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나도 당신도 없고 그러니 어떤 단어도 추억할 수 없는 골목에 모두 잠들어 아무도 깨우지 않게 생활이 돌아눕는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에 아무도 태어나지 않아 우는 것도 없는 그 가만 새벽에 어린 부부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을 것이다 고요는 잎보다 먼저 꽃을 흔든다우리는 살다가 과거도 미래도 없는 어떤 고요의 세계와 마주할 때가 있다. 순수한 현재만이 있는 세계. 생활 속에 있는 생활 너머의 세계. 추억도 없고 “아무도 태어나지 않아 우는 것도 없는” 저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이 그런 세계일 테다. 하나 그 현재의 고요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가만 새벽에”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어린 부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고요가 흔드는 꽃의 아름다움. 문학평론가
2024-01-22
시인들은 경기병처럼 돌격할 수도 있지만 소설가는꾸밈없고 서툴게 되는 방법을, 그 누구도본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법을익지 않은 재능에서 애써 빠져나와 배워야 한다.가장 사소한 것을 이루기 위해 소설가는온통 지겨움의 덩어리가 되어야 하고, 천박한사랑타령에 좌우되고, 의로운 자들 가운데에서는의롭고, 지저분한 자들 속에서는 지저분해야 하고,가능하다면 연약한 자신이 몸소인류의 모든 잘못을 무덤덤하게 견뎌 내야 한다.시인이 시로 쓴 소설가론. 그런데 소설에 대해 핵심을 찌른 감이 있다. 시가 핵심을 향해 “경기병처럼 돌격”한다고 할 때 시답게 소설론을 쓴 것. 이에 따르면 소설은 “가장 사소한 것을 이루기 위해” 자질구레할 수 있어야 한다. “지겨움의 덩어리”가 되고, “천박한 사랑타령”에 좌우되며, “지저분해”질 수 있어야 한다. 하나 이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인류 모든 잘못을” “무덤덤하게 견뎌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4-01-21
한참을 살다 뒤돌아보니내 생의 단 하루도 오늘이 없었다유체 이탈한 짐승처럼늘 하루를 앞질러 달려왔던 것오늘이 없으니당연히 어제도 있을 수 없지오늘이 되기도 전에 벌써내일이 사라지곤 하였으니나의 지난 삶은 텅 비었다멀리 날지 못한젖은 종이비행기처럼너무나도 축축한나의 과거우리도 위의 시에서처럼 오늘을 오늘대로 살고 있지 못하지는 않는지. 미래에 저당 잡히거나 과거로 젖어버린 오늘을 보내고 있지 아니한지. 과거로 축축한 삶은 “젖은 종이비행기처럼” 날아갈 수 없으며, “하루를 앞질러 달려”온 삶은 “오늘이 되기도 전에” “내일이 사라”져 버린다.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오늘, 오늘이 없는 오늘은 역설적이게도 어제나 내일을 사라지게 한다. 텅 빈 삶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1-18
의자는, 뿔을 가졌다고집스런 두 개의 뿔을 가졌다말뚝에 매어 있지 않은데도 말뚝에 매인 듯그 자리를 떠날 줄을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리듯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온종일 그 자리를 맴돈다무거운 엉덩이에 짓눌리면서도 일생동안무게의 하중荷重을 안간힘으로 버티면서도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는, 저 의자는-때로는 비의 가시에 전신을 적시면서도관절 마디마디 삐걱거림으로 목욕을 하면서도고집스런 두 개의 뿔을 가진, 저 의자는-위의 시에서 시인은 집 바깥에 놓여 비를 맞고 있는 의자로부터 인내와 의지를 포착하고 이를 ‘두 개의 뿔’로 이미지화 한다. 의자는 황소와 같은 ‘고집스런’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고집은 갖은 고난도 “안간힘으로 버티면서”,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의자에서 삶의 어떤 숭고한 힘을 발견한다. 문학평론가
