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아 있구나 늦지 않았어 너덜거리는 자루 가득 장작을 메고 오가는 밤의 노역은 불을 지키는 시간 (….) 나는 불을 지키는 자, (….) 나는 이름 없이 늙어 가는 가난한 노파 불을 살피느라 언 몸을 녹일 수 없다 꺼져 가는 불씨를 살려내고 문 밖으로 나서면 얼굴을 찢는 바람뿐 어떤 날은 별도 뜨지 않아 캄캄한 숲을 비틀거리며 걷는다 뜨겁고 차가운 것이 이생의 일인지도 잘도 자는구나 장작이 타는 소리 꿈속에서도 들리는지 재가 되어 가는 소리다 담요를 걷어차고 잠든 걸 보니 오늘도 나의 불길은 뜨거웠구나‘테를지’는 몽골의 국립공원이다. 이곳의 어떤 노파는 “바람에 넘어진”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고 관리하는 “불을 지키는 자”다. 그녀의 노역을 통해 숙소의 방은 따듯해져, 방안 사람들은 “담요를 걷어차고 잠”들 수 있다. 하나 정작 자신은 “불을 살피느라 언 몸을 녹”이지 못한다. 저 노파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만큼 중요한 일을 한다. 불을 꺼트리지 않고 “불씨를 살려내”는 일을 하니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3-12-10
눈이 퇴화한 개미들은 더듬이로 산다보지 못해도 큰 불편 없다쉬지 않고 움직이는 더듬이쉬지 않고 어디론가 가는 개미들개미들을 생각하면 몸이 가렵다더듬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눈을 빼버릴 놈!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눈은 멀어진다오로지 돈에 눈먼 세상에서욕심으로만 빛나는 눈을 감아본다홀로 눈 떠 길을 더듬는개미 한 마리 따라간다살날이 가깝고도 멀다살아가라, 단지 뜨거운 것은 그뿐이다 (부분)“돈에 눈먼 세상에서” 밝혀 있는 눈은 “욕심으로만 빛”날 뿐이다. 그 세상에서는 돈밖에 보이지 않을 터, 하여 돈의 길과는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시인이 “눈이 퇴화”해도 더듬이를 통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개미들을 생각하고는, “길을 더듬는/개미 한 마리 따라”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눈먼 세상에서 그 개미는 “홀로 눈 떠”있는 이로, 오직 “살아가라”는 명을 뜨겁게 실행하고 있기에. 문학평론가
2023-12-07
첫 일터 메리야스 공장 재단기에 한 가락 해 먹고재활용 분리수거 컨베이어에 한 가락 해 먹고부품 공장 검사반에 왔다는하얀 장갑 규석 씨한 가락 없어도메리야스 재봉 일 할 수 있지만한 가락 없어도 재활용 컨베이어 분리수거 영락없지만손끝에 눈금자가 새겨지도록 손끝에 저울추가 박히도록뼈가 곧아버린 시간을살이 해어지는 시간을마음이 굳어지는 시간을흘러서 굴러서 떠밀려서 왔다는하얀 장갑 규석 씨 손가락은 세 가락 (부분)‘공장 재단기와’ ‘분리수거 컨베이어’에 손가락이 잘려 손가락이 세 가락 남은 어떤 노동자의 삶. “흘러서 굴러서 떠밀려서” 여기까지 왔다는 그는 “손끝에 저울추가 박히도록/뼈가 곧아버”리고 “살이 해어지는” 노동의 시간을 살아야 했다. 그 시간 동안 마음도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몸과 마음에 노동 시간이 박혀버린 삶, 한국사회가 그가 해온 노동처럼 자르고 분리수거하고자 하는 노동자의 삶이 여기 있다. 문학평론가
2023-12-06
원룸에 사는 친구가 벼를 키운다며 사진을 보내왔습니다.작년에 자라지 않던 벼가 올해는 쑥쑥 자라낱알이 열렸다고 초록이 가득한 벼를 찍어 보냈습니다.(….)말갈기를 부여잡고 사막을 달리는 사람을챙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쭉정이 뽑는 사람을자라지 않은 벼와 자란 벼를 비교하며 지나간 함성을생각할 것입니다.솜털처럼 가벼운 벼들의 흔들림과흔들리지 않으려는 친구의 흔들림을원룸 작은 창문을 뚫고구름의 한쪽 귀퉁이를 자르고달아나는 상상을 해봅니다.볕이 들지 않는 원룸에서한 뼘의 벼들과 함께친구의 슬픔이 느리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부분)“사막을 달리는” 삶을 꿈꾸었을 ‘친구’는 현재 “볕이 들지 않는 원룸에서” 그가 키우는 “한 뼘의 벼들”처럼 흔들리며 살고 있다. 그런데 “작년에 자라지 않던 벼가 올해는 쑥쑥” 자라났다는 것! 친구가 그 벼 사진을 시인에게 보낸 것은 자라는 벼들로부터 어떤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그렇게 희망을 품음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려는 것, 시인은 이로부터 “느리게 올라오”는 슬픔을 읽고 있지만. 문학평론가
