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떠난 재건축아파트 복도식 현관문마다 흰 페인트로 크게 X가 그려 있다 40년 넘게 새와 바람을 불러들이고 그늘을 만들던 나무들은 빽빽한 나이테를 드러낸 채 밑동이 잘려 있다 제집을 잃은 새들은 키 작은 나무를 뽑느라 파헤쳐진 흙바닥에 기억의 뿌리를 찾아 부리를 박기도 하고 붉은 발바닥 도장을 찍으며 서성인다 나무들이 다 어디 갔는지 둥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널브러진 잔가지 위에 앉아 두리번거리다 날아간다 강변에서 저녁놀 묻은 발을 끌고 둥지로 돌아온 몇 마리 비둘기 발을 헛딛는다.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파괴. “40년 넘게 새와 바람을 불러들”여 왔던 나무마저 무참히 “밑동이 잘려”나간 모습을 보라. 사람들 사는 집을 새로 짓는다고 나무 위에 지은 새들의 집을 파괴해버린 것. 위의 시는 자연을 파괴하여 뭇 생명들이 살고 있는 터전을 없애버리는 현대 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 흰 페인트로 현관문에 그려 있는 ‘X’가 현대 사회의 파괴성을 을씨년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11-14
개나리아파트 어디를 둘러봐도 개나리가 없다 개나리가 없으니 개나리꽃이 피지 않는다 꽃이 피지 않으니 봄이 올 리가 없다 관리사무소 소장은 유실수나 꽃나무 지원을 구청에 요청했다 한다. 작년에도 올해도 하지만 늘 예산이 없다는 대답뿐이란다 기초의회에 근무하시는 나리 분들 주민 생활 관련 조례 제정 건수가 평균 0.8건인데 연봉이 오천만 원 참, 개 같은 나리들이다 지천인 개나리 하나 개나리아프트에 못 실어주는 이름은 ‘개나리아파트’인데, 아파트 화단엔 개나리가 없다. 이름과 실제의 불일치다. 한국엔 이름뿐인 현실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꽃나무 지원을 구청에 요청”해도 “늘 예산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오는 것이 현실. 별 하는 일 없어 보이는 기초 의회 ‘나리 분들’은, 많은 연봉을 받아도 주민들의 이러한 ‘기초’적인 생활환경을 개선할 의지가 없다. ‘개나리’가 ‘개 같은 나리들’로 나타나는 한국의 우울한 맨얼굴. 문학평론가
2024-11-13
다시 잎이 진다, 저녁의 바람이 어디론가 몰려가 어둠에 섞이고 저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는 이는 불 꺼진 방 안에 누워 뉘우침의 감옥에 갇힌다,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짧게는 약이 될 저 소리는 제 몸에 젖어 있는 기억들이 내지르는 비명이다, 환하게 만들다 결국에는 더 큰 구멍으로 자신의 몸을 관통할 총탄이다 누가 서글픔에 창문을 본다, 나무들의 침묵, 그 사이로 떨러지는 붉은 울음들, 삶의 배경이 되는 허무의 울음들 그리하여 어떤 이는 먼 바다에 이르러 굽이치는 자신의 파도를 달래느라 우두커니 연민의 배경이 되고 또 어떤 이는 제 침묵 속에 기다란 막대기를 집어 넣어 죽은 노래를 깨운다, 날이 가물고 펄럭이는 것들이 굶주린 정원에서 헤매이고 비명 소리는 자지러지게 울려 퍼진다 대개 사람들은 ‘가을’ 하면, 낙엽에서 연상되는 쓸쓸함과 애상의 이미지를 떠올릴 테다. 하나 위의 시는 애상을 넘어 매우 고통스럽고 강렬한 가을 이미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섞인 가을 저녁 바람은 “뉘우침의 감옥”에 어떤 이를 가두고, 자신의 몸에 총탄을 박도록 그를 끌고 간다. “자지러지게 울”리는 비명의 이미지로 가득한 가을. 가을은 “허무의 울음들”을 ‘배경’으로 부르는 “죽은 노래를 깨”우는 계절이다. 문학평론가
2024-11-12
