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인가의 불빛처럼 반짝이는 무엇이 되고 싶었다어둠이 밤새 일렁일 때마다 불 비늘이 되어외로운 이의 창가를 밝히고 싶었다심야 버스의 낯선 실내등이 파랗게 질려 간다어둠을 배경 삼아 더 파랗게 질려 가는 찌든 얼굴들이마가 창문에 차갑게 닿는다출렁거리며 어둠이 다가왔다가 물러선다어둠을 뚫고 먼 인가의 불빛이 다가오다 망설인다이 버스가 닿는 곳이 내일이다시인은 젊었을 때, “불빛처럼 반짝이는 무엇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어둠 속에 외로이 있는 다른 이를 위해 불빛이 되고자 했던 것. 하나 현재 그는 파랗게 질린 얼굴들로 어둑한 심야 버스를 타고 밤을 지나가고 있다. “인가의 불빛”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다 망설”이고 있는 밤, 피로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댄다. 그렇지만 심야 버스는 어딘가에 도착할 것이요, 내일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3-11
밤마다 꿈속에지구가 들어왔다남루한 옷에 눈물이 젖고달은달달한 딸어두운 꿈속에서그녀가 울고 있다외계에서 보면푸르른 별인데내 꿈속에선시름시름 앓고 있는 짐승지구는 저기 떨어진 돌조각으로 취급할 수 없는, 모든 존재자들이 연결된 유기적인 존재이며, 그래서 하나의 생명체라고도 보는 시각이 있다. 위 시의 시인은 특히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생명체인가? “시름시름 앓고 있는 짐승”이다. “남루한 옷에 눈물이 젖”은 사람이다. 이 시적 사유에서 달은 딸 같은 존재자다. “어두운 꿈속에서” “울고 있”는 딸. 이 시대엔 우리가 살고 있고 꿈꾸는 세계는 슬픔에 젖어 있다. 문학평론가
2024-03-10
나는 죽었지만 그대는 여전히 살아 있다.하소연하며 울부짖으며바람은 숲과 오두막집을 뒤흔든다.아주 끝없이 먼 곳까지소나무 한 그루 한 그루씩이 아닌모든 나무를 한꺼번에마치 어느 배 닿는 포구의거울 같은 수면 위에 떠 있는 돛단배의 선체를뒤흔들 듯이따라서 이 바람은 허세나무의미한 분노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당신을 위한 자장가의 노랫말을이 슬픔 속에서 찾기 위함이다.“살아 있다”는 ‘그대’는 죽은 이 아닐까. 반면 ‘나’는 살고 있으나 죽은 듯이 무력한 상태고. 이와 달리 죽은 ‘그대’는 바람이 되어 “울부짖으며” “숲과 오두막집을”, 그것도 소나무 한 그루씩이 아니라 숲 전체를 뒤흔든다. 그대는 억울하게 죽은 이였던 건가. 시에 따르면, 이 바람은 허세나 무의미한 분노가 아니라, 안식을 얻기 위해 ‘자장가의 노랫말을/슬픔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문학평론가
2024-03-07
흘러가버렸다 국지성 호우가 쏟아졌다 가방도 마음도 젖었다 가지고 다니던 네 편지를 펼치자 오로라의 악보가 나왔다 네가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언제까지라도 보고 싶었는데 이제 너는 없다 언젠가 학교 앞에서 만난 너는 큰 기타를 메고 있었다 네가 음악을 하는지 전혀 몰랐다 나는 강의실로 가고 있었다 너는 방금 쓴 노래를 들려주겠노라 했다 나는 그런 네 모습이 낯설어서 “나중에, 나중에”라고 했다위 시의 ‘너’는 화자 자신의 소년 시절이거나 당시 그의 친구일 터, 여하튼 ‘너’와 지금의 화자는 “호우가 쏟아”지고 “가방도 마음도 젖”은 후 단절되었다. ‘너’는 “방금 쓴 노래를 들려주겠노라”며 화자에게 접근하지만, 화자는 “그런 네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가방 속 네 편지-‘오로라의 악보’-는 젖어버렸기에, 이제 ‘너’의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은 화자의 마음에서 사라진 것이다.문학평론가
2024-03-06