2023-12-05
아침에 일어나 사립 쪽으로 걷는데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어제저녁에 나는 닭가슴살 한 팩을 사다가구워서 맥주 안주로 먹었는데너에게 몇 점 먹였으면그 어린 나이에 죽이 않았을 텐데밤하늘에 슈퍼문이 뜬다고사방에서 환호성이 들리던데그 배고픈 저녁에밤하늘의 슈퍼문이네 눈을 감겨준 거니우리는 보통 슬픈 일과 마주치고는 그 일을 그냥 지나쳐버린다. 하지만 시인은 그 슬픔을 잊지 않고 시로 간직한다. 위의 시가 보여주듯이. “맥주 안주로 먹”은 ‘닭가슴살’을 조금만 주어도 살 수 있었을 새끼 고양이가 죽었다. 시인은 자신이 조그만 배려심을 가졌다면 저 고양이는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자책한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슈퍼문’과 그 달 아래 죽은 고양이의 모습이 대조되면서 슬픔이 새겨지는 시. 문학평론가
2023-12-04
초등학고 일학년 첫 방학 숙제 중 하나는 태극기 그리기였다자꾸만 일그러지는 원이 암만해도 속이 차질 않아끙끙대고 있는 아들놈이 보기 딱했던지공장 일을 마치고 오신 아버지 대뜸밥그릇을 들고 오시더니밥그릇 둘레 따라 원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아마도 그날 이후부터였나 보다뜨건 공깃밥과 국기를 떼어놓고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은,노동자들 분신 뉴스가 지나갈 때마다멀쩡한 밥그릇으로도 자꾸 일그러져만 가는방학 숙제를 여태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분)노동자들의 노동이 없다면 국가는 유지될 수 없다. ‘공깃밥’이 국가 기반인 국민의 삶을 지탱하기 때문에. 그래서 “공깃밥과 국기를 떼어놓고/생각할 수 없”다. 시인에게 이를 가르쳐준 이는 “공장 일을” 다니는 그의 아버지다. 하나 “노동자들 분신 뉴스가” 끊이지 않는 것이 한국의 상황이다. 밥그릇을 도화지에 대고 국기를 그리는 초등학교 일학년 “방학 숙제를 여태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3-12-03
마음속으로 점점 뿌리가 깊이 내리면서뿌리 깊은 나무세월의 바람에 한 치도 흔들림 없이자신을 비워갔다(중략)울림으로 가득 찬,당신의 저 뿌리 깊은 빈방에물수제비뜨듯 돌멩이를 던지자파문처럼 번져오는꽃 좋고 열매 많던 시절들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깊은 물처럼겹겹의 나이테들을 하나로 아우르며메마른 나의 꿈속에까지 고여 오는샘이 깊은 당신의 빈방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 그것은 사랑하는 당신에 대한 기억 아닐까. 그 기억의 나무는 “세월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동시에, 특이하게도 자신을 비워간다. 하여 그 비워지는 나무-당신-는 “샘이 깊은 물처럼” “울림으로 가득 찬” ‘빈방’이 되고, 이 “빈방에/물수제비뜨듯 돌멩이를 던”지면 “꽃 좇고 열매 많던 시절들”이 “메마른 나의 꿈속에까지 고여 오”는 것, 마음속 뿌리내린 사랑은 이렇게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2023-11-30