둑으로, 골짜기 아래로, 그러다가는 곧장 모퉁이를 돌아 길이 꿈틀대는 리본이 되어 멈추지 않고 앞으로 뻗어 간다. (중략) 어떨 때는 내리막으로, 어떨 때는 오르막으로 곧은 간선도로가 앞으로 달려간다. 과연 삶이란 오직 그렇게 줄곧 위로 그리고 멀리 돌진하는 것이다. 무수한 환장을 지나 장소와 시간을 지나 장애와 도움을 지나 삶도 목적지를 향해 질주해 간다. 굽이굽이 곁을 지나가는 길이 저 먼 광활한 땅을 활기차게 하듯, 밖에서도 집에서도 삶의 목적은 모든 것을 겪고 모든 것을 이겨 나가는 것이다 ‘닥터 지바고’를 쓴 파스테르나크는 원래 시로 문학적 경력을 시작했다. 위의 시는 그가 말년에 이르러 쓴 시. 노인이 된 그는 비로소 삶의 목적에 대해 깨닫는다. “모든 것을 겪고 모든 것을 이겨 나가는 것”임을. “곧은 간선도로”처럼, “위로 그리고 멀리 돌진하는 것”임을. 그러한 삶은 길이 광활한 땅-삶의 터전-을 활기차게 하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 돌진이 없다면, 삶이란 허허벌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11
오케스트라가 침묵할 때, 베일 쓴 여인들의 그림자 나뭇가지 밑을 지나가고, 마른 나뭇잎들 사이로 차가운 달빛 망상, 창백한 노을 구름이 스민다. 망각 속의 아리아를 흐느끼는 입술들이 있고, 상아색 드레스는 커다란 붓꽃을 가장한다. 실성한 무리들의 수다와 미소가 거친 풀숲에 실크 향을 뿌린다. 햇살이 그대의 귀환을 웃음으로 맞아 주길. 그대가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면 축제는 금빛 창조로 노래하리라. 그러면 나의 시는 그대의 땅에서 음메 하고 울리라, 온통 신비로운 구릿빛에 싸여, 그대 사랑의 아기 예수가 탄생했다고 흥얼거리며.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페루 시인 바예호의 시. 성탄 전야의 축제를 신비스럽게 묘사했다. 차가운 달빛이 “마른 나뭇잎들 사이로” 흔들리며 비추는데, “아리아를 흐느끼는 입술들”과 “실성한 무리들의 수다와 미소”들이 난무한다. 시인은 이 광기 어린 축제를 보며 ‘그대의 귀환’-‘아기예수’의 재탄생-을 기다린다. ‘그대’가 오면 “축제는 금빛 창조로 노래”할 것이며, “나의 시는 그대의 땅에서” 소처럼 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10
장엄하고 느리고 슬픔에 빠져 있는 비극적 선율이 조금씩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최후의 길은 이렇게 차갑고 냉정하고 섬세한 구조로 짜여 있는 것일까 미쳐버린 새들은 둥지를 떠나 북쪽 하늘가를 날고 있고 귀를 닫아버린 아이들은 정처 없이 골목을 떠돌아다니는데 우리는 이제 입을 틀어막고, 가슴을 바짝 움켜쥐고, 처참한 애도를 드러내야 하나 장송곡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 우리는 외마디 비명처럼 하얗게 얼어붙은 몸으로 벌거숭이 된 채 서 있다 마음이 아파오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시다. ‘하염없는 슬픔’을 가져다 줄 ‘비극적 선율’이 “조금씩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예언을 전하고 있기에. 우리가 세상 종말 직전에 서 있다는 예언. 그래서 지금 새들은 미친 채 날고 있고 아이들은 귀 닫고 “정처 없이 골목을 떠돌아다”닌다. 곧 죽음이 들이닥치고 ‘장송곡’이 울릴 터, 이 종말 앞에서 “우리는 외마디 비명처럼 하얗게 얼어붙”어 있을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4-11-07