하얀 할머니 이승 떠날 때는 가뿐했다.붉은 놀이 살갗에 닿자화악,흰 세포로 당겨져 공중에 흩어졌다.단촐하고 당당한 행장이었다.마치 눈발처럼 천지 사방으로 스미어홀홀홀,평생의 경륜을 퍼뜨리실 것이다.세상에, 별리가 이처럼 자연스럽다니.애초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는 듯 말끔했다.하늘로 뻗은 빈 가지가 탱탱해진다.억울한 죽음이 아니라면, 죽을 때 되어 죽는다면 슬픈 일은 아니다. 그 죽음은, 위 시의 “흰 세포로 당겨져 공중에 흩어”지며 ‘가뿐’하게 사라진 할머니의 모습처럼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그 죽음은 마냥 무(無)로의 회귀가 아니다. 그 죽음은 “평생의 경륜을” 하늘에서 “눈발처럼 천지 사방”으로 퍼뜨리기에. 그래서 하늘을 향해 뻗고 있는 ‘빈 가지’-화자의 객관적 상관물-는 할머니의 삶으로 탱탱해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3-05
늙어 꼬부라는 졌지만 아직도 정정한 늙은이와풍 맞아 한쪽이 어줍은 안주인과대처 공장에 나갔다가한쪽 손을 프레스기에 바치고 돌아온 아들과젊어 혼자 된 환갑 가까운 큰딸이붉은 페인트로 새마을이라 써놓은무럭무럭 훈김이 나는 미닫이문 안에서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뽀얀 절편을 뽑아내고 있습니다방앗간이 ‘아직도’ 있는 곳이 있다. 위의 시의 방앗간은 ‘새마을’이란 이름이 붙은 걸 보니 1970년대에 세워진 곳일 테다. 이곳 주인은 늙었지만 아직도 정정하다. 하지만 안주인은 풍을 맞았고, 아들은 공장에서 “한쪽 손을 프레스기에 바”쳤다. “젊어 혼자 된” 큰딸은 환갑이 다 되었다. 이 가족은 기구해 보이지만,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활기차게 살고 있다. 여전히 “뽀얀 절편을 뽑아내고 있”는 것. 문학평론가
2024-03-04
튀어 오르는 자의 기쁨을 알 것 같다뛰어내리는 자의 고뇌를알 것도 같다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종아리를 걷는 맨발들이 보이고총총 사라진 뒤달빛이 해파리처럼 공중을 떠돈다아무도 없는 공터에트램펄린이 놓여 있고속이 환히 비치는 슈퍼문이 떠 있다아래에서 위로 “튀어 오르”면 신나고 기쁘다. 반면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일은 깊은 고뇌를 필요로 한다. 저기 공터에 놓인 ‘트램펄린’에서, 한밤중에 “종아리를 걷”고 뛰는 이들은 튀어 오르고 있는 걸까 뛰어내리고 있는 걸까. 저 트램펄린 위의 사람들 모습은 우리들의 삶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기쁨과 고뇌의 반복 리듬을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들을 위로해줄 달빛은 “해파리처럼 공중을 떠”돌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4-03-03
다 내 것이라 여겼던 손발인데손은 손대로 하고 싶은 것 하게 하고발도 제 뜻대로 하라고 그냥 둡니다내 맘대로 이리저리 부리면말을 듣지 않습니다눈이 보여준 것만 보고귀가 들려준 것만 듣고 삽니다다만 꽃이 지는 소리를눈으로 듣습니다눈으로 듣고 귀로 보고손으로는 마음을 만집니다발은 또 천리 밖을 다녀와걸음이 무겁습니다늙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시에 따르면 나의 몸이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한다. 내 의지로 몸을 부리려 하면 몸은 이에 반항한다. 그러니 나는 나의 몸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야 한다. 이때 몸의 부위들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꽃이 지는 소리를/눈으로” 들을 수 있게 되고, 손은 “마음을 만”질 수 있게 되며, 발은 “천리 밖을 다녀”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늙음에 순응하면 늙음은 다른 세상을 열어준다. 문학평론가
2024-02-28
