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면 땅은 몸에 박힌 발자국을 밀어낸다./ 발자국이 향하고 있는 끝에/ 네가 있다.(중략)나는/ 나무가 되지 못하고/ 고라니가 되지 못하고/ 별도 아니어서/ 네가 있어/ 제자리에서 발만 구르며 끝을 바라볼 뿐인데그건 병든 몸을 바라보는 신비주의자의 믿음이라고/ 저 빈 하늘/ 저 차가운 하늘/ 가득새 한 마리/ 제 그림자를 움켜쥐고 날아가자/ 어둠이 눈발처럼 날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착하게만 살 뿐./ 쓸 뿐./ 살아내 써낼 뿐.‘엠페리파테오’는 성경에 나오는 헬라어로, (하나님이) 순시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시인은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영혼의 구원이라는 ‘신비주의’의 의미에서 이 단어를 쓴 듯하다. 땅 위에 쌓이는 눈이 발자국을 밀어내고, 이 “발자국이 향하고 있는 끝”에 있는 너를 시인은 “발만 구르며” 바라본다. 나무나, 별, 고라니처럼 순수한 존재여야 네게 갈 수 있는 것. 다만 그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살아내 써낼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4-04-09
어린이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 세상이 무서워 어깨동무하고 우우 몰려다니는 노랑, 노랑은 징검다리, 바람 속에서 따뜻했다 아직 삐딱한 사춘기의 표정은 도착하지 않았다 숙성되어 채도 낮은 골드까지 가려면 시간의 긴 늪과 오솔길을 건너야 하고, 이제 봇짐 속에 놓치거나 잃어버린 골목을 점검하며 수시로 방향을 바꾸며 길을 떠나야 하리라 지금 이곳에서부터 저 쨍하게 밝은 날들이 뼈마디 욱신거리는 곳곳마다 스며들어 부드럽게 힘차게 늙어가기를갓 핀 개나리는 어깨동무 한 어린이처럼 보인다. 나이 든 시인도 개나리를 보며 어린이처럼 마음이 설렜던 것. 하나 이 개나리도 “시간의 긴 늪과 오솔길을 건너” “채도 낮은 골드”에 도달할 터, 이 ‘숙성’으로 가기 위해 “잃어버린 골목을 점검하며” “길을 떠나야” 할 테다. “쨍하게 밝은 날들이” 이 긴 여행을 위한 힘을 불어넣어주기를 시인은 기원한다. 그는 저 개나리에서 어린 날의 자신을 읽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4-08
돌 위에 돌을 얹고 그 위에 또 돌을 얹어궁극으로 치닫는 마음마음위에 마음을 얹고 그 위에 또 마음을 얹어허공으로 치솟는 몸(중략)조그만 돌멩이를 주워마음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태어나기 전의 돌탑을 태어난 이후에도 기다렸다.한곳에 머물러 오래 기다렸다.돌멩이가 자랄 때까지돌탑이 될 때까지사찰에 가면 사람들이 차곡차곡 얹어놓은 돌을 볼 수 있다. 시인은 깊은 마음과 생각으로 이 돌 위에 또 하나의 돌을 얹는다. 시에 따르면, 이 돌들은 “궁극으로 치닫는 마음”인 것, 그 마음들은 허공 위로 한 층 한 층 얹히며 탑을 이루는 중이다. 비록 작은 돌탑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는 어떤 위대한 ‘연대’가 맺어진다. “돌멩이가 다 자”라서 “태어나기 전의 돌탑”이 되기를 기다리며 이루어지는 “시간의 연대”가. 문학평론가
2024-04-07