2024-01-17
두 손은 펼치고 있을 때가가장 편하고 자유롭지무언가를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면움켜쥔 손을 움켜쥐고 있는내 영혼까지 움켜쥐고 있어야 하지물론 나도 때로는 움켜쥐지누군가를 위험으로부터 구해야 할 때그리고, 너나 너희가 빼앗아 간 것들을 내놓으라 할 때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할 때두 주먹을 불끈 쥘 때가 있지하지만 그 주먹도다시 펼치고 나면 그만그 무엇도 거기 남기지 않지위의 시의 시인에게 투쟁은 궁극적으로 자유를 위해서이다. 자유는 펼치고 있는 손처럼 무언가를 움켜쥐지 않을 때 가질 수 있다. 하나 가난한 자에겐 투쟁해야 할 때, 즉 사랑을 지키기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쥘 때가 있”다. 그런데 이 투쟁 역시 자유를 위한 것, 그 ‘주먹’을 “다시 펼치”기 위한 것이지 무엇을 움켜쥐기 위한 투쟁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투쟁은 움켜쥔 주먹 안에 ‘영혼’을 가두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1-16
수원역에서 아이와 기차 타고보령 가는 날저기, 저것 좀 볼래?학교와 학원밖에 모르는 아이에게나는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보여 주었다학교 밖의 교실을,교실보다 더 광활한 교과서를!요즘 아이들은 아이들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 아이들은 놀면서 세계와 마주하고 세계를 알아나간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교과서’를 들고 학교와 학원을 전전해야 한다. 시인은 “아이와 기차 타고” 가는 길에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보여” 준다. 세계의 아름다움을 세계 그 자체를 통해 느낄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아이는 참다운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교실보더 더 광활한 교과서”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1-15
전쟁이 있기까지이반은 개울가에서 지냈네,주인을 모르는 버드나무가 자라난 곳.개울 위로 가지를 뻗은이유는 알지 못했지만,이것은 이반의 버드나무.군복을 입은 채,전쟁에서 죽은 이반은자신의 버드나무 아래로 돌아왔네.이반의 버드나무,이반의 버드나무,흰 쪽배처럼 개울가를 떠다니리.전쟁에서 사람들은 파리 목숨처럼 죽는다. 하나 그들은 각각 절절한 사연을 갖고 있는 개인이다. 위의 시의 이반이 그렇듯이. 개울가에 사는 이반은 버드나무를 사랑했다. 버드나무 역시 이반을 사랑해서 “개울 위로 가지를 뻗”는다. 그래서 이 버드나무는 ‘이반의 버드나무’였다. 안타깝게도 “전쟁에서 죽은 이반은” 이 버드나무 아래 묻히고, 슬픔을 못 이긴 버드나무는 이반이 살던 개울가를 ‘쪽배처럼’ 떠다닌다…. 문학평론가
2024-01-14
비 맞은 꽃이 훨씬 예쁘다면서노래 얹어 사진을 띄웠다꽃이 걸고 있는 빗방울물 좋은 새벽 비란 것을 알겠다칼 가는일육수산 여자흔들거리는 진주 귀고리 닮았다사양도 동백꽃 꺾어 물고갈매기 날아와쑥섬 꽃들이 젖어 흐르는바다가비에 젖어 핀다는 것을 알겠다마지막 연이 인상적인 시다. 비에 젖은 바다가 꽃처럼 피어 있다니! 이 연을 읽고 비오는 바다 풍경을 떠올렸다. 그런데 정말 비 맞은 한 송이 꽃같이 느껴졌다! 시의 힘이다. “물 좋은 새벽 비”라는 구절도 무릎을 치게 한 표현이다. “꽃이 걸고 있는 빗방울”이 횟집 “칼 가는 여자”가 달고 있는 ‘진주 귀고리’로 환유되는 것도 놀랍다. 그리고 이 표현들은 “꽃들이 젖어 흐르는” 섬, ‘나로도’에 대한 찬미로 모인다…. 문학평론가
