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하늘을 향해 나는 것매 숨결마다 장막을 백 개씩 뜯어내는 것처음엔 한 숨 한 숨 끊고처음엔 한 걸음 한걸음 끊는 것이 세상을 무시해버리는 것자기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심장아, 네게 축복이 있길사모하는 자들의 무리 속에 도달하기를보이는 곳 너머의 그곳을 바라보길가슴속 골목길을 달리기를오 심장아,이 숨결은 어디서 왔는가오 심장아,이 두근거림은 어디에서….오 새여, 새들의 언어를 말하라나는 들리는 소리에 숨겨진 신비를 알고 있다 (하략)13세기 페르시아 신비주의 시인인 루미의 시. 중세 시대에 놀랍게도 루미는 사랑에 대한 확 트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사랑은 신과의 사랑을 의미하겠지만, 사람끼리의 사랑 역시 저 이미지는 생생하게 들어맞지 않는가. 하여, 사랑은 ‘새들의 언어’로 소통한다. 사랑이란 “하늘을 향해 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사랑에 빠진 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 지상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2-06
택배 받아 내용물 다 들어내고빈 포장 박스를 뜯어 해체한다.당초의 얼개대로 접고 붙인 부분들을일일이 찾아 뜯고 다시 편다.사람도 접히고 붙여진 몇 굽이 곡절들로생을 포장해 미움도 사랑도 담아내지만언젠가는 여기 이렇게 뜯어 펴는 박스처럼 해체되리라.다만 길고 짧은 시간 그가 앉았다 간 자리엔따스한 온기만이 남아 식으리라.여섯 면의 곽이었던 몸피가 분해되면 납작하게 평면으로 쭈그러든다.그렇게 용도 폐기된 상자가 골판지 낱장들로그동안의 크고 작았던 삶에 상관없이원래의 면목대로 고물상 한옆에 쌓인다.반납되곤 한다.인생은 ‘포장 박스’ 같다. 삶은 “몇 굽이 곡절들”을 “접고 붙”이면서 포장 박스가 되고, 그 박스 안에 “미움도 사랑도 담아”낸다. 하나 용도를 다한 포장 박스가 해체되듯, 인생 역시 원래대로 “평면으로 쭈그러”져 저 세상으로 반납될 것이다. 인생은 허무한 것인가? 하지만 적어도 “그가 앉았다 간 자리엔/따스한 온기가” 얼마 동안 남아 있다. 눈물겹지만, 그 온기만으로도 삶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문학평론가
2024-02-05
어딘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는가하루 일이 끝나면 흑맥주 한 잔괭이를 세워두고, 바구니를 내려두고남자도 여자도 커다란 맥주잔을 기울이는어딘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는가먹을 수 있는 열매가 달린 가로수가어디까지고 이어지고, 노을 짙은 해질녘에젊은이가 상냥하게 떠드는 소리로 흘러넘치는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의 힘은 없는가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날카로운 힘이 되어, 눈앞에 불쑥 나타나는시인은 ‘~없는가’라는 문형의 문장을 반복하면서, 현재는 찾기 힘들어진 아름다운 마을, 아름다운 거리,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워한다. 시인에 따르면, 일 끝나고 함께 일한 남녀 모두 흑맥주를 마실 수 있는 마을은 아름답다. “젊은이가 상냥하게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도 아름답다. 또한 “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 사람의 “날카로운 힘이 되어” “불쑥 나타”날 때, 그 ‘사람의 힘’ 역시 아름답다. 문학평론가
2024-02-04
지그시 두 손으로 감싸면 꼭 심장을 쥔 것 같다불은 견딘 것들은불의 성질을 그대로 닮아서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는사람의 심장도밥그릇 크기로딱 그만큼 뜨거워졌다따듯한 밥그릇을 심장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 놀랍다. 사실 밥은 우리의 삶을 살게 해주는 것 아닌가. 심장이 우리 생명을 지탱해주듯이. 한데 시인의 유추는 더 나아간다. 따스한 밥과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는” 이의 심장을 동일화 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밥을 지어 먹이겠다는 마음 역시 밥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것. 그 마음은 불처럼 뜨겁다. 그래서 그것은 불을 견딘 밥처럼 “불의 성질을 그대로 닯”는다. 문학평론가