내게 가장 소중한 생각들은 세상에는 낯설어, 나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표현한다면 세상에 낯설게 비친다. 그러나 만일 나 그것들을 완전히 표현한다면, 그것들은 세상에 두루 통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거다.아! 나 그럴 수 있는가? 그것들은 내게도 낯설어 보인다 나 자신에게도. 나 분명히 말했다: 가장 소중한 것들이라고….개념들, 그리고 말들, 그리고 말들, 그리고 개념들을 참조하는 일련의 (괴상한) 것들.20세기 프랑스 시인 퐁주의 시. 생각을 언어로 어떻게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이 문제로 골치를 썩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쓰고 있는 말들이 개념과 일치하리라 별 의심 없이 전제한다. 하지만 이 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 그에게 “가장 소중한 생각들”이란 “세상에는 낯설게 비”칠 터, 이 생각을 어떻게 완전히 표현할 것인가가 그의 과제다. 그 표현은 결국 괴상한 모습을 하게 될 테지만. 문학평론가
2024-04-04
사랑만 한 수고로움이 어디 있으랴평생을 그리워만 하다지쳐 끝날지도 모르는 일마음속 하늘치솟는 처마 끝눈썹 같은 낮달 하나 걸어 두고하냥 그대로 끝날지도 모르는 일미련하다수고롭구나푸른 가지 둥그렇게 감아 올리며불타는 저 향나무우리가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해 있을 때 아닐까. 사무치는 그리움이 사랑을 확인케 하는 것, 그래서 “사랑만 한 수고로움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인의 말이 정곡을 찌르는 느낌이다. 그리움은 저 “눈썹 같은 낮달”을 “마음속 하늘”에 걸어두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이니. 이 ‘사랑-그리움’을 몸으로 드러내는 것이 향나무다. 향나무가 저렇게 “푸른 가지 둥그렇게 감아 올리며/불타는” 것을 보면. 문학평론가
2024-04-03
생각을 끄려고 음악을 틀었다수요일인 줄로 알고 목요일을 보냈다비가 온다는 걸 안 뒤에야 우산을 샀다풍경이 나보다 먼저 흐르고나는 몇걸음 뒤처져 따라갔다늦은 나이에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내 안의 미움을 웃음으로 번역하는 매일매일무슨 말을 하는데 자꾸만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요세상과는 영 입 모양이 맞지 않았다우리들 대부분은 세상과 “입 모양이 맞지 않”은 채 살지 않는가. 우리 역시 위의 시의 화자처럼 세상과 맞추기 위해 외국어 번역하듯이 “미움을 웃음으로 번역”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아닐까. 필자 역시 “생각을 끄려고 음악을 틀”으며 세상의 흐름에 “몇걸음 뒤처져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나아가 외국어 배우듯 세상살이 요령을 배우다 “모르는 목소리가” 내면에서 들릴 때도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4-02
사랑은 시로 할 수밖에 없는 것.시의 말로 약속 잡고결국 더 시선을 건드리지.그런 음지(陰地)지. 사랑은시간의 공간이어서잔 이별마저 시로 돌아보는 거야.너는 내게 눈웃음 짓는다,나무 의자 수리하는 시인같이.그런 시는 도대체 무슨 눈길일까?퇴고할 수 없는, 그래,나를 응시하는 너 말고 이 세상에누가 더 낯선 시인가?위의 시에 따르면, 시는 사랑의 속성을 가졌다. 시는 사랑의 언어적 표현이다. 시는 사랑하는 너의 나에 대한 ‘눈웃음’ 띤 응시를 마주하면서 풀려나온다. “도대체 무슨 눈길”인지 모를 너의 눈웃음에 발동되는 사랑은, 나의 시선을 충만케 하고 “약속 잡”는 시의 말이 솟아나게 한다. 시 자체여서 퇴고할 수 없는 말을. “시간의 공간”인 사랑은 이별도 “시로 돌아보”게 만든다. 이별의 시간이 머무는 음지로서의 시. 문학평론가
2024-04-01