2024-01-11
조상들의 숨소리 들렸다어디로 가고 있니하고 물었다내가 물속을바라보자조상들이 강물에 있었다내가 강물에 몸을 담글 때조상들이 내 몸을씻겨주었다나와 함께 조상들이거기 있었다모래들이 운다온몸으로, 온몸으로모래들이 숨을 쉰다모래들이 운다위의 시를 읽으면서, 비록 보이지 않으나 우리 조상들이 어디에서나 숨 쉬며 존재하며,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이 조상은 가족의 조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죽은 이들이겠다. “강물에 있”는 그들은 시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거나, 시인이 강물에 들어가면 사랑스럽게 그의 “몸을/씻겨”준다. 하나 그들은 슬픈 사람들이다. “온몸으로” 숨을 쉬며 울고 있는 이들인 것을 보면. 문학평론가
2024-01-10
폭설이 쏟아지는 겨울 산에서 우리 알게 되었네길을 지우고 나무를 지우고 보이는 세상도 버리며어떻게 하늘의 사랑과 땅의 노여움이뿌옇게 서로를 끌어안으며 하나로 만나게 되는가를길 아닌 곳에서도 우리는 새들처럼 자유롭고옅은 계곡물 수리 하나만 열어놓은 겨울 산에서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겨울 산에서 우리 보게 되겠네그곳 눈 내린 전나무 숲속에서 만나는 짐승 발자국만으로도어떻게 우리의 절망이 따뜻이 위로받게 되는가를폭설이 내려 길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 버려진 듯 시야가 뿌연 겨울 산에서. 시인은 “하늘의 사랑과 땅의 노여움이” 서로 껴안는 모습을 본다. 이 모습은 인간계에서는 볼 수 없는 성스러움을 띤다. 하여 그 산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 하나 분노와 사랑의 포옹을 우리 앞에 숭고하게 드려내 준다. 또한 “숲속에서 만나는 짐승 발자국”은, 저 산과 차단된 “우리의 절망”을 “따뜻이 위로”해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01-09
그녀는 웃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억지로 당겨진 입꼬리, 몰래꼭두각시 줄을 끊어낸 그녀 입속에가시가 돋쳤다 빨리콜을 당기라는 팀장의 고함 소리몸속 불이 켜졌다하루 수백통의 전화를 받으며문신처럼 새긴 억지웃음과 높은 톤의 목소리는퇴근 후에도 검질기게 이어졌다(중략)불이 꺼졌다 켜질 때마다옆자리 직원들이 하나둘 사라졌다세상을 한번 뒤집어야 하는데허구한 날 자기 속만 뒤집어진다는 동료사무실 빈자리에서 도깨비불이날아다녔다시에 따르면, 억지로 웃어야 하는 감정노동자인 콜센터 직원은, “꼭두각시 줄” 타듯 일을 한다. 그는 “하루 수백통의 전화를 받”기 위해, 적당한 통화 후 전화를 끊을 수 있는 곡예를 부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몸속에 ‘도깨비 불’을 품고 일을 한다. 이 노동은 끔찍하게도, 퇴근 후의 그의 삶에 “문신처럼 새”겨진다. “옆자리 직원들이” 일을 그만두거나 세상을 뒤집고 싶은 욕망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학평론가
2024-01-08
오늘이 오늘 하나로는 부족해서달력 속의 6월 30일에 동그라미를 그려요그러면 오늘이 두 개가 됩니다하나의 오늘에는 울화(鬱火)가 활짝 피었군요나는 당신의 빨간 울화 옆에 쪼그리고 앉아접시꽃이 요렇게 예쁜 줄 몰랐어이런 말을 하며남은 오늘도 또 이렇게 사용합니다세 끼를 다 먹고도 허기진 사람처럼우리는 오늘을 다 사용했네요접시꽃이 조렇게 예쁘게 피었는데‘하루’는 단수지만 하루 안의 생활은 단수여서는 안 된다. 시인이 달력 속 날짜에 동그라미를 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나의 오늘’을 복수로 만드는 작업. 대개 우리의 생활은 팍팍해서 우울하게 하루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위의 시에서 ‘당신’이 울화로 피어나 있듯이. 애써 시인은 접시꽃을 바라보고 그 예쁨을 감탄하며 “남은 오늘”을 사용한다. ‘허기진 사람’처럼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더 없나 찾아보면서. 문학평론가