2024-02-01
숲을 찾았다.사라지지 않을 물과사라지지 않을 공기와 나무에게 입술을 대었다.집도 자동차도 직업도 사람도 모두 바뀐다.저물녘과 새벽만 바뀌지 않는다.가난한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죽기 전까지 함께 할 것들이 나를 살린다.화분에 쌓인 돌을 오래 보았다.부정한 입술이 맑아졌다.시인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살리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것들은 가난하다. 시인에 따르면 집이나 자동차, 사람마저도 변한다. 부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한낮의 세계에 존재하는 그것들은 ‘부정함’을 끌고 온다. 반면, 낮밤이 교차되는 ‘저물녘과 새벽’은, “화분에 쌓인 돌”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의 세계다. 그리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입술을 대었”을 때, 부정한 삶은 맑아질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4-01-31
백일 갓 지난 딸아이를 둘러업고 덤프트럭을 타고배달을 나설 때나의 바다는 일 단과 이 단 사이에서태풍주의보신호등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환하게 묵례를 하고 있었고인사를 받을 틈도 없이멈춘 사거리에서 출렁,좌회전을 할까직진을 할까어린 딸은 조수석 등받이에서염소 울음만큼 작고 가늘게 울었고여기서 시동을 끄면 집은 난파다땀에 젖은 작은 배 한 척을 다시 한번 고쳐 쓴다직진이다목구멍이라는 거대한 파도를1톤 덤프트럭으로 힘껏 들이박는다매일 바다를 항해하듯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의 화자도 그러한 사람이다. 그는 “백일 갓 지난 딸아이를 둘러업고 덤프트럭을 타고” 배달하며 살아야 한다. 어떤 진로를 선택할 때에도 ‘직진’을 선택해야 하는, “시동을 끄면 집은 난파”되는 삶. 먹고 살기 위해 채워져야 하는 그의 ‘목구멍’ 안에는 언제나 큰 파도가 친다. 하나 감동적이게도, 화자는 이 파도를 “덤프트럭으로 힘껏 들이박”으며 돌파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01-30
순서도 없이 한 줄로 늘어선 불안함이 주저앉아반찬 통에 묻은 밥알처럼 말라붙어 가는 공간 속표정 없는 사람들의 집에서 가져온 숟가락에만 표정이 묻어 있는단 한 번의 외출로 어떤 사람은 마중을어떤 사람은 배웅을 위해 뛰어내려야 하는 공중정원 새들도 찾아오지 않는 무겁고 탁한 공기 속을 휘저으며희미해져 가는 가족의 이름을 반복해서 속으로 부르다그 이름에 곧 반사적으로 뛰어내려야 하는이곳은 결국 지상에 안착하지 못한 인생들을 등 떠밀어내는불안한 공중정원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 있어본 이들은 위의 시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그곳은 언제 비보가 날아올지 모르는 ‘불안함’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그곳을 언제 추락할지도 모르는 ‘공중정원’이라 부른다. 공중에 붕 떠 있는 곳이라는 의미겠다. 중환자실에 가족을 둔 이들은 불안과 걱정으로 지쳐 표정을 잃어버리고, “지상에 안착하지 못한 인생”을 살게 된다. 중환자 가족을 둔 이들의 슬픔에 대한 시적인 조명. 문학평론가
2024-01-29