상처 입은 짐승은/ 동굴 깊이 숨는다일 년이 간다/ 십 년이 간다상처는 깊었지만/ 깊은 만큼 깊이 숨어/ 겨우 아문다그런데 나가는 길을 잃는다/ 나갈 수가 없다길을 잃은 상처는/ 다시 도진다깊이 숨은 만큼 깊게 도진/ 상처가/ 벽을 긁는다예술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위의 시에 따르면, 상처가 아물도록 들어간 동굴에서 나가는 길을 잃은 이들이, 상처가 도져 벽에 무엇인가를 긁는 데서 예술은 시작된다. 하여 최초의 예술은 벽화였다. 깊이, 오래 숨을수록 상처도 깊어지고 벽화 역시 깊어질 터, 그런데 예술의 주체는 상처 입은 자가 아니라 상처 자체라는 점에 주목하자. “벽을 긁는” 일은 상처가 하는 것, 즉 고통의 힘이 예술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3-31
불구덩이를지나온 기왓장그 불기운을 빨아올려야겠다고대웅전 기와지붕 위에서 풀들이 자란다뿌리가 들린 生은불기운을 먹고 자란다그러나,저 허공에 떠 있는풀뿌리의 힘으로부처의 이마엔 주름이 없다시인은 뜻밖의 발견을 해준다. 위의 시는 기와지붕 위에 펼쳐진 풀들이 “불기운을 먹고 자란다”는 발견을 보여준다. “불구덩이를/지나온 기왓장” 속에 보존되어 있는 불기운. 뿌리 들린 존재자들은 자신의 ‘풀뿌리’를 이 불기운에 대면서 “허공에 떠” 살아가는 것, 허공 위로 타‘오르는’ 것이 불이기 때문이리라. 이 “풀뿌리의 힘”이 부처의 이마에 주름을 없앤 걸 보면, 그 힘은 삶의 근심을 이겨내는 힘인 듯하다. 문학평론가
2024-03-27
12월 어느 날 밤 돈 때문에호텔 마담을 시인이 찾아갔다마담은 눈길도 안 주고 말했다돈이라뇨시인답지도 않은 말씀을 하시네요속인들이나 하는 말 따위를시인이 입에 올리시는 건 아니라고 봐요돈하고는 거리가 먼 게 시인이니시인은 가난하니까 그야말로대단한 존경도 받는 거죠시인은 그 말에 울컥하여빌리러 온 일도 잊어버린 채자못 점잔 빼고 있었다야마노쿠치 바쿠는 오키나와 출신의 시인. 위의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본시에서 진정한 구어체를 완성했다고 평가받는다고. 시인도 돈이 있어야 먹고 사는 법, 하나 그는 돈이 없다. 돈 빌리러 찾아간 지인은 돈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한다. 가난하니까 시인은 존경받는 거라고. 이 말에 시인이 울컥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그는 다시 시인의 자세를 갖추며 점잔 빼고, 돈 빌리는 걸 잊고 만다는 것…. 문학평론가
2024-03-26
누런 애기 별들이이고 온 빛살 풀어좌판을 벌였다저 작은 것들의 치열한 발원에하늘도 황금을 녹여 엎질러 놓았나마른 들판에 발톱을 박아흙의 피를 빨아올리는혀의 흡인력압도적 군락으로뜨거운 여름을굽고 있다불갑초는, 유독 돌을 좋아해서 돌나물이라고도 불리는, 노란 꽃을 피워내는 산나물이다. 시인은 무더기로 핀 꽃들이 “누런 애기 별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꽃무더기가 뿜어내는 노란 빛이 황홀해, “하늘도 황금을 녹여 엎질러 놓았”다고 감탄하는 시인. 한데 더 강렬한 건, “마른 들판에 발톱을 박아/흙의 피를 빨라올리”는 불갑초꽃의 ‘흡인력’이다. 여름은 이 ‘압도적 군락’의 생명력으로 더 뜨겁게 구워지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03-25
인간이 그림자에게2인자의 지위를 부여한 건인간이 무지하거나오만하다는 증거밤을 무서워하는인간의 지위는그림자를 붙잡을 수 없어2인자 없는 영역이몹시 불안하다인간은 그림자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중요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의 시에 따르면 그것은 무지나 오만의 증거일 뿐이다. 통상의 생각과는 달리, 융과 같은 분석심리학자가 말한 바, 그림자야말로 인간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인간은 그림자에게 “2인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 한편 그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인간은 “몹시 불안”해 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3-24
