뿌리는 무엇과도 친하다꽃나무와 풀꽃들의 뿌리가 땅속에서 서로 엉켜 있다냉이가 봄쑥에게라일락이 목련나무에게꽃사과나무가 나에게햇빛과 구름과 빗방울이 기르는 것은 뿌리의 친화력바람은 얽히지 않는 뿌리를 고집스레 뽑아버린다우리는 울고 웃으며 풀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옮겨 감았다위의 시에 따르면, 꽃나무나 풀꽃처럼 여린 존재자들은 “뿌리의 친화력”으로 “서로 엉켜 있”음으로써 생존한다. 이때 ‘뿌리’는 시적인 의미에서의 뿌리, 존재자들의 존재 차원에서의 뿌리이다. 뿌리둘이 서로 엉키도록 이끄는 ‘친화력’은 “햇빛과 구름과 빗방울이 기”른다. 세계에는 “얽히지 않는 뿌리를 고집스레 뽑아버”리는 힘도 존재하지만, 존재자들이 “서로를 옮겨 감”게 이끄는 연결의 힘도 존재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8-08
나이 수만큼의 표정은 눈길 뒤에 숨었을까거울 속엔무덤덤한 그녀의 얼굴이 살고 있다손댈 수 없는 네 표정을 문질러 보았다슬픔이 겹겹이 밀리면서 속눈물은 말라갔다(중략)얼굴은 알아보지만 전혀 다른 사람으로착각한다는 카그라스증후군어떤 추억도 살아남지 못했으매그 옛날 눈 감은, 입술의 접점을느리고 생생하게, 음표로 베낀 간주곡,이따금씩 반짝이는 바람결저 구름 호수의 무늬들보일 듯 말 듯 한 그녀 얼굴, 보일 듯 말 듯.거울을 언뜻 보자 ‘저 사람이 누구지?’라고 의아해 할 때가 있지 않겠는가.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될 때가. “어떤 추억도 살아남지 못했”을 때 그런 착각이 일어날 터, 추억의 말소는 “슬픔이 겹겹이 밀리면서” 이루어진다. 하나 시인은 저 낯선 얼굴이 느리게 재생하는 ‘간주곡’을 듣기 시작한다. 그러자 ‘구름 호수’가 된 얼굴에서 ‘바람결’이 “이따금씩 반짝이”고, ‘그녀 얼굴’이 “보일 듯 말 듯”하기 시작한다. 문학평론가
2024-08-07
너는 언니다. 동생을 기른다같이 아침 먹고 같이 잠자고 웃는다옷도 갈아 입혀주고 몸도 씻어준다집에서는 늘 같이 지낸다외출은 혼자 한다그 같이를 뚫고 전화 한 통 온다동생의 시신을 바다에서 찾았습니다만너는 네 시신을 찾았대 동생에게 말해준다그러고도 같이 산다 꿈도 대신 꿔주고 친구도 만들어준다동생의 시신을 확인하고 와서도동생이 바다에 가라앉는 꿈을 꾼다같이 밥 먹고 같이 잠자고 같이 텔레비전 본다너는 동생과 같이 사는 것이 가장 편하다해변에 서 있으면 무언가 검은 덩어리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언제나 같이 지내며, “옷도 갈아 입혀주고 몸도 씻어”주었던 동생. 그 동생이 바다에서 죽음을 맞았다. 화자는 죽어버린 동생에게 “네 시신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그는 여전히 ‘동명이인’이 된 동생의 영혼과 같이 살고 있는 것, “동생과 같이 사는 것이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하나 해변에 가면 화자는 동생의 죽음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는 검은 덩어리가, 죽음이 하늘에서 내려오기에. 문학평론가
2024-08-06
노란 비단막 위에하나의 태양은 여전히 금빛이고 하나의 한숨이 일렁인다.한순간 바람에 지난날이 흔들리며 삐걱대는 소리를 낸다.여전히 공간 속에 남아 생각하거나자신을 돌아본다. 잠들어 지켜보는 사람은 대답 않고침묵을 본다, 아니 그건 잠들어 있는 사랑.잠, 삶, 죽음. 연약한 비단이 자잘하니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화사하게 꿈꾼다, 너무도 생생하다. 누군가의 기호생각했던 사람의 이미지가 거기에 남는다.삶이 천천히 도모했고 아직도 숨가빠하는 호흡을 위해한올 한올 남겨놓았던 곳에서 줄거리를 엮는다.모르는 것이 삶. 앎은 삶을 죽이고.197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페인 시인 알레익산드레가 노년에 발표한 시. 시에 따르면, ‘지난날’이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너무도 생생하”게 현재의 삶에 다가오는 때가 있다. 이 회상에 등장하는 이는, 침묵하고 있다. 그는 이제 “잠들어 있는 사랑”인 것. 그래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일은 침묵을 보는 일, 하나 이미지는 남고 하나의 줄거리가 엮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앎은 삶을 죽”인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문학평론가