절망이 유행이다. 절망적인 절망은 그렇지 않고. 그런 절망 안에야, 즉 격심한절망 안에야 늘 그래도 희망이 불타고 있는 법인데,오늘날 설쳐대고 있는 건 아늑한 절망히죽거리는 절망.니체의 포즈로: 선악이란 없으며, 존재하고존재했으며 또 존재할 모든 것, 그 모든 것은 한결같다고:자연과정이라고:인간 없는 인류라고,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얼마나 굼뜨게 인생이 흘러버리는가, 희망희망은-얼마나 극렬한가 아직도 언제나!옛 동독 시절 독일의 비판적 음유 시인 볼프 비어만의 시인데, 지금 한국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현 상황에서 ‘절망’을 운운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아늑한’, ‘히죽거리는 절망’ 아닐까. 왜냐하면 “격심한/절망 안에”는 “희망이 불타고 있는 법”인데 요즘 말해지는 ‘절망’ 안엔 극렬한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 그 절망은, 모든 게 ‘자연과정’이라며 현실에 순응하는 절망처럼 보인다. 문학평론가
2024-02-27
물 수(水)에 갈 거(去)법 법(法)물 흐르듯 가는 것이 법이라 배웠지(중략)법이 눈물을 닦아주는 거라면억울한 밑둥까지 살펴야제대로 법으로 밥 먹는 사람결국 법을 공부하는 것은법을 달달 외는 게 아니라 눈물을 공부하는 것그렇게 통섭했다면수많은 조영래가 있지 않았을까눈물이 법이 된 시대 벌써 오지 않았을까어느새 한국 사회는 법의 근본 취지를 망각해버렸다. 법은 마치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 위의 시는 법의 본질을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준다. 법이란 “물 흐르듯 가는 것”이며 힘없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거”라는 본질. 하나 한국엔 “법을 달달 외”어 현실에 적용하는 법 기술자가 득시글댄다. 반면 “법을 공부하는 것은” “눈물을 공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문학평론가
2024-02-26
(전략)싱싱한 새벽 공기를 따라 내처 뛰어나갔던 그 자리이제 노을에 젖은 가슴이 그만 오른 발길에 차인다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그러면 누군가 물을 것이다, 언제 헤어질 것이냐고어떤 날을 그리워하기를 바란다면네 몸의 상처를 낭자하게 내버려두며동거하지 않음에 대하여 슬퍼하지 말며발가벗은 몸으로도 꽃을 피울 줄 알아야 한다선홍빛 상사화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잠깐 이런 생각도 하는 것이다상사화는 꽃과 잎이 피는 시기가 달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비유되곤 하는 꽃. 시인이 이 꽃을 들여다보다가 생각한 것은 잃어버린 사랑일 테다. “노을에 젖은 가슴”이 되었던 실연의 시간. 하나 그는 이 실연의 상처가 이파리와 ‘동거’하지 않고 “벌거벗은 몸으로도 꽃을 피”우는 상사화로 피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여 그리움으로 “네 몸의 상처를 낭자하게 내버려”두라고 스스로에게 권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2-25
빛의 줄기들은 마음이 처음 왔듯내 얼굴에 가만히 와서얹히겠지그 언덕으로, 천천히부서지고 따스해지는 빛을만져보며물결이 일렁이듯아무 슬픔도 없이갑자기 눈물을 흘리게 될까롱샹성당에 나를 데리고 온신비하고 이상한 그 일이시인을 감싸는 타인의 마음처럼, 빛은 그의 얼굴 위에 “가만히 와서/얹”히자, 시인은 자신에게 다가온 따스한 빛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몸 위로 물결처럼 번져나가는 빛에 이끌려, “아무 슬픔도 없이//갑자기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빛은 어떤 장소를 다른 장소로, 어떤 사물을 다른 것으로 드러내며 다르게 감각하도록 이끌 터, 이렇게 시인은 ‘롱샹성당’만의 독특한 감각이 불러일으킬 신비를 상상해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02-21
