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는 완고하다묶여 있는 장미들은 고독한 늑대 같다향기를 내보는 데도 인색하다리본 묶인 비닐을 걷어내고 화병에 꽃아도묶여 있던장미들은 내내 완고하다절대 꽃잎을 벌리지 않겠다봉오리 끝에서부터 까맣게 말라간다쭉쭉 물을 좀 빨아들여봐물을 뿌려도 갈아줘도 요지부동이다피지 않는 장미매일 물을 갈아준다붉은, 연분홍 장미들아 왜 피어나지 않는 것이냐물을 먹으며 말라가는 장미들은꽃다발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물빛이 탁해졌다꽃다발에 묶여 있는 장미, 시인은 화병에 꽃아 그 장미를 돌보고자 한다. 하지만 “장미는 내내 완고”해서, “절대 꽃잎을 벌리지 않”고, “향기를 내보는 데도 인색”하다. 장미는 스스로 말라가는 것 같다. 장미는 왜 이렇게 완고한가. “꽃다발의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화려한 시절에 대한 기억들…. 그렇다면 “물빛이 탁해”진 것은, 과거와 현재의 낙차로 유발된 장미의 우울이 물에 풀어졌기 때문이리라. 문학평론가
2024-07-10
그녀가 화장으로 덮은 덧없이 사라지는멍이 아니라, 그녀가 출구를 찾으며망원경에 눈을 너무 세게 눌러 찍힌 자국처럼 남은어두운 반점이 아니라, 난로 위 뼈다귓국 우리던솥에 몸을 기울이고선 그녀가 가다듬곤 하던목소리의 떨림이 아니라, 자기 치아 대신해 넣은 그 이가 아니라, 혹은그 공문서-그 직인과희미해진 서명-이미 바래고 있는,나달나달 닳은 모서리가 아니라, 날짜들과 그녀 이름이적힌, 역사처럼 추상적인, 그 작은 표지가 아니라.다만 그녀 육신의 풍경-쪼개진 빗장뼈,구멍 난 관자놀이-그녀의 자그만 뼈들이지.매일 조금씩 자리를 잡는, 모든 게 그러하듯.나타샤 트레스웨이는 1966년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여성 시인이다. 이 시 제목의 ‘증거’는 무엇의 증거일까? ‘그녀’가 당한 폭력의 증거 아니겠는가. 그 증거는 직인이나 서명이 확인된 공문서 따위에 있지 않다. “덧없이 사라”질 살갗 위의 멍 역시 증거가 아니다. 증거는 “쪼개진 빗장뼈”나 “구멍 난 관자놀이”와 같은, 끔찍한 “육신의 풍경” 자체에 직접적으로 있다. “매일 조금씩 자리를 잡는” 폭력의 증거들. 문학평론가
2024-07-09
닭갈빗집을 운영하는 김사장한쪽 눈이 숯불에 하도 많이 드러나 상해간다고 한다숯불이 자신의 눈동자를 조금씩 파먹는다고그럼에도 이 일을 멈출 수 없다는 남자의 눈에서석류알이 쏟아졌다숯불로 고기 구워내는 일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자신의 눈동자를 내준단 말인가한 번도 내 전부를 꺼내놓지 못한 나는석류를 손에 쥐고전전긍긍붉은 피톨들이 왈칵, 내 앞에 쏟아진다몸이 상하더라도 일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 아마 한국의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특히 고용된 이가 아니라, “닭갈빗집을 운영하는 김사장” 같은 이는 더욱 일을 멈출 수 없다. 시인은 “자신의 눈동자를 내”주면서까지 일해야 하는 ‘김사장’으로부터 숭고함을 느낀다. 가장 소중한 자신의 ‘석류알’, 그 “붉은 피톨들”을 ‘왈칵’ 쏟아내며 일하는 그에 비해, 자신은 “석류를 존에 쥐고/전전긍긍” 하며 살고 있기에. 문학평론가
2024-07-08
우린 겹치는 부분으로 있었습니다우린 겹치는 부분이 많았기에 행복을 찾은 듯했습니다붉은 겹꽃잎처럼꽃은 늘 먼 곳을 바라보았지요겹치는 부분이 많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했습니다외출에서 돌아와 떠나고 없는 꽃을 보았습니다나는 곧 겨울이 올 것을 알고마당으로 나가떨어진 꽃잎들을 쓸어 모았습니다흰 눈발이 창을 두드리고침대는 차가워졌습니다흰 눈 속에 산새 한 마리 날아와 웁니다행복은 어디에서 비롯할까. 시인에 따르면 ‘우리’가 형성될 때, 당신과 “겹치는 부분이 많”을 때 찾아온다. 그때 “붉은 겹꽃잎처럼” 우리는 아름다워질 수 있다. “겹치는 부분이 많아”지면 “꽃은 늘 먼 곳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꽃은 마당에 떨어지고, 당신은 떠나는 날이 온다. “흰 눈발이 창을 두드”릴 계절이 오면, “침대는 차가워”져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7-07