2024-08-05
불과 물. 우리는 서로를 불태우며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망해가는 나라니까. 악천후의 지표니까. 우리는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붙였고, 오줌을 쌌고, 자주 울었고, 나무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위의 시는 ‘악천후’ 시기인 십대를 ‘불과 물’이 공존하고 뒤섞이는 시기로 상징화한다. 자신의 삶을 “망해가는 나라”라고 여기고 “자주 울었”던 십대 시절, 이 시절 ‘우리’는 위험한 불장난으로 “서로를 불태우”거나, 오줌을 싸서 서로를 “물속으로 밀어 넣”기도 했다고. 하나 이 시절엔 이 모든 위반 행위들을 품어주고 지켜봐주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나뭇잎들을 품고 있는 ‘나무들’과 같은 존재가. 문학평론가
2024-08-04
칼국수가 먹고 싶은 날은입소문 자자한?해물 칼국수 집으로 간다바지락, 새우, 오징어?듬뿍 넣고고추장 풀어 끓인 해물칼국수,시청 뒷골목 칼국수 그 집에는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나해맑은 날에도 만원이다(중략)온통 바다 내음이어머니 무르익은 손맛을 넘보는해물칼국수, 그 집에는파도?소리가 살고 있다인간은 음식을 먹을 때 자연처럼 존재한다. 동물은 에너지를 재충전해야 살 수 있는 법, 이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칼국수에 ‘듬뿍’ 들어간 해물들이 군침 돌게 하는 해물 칼국수 파는 집. 각양각색 사람들이 자연물과 어우러진 칼국수 먹으며 살아갈 힘을 얻는 이 식당은 자연의 생명력이 샘솟는 공간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 집에는/파도 소리가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8-01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내 가슴 설레느니,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쉰 예순에도 그러지 못하다면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워즈워스의 유명한 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시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다. 오랜만에 이 시를 읽어보니 가슴이 찔리는 듯 아프다. “쉰 예순에도”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는 구절 때문이다. 사실, 그 나이에도 하늘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하늘을 보지 않으니 무지개를 볼 수도 없는 일, 우리는 어쩌다 죽음이 나은 삶을 살게 된 걸까? 문학평론가
2024-07-31
기억의 뒤편에 있던 ‘첫’그가 하얀 꽃송이로 왔다밤새 하얗게 내려 쌓인 첫눈검은 발자국들 소리 없이 덮은 눈꽃 세상이내 눈으로 들어온다‘첫’들이 솟구치는 방의 문고리를 연다깊숙한 방에서 한 장 한 장 화선지를 들추면첫 아기, 첫 노래, 첫 학교, 첫 동무, 첫 영성체, 첫 무대, 첫 운동화첫 색동저고리, 첫 심부름, 첫, 첫….에밀레 종소리처럼 퍼지는 음파, 하얀 첫눈목어木魚도 으스레를 친다차별 없는 저 하얀 손길오늘 나도첫 눈꽃 송이가 되는 꿈을 꾼다밖에는 올해 첫눈이 내리고, 마음 뒤편의 기억이 ‘솟구치’듯 되살아난다. ‘첫 아기’부터 시작하는 ‘첫’에 대한 기억들. 하여, 첫눈은 ‘에밀레 종소리’처럼 은은하게 퍼지며 시간을 되살리는 음파다. 그렇게 첫눈은 거리를 더럽히는 ‘검은 발자국들’을 덮으며 세상을 순결하게 변모시키고, 그 순결한 ‘하얀 손길’은 차별 없이 세상을 어루만진다. 시인도 이 손길의 은총을 받아 ‘첫 눈꽃 송이’으로 변모하는 꿈을 꾼다…. 문학평론가