강가에 있는 3월의 과수원그 꽃들 사이로 그대 볼 때면순결한 꾀꼬리들처럼꾀꼴꾀꼴 지저귀고 싶다오.순결한 꾀꼬리들처럼그대에게 내 사랑 바치고그대 사랑 빼앗기는 여름까지노래하며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오.그대 키보다 너무 큰 내가과수원 사과 딸 때면그대 욕망보다 너무 크다오잡힐까 너무나 저항하며그대 향기에 이끌리는 나는너무나 조그만 아이라오.스페인 프랑코 군부독재정권에 죽임을 당한 참여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의 시. 참여 시인의 마음에는 위의 연시가 보여주듯이 아름답고 순수한 서정이 밑에 깔려 있다. 화자는 “3월의 과수원”에서 본 ‘그대’에게 반해버려 “순결한 꾀꼬리들처럼” “노래하며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고 말한다. ‘그대’보다 큰 자신의 키처럼 그대에 대한 욕망은 너무 크지만, “그대 향기에 이끌리는” 사랑하는 이는 “조그만 아이”가 된다. 문학평론가
2024-03-21
강은 흘러야 강이고꽃은 피어야 꽃이라고 말하는 듯동강할미꽃 피네수만 년 동안강과 산이밤낮으로 만나 빚은 절경절벽을 수놓는 꽃댐을 막아절경을 수장시키려던 시절때맞추어 세상에 나타나아름다움의 가치를 증언한 꽃강은 한없이 젊고그리움은 늙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동강할미꽃 피네.통념과는 달리, 자연은 늙지 않는다. 도리어 “한없이 젊”다. “수만 년 동안” 강은 멈추지 않고 흐르며, “동강할미꽃”도 이름과 달리 새로 피어나기 때문이다. 강과 꽃은 서로 어울려 절경을 보여주며 “아름다움의 가치를 증언한”다. 그러나 인간 세상은 이 “절경을 수장시키려”고 하며, 이제 자연은 훼손되고 사라지고 있다. 남은 것은 절경에 대한 그리움, 자연을 대신한 그 그리움은 자연처럼 “늙지 않”게 되었다. 문학평론가
2024-03-20
광산촌 사북의슬레이트 사택들처럼달동네 판잣집들처럼다닥다닥 다닥다닥파도가 때려도 다닥다닥물거품에 휩쓸려도 다닥다닥죽어서도 다닥다닥악착같이 다닥다닥파도 시퍼런 갯바위따개비 마을에따개비들이 산다다닥다닥 다닥다닥“재벌 4세는 모르”는 삶. 가난한 이들의 삶. 이들은 “다닥다닥” 붙은 집들에서 살고 있다. 이는 가난 때문이기도 하지만, 약한 이들은 이렇게 집단을 이루어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파도 시퍼런” 세상을 “악착같이” 견딜 수 있다. “물거품에 휩쓸”리거나 “죽어서도” 이루어지는 이 삶의 방식은 “따개비들이” 사는 방식과 닮았다. 이 집단적 삶은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생존의 지혜를 바탕에 둔 것이기에. 문학평론가
2024-03-19
제 몸이 되지 못한 몇 알의 씨앗들이구멍 난 정수리 속에서 꿈틀거린다자꾸만 간지러워, 손톱으로 긁어 보지만뿌리에 박힌 낯선 얼굴이 고개를 든다슬픔을 머리에 이고 가만히 웃는 너,떡잎이 떨어질 때까지 푸드득 춤을 춘다가는 비를 맞으며 자유공원에서 월미공원까지사부작 걸어가면 어느새 해가 쨍쨍하다미워했던 마음 위로 불어오는 따뜻한 공기가냘픈 이파리들이 머리칼처럼 휘날린다땅과 물, 불과 바람이 가득 차오르면겨우내 굳었던 마음들이 새순으로 돋는다봄이 오면, 자연의 싹들만 새로 움트는 건 아닌가보다. 머리 안에 있었던 생각의 씨앗들도 꿈틀거리기 시작하니. 그 생각은 ‘낯선 얼굴’을 가졌다. 시인의 마음은 미움이나 슬픔으로 ‘겨우내’ 굳어 있었지만, ‘너’는 “슬픔을 머리에 이고 가만히 웃”다가 “푸드득 춤을” 추기까지 하기에. 하여 “마음 위로” “따뜻한 공기”가 “불어오”면서 마음의 공간은 생명의 기운으로 차오르고, 마음에서도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문학평론가
2024-03-18