저녁에 우리는 들판을 지나갔네,다 익은 곡식 이삭을 따며 갔네,우리는 싸웠네, 나와 내 아내는,오, 우리는 싸웠다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그리고 다시 눈물 흘리며 키스했다네.사랑하는 사람들이 싸우고 나서다시 눈물 흘리며 키스할 때,사랑을 더해 주는 사랑싸움은축복할 만한 것!왜냐하면 오래전에 잃은우리 아이가 누워 있는 곳에 왔을 때,거기 작은 무덤 위에서,오, 거기 작은 무덤 위에서,우리는 다시 눈물 흘리며 키스했기에.여느 부부처럼 위의 시에 등장하는 부부도 이유 모르는 싸움을 하고는 눈물로 화해하고 키스한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미소를 짓게 되지만, 시의 후반부를 읽으면 가슴 아픈 슬픔을 느끼게 된다. 부부가 “다시 눈물 흘리며 키스”하게 된 것은 둘의 아이가 묻혀 있는 ‘작은 무덤’ 앞에 왔기 때문임을 알게 되니까. 부부의 사랑은 아이의 죽음을 겪으며 더 깊고 강해졌을 터, 이들에게 사랑싸움은 사랑을 더해줄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3-11-29
화창한 날에 꽃눈이 내린다사월 초이튿날,한 시절 아름다운 꽃이 지고 나면그뿐인 것을한바탕 비라도 내리는 날에청춘이 지고내 삶이 지고미칠 정도로 날이 좋았다가눈이 따가울 정도로 날이 좋았다가이렇게 좋은 날, 눈물 나도록 내 사랑하는 님이 먼 길을 떠났다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오는 날,하늘에서 벚꽃눈이 펑펑 내렸다꽃눈이 펑펑 울고 있었다떨어지는 눈처럼 지는 벚꽃은 “미칠 정도로” 화창한 봄빛과 대비되면서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아름다움은 한 시절이 지나갔다는 슬픔을 동반하니까. 게다가 “이렇게 좋은 날”에 “내 사랑하는 님이 먼 길을 떠났”다고. 하여 벚꽃은 꽃눈이 되어 눈물 흘리듯 ‘펑펑’ 떨어진다. 우리는 이 감당하기 슬픔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살아간다. 눈 같은 벚꽃의 아름다움은 그 운명에 대한 신의 작은 보상일 테다. 문학평론가
2023-11-28
처서 지났으니시간이 훨훨 날아가겠지아침저녁으로 율량동공원에 뒹구는찬바람도 발 끝에 채이겠지어떻게 살아 낼까 베일 듯 버틴 시간도녹슨 칼끝 같아여전히 월요일의 가중치는감기기운처럼 떨어지지 않아도또 한 주일은 지나가겠지두려움은 발아래 슬쩍 눌러두고서눈인사를 해야지안녕 ‘월요일’용기 내 마주할 테니순하게 지나가거라‘처서’ 지나 가을이 오고, 시인은 이제 더위를 벗은 시간이 “훨훨 날아가”리라고 기대한다. 사실 ‘월요병’에 시달리며 밥벌이에 지친 이들에게 경쾌한 시간은 오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은 애써 그러한 기대를 품고 “감기기운처럼 떨어지지 않”는 월요일을 맞이한다. ‘한 주일’이 바람처럼 ‘지나가’리라 기대하면서, 그렇게 시인은 월요일을 “용기 내 마주”하는 것이다. 주말만 오기를 기다리는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 문학평론가
2023-11-27
누우면 멈추는 시간직립을 고집하는 시간이 있지하룻저녁에 바람이 산을 옮기고좌표를 잃어버린 낙타들은고개를 숙이며 걷는다안구에 바람이 들어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이곳에서 유일하게살아남을 것은 거짓말뿐‘당신이 있어 사막이 아름답다’는그 거짓말이 수많은 혀가 되어유성처럼 떨어지는적막한 직립의 시간사막에서 “고개를 숙이며 걷는” “좌표를 잃어버린 낙타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 아닌가.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사방은 모래뿐이요, “안구에 바람이 들어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우리들. 하나 이곳의 시간은 “누우면 멈추”기에, 직립하여 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 이때 유성이 하늘을 가르며 사막을 빛낸다. 그 유성은 ‘당신이 있어 사막이 아름답다’는 거짓말, 이 거짓말이 그래도 사막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11-26