몇 시간 봉사하고/ 몇 배를 얻는 길이라면/ 밥집에 가야 한다밥집은/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밥을 위하여/ 밥을 찾는 곳밥을 먹는 사람과/ 밥을 나르는 사람들이/ 한통속이 되는 곳밥집은/ 밥과 함께/ 밥이 되어/ 우리 모두 한통속임을 깨닫는 곳우리는 밥으로 살고/ 밥으로 죽고/ 밥이 되어 떠난다시인은 ‘명동밥집’에서 노숙자에게 식사를 배급하는 봉사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 몇 시간의 활동으로 “몇 배를 얻는” 바, 그것은 “우리 모두 한통속”이라는 깨달음이다. 그 활동은 ‘우리 모두’ “밥을 먹어야” 해서 “밥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누군가 밥은 하나님이라고 했듯이, 밥 아래에서는 모두 평등하며 하나라는 것을. 밥으로 살고 죽는 ‘우리 모두’ “밥이 되어 떠”나는 존재다. 문학평론가
2024-07-04
멀리 가지 않고도지붕 아래 내려 온 별을 만난다.맑고도 아늑한 공기 한 웅큼.돌을 들어 올리는 풀꽃의 힘으로집을 들어 올리는 이 흰빛.나를 마중 나오시는 희미한 등불.비 오는 가을 오후,?시드는 숲 가의 집에서둥근 빛에 우리는 둘러앉았다.한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다.오지 못할 것이다.?어쩌면 올 것이다.둥근 흰 빛에 한숨을 섞으며우리는 기다렸다.조바심이 흰 빛에 빨려 들어가도록.흰 빛은 이윽고 우리를 들어올렸다.팽창하여 대기가 되었다.이 흰빛은 우리이다.북풍이 세계에 선물한.“지붕 아래 내려 온” 별의 ‘흰빛’은 신성한 힘을 가졌다. “돌을 들어 올리는 풀꽃”처럼 죽음을 삶으로 상승시키는 신생의 힘을. 이 빛은 식탁에 강림한 둥근 빛 주위에 앉아 있는 ‘우리’를 들어올리기도 한다. 하여, 우리는 팽창하여 대기가 된 흰빛이 된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오지 못할”‘한사람’이 죽은 이라면, 그는 ‘대기’가 된 우리와 함께 살게 될 터이다. 빛은 우리를, 죽음을 품은 신생으로 이끄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7-03
아들 없는 생일날에 미역국을 끓여놓고교과서보다 만화책을 좋아했던 아들을, 공부보다 공놀이를 좋아했던 아들을, 밥 먹는 시간 대신 자겠다는 아들을, 대학을 안 가고 돈 벌겠다는 아들을, 부글부글 물거품이 되어버린 아들을 가슴에 박힌 심장같은 아들을, 엄마를 기다리다 가라앉은 아들을이제는 저녁바다가 된 아들의 얼굴을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다. 참사의 희생자를 아이로 둔 부모는 여전히 ‘문득’ 아이의 얼굴이 생각날 것이다. 위의 시는 아들의 생일날에 “미역국을 끓여놓고” “이제 저녁바다가 된” 아들을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엄마를 찾았을 아들의 얼굴은 심장이 되어 어머니의 가슴에 박혀 부글부글 끓고 있다. 공부보다 만화를 좋아했던 아들의 모습은 더욱 그녀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문학평론가
2024-07-02
아무리 애 터지는 슬픔도시간이 흐르고 흐르면흐릿해지지시간은 흐르고흐려지지장소는어디 가지 않아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영원할 것 같은영원한 것 같은아플 것 같은아픈 것 같은장소들이야기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기억 속에? 시간 속에? 하지만 위의 시에 따르면, “애 터지는 슬픔도/시간이 흐르고 흐르면/흐릿해지”는 것. 흐름은 흐릿함을 가져온다. 하나 이야기가 흐릿해지지 않은 곳이 있다. ‘장소’다. “장소는/어디 가지 않”는 것, 슬픈 이야기가 묻혀 있는 장소들에 가면 슬픔은 되살아난다. 그곳에서 아픔은 “영원할 것 같”고 “영원한 것” 같이 나타난다. 공간이 시간보다 더 영원한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7-01