2024-07-29
어려운 공식은 내려놔도 돼뭐라 하지 않을게빨간 빗금도 치지 않을게회초리는 모두 불쏘시개로 쓸게그러니 우리는 그만제 얼굴을 찾는 게 좋겠어더는 사랑하라고 강요하지 않을게약속은 다 과거에 버리고다시 여기서 기약하면 돼다 기점이 있고 종점이 있고그렇게 지키려고 힘쓰지 않아도 돼(중략)그림자는 제 길로 보내 버리고꽃과는 의절을 하고우리 여기저기 서 있으면 돼기억해보면, 세상은 ‘회초리’를 들고 ‘빨간 빗금’을 그으며 필자를 자신의 질서에 맞추도록 강요해왔던 것 같다. 이에 맞춰 살아가기 점점 지쳐갔던 것 같기도 하고. 위의 시는 이런 필자에게 주는 어떤 위로로 다가온다. 시는 말한다. “뭐라 하지 않을”테니 이제 “그만/제 얼굴을 찾”으라고. 약속을 지키느라 드리워진 과거의 그림자에 얽매이지 말라고. 사랑의 강요에서 벗어나 그저 “여기저기 서 있으면” 된다고. 문학평론가
2024-07-28
광장에서 흩어진 사람들이근처 골목으로 삼삼오오 뭉친다골목은 혁명을 숨겨주었고그로부터 다시 늙은 미완의 혁명들을불러들이고 술잔을 권한다골목들은 늘 저변의 힘으로장미를 피워올렸고그 왁자한 뒤끝으로 아직도 곳곳에 건재하다꺾어들고 다시 꺾어 내달렸던그 모퉁이들을 회상하면최루탄이니 물대포에 맞닿은 간격으로스크럼을 짜고 막아서던그 든든한 뒷배 같았던 골목들도시의 매력은 큰 건물이 솟아 있는 도심의 대로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흔적이 녹아있는 골목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도시-골목’의 매력은, 시위자들을 백골단으로부터 “스크럼을 짜고” 지켜주었던 시위 때 더욱 빛을 발한 바 있다. 이 골목은 이제 “늙은 미완의 혁명들을/불러들이고 술잔을 권”하는 ‘회상’ 대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저변의 힘으로/장미를 피워올”리는 곳으로 건재해 있음을 시인은 말해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07-25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을아삭아삭 씹어 먹는다나는 익히 당근을 좋아하는데걱정도 조리해 먹으면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삶은 옥수수에 마요네즈를 넣고 버무리면 샐러드의 세계웅크리고 있는 양파에 간장을 쪼르르부으면 장아찌의 세계껍질이 연한 기분을 골라 찬물에 씻는다저녁이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는 동안뿌리가 발바닥을 뚫고 자란다창밖엔 줄기가 부러진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다다 익은 영혼을 헤쳐보면 작은벌레가 자라고 있다남이 가하는 힐난을 당근 먹듯 먹고, “걱정도 조리해 먹”는 화자. 그에게 사람살이는 음식과 같아서, 삶은 샐러드나 장아찌의 세계로 나타난다. 그렇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을 어떤 음식처럼 먹으며 자란 사람은 “뿌리가 발바닥을 뚫고 자”라는 식물이 된다. 그 중에 어떤 이는 “줄기가 부러”져 버리고, 어떤 영혼 익은 ‘식물-사람’ 속에는 “벌레가 자라고 있”기도 한다. 식물로서의 삶에도 고통은 여전한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7-24
전나무 우듬지에살랑 바람이 스치면,맑은 하늘에검은 구름이 흐르듯,나도 무거운 걸음걸이로터벅터벅 나의 길을 따라가네,밝고 즐거운 모습들 사이로,쓸쓸하게, 다정한 벗도 없이.아, 바람은 고요하구나!아, 세상은 참으로 밝구나!폭풍우가 휘몰아칠 때도,나 이처럼 비참하지는 않았는데.독일 후기 낭만파 시인 빌헬름 뮐러. 그의 시를 노랫말로 슈베르트가 많은 곡을 작곡하여 유명해진 시인. 우리 모두 삶의 황혼을 “쓸쓸하게, 다정한 벗도 없이” “무거운 걸음걸이로” 걸어가게 되지 않겠는가. 하나 그때에도,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고 있는 세상은, ‘나’의 모습과 반대로 밝고 즐거운 모습일 테다. 하여, 이 고독의 비참보다는,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견디며 살 때가 차라리 더 좋았다고 시인은 탄식한다. 문학평론가