2024-01-07
지나가는 말투로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더니진짜로 나를불러들여 약속을 지켰다흰 비닐 상보 깔고일회용 접시에다 마른안주와돼지고기 수육과 새우젓과 코다리찜과 홍어와게맛살 낀 산적과 새 김치 도라지무침을 내오고막 덮힌 육개장에 공깃밥 말아 먹이며반주 한잔도 곁들여 주었다약소하게나마 밥값은 내가 냈다필자도 지인과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빈 약속’을 자주 한다. 그런데 그를 만나지 못하다가 영정 사진으로 만나는 경우가 있다. 위의 시는 이 상황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공감이 컸다. 위의 상황에서는 죽은 이가 밥 같이 먹자고 약속했나보다. 그가 약속을 지켰다 하니. 시인은 그와의 마지막 식사에 나온 음식들을 세세하게 적는다. 죽은 이가 마지막으로 마련한 음식이니 하나도 빠뜨릴 수 없다는 듯이. 문학평론가
2024-01-04
빛의 총량이 운명의 총량이라고 말할 수 없다보라가 고혹적인 것은기다릴 줄 알기 때문일 거다꽃집 주인은 보라색 꽃이 강하다고 했다천천히 시든다고 했다멀어져가던 너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쓰나미에서 살아남은 피아노가 그렇듯모든 것을 껴안고 있는 눈동자 (중략)천천히 시드는 색감의 운명을 사랑하고 싶다여름꽃을 한 아름 안겨주고 너는난생처음 보는 여행자처럼 오른쪽 등의지도 무늬까지 지우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더 진하고 더 어둡고 더 달콤한 여름꽃의전조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거나 끝난다위의 시에 따르면 강함은 ‘천천히’ 시들 수 있는 능력이며 그 능력은 “기다릴 줄” 아는 데서 온다. 그리고 그 능력에서 보라색의 ‘고혹’이 발산된다. 시인은 “지도 무늬까지 지우며” “멀어져가던 너의 뒷모습”에서 한 아름 보라색 ‘여름꽃’을 떠올린다. “모든 것을 껴안고 있는” 그 모습이 “천천히 시드는 색감의 운명”을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여름꽃의 보라색은 “이야기가 시작되거나 끝”나는 전조를 드러내기에. 문학평론가
2024-01-03
저 언덕에 나무 한 그루글썽거리고 서 있습니다.나는 오래도록 그 모습을 못 잊어한 번씩 가서 봅니다.젖배 곯은 아이의 궁핍이나무의 모습에 스몄습니다.옷자락 차마 잡지 못하고 보낸 쓸쓸함도나무의 그림자에 스몄습니다.우주는 천천히 돌지만못한 이야기를 다 들려줍니다.우주는 시인에게 “천천히 돌”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다. 온갖 삶들이 우주에는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어떤 사물을 통해 침묵 속에서 발설된다. “젖배 곯은 아이의 궁핍이” 스며든 저 나무는 “글썽거리”는 얼굴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의 정서-‘쓸쓸함’-는 사물의 그림자에 스며든다. 이렇듯 우주의 뭇 사물들과 그 그림자에는 어떤 삶의 이야기와 그 삶이 유발하는 감정들이 발설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1-02
야영지 흔들리는 모닥불이꿈의 형상들을 비추네뒤엉킨 나뭇가지들 속몽환이 천천히 올라가네이제야 한심해하는 회한은딸기처럼 온통 흠집투성이추억과 비밀에서남은 것은 오직 숯덩이“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랭보가 말했듯이, 우리는 모두 상처를 안고 산다. 이 상처를 잊고 살다가 상처가 드러날 때가 있으니,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을 때다. “뒤엉킨 나뭇가지들”을 태우며 흔들리는 모닥불 위로 “추억과 비밀” 역시 타오른다. 그러자 “몽환이 천천히 올라”가면서, “딸기처럼 온통 흠집투성이” 같은 회한이 마음을 조이기 시작하고, 결국 마음엔 “오직 숯덩이”만 상처로서 남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1-01