오랫동안 풍을 앓던 동생 초상을 치르고망백이 넘은 누이는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방문요양사만 날마다 드나들었다이레 만에 구급차를 대동한 요양사에게 겨우부축받으며 문밖을 나서던 삭정이 같은 몸이무너지듯 마당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울었다동네사람들이 모여들어 달래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중략)비애의 곡절이 끝나기도 전에 혼절한 그이를 실은구급차가 황급히 떠나고 사람들이 혀를 차며돌아서자 철없는 새끼고양이가 봄볕을 쬐며바닥난 슬픔 위를 뒹굴었다(하략)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슬픈 일은 연이어 일어난다. 위의 시가 보여주듯이. 비극은 문학작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비극은 자주 일어나는 바, 고대에서와는 달리 현대의 비극은 낮은 곳에서 볼 수 있다. 풍을 앓은 동생을 저 세상으로 보낸 누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고는, 그 역시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빈집 수돗가’에 한창인 작약은 이 남매의 비극적 삶을 더욱 짙은 슬픔으로 채색한다. 문학평론가
2024-02-20
단지 외로워서 제 몸에서 송곳니처럼 뻗은 가지들이필시 그 외로움으로 한 계절을 같이 해온 무성한 이파리들그러나 일찍이 병든 이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긴 손을 뻗은 채 서 있는 궁산 기슭의 서어나무 한 그루뱀의 혓바닥 같은 연이은 참사를 몰고 온 여름의 폭풍에도마냥 꺾일 듯 쓰러졌다가 일어서길 반복하며 해마다알을 품고 새끼쳐나가는 까치집을 몇 년째 붙들고 있다(중략)스스로조차 어찌할 바 모르는 바람의 본성에 따라흔들리면서 흔들리지 않는 나무의 지혜에 충실하게어쩌면 그 누구도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비탄의 시간,(하략)모든 존재자들은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저 ‘서어나무’와 까치도 그렇다. ‘까치집’은 두 존재자가 맺은 관계의 결실이다. 까치는 서어나무 위에 둥지를 지어 나무를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나무는 “바람의 본성에 따라/흔들리면서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까치집을 “몇 년째 붙들”며 보호한다. 이 관계 맺음을 통해 존재자들은 ‘연이은 참사’에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할 테다. 문학평론가
2024-02-19
빛이 허약해지는 겨울에는바르게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거기에는 늘 새가 있고태양이 돌아누운 하늘은 새들의 것혀와 입술이 읽어주는 몸의 연애처럼기계가 읽어주는 쓸쓸한 소음처럼뭉근히 울려 퍼지는 날개책을 덮으면투명한 몸으로핏물처럼 번지는 문장등 뒤척이는 밤을 열면새들의 눈알이가지처럼 빛난다(하략)하늘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계절이 있다. “빛이 허약해지는” 계절인 겨울이다. 빛이 약해야 하늘의 존재자들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무엇이 드러나는가? 새다. 겨울엔 “하늘은 새들의 것”이라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 진실은 시각을 넘어서는 감각. 키스할 때의 촉각이나 “쓸쓸한 소음”의 청각을 통해 “뭉근히 울려 퍼지는 날개”로 현현한다. “투명한 몸으로/핏물처럼 번지는 문장”을 선사하는 날개로. 문학평론가
2024-02-18