2024-07-23
건물은 비상구를 전부 갖고 있는데사람만 갖고 있지 않다아니다 누구나 비상구가 있다그저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스스로 폐쇄시키거나 열지 않는 사람들그중에 한 명은 기필코 내 어머니다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처럼어머니는 어머니를 끝까지 탈출하지 않았다평생 누군가의 비상구만 되어준 이력(중략)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는 궁금했다비상구가 처음으로 열린 걸까마침내 닫힌 걸까누구나 자신의 현재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가질 터, 하나 탈출하는 이는 거의 없다. “누구나 비상구가 있”지만 사용하지 못하기에. 대부분의 어머니들 역시 ‘어머니’로부터 탈출하지 않는데, 그들은 스스로 비상구를 폐쇄시키고 “처음부터 갖지 않았던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것은 사랑 때문일까. 그들이 죽었을 때엔 사랑의 굴레로부터 벗어난 것일까, 비상구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난 것일까. 시인의 의문이다. 문학평론가
2024-07-22
고층아파트 건물에는 꺼지지 않은 창들이 흰 별 몇 개로 떠 있고숲길 어둠에는 꺼지지 않은 가로등이 오렌지 별 몇 개로 떠 있고영빈관 침대에서 홀로 깨어나도 어둠을 지우지 못한 별 하나로 떠 있고암에 걸린 환자들이 남은 생을 별처럼 바라보는 이 적막 속에서창가에 또 하루가 오는 발자국을 모두 귀 기울여 듣고 있고원자력병원은 주로 암환자들이 치료받는 곳. “영빈관 침대에서 홀로 깨어” 있는 시인도 암환자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고 있는 암환자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소중하며, 일상적으로 보는 불 켜진 아파트 창문들이나 숲길 가로등들이 모두 별처럼 빛난다. 그 불빛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시인 역시 “어둠을 지우지 못한 별 하나”로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2024-07-21
내원골에 누워밤하늘을 바라본다나는 또렷하게 빛나는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다맑은 물고기가꼬릴 흔드는 웅덩이처럼별이 첨벙댄다헤엄치는 물고기는쏘가린지꺽진지 잘 모르겠다물결 속에 보이는 별은산사람인지토벌군인지구분하기 어렵다맑은 날, 산에 올라 바라본 밤하늘의 놀라운 아름다움! 박우담 시인은 지리산 내원골에서 바라본 밤하늘을 물결 이는 웅덩이로, 하늘 속에서 “또렷하게 빛나는” 별들을 그 웅덩이에서 첨벙대며 헤엄치는 물고기로 비유한다. 그 비유는 나아가 지리산에서 서로 적으로 뒤엉켰던 사람들로 확장된다. 하지만 하늘의 별들은 누가 “산사람인지/토벌군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 모두 함께 빛나는 별들로 존재하기에. 문학평론가
2024-07-18
울렁거리는 지층에서 태어났다검은 줄과 흰 줄의 팽팽한 줄다리기다(중략)얼룩이 상처라면덜룩은 그만큼의 공백얼룩이 눈물 자국이라면덜룩은 빠져나오기 어려운 그늘울타리 밖의 삶을 기웃거리지만,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둔말은 이따금 제 안의 파도를 뚫고 나온다얼룩, 안간힘으로 울타리를 부순 흔적산등성이 다량논과 논두렁의 고단함 같은이젠 악기도 가구도 아닌 피아노처럼검은 말도 흰말도 아닌 모호한 말내가 만든 철창에 다시 갇히는 말얼룩덜룩 얼룩말. 시인은 “울렁거리는 지층” 같은 ‘얼룩’에서 상처에서 빚어 나온 눈물을, ‘덜룩’에서는 그 눈물 뒤에 드리워진 그늘을 읽는다. 얼룩말의 ‘얼룩덜룩’은 “울타리 밖의 삶”에 대한 욕망과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야 하는 그늘의 삶과의 갈등에서 그려지는 것, “제 안의 파도를 뚫고 나”오는, 음악의 울렁거림 같은 표현이 ‘얼룩-눈물’이며, 그 얼룩은 시인이 발하는 말(語)과 같음을 시는 말해준다. 문학평론가