아름다운 동물들은 대체로 쓸개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그 진술의 과학적 진위는 증명된 바 없으나미학적 가치는 기꺼이 동의하는 바불필요한 무언가 주렁주렁 달고 있다는 건미(美)보다는 추(醜)의 표시일 수 있겠거니떼어내고 버려 가벼워져야 비로소 아름다운 것없애고 비워내 자유로워야 비로소 아름다운 것시가 그렇고삶 또한 그렇다상상력은 더하는 힘이 아니라솎아내는 힘에서 제대로 꽃 피고발목과 마음에 두른 굴레 툴툴 털어낼 수 있을 때빛 향한 자유로운 영혼의 시간 향유할 수 있는 것“주렁주렁 달고 있는” 장식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그런 장식은 부담스러울 뿐이다. 시인은 아름다움이란 장식과 반대로 “떼어내고 버려”야 확보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미학적 가치’관에 따르면, 상상력도 통념과는 달리 “솎아내는 힘에서 제대로 꽃” 핀다. 상상력의 자유로움은 “발목과 마음에 두른 굴레 툴툴 털어낼” 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유로운 영혼이 시와 삶을 아름답게 한다. 문학평론가
2023-11-23
가끔은 풍뎅이가 날아오는 것이다 날아오는 풍뎅이는 향기를 물고 오는 것이다 저녁의 문 뒤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은 꿈결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축축한 기억에 젖어 그늘이 된 여자는 우두커니 물드는 것이다 비 그치고 이미 물든 저녁을 그는 왜 날아왔는지 보랏빛으로 물든 저녁에 어떻게 향기를 입히는지 가끔은 풍뎅이가 되어보는 것이다 풋잠 속을 유영(遊泳)하듯 라일락은 흩날리고 여자를 물고 풍뎅이가 날아가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절뚝거리는 것이다이 시 속의 ‘여자’는 삶에 지쳐 있다. 우리가 그렇듯이. 그녀는 “축축한 기억에 젖어 그늘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삶에도 ‘가끔은’ “향기를 물고” “풍뎅이가 날아오”기도 한다. 그 향기에 “우두커니 물드는” 여자. 풍뎅이가 그녀를 물고 날아가고, 그녀는 꿈꾸듯 “풋잠 속을 유영”하며 “풍뎅이가 되어”본다. 이 비행이 쾌활한 것은 아니다. 시인이 이 비행을 삶의 절뚝거림으로 표현하듯이, 슬픈 ‘유영’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11-22
비 내리는 밤길 걷다가불 켜진 버스 정류장에서내 뒤를 따라오는작은 아이를 보았지잠시, 멈추어 서서가로등 불빛에 난사되는신기루 같은 아이에게말, 걸어 보았네그는 아무 말 않고가다 서기를 반복하며홀로 걷는 내게 보폭을 맞추며중년까지 따라올 기세네시인은 중년에 다다른 현재까지, 자신이 잊고 있었던 존재가 자신을 그림자처럼 언제나 쫓아오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그 존재는 ‘작은 아이’로, 아마 어린 시절의 시인 자신일 테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망각 속에서도 존재해 왔으며, ‘신기루’ 같은 그 어린 아이는 “내게 보폭을 맞추며” 따라와 주었다는 것, 지금 삶을 살아가는데 지쳐 있다면 그 아이를 찾아 “말, 걸어 보”라고 시인은 우리에게 권한다. 문학평론가
2023-11-21
여기도 뺏기면 어디로 가나막막하여 하늘을 본다공항을 나는, 하늘을 뺏긴 새들1분마다 뜨고 내리는 비행기 엔진에순식간에 한 생애가 빨려든다공중분해 되어버린 새의 조각난 몸흔적 없다지상에도 지하에도어디에로 편입되지 못한 무소속의 엉거주춤서지도 앉지도 못한 회색 중간지대에짧은 햇살이 지난다기죽어서 욕심내어보는 한 줌 햇살언젠가는 온전히 품으리라차곡차곡 접어 넣는 눅눅한 희망반지하 방으로 밀려난 사람들. 시인은 모두 사연이 있을 그들을 “비행기 엔진에/순식간에 한 생애가 빨려”들어간 새들로 비유한다. 비행기 엔진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힘과 그 냉혹한 메커니즘을 상징한다. 새처럼 순진한 이들은 이 메커니즘에 빨려 들어가 산산조각 나는 것, 하지만 시인은 이들이 지하방에 내리는 ‘짧은 햇살’을 “언젠가는 온전히 품으리라”는 ‘눅눅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3-11-20