오래된 사진 속 너는카페의 창가 의자에 앉아나를 바라보고 있다내가 바라보는 곳은내가 지나온 세계이기도 하지만카메라 너머의 사물들을 붙들 것처럼너는 흰 손을 뻗으며얼굴에 환한 빛을 밝히고 있지만(중략)잠에서 막 깬 사람처럼나는 네가 몸을 기울인 공간의 온도와습도를 상상한다손 끝에 닿은 사물들이뜨거운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위의 시에 따르면, 사진 속의 세계는 수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속의 인물을 보고 있자면, 그가 “나를 바라보”며 “흰 손을 뻗”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느낌은 “내가 지나온 세계이기도” 한 사진 속 공간과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이 겹치는 ‘상상’으로 이끌고, 현 공간과 섞이는 사진 속의 세계는 “온도와 습도”를 가진 살아있는 세계, “사물들이/뜨거운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세계로 현존하게 된다. 문학평론가
2024-02-15
연못가 버드나무에선바람이 불 때마다몇 마리의 물고기가 툭 툭 놓여났다공중을 물들이며 스스륵 잠기는 물고기(중략)버드나무는물속에 잠긴 발등을 오래 바라보며고요하다이게 버드나무의 마음이라면연못 속에도나뭇잎에서도물고기들이 태어나고 자란다어느 저녁나도 툭 놓여나겠지밤이 연못 속으로 고이고물속은 한없이 깊어지고나를 데려다준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텐데연못과 그 옆에서 연못을 “오래 바라보”고 있는 버드나무와 이 풍경을 보고 있는 ‘나’는 서로 감응하며 미메시스된다. 하여 연못의 물고기는 버드나무 나뭇잎이 되며,‘나’ 역시 물고기처럼 “툭 놓여”날 테다. 이러한 마술의 현현은 미메시스가 마음에서 일어나기에 가능한 일이다. 연못과 버드나무와 ‘나’의 마음은 미메시스로 인해 물처럼 뒤섞이며 깊어지고, 이 마음속에서 “물고기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2-14
세상을 다독여 재우려는아기 숨결 같은 눈이라니뒤척이는 진창으로 내려와 점점이입김 내불고 숨을 놓는다깊어 가는 골목마다빈 나뭇가지마다 고요한 뜰에아기 살결 같은 눈이 쌓여먼 나라웅숭깊은 창을 열면칠흑의 어둠 속거룩한 성자겨울밤 가만히 쌓이는 눈. 순결하고 아름답다. 시에 따르면, “아기 숨결 같”은 이 눈은 “세상을 다독여 재우려는” 듯 자신의 고요한 숨결을 이 세상 위에 놓는다. 세상은 어떠한가. “뒤척이는 진창”이다. 이 진창의 골목 구석까지 내리는 눈은 세상을 더 깊게 만든다. 하여, 눈 내리는 창밖 세계는 더욱 ‘웅숭깊은’ ‘먼 나라’로 현현한다. 눈이 ‘칠흑의 어둠 속’을 밝히는 ‘거룩한 성자’로 이 세상에 도래했기 때문에. 문학평론가
2024-02-13
인생에 악착같이 밀착해야지그것을 맹렬히 붙들어야지이 날의 달콤함이 가시기 전에나의 체온으로 영원한 온기를 남겨야지모든 나라에 미치는 끝없는 바다는변덕스러운 파도에 쓰고 짠나의 고통을 쪽배처럼 흔들흔들실어 나르겠지만나는 남겨야지, 저 언덕에 나의 흔적을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던 나의 뜨거운 시선을그러면 가시나무의 매미는 노래하겠지나의 욕망이 부르는 날카로운 울음을(하략)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여성 시인 안나 드 노아이유의 시. 사람이 삶에서 가장 욕망하는 것은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것 아닐까. 예술가들의 본질적 욕망은 거기 있는 것 아닐까. 세계라는 바다는 “나의 고통을” “실어 나”르지만, 그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뜨거운 시선”을 시로, 형상으로 표현하고, 이 세계 속에서 품게 된 “욕망이 부르는 날카로운 울음”을 노래하면서 이 바다를 항해한다. 문학평론가
2024-02-12
한 왕관처럼대지의 이마에한 왕관처럼날아가고 있었다 새들이멀리서 보았다그리고 나는 바로 거기에서 소리쳤다축하한다대지여, 축하한다.인도 현대시인인 께다르나트 싱의 시. 짧지만 응축적이면서 황홀한 시다. 시인은 대지 위를 나는 새들을 “멀리서 보”고 있다. 그 새들의 비상은 마치 대지의 이마 위에 씌워진 왕관 같은 모습이다. 이 세계의 왕이 대지라고 할 때, 비상하는 새들이 대지가 이 세계의 왕임을 드러내기에 그렇다. 시인이 대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건, 새들의 비상으로 비로소 대지가 세계의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기 때문일 터. 문학평론가
2024-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