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희
아무 날도 아닌 아무 날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당신을 생각한다. 첫사랑도 같고 풋사랑이었던 것도 같은 희미한 기억 속에 당신이 불쑥 떠오르는 아무 날은 아무것도 아닌 기억 하나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기억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래된 추억의 철로를 복원시키고 수천 일 속의 어제들을 정렬 시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 행 열차표를 끊는다. 십 수 년 전 무방비의 마음을 태워 달리다가 경적도 없이 떠나버린 당신에게 이미 나는 아무개일 텐데 번번이 아무렇지도 않게 기억에 자리를 내준다. 아무. 날에나
‘아무’는 아무 뜻도 없는 듯하지만, 다른 말들에 달라붙어 다양한 의미를 발산한다. 시인은 그런 ‘아무’ 앞에서 마음 깊이 묻어둔 ‘당신’이 ‘불쑥’ 기억 위로 떠오름을 느낀다. “무방비의 마음을 태워 달리다가 경적도 없이 떠나버린 당신”은 시인과 서로 ‘아무개’가 된 사이가 되었고, 그에 대한 기억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하나 그래서인지 ‘당신’은 더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 행 열차”에 나를 태우는 것!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