오늘 하루 내가 바라는 건먼지 구름 까치집 엉겅퀴 푸른 하늘아무것도 아닌 것들만 잔뜩 바라보는 일이다압셍트 한 잔을 놓고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화가처럼가장 가까운 나무 한 그루의 색을 바꿔주는 것결국 그 말이 아무 의미도 아닌 것처럼결국 그 손길이 허공인 것처럼가벼움을 가지는 것내가 정말 원하는 건개 한 마리가 짖는 소리에도앞서 간 네 마음을 따라잡지 않은 채조금 더 오래 앉아 있는 것뿐이다마음도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무심해지는 것. 온갖 마음을 짓누르는 무게로부터 해방되어 “가벼움을 가지”고 싶을 때. 어쩌면 그때 “가장 가까운 나무 한 그루의 색을 바꿔주는” 예술이, 시가 잉태될 수 있을지 모른다. 말을 의미의 족쇄로부터 놔주고, “앞서 간 네 마음을 따라잡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닌 것들만 잔뜩 바라보”며 “조금 더 오래 앉아 있는”, 이 ‘하염없는’ 평화로움을 마음에 되찾아줄 때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4-06-30
곧게 자란 나무가 없다굵고 반듯하게 자라면서도어깨가 굽은 소나무수많은 가지 살피느라 허리가 휘어진 소나무햇살 찾아 제 키만 키우는 소나무하나같이 못난이로 자라서로에게 치어 자릴 비켜주면서그렇게 몸 비비 틀면서저도 모르게 숲이 되고 있다거북이등껍질 같은 울음을 꺼내바람에 날리는 사방푸른 그늘들반듯하게 자라나려는 나무는, 곧게 자라지 못한다. 반듯하게 자란다는 건 타자들을 돌보고 배려하면서 사는 것, 그 삶은 “어깨가 굽”거나 “허리가 휘어”질 수밖에 없기에. 하나 이러한 삶들이 모여 “저도 모르게 숲이 되”고 “푸른 그늘들”을 만들어낸다. 한데 ‘곰나루’는 동학 농민의 정신이 깃든 곳. 저 “몸 비비 틀면서” 숲을 이루며 울음을 “바람에 날리는” 소나무들은 동학 민중의 영혼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문학평론가
2024-06-26
아직도 시인은 자고로휑하고 추운 불모의 다락방에서굶주리고 떨면서, 꽃의 노래와 그대와같은 그러한 것들에 맞게 시를 만들어야만 한다.아직도 자고로 시인의 존재는아름다움의 이름에 굴복해야만 한다.꽃과 그대와 노래가 있는 한 죽지 않을아름다움, 아름다움이 살 수 있는 동안에는20세기 전반에 활동한 미국의 여성 시인 빈센트 밀레이의 시. ‘아직도’라는 말은 ‘지금도’라는 말을 불러온다. ‘지금도’ 역시 ‘시인’은 “굶주리고 떨면서” “아름다움의 이름에 굴복”하는 삶을 살며 “시를 만들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기에. 시인은 여전히 가난과 추위를 겪으며 살아간다. 시는 돈이 되지 않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꽃의 노래와 그대”로부터 시를 길어 올려 아름다움이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학평론가
2024-06-25
오늘밤, 어느 어둠 속을볼 수 없는 누군가가,눈을 감고 다른어둠 속을 들여다 본다.그는 잠자는 사람들 가운데깨어 있는 사람.그의 소리로 그를 알라.초조하게 긁는연필, 부스럭대는종이, 작고 쉼없는 두드림소리, 한 영혼이 미세하게질겅거리는 소리,새롭고 잔인한세기에 자신을탄생시키는 이오래된 시 소리를 들으라.현재 활동하고 있는 아시아계 미국계 시인 리영리의 시. 시에 따르면 ‘시인’은 “어둠 속을 들여다” 보는 이다. ‘시인’ 또한 “어둠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기에, 그의 존재는 소리로 알 수 있다. 종이 위에 연필로 무언가를 “초조하게 긁”고 있는 소리로. 그것은 “한 영혼이 미세하게/질겅거리는 소리”다. 이 세기 역시 “새롭고 잔인”한 어둠의 세기, 이 어둠 속에서 “오래된 시 소리”는 저렇게 “자신을/탄생시”킨다. 문학평론가
2024-06-24
다양한 종이 우리를 넘나들지/ 구두 수선공과 친구가 되고/ 새들은 날아오르며 궤적을 남기네너는 내 손을 잡고 문득 흔들었지,/ 우리가 각자 삶의 외로운 구경꾼이자 싸움꾼이었을 때거리의 악사가 되어 떠돌아도 좋아/ 흔적도 남지 않은 음악이 되어나무 위에서 새가 열매를 떨어뜨리자/ 우리 손이 우연히 붉게 물들었다종이 흔들리는 순간을 좋아해/ 지나가는 음악처럼너의 초라함을 좋아해/ 철 지난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린 조형물처럼/ 지나가는 경적처럼우리는 “우리를 넘나”드는 ‘다양한 종’의 존재자들과 마주친다. 하늘에 궤적을 남기고 날아오르는 새들, 구두 수선공, “내 손을 잡고 문득 흔”드는 너의 손, 그리고 “우연히 붉게 물”드는 “우리 손”도. 이 마주침은 삶을 좋아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 “종이 흔들리는 순간”도, “철 지난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신구 같은 “너의 초라함”도 좋다. 시인이 흐르는 음악처럼 떠돌아다니는 거리의 악사가 되고 싶은 이유다. 문학평론가
