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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란 무엇인가

등록일 2024-07-09 18:31 게재일 2024-07-1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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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 트레스웨이(정은귀 옮김)

그녀가 화장으로 덮은 덧없이 사라지는

멍이 아니라, 그녀가 출구를 찾으며

망원경에 눈을 너무 세게 눌러 찍힌 자국처럼 남은

어두운 반점이 아니라, 난로 위 뼈다귓국 우리던

솥에 몸을 기울이고선 그녀가 가다듬곤 하던

목소리의 떨림이 아니라, 자기 치아 대신

해 넣은 그 이가 아니라, 혹은

그 공문서-그 직인과

희미해진 서명-이미 바래고 있는,

나달나달 닳은 모서리가 아니라, 날짜들과 그녀 이름이

적힌, 역사처럼 추상적인, 그 작은 표지가 아니라.

다만 그녀 육신의 풍경-쪼개진 빗장뼈,

구멍 난 관자놀이-그녀의 자그만 뼈들이지.

매일 조금씩 자리를 잡는, 모든 게 그러하듯.

나타샤 트레스웨이는 1966년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여성 시인이다. 이 시 제목의 ‘증거’는 무엇의 증거일까? ‘그녀’가 당한 폭력의 증거 아니겠는가. 그 증거는 직인이나 서명이 확인된 공문서 따위에 있지 않다. “덧없이 사라”질 살갗 위의 멍 역시 증거가 아니다. 증거는 “쪼개진 빗장뼈”나 “구멍 난 관자놀이”와 같은, 끔찍한 “육신의 풍경” 자체에 직접적으로 있다. “매일 조금씩 자리를 잡는” 폭력의 증거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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