꽃의 부드러운 몸에는시간의 어둠과 빛이 새겨져 있다목을 길게 빼고그리운 쪽을 바라본다(중략)꽃은 시간의 손바닥을 펼치려 한다손에 짙게 밴 피비린내일본인인 우리의 죄가붉은 물시계 속으로 언제까지고 떨어져 내린다풀리지 않는 시간은얼음처럼 단단한 채이지만일본의 동북지방 재난 희생자에게 바친 기도는하늘 높이 퍼진다빛 쪽으로 향하는 것빛에 둘러싸여야 하는 것그 고통의 언어는새로 돋아난 영혼의 날개를 움직인다(한성례 옮김)1954년 생 일본 시인 사가와 아키는, 위의 시에서 일본 역사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는 ‘꽃’을 “시간의 어둠과 빛이 새겨져 있”는 무엇으로 상징화한다. 일본의 역사적 시간이 새겨져 있는 그 꽃 속 시간을 펼치면, “언제까지고 떨어져 내”리는 붉은 시간의 죄스러운 ‘피비린내’가 난다. 일본 외부 민족에 대한 폭력뿐만 ‘동북지방 지낸 희생자’에 대해서도 스며들어 있는 피비린내. 문학평론가
2023-11-19
어쩌다 풍랑이란 말 곁에 놀다풍랑이 풍란으로 그윽해질 때 있어내 마음이 그렇다네 눈빛이 그렇다풍랑의 성깔머리가풍란 꽃처럼 퐁퐁 터지며향유고래의 눈빛으로그렁해질 때가 있다내 번민이 그렇다네 눈총이 그러하다말이란 참 신기할 때가 있다. ‘풍랑’과 ‘풍란’은 성격이 다른 대상을 지칭하지만, 발음이 비슷해서 유종인 시인처럼 서로 유추해보게 되는 것, 그러자 시의 세계가 펼쳐진다. 풍랑은 “풍란으로 그윽”해지고, 풍랑 성깔머리를 닮은 풍란 꽃은 “향유고래의 눈빛으로/그렁해”진다. 나아가 풍란과 풍랑의 관계는 너와 나의 관계로 유추된다. 네 눈빛으로 내 마음은 그윽해지고, 네 그렁해지는 눈총은 내 번민과 닮았다. 문학평론가
2023-11-16
믿음이 부실공사다꿈은 냉동실에 처박힌 빵노동자 없는 노동배 아픈 욕망 배고픈 욕망절망스럽게 소비되는 절망끼니 같은 앰뷸런스 끼고일상에 중독된 죽음죽음에 중독된 일상무덤으로 출근하고관계에서 야근한다인력시장에 하루하루 나가 일을 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들.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본모습은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노동자 없는 노동” 체제, 사람보다 노동이 중요한 사회. 미래 없는 하루를 위해 인력시장에 나오는 이들에게 ‘꿈’은 냉동고 속의 언 빵과 같다. 이들의 일상은 죽음의 기운에 중독되어 딱딱하게 굳어 있다. 더욱 무서운 일은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것, 일터가 무덤이 된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11-15
웃으며 달려오는 아이를 향해엄마가 두 팔을 활짝 편다엄마 팔이 쭉쭉 늘어난다엄마 품은 둥글어지고 움푹해진다공중으로 뛰어오른 아이가품 안으로 막 뛰어드는 찰나바람을 껴안은 플라타너스는푸르게 부풀어 올라 한껏 휘어진다(중략)엄마 품에 다 안겼는데도아이는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다엄마란 존재는 신비롭다. 물론 평범한 이들이 엄마가 된다. 그녀들은 평범한 삶을 살지만 엄마로서 살 때는 존재의 신비를 뿜어낸다. 엄마가 아이를 안기 위해 “두 팔을 활짝” 펴자 그 “팔이 쭉쭉 늘어”나는 것처럼. 엄마는 세계와 조응하는 존재다.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플라타너스도 바람을 껴안으며 “푸르게 부풀어” 오르듯이. 하여 엄마 품속에서 아이는 계속 뛰어다닐 수 있다. 바람이 멈추지 않듯이. 문학평론가
2023-11-14
꽃 무더기 일제히 한 방향으로 예뻤다낱장의 꽃잎들이 가벼워 나도 사뿐 얹혀햇빛과 함께 흔들렸다돌아오는 길에 보고 말았다꽃들의 뒷모습을수만 개의 받침이 밑에서 만개하고 있었다한 아름 품었던 송이를 터뜨려 가슴 밖에 내놓고그 꽃잎 하나 질 때마다 비와 바람을 붙들고텅 빈 채 울고 있었다당신이 내 발을 붙들고울고 있었다꽃들에게도 뒷모습이 있었구나! 우리는 드러나 있는 꽃의 아름다움에만 심취하지 않았던가. 꽃들도 “꽃잎 하나 질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는 것이다! 한편 ‘받침’은 꽃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는 “비와 바람을 붙들”지만, 결국 꽃을 잃고 “텅 빈 채 울고 있”다. 시인이 꽃의 뒷모습을 투시할 수 있었던 것은 지는 꽃잎처럼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내 발을 붙들고” 당신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문학평론가
2023-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