2024-06-23
그저께는 미세먼지 주의보어제는 비가 몹시 내렸고오늘은 몸이 않 좋아창밖 풍경 바라만 보는 줄봄 냄새 맡으려가까이 다가가 감싸 안았던저 나무들, 멀리서 바라보니실루엣 한결 선명하고 아름답다.나날이 풍성해지는 잎사귀들과짙어지는 연둣빛더 또렷이 느껴진다.너무 오래 가까웠다가시나브로 멀어진 벗이여,만나지 못하더라도 부디편안하고 싱그럽기를….어떤 대상은 멀리서 보았을 때 더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가까이 두었던 대상이 그렇다. 팔로 감싸 안기도 했던 나무를 창 밖 풍경으로 보았을 때, 시인은 이를 깨닫는다. 멀리서 본 나무의 ‘실루엣’이 “한결 선명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말이다. 벗도 그렇다. 언제나 가까이 있었던 벗. 하나 이제 그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 “만나지 못하”자 벗의 모습은 더욱 선명해지고 싱그러워지지 않는가. 그리움과 함께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4-06-20
새는 바람이 쓰는 문장울음의 외적 범주에 속합니다아무것도 쥘 것 없는 나무가쓸쓸한 영혼으로 흔들리는 오늘 같은 날은움켜쥔 것을 잠시 내려놓고메아릴랑 미련 없이 돌려보내요(중략)잘 보면 날개 안에 추신이 있는새는 지상으로 띄우는 편지가지들 흔들리는 숲에서아닌 척 눈 감는 나무의 쓸쓸한 영혼이당신께 보내는 바람의 외전입니다새와 나무는 친구, 새는 나뭇가지에 앉아 나무의 마음을 듣고 하늘로 날아간다. 나무는 고독하게 한 곳에 서서 다만 흔들릴 수 있을 뿐이어서, 저기 ‘당신’에게 전할 말이 있어도 전할 수 없다. 하나 새가 나무의 마음을 전해줄 수 있다. 시에 따르면 나무의 마음은 바람으로 발현되고, 이 바람이 새를 빌어 문장으로 표현된다. 하여 나무의 ‘쓸쓸한 영혼’은 새가 쓴 ‘편지’를 통해 지상의 ‘당신’께 전해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6-19
술 받으러 구멍가게에 갔다 덜컥 개에게 물렸다헐렁한 몸빼의 여주인이 개에게이 계집이, 이 다 큰 계집이,야윈 어미 개를 내 앞에서 큰딸 혼내듯 했다내게 되레 잘못한 일이 있었나 뜨끔했다술을 받아 나올 때 여주인은여태 눈도 못 뜨는 두 마리의 하얀 새끼 개를 들어 보였다따뜻한 배를 각각의 손을 받쳐 들어 나에게 보여 주었다.그 집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겨우 다시 돌아보았을 때에도사람과 동물 사이의 관계에도 모정이 있다. 술집 여주인이 “야윈 어미 개”를 “이 다 큰 계집이”라며 혼내는 건 그 개를 ‘큰딸’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어미 개가 시인을 문 이유가 낯선 이로부터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음이 시의 뒤에서 드러난다. 이를 여주인도 안다. 시인에게 “두 마리의 새끼 개를 들어 보”이는 것을 보면, 모정은 동물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는 것, 이 시가 주는 감동이다. 문학평론가
2024-06-18
제가 죽어갈 때, 알게 하소서채찍처럼 얼얼하긴 했지만제가 날리는 눈을 사랑했다는 것을,제가 사랑스러운 모든 것들을 사랑했고그에 따르는 고통마저 명랑한 입술로달갑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는 것을,제가 온 힘을 다해서, 제 영혼의완전한 깊이와 길이까지, 제 가슴이부서져도 개의치 않고 사랑했다는 것을,아이들이 모든 것이 딱딱 곡을붙여 노래하듯이 저도 노래하며삶 자체를 위해 삶을 사랑했다는 것을.20세기 초 활약한 미국 여성 시인 사라 티즈데일의 시.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를 위해 삶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삶이다. 사랑은 삶의 고통까지도 “달갑게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것, “날리는 눈을 사랑”하는 것처럼. 온전한 사랑은 “사랑스러운 모든 것을” “완전한 깊이와 길이까지, 제 가슴이/부서”지도록 사랑하는 것. 아마 노래는 이 사랑으로 부서지는 가슴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테다. 문학평론가