2024-07-17
시대는 우리에게 노래하라고 요구하고는우리의 혀를 잘라 버렸다.시대는 우리에게 거침없으라고 요구하고는거짓말을 늘어놓았다.시대는 우리에게 춤추라고 요구하고는우리를 강철 바지에 욱여 넣었다.그렇게 시대는 기어이 뜻대로요구한 개짓거리를 손에 넣었다.유명한 소설가 헤밍웨이가 20대 초반인 1922년경에 쓴 시. 이 시는 그가 젊은 시절에 얼마나 당시 세상에 비판적이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위와 같은 젊은 세대의 시대에 대한 비판,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는 어느 시대나 공통되는 것 같다. 모든 시대는 젊은 세대를 찬양하며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펼치라 하지만, 결국 그 세대의 “혀를 잘라 버”리고 “강철 바지에 욱여 넣”어 ‘개짓거리를’ 하도록 강요해왔기에. 문학평론가
2024-07-16
어허, 부질없어라젊은 날 쉬지 않고 익힌 글과 검술 근심만 사고늙지 않고 명 늘일 도리 없는관속에 갇힐 서글픈 인생이라서귀염받다 버려지는 강아지처럼궁해져 말라가는 물속 붕어처럼사람마다 인간 세상 좋다 말해도꽃다운 시절은 잠시뿐인 것을어느새 “관속에 갇힐” 시간을 생각하며 “젊은 날 쉬지 않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부질없’다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나이에 이른 김시습. 젊은 날에는 세상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명을 다하면 “귀염받다 버려지는 강아지처럼” 될 운명이며, “꽃다운 시절은 잠시뿐”이고 인생은 “말라가는 물속 붕어”의 삶과 같다는 처절한 탄식은,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하지만 비껴갈 수 없이 언젠가 마주해야 하는 진실 아닐까. 문학평론가
2024-07-15
나는 욕실에서/ 죽어 가는/ 입김이 좋다거울 끝자락부터/ 얼굴을 내미는/ 녹이 좋다고개를/ 들고/ 거울을 본다밤새 어디를/ 끌려갔다/ 왔는지목에/ 빨랫줄 자국/ 여러 개1984년 생 시인의 시로, 이제 막 40이 된 시인의 현재 마음이 어떠한지 보여준다. “죽어가는 입김이 좋”은 마음. 거울이 시인의 마음을 은유하는 것이라 할 때, 시인은 자신의 마음 “끝자락부터2044 얼굴을 내미는2044 녹”을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사라지고 녹슬기를 바라는 것, 그의 삶이 현재 어떻기에? ‘거울-마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이를 알려준다. “목에2044 빨랫줄”이 걸려 목숨을 담보로 끌려 다녀야 삶. 문학평론가
2024-07-14
어제보다 깊어진 동굴에서 깨어납니다떠나보낸 작은 새는 다시 돌아와내 가슴에 둥지를 틀고 붉은 알을 낳았습니다깨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중략)굶주린 새에게 나의 살점을 떼어 줍니다새는 나의 살점을 먹고나는 새의 알을 먹고그것이 이곳에서 내가 택한 방식입니다눈먼 새를 가슴에 올려두고 기다립니다긴 겨울이 끝나고남은 살점이 모두 사라지고 뼈만 남게 되었을 때누군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겨울날, 동굴에서 홀로 거주하는 화자에게 찾아오는 이는, 화자가 떠나보냈지만 다시 돌아온 ‘작은 새’밖에 없다. 이 ‘새’는 시를 의미하지 않을까? 동굴 속에서 화자는 자신의 살을 새에게 주고 새는 자신의 알을 화자에게 주면서, 둘은 공생한다. 결국 화자가 ‘시-새’에게 자신의 살을 다 내어주고 뼈만 남았을 때, 시에 삶을 다 맡겼을 때, 그가 기다리던 누군가가 도래할 지도 모른다는 어떤 희망을 화자는 품는다. 문학평론가
2024-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