내 손을 잡아, 그리고 춤을 추자, 너와 나,그때처럼 손을 줘,한 송이 꽃이 되자, 나와 나,한 송이 꽃, 그걸로 충분해.같은 춤을 추자, 너와 나,같은 스텝을 탐색하자,바람에 나풀대는 어린 벼처럼,하나되어 흔들자, 그걸로 충분해.네 이름은 장미, 내 이름은 희망,하지만 이름 따위가 뭐라고,우리는 산꼭대기에 있을 텐데,춤만 추면 되는데, 그걸로 충분한데.삶의 본질을 찌르는, 가슴 벅차게 하는 시. 너와 내가 손잡고 춤추면서 ‘산꼭대기’의 “한 송이 꽃이 되”는 것, 삶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하나 “그걸로 충분한데.”라고 끝맺는 마지막 행은, 우리가 아직 이 춤을 추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근심과 욕심을 거추장스럽게 달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벗어나 ‘너’와 “같은 스텝을 탐색”할 때 우리는 ‘충분한’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1-28
감아도 감아도당신은 내 품 밖에 있습니다당신을 오르느라 핏물 배인 내 여린 손가락들모른 척 당신은 먼 하늘만 바라보네요몸이 있다고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안았다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어서당신 몸 속을 파고 또 파고 들었지만통나무 같은 당신은 매일 밤 나를 토해내네요차이는 게 일이라그리움조차 하얗게 말라버렸지만감고 감는 일밖에 나는다른 사랑을 모릅니다시인은 사랑의 전도사 아닐까. 그러나 시인에겐 교리가 없다. 그는 사랑의 속성을 새로 발견하여 우리에게 전한다. 위의 시의 사랑은 어떤가. 슬프다. 화자는 당신의 “몸 속을 파고 또 파고 들”며 사랑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하지만, 당신은 “매일 밤 나를 토해내”니 말이다. 이젠 그 사랑은 끝나 “그리움조차 하얗게 말라버렸”다. 하나 사랑은 그 “감고 감는 일” 자체에 깃든다는 진실을, 화자는 우리에게 전해준다. 문학평론가
2024-01-25
별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 거주한다공처럼 튀어 오르기도 하고공을 벗은 바람이 되기도 한다.바람은 불과 놀며술이 되고 황금도 되나니우주는 정보가 갈 수 있는 한계라는 말은철없는 말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 거주하는 것이문제이다.높은 천장을 갖고 싶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시인에 따르면, ‘시인’이란 존재는 변신의 귀재다. ‘시인’은 튀어 오르는 공이 되다가도, “공을 벗”고 공 속 바람이 되어 “불과 놀”면서, “숲이 되고 황금도” 된다. 하지만 ‘시인’은 “별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 거주”한다. 별을 볼 수 없는 곳에서는 ‘시인’의 능력 역시 드러나지 않는다. 우주와 시인 사이엔 천장이 가로막고 있다. “높은 천장을 갖고 싶다는” 희구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의 우주를 보고 싶기 때문이리라. 문학평론가
2024-01-24
나는 어리둥절하다저 망치는 언제부터 나에게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나내가 스스로 못대가리임을 자각하는 순간망치를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뽀족한 내 몸이 사정없이 들어가 박히는저 몸은 누구의 것인지나는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사랑도 망치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나는 내 몸이 두렵다사랑은 불현듯 몸을 통해 찾아온다. 과격한 사랑의 도래도 있다. ‘망치’ 같은 사랑이 그것. 그야말로 그 사랑은 우리를 가격한다. 망치에 맞은 우리의 몸은, 당신의 몸에 못처럼 “사정없이 들어가 박”힌다. 사랑은 ‘나’의 의지를 무시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한다. 사랑은 마치 “나에게/적개심을 가”진 것처럼 ‘내 몸’에 침입하는 것, 두려워할 만하다. 하나,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도래를 원하고 있지 아니한가? 문학평론가
2024-01-23