2024-06-17
두 사람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다오후 2시 민방위 사이렌이 울리자마치 멈춰 있었던 것처럼아무렇지도 않게 숟가락을 들고 있다.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오물거리자한 사람이 그러지 말라는 것처럼 눈을 찡그린다.한 사람의 입과 또 한 사람의 눈 사이로사십 년의 오후가 자막처럼 지나간다.중얼중얼 사라지고 있다.한 사람이 입안에 남은 음식을 넘기려다사래에 걸렸는지 연신 기침을 한다.기침을 할 때마다 고개가 앞뒤로 크게 흔들렸지만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쓴다.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가느다란 시간을 건너가고 있다.이 시 속 ‘두 사람’은 ‘민방위 사이렌’이 상기시키는 어떤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자막처럼 지나간” ‘사십 년의 오후’라는 구절을 볼 때, 두 사람은 40년의 세월을 같이 지냈다. 위의 시가 발표된 2016년의 40년 전이면 1986년. 젊은이였던 두 사람은 이때 군부독재에 저항한 격렬한 투쟁을 하지 않았을까. 그 이후 40년은 ‘가느다란 시간’일 뿐, 두 사람이 상기한 어떤 기억을 굳이 말하지 않으려는 것이 이해된다. 문학평론가
2024-06-16
아무 날도 아닌 아무 날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당신을 생각한다. 첫사랑도 같고 풋사랑이었던 것도 같은 희미한 기억 속에 당신이 불쑥 떠오르는 아무 날은 아무것도 아닌 기억 하나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기억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래된 추억의 철로를 복원시키고 수천 일 속의 어제들을 정렬 시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 행 열차표를 끊는다. 십 수 년 전 무방비의 마음을 태워 달리다가 경적도 없이 떠나버린 당신에게 이미 나는 아무개일 텐데 번번이 아무렇지도 않게 기억에 자리를 내준다. 아무. 날에나‘아무’는 아무 뜻도 없는 듯하지만, 다른 말들에 달라붙어 다양한 의미를 발산한다. 시인은 그런 ‘아무’ 앞에서 마음 깊이 묻어둔 ‘당신’이 ‘불쑥’ 기억 위로 떠오름을 느낀다. “무방비의 마음을 태워 달리다가 경적도 없이 떠나버린 당신”은 시인과 서로 ‘아무개’가 된 사이가 되었고, 그에 대한 기억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하나 그래서인지 ‘당신’은 더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 행 열차”에 나를 태우는 것! 문학평론가
2024-06-13
오늘 밤 물속은 차갑지도 무섭지도 않아요 바다를 수영하기에 적당한 수온, 바다를 건너기에 적당한 파도입니다 검은 밤 망망대해에 나 혼자 떠 있어요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바다와 물결을 비추는 달빛 낯설지 않아요 바닷물은 편안하게 일렁이고 부드럽게 나를 감쌉니다 그런데 왜 나는 두렵습니까 무더운 여름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땀처럼 밤새 수영을 해야만 아침에 닿을 수 있다니 매일 밤 나는 건너가고 있어요 매일 밤 바다를 기어코 건너고야 맙니다 햇빛 아래서도 내가 저체온인 이유를 아무도 모를 거예요‘검은 밤’이 되면 화자는 언제나 “망망대해에 나 혼자 떠 있어”야 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기에 낯설지도 무섭지도 않다고. 특히 ‘오늘 밤’은 “수영하기에 적당한 수온”에 “적당한 파도” 아닌가. 하나 그는 두렵다. “밤새 수영을 해야만 아침에 닿을 수 있”기에, 이 무한 반복의 필연성이 그를 두렵게 만드는 것. 그런데 ‘밤 수영’이란 시 쓰기 아니겠는가. 낮에도 그가 저체온인 건 이 시 쓰는 밤의 현기 때문일 테다. 문학평론가
2024-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