높이 떠 있는흰 가로등 안에날벌레들이 까맣게 쌓여 있고다시 침잠하리라 생각했던 겨울은 기록적인 폭설 같은 것은 없었다오래된 나무 아래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의자가 하나씩생겨나 누군가를 기다려 보려 했지만기다림보다는 기다림을 버리는 것이 더 쉬었다이따금 상처 없는 바람이 왔고아무 근심 걱정 없이 쏟아지던 햇살이 이쪽과 저쪽에 걸쳐진횡단보도를 건너 돌아오지 않는 숲으로 갔다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겨울은 “하염없이” 쓸쓸한 계절. 사라진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림보다는 기다림을 버리는 것이 더 쉬”운 겨울의 긴 적막. 폭설도 내리지 않은 겨울엔 시인의 마음은 “날벌레들이 까맣게 쌓여 있”는 가로등처럼 답답하다. 이 쓸쓸한 내면 풍경 속으로 “상처 없는 바람”이 불거나 햇살 역시 “근심 없이” 쏟아지곤 했지만, 이 햇살마저 “횡단보도를 건너” 숲으로 가 버리는 계절이 겨울이다. 문학평론가
2023-12-28
날 버린 여자의 아버지가 자꾸 생각난다아들을 광부로 만들지 않는 게 꿈이라던돈 벌면 고향 땅 풍기에다 밭을 사겠다던땅 많은 남자를 사위로 맞고그는 모처럼 갱구 같은 입을 벌려 크게 웃었다그녀가 시집가던 날에도나는 휴일 수당을 위해지하 750m 갱도에서 펌프를 돌렸다눈물이야 있었겠지만힘 좋은 펌프가웬만한 지하수 정도는 바닥이 드러나도록 퍼냈다캄캄한 막장 속의 둥불이 나를 용서했다.지하에서 일을 하는 업을 가졌기에, 사귀던 여자를 잃어야 했던 어떤 광부의 슬픈 이야기. 하나 화자는 그 여자를 미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여자를 “땅 많은 남자”와 결혼시킨 여자의 아버지 역시 광부여서, 그는 광부라는 업이 얼마나 힘들고 돈벌이가 안 되는지 잘 알고 있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그녀의 결혼식 날에도 “휴일 수당을 위해” 지하 깊숙이 내려가 일해야 했던 것이 광부의 현실이었기에. 문학평론가
2023-12-27
오빠오빠오빠그렇게날부르며졸졸따라오던시냇물조약돌위를반짝이며뱀의혀를날름거리며귀엽게조금은두텁고도투명하게굽이치던너어느덧나는모래가되고물소리는신경질을내고밤은다가와흥얼거리고나의앞산은노래를듣다가슬픔에취해이만큼다가와잠의냄새를풍기네모닥불의독백노래는그때부터밤샘일부러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시. 사실 시냇물의 흐름은 띄어쓰기가 없지 않는가. 위의 시에서 ‘시냇물’은 양가적이다. 귀엽고 투명하면서도, 화자에게 유혹적이기 때문인지 뱀의 혀를 날름거리는 것으로도 표현되는 것이다. 화자는 유혹에 넘어간 듯, 시냇물 옆의 모래가 된다. 하나 졸졸거리던 시냇물 소리는 신경질로 변모되고 마니…. 사랑은 퇴색해버린 것일까. 슬픈 독백 같은 노래가 밤새 계속되는 것을 보면. 문학평론가
2023-12-26
광주천변을 걷다가순간, 밟아버릴지 몰라깜빡 놀라 뒷설음쳤다모가지째 떨어진 자미꽃그 붉은 꽃 가장자리쯤에굼벵이가 뒹굴고 있었다하마터면 큰 하늘 하나를밟고도 일이 없었다는 듯태연, 멀리 걸어갈 뻔했다아 하늘 속에 또 하늘들하늘 바깥에 또 하늘들!잘못하여 밟을 뻔하였다하얀 두루미 날기 시작한광주천 극락강변이었다‘광주천’에 ‘극락강변’이라는 곳이 있나보다. 온갖 생명들이 잘 보존되어 살고 있는 곳이기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시인은 소위 미물들 역시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떨어진 “꽃 가장자리쯤에” “뒹굴고 있”는 ‘굼벵이’도 하나의 ‘큰 하늘’이다. 이 하늘 하나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늘 속에 또 하늘들”이 있으며 “하늘 바깥에 또 하늘들”이 있다는 시인의 ‘다중우주관’이 이런 윤리를 가능케 했으리라. 문학평론가
2023-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