오래전 나도 당신도 없고 그러니 어떤 단어도 추억할 수 없는 골목에 모두 잠들어 아무도 깨우지 않게 생활이 돌아눕는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에 아무도 태어나지 않아 우는 것도 없는 그 가만 새벽에 어린 부부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을 것이다 고요는 잎보다 먼저 꽃을 흔든다우리는 살다가 과거도 미래도 없는 어떤 고요의 세계와 마주할 때가 있다. 순수한 현재만이 있는 세계. 생활 속에 있는 생활 너머의 세계. 추억도 없고 “아무도 태어나지 않아 우는 것도 없는” 저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이 그런 세계일 테다. 하나 그 현재의 고요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가만 새벽에”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어린 부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고요가 흔드는 꽃의 아름다움. 문학평론가
2024-01-22
시인들은 경기병처럼 돌격할 수도 있지만 소설가는꾸밈없고 서툴게 되는 방법을, 그 누구도본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법을익지 않은 재능에서 애써 빠져나와 배워야 한다.가장 사소한 것을 이루기 위해 소설가는온통 지겨움의 덩어리가 되어야 하고, 천박한사랑타령에 좌우되고, 의로운 자들 가운데에서는의롭고, 지저분한 자들 속에서는 지저분해야 하고,가능하다면 연약한 자신이 몸소인류의 모든 잘못을 무덤덤하게 견뎌 내야 한다.시인이 시로 쓴 소설가론. 그런데 소설에 대해 핵심을 찌른 감이 있다. 시가 핵심을 향해 “경기병처럼 돌격”한다고 할 때 시답게 소설론을 쓴 것. 이에 따르면 소설은 “가장 사소한 것을 이루기 위해” 자질구레할 수 있어야 한다. “지겨움의 덩어리”가 되고, “천박한 사랑타령”에 좌우되며, “지저분해”질 수 있어야 한다. 하나 이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인류 모든 잘못을” “무덤덤하게 견뎌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4-01-21
한참을 살다 뒤돌아보니내 생의 단 하루도 오늘이 없었다유체 이탈한 짐승처럼늘 하루를 앞질러 달려왔던 것오늘이 없으니당연히 어제도 있을 수 없지오늘이 되기도 전에 벌써내일이 사라지곤 하였으니나의 지난 삶은 텅 비었다멀리 날지 못한젖은 종이비행기처럼너무나도 축축한나의 과거우리도 위의 시에서처럼 오늘을 오늘대로 살고 있지 못하지는 않는지. 미래에 저당 잡히거나 과거로 젖어버린 오늘을 보내고 있지 아니한지. 과거로 축축한 삶은 “젖은 종이비행기처럼” 날아갈 수 없으며, “하루를 앞질러 달려”온 삶은 “오늘이 되기도 전에” “내일이 사라”져 버린다.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오늘, 오늘이 없는 오늘은 역설적이게도 어제나 내일을 사라지게 한다. 텅 빈 삶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1-18
의자는, 뿔을 가졌다고집스런 두 개의 뿔을 가졌다말뚝에 매어 있지 않은데도 말뚝에 매인 듯그 자리를 떠날 줄을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리듯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온종일 그 자리를 맴돈다무거운 엉덩이에 짓눌리면서도 일생동안무게의 하중荷重을 안간힘으로 버티면서도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는, 저 의자는-때로는 비의 가시에 전신을 적시면서도관절 마디마디 삐걱거림으로 목욕을 하면서도고집스런 두 개의 뿔을 가진, 저 의자는-위의 시에서 시인은 집 바깥에 놓여 비를 맞고 있는 의자로부터 인내와 의지를 포착하고 이를 ‘두 개의 뿔’로 이미지화 한다. 의자는 황소와 같은 ‘고집스런’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고집은 갖은 고난도 “안간힘으로 버티면서”,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의자에서 삶의 어떤 숭고한 힘을 발견한다. 문학평론가
2024-01-17
