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가을볕
이 엄숙한 투명 앞에 서면
썼던 모자도 다시 벗어야 할 것 같다
곱게 늙은 나뭇잎들 소리내며 구르고
아직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아무도 남은 길 더는 가지 않고
온 길을 되돌아보며
까칠한 입술에 한개피씩 담배를 빼문다
어떤 얼굴로 저 가을볕 속에 서야
사람은 비로소 잘 익은 게 되리
바자랑대도 닿지 않는 아슬한 꼭대기
혼자 남아 지키는 감처럼
닥쳐올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면
나는 이 맑음 속에 어떤 자세로 앉아야 하리
.....
군사독재 시대 끝자락인 1980년대 중반에 발표된 시. 우리는 그러한 독재 시대로 되돌아갈 뻔했다. 우리 시가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기다려야” 하는 시대가 다시 올 수 있었던 것. 그래서인지 위의 시는 지금도 깊은 감회를 가져온다. 가을 대기의 ‘엄숙한 투명’ 속에서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시인. 그 모습은 ‘아슬한 꼭대기’에서 혼자 남아 익어가는 감과 같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