二月의 빈 논/ 잘린 벼들의 발목/ 시름 얽힌/ 영하의 긴 아침떨며 가는/ 바람의 빗장뼈/ 사이사이/ 봄의 딸꾹질을 막는/ 겨울의 주먹소쩍,/ 소쩍,해거름 동풍冬風에/ 응어리진 살얼음 소리/ 먼 산 가득 흩어지고/ 소쩍새들/ 세월 앞당겨 미리 우는/ 당신의 무덤가소쩍, 쿵/ 소쩍, 쿵애절도 녹여 내리는/ 낫날 같은/ 이월의 목청.시에 따르면, 무덤가에서 봄은 시작된다. “당신의 무덤가”에서 “세월 앞당겨 미리 우는” ‘소쩍새들’의 울음이 봄을 가져온다. 그 울음은 죽음에 대한 슬픔의 표현이자, 새로이 삶이 곧 태어나리라는 징조이기도 하다(‘쿵’이라는 소리가 그 징조다). 소쩍새들이 우는 시기는 아직 겨울바람이 “봄의 딸꾹질을 막는” 2월, 하나 소쩍새들의 “낫날 같은” 날카로운 목청은 ‘영하’의 “애절도 녹여 내리는” 뜨거움을 가졌던 것! 문학평론가
2024-03-17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나무 병에 우유를 담는 일,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어두운 벽난로와 옴이 오른 늙은 고양이와,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 아이들 옆에서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한밤중에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생명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위대하다. 우유를 담거나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이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일과 같은. 그래서 삶을 지속하게 해주는 노동은 위대하며, 평화도 가져온다. 아이들이 “늙은 고양이와,/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모습이 보여주는 평화. 귀뚜라미 울음이 표현하는 자연의 리듬을 타며 사람들이 노동하고 삶을 살 때, 그 평화는 나타난다. 씨앗을 뿌리고 달걀을 거두는 자연적 노동과 삶. 문학평론가
2024-03-14
엄니는 신명이 많았다당신의 감정을 노래로 대신하였다(중략)노래는 엄니의 삶과 생의 양식이었고 경전이었다엄니는 밝고 높고 경쾌한 노래보다는어둡고 낮고 무거운 노래를 즐겨 불렀다슬픔으로 슬픔을 문질러 닦아 내었다나는 엄니의 노래를 곧잘 따라 불렀다어린 몸속에 청승을 담고 산 것은엄니 때문이었다엄니는 내게 노래를 남기고 돌아가셨다노래를 살다 가신 엄니나는 오늘도 엄니의 노래를 부르며 살고 있다노래는 힘이 세다‘엄니’의 노래는 시인의 몸속에 녹아들어 있다. 아마 엄니의 삶은 고달팠을 테다. “슬픔으로 슬픔을 문질러 닦아 내”기 위해 노래 불렀다니 말이다. 시인도 자신이 고달플 때 “엄니의 노래를 곧잘 따라 불렀”을 것, 여전히 그 “노래를 부르며 살고 있다”고 한다. 노래는 엄니의 “생의 양식”이자 “경전”이었다고 하니, 시인에게도 노래는 양식이자 경전이 되었을 터, 엄니의 노래는 후대의 삶까지 이끄는 힘을 가졌다. 문학평론가
2024-03-13
이른 꽃 핀 늙은 매화나무가느란 가지 끝에 소복이흰 눈 내려 쌓이네활들짝, 놀란 꽃잎들일순 잎을 오므리고놀란 꽃잎처럼 나도 깨어차고 은은한 매화 향에 눈을 뜨네누군가 봄눈 같은 말을 문자로 보내왔네삶은 기적이요 만남은 신비라고,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을 가진 시인에게 이 세계는 놀라운 일이 계속 벌어진다.‘늙은 매화나무’ 위로 새로 “흰 눈 내려 쌓이”는 일도 매년 반복되는 일이기보다는 놀라운 사건이다. 시인은 이 놀라움을 표현하기 위해 ‘활들짝’이라고 쓴다. 그래서 ‘누군가’ 보낸 문자 그대로, “삶은 기적이요 만남은 신비”인 것, 이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 쉼표를 찍은 것은 이 세계에 놀라운 일들이 계속되리라는 뜻이리라. 문학평론가
2024-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