두 손은 펼치고 있을 때가가장 편하고 자유롭지무언가를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면움켜쥔 손을 움켜쥐고 있는내 영혼까지 움켜쥐고 있어야 하지물론 나도 때로는 움켜쥐지누군가를 위험으로부터 구해야 할 때그리고, 너나 너희가 빼앗아 간 것들을 내놓으라 할 때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할 때두 주먹을 불끈 쥘 때가 있지하지만 그 주먹도다시 펼치고 나면 그만그 무엇도 거기 남기지 않지위의 시의 시인에게 투쟁은 궁극적으로 자유를 위해서이다. 자유는 펼치고 있는 손처럼 무언가를 움켜쥐지 않을 때 가질 수 있다. 하나 가난한 자에겐 투쟁해야 할 때, 즉 사랑을 지키기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쥘 때가 있”다. 그런데 이 투쟁 역시 자유를 위한 것, 그 ‘주먹’을 “다시 펼치”기 위한 것이지 무엇을 움켜쥐기 위한 투쟁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투쟁은 움켜쥔 주먹 안에 ‘영혼’을 가두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1-16
수원역에서 아이와 기차 타고보령 가는 날저기, 저것 좀 볼래?학교와 학원밖에 모르는 아이에게나는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보여 주었다학교 밖의 교실을,교실보다 더 광활한 교과서를!요즘 아이들은 아이들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 아이들은 놀면서 세계와 마주하고 세계를 알아나간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교과서’를 들고 학교와 학원을 전전해야 한다. 시인은 “아이와 기차 타고” 가는 길에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보여” 준다. 세계의 아름다움을 세계 그 자체를 통해 느낄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아이는 참다운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교실보더 더 광활한 교과서”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1-15
전쟁이 있기까지이반은 개울가에서 지냈네,주인을 모르는 버드나무가 자라난 곳.개울 위로 가지를 뻗은이유는 알지 못했지만,이것은 이반의 버드나무.군복을 입은 채,전쟁에서 죽은 이반은자신의 버드나무 아래로 돌아왔네.이반의 버드나무,이반의 버드나무,흰 쪽배처럼 개울가를 떠다니리.전쟁에서 사람들은 파리 목숨처럼 죽는다. 하나 그들은 각각 절절한 사연을 갖고 있는 개인이다. 위의 시의 이반이 그렇듯이. 개울가에 사는 이반은 버드나무를 사랑했다. 버드나무 역시 이반을 사랑해서 “개울 위로 가지를 뻗”는다. 그래서 이 버드나무는 ‘이반의 버드나무’였다. 안타깝게도 “전쟁에서 죽은 이반은” 이 버드나무 아래 묻히고, 슬픔을 못 이긴 버드나무는 이반이 살던 개울가를 ‘쪽배처럼’ 떠다닌다…. 문학평론가
2024-01-14
비 맞은 꽃이 훨씬 예쁘다면서노래 얹어 사진을 띄웠다꽃이 걸고 있는 빗방울물 좋은 새벽 비란 것을 알겠다칼 가는일육수산 여자흔들거리는 진주 귀고리 닮았다사양도 동백꽃 꺾어 물고갈매기 날아와쑥섬 꽃들이 젖어 흐르는바다가비에 젖어 핀다는 것을 알겠다마지막 연이 인상적인 시다. 비에 젖은 바다가 꽃처럼 피어 있다니! 이 연을 읽고 비오는 바다 풍경을 떠올렸다. 그런데 정말 비 맞은 한 송이 꽃같이 느껴졌다! 시의 힘이다. “물 좋은 새벽 비”라는 구절도 무릎을 치게 한 표현이다. “꽃이 걸고 있는 빗방울”이 횟집 “칼 가는 여자”가 달고 있는 ‘진주 귀고리’로 환유되는 것도 놀랍다. 그리고 이 표현들은 “꽃들이 젖어 흐르는” 섬, ‘나로도’에 대한 찬미로 모인다…. 문학평론가
2024-01-11
조상들의 숨소리 들렸다어디로 가고 있니하고 물었다내가 물속을바라보자조상들이 강물에 있었다내가 강물에 몸을 담글 때조상들이 내 몸을씻겨주었다나와 함께 조상들이거기 있었다모래들이 운다온몸으로, 온몸으로모래들이 숨을 쉰다모래들이 운다위의 시를 읽으면서, 비록 보이지 않으나 우리 조상들이 어디에서나 숨 쉬며 존재하며,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이 조상은 가족의 조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죽은 이들이겠다. “강물에 있”는 그들은 시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거나, 시인이 강물에 들어가면 사랑스럽게 그의 “몸을/씻겨”준다. 하나 그들은 슬픈 사람들이다. “온몸으로” 숨을 쉬며 울고 있는 이들인 것을 보면. 문학평론가
2024-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