슬픔을 예약했어요/ 다음 주 토요일로 울고 싶은 날이죠/ 취소는 안 된대요 실연의 주인공을 따라/ 한강변으로 갈게요 추가된 옵션으로/ 웃음을 구매하면 자동으로 당신도/ 업데이트될 거래요 또 다른 감정들을 모아/ 장바구니에 담아둬요 AI 시대다. 이젠 AI가 특정한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도 학습하여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고. 알고리즘에 따라 그 사람 취향에 맞게 상품을 권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AI의 인도에 따라 감정을 쇼핑할 수 있게 되었다. 위의 시는 감정도 쇼핑 대상이 되는 현 세태를 풍자한다. ‘슬픔’을 사고 싶으면, ‘실연’을 맛보고 싶으면 AI는 거기에 맞는 행동을 권하며, AI를 통한 감정 구매를 통해 “자동으로 당신”은 업데이트된다. 문학평론가
2024-11-06
사랑이 피어날 때도 그랬지만 사랑이 질 때도 저랬었겠지 감탄 속에서 떠오르는 꽃망울들이 스스로 유배의 길을 떠나겠지 떨어지는 벚꽃 잎처럼 그녀의 얼굴에도 이제 곧 그늘이 지겠지 향기 속으로 번져가는 우리의 생도 한때는 저렇게 미소 지었으련만. 예나 지금이나 서정이 솟아오르는 터전은 지나가버린 사랑의 시간이다. 하지만 피어난 벚꽃처럼 아름다운 그 시간 역시 “스스로 유배의 길을 떠나”는 벚꽃처럼 져버릴 터, 이 흩날리는 벚꽃도 또한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한다. 서정이 풀려나오는 곳은 이 사라져가는 사랑의 모습에서다. 그 모습은 서정의 향기를 세상에 퍼뜨리고, “우리의 생도” 서정을 통해 “향기 속으로 번져”간다. 서정시의 원형을 보여주는 시. 문학평론가
2024-11-05
일찍 커버린 아이의 빈방에 앉아 창밖을 본다 썼다 지웠던 안부처럼 꽃눈이 환하다 꽃의 자리를 더듬으며 아이는 먼 곳을 생각했겠다 가끔 눈이 매웠겠다 내게도 강이 있어 길게 흐를 수 있다면 아이의 다정이 아직 남아 아껴놓은 비밀을 읽을 수 있다면 이 마음을 갚을 수 있을까 새 주가 시작하는 월요일. 창밖엔 새로 피어날 듯 “꽃눈이 환하”고, “일찍 커버린 아이”도 이제, 창밖 “꽃의 자리를 더듬으며” 자신이 나아갈 길-“먼 곳”-을 스스로 찾기 시작할 테다. 시인은 아이에게 닿는 긴 강이 자신에게 여전히 있어서 아이의 “아껴놓은 비밀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아이가 그에게 준 “마음을 갚을 수 있을” 것이기에. 물론 “아이의 다정이 아직 남아” 있어야 그 갚음은 가능하리라. 문학평론가
2024-11-04
오래도록 소식 없는 사람은 소식올 날을 가만히 헤아리고 있는 사람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매 순간 짐작으로 천지를 건너는 사람 138억년 전 지구로 이주한 먼지의 기별로 올 사람 밤이면 별빛에 애를 태우며 별을 빚는 사람 오래도록 소식 없는 사람은 오래도록 소식 없을 사람 우주를 건너는 사람 우주를 만드는 사람 위의 시에서 소식 없는 사람과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동일화되는 바, 시는 소식을 기다린다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보여준다. “오래도록 소식 없는” 이는 “오래도록 소식 없을” 이일 것, 왜냐면 그는 숨 쉬는 ‘매순간’ “138억년 전 지구”에서 “우주를 건너” “먼지의 기별로 올 사람”이기에. 하여 소식을 기다리는 이는 하늘의 “별빛에 애를 태우”고 “별을 빚”을 터, 그럼으로써 “우주를 만”들 기에 이를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03
누군가 연 문누군가 닫은 문누군가 앉은 의자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누군가 깨문 과일누군가 읽은 편지누군가 넘어뜨린 의자누군가 연 문누군가 아직 달리고 있는 길누군가 건너지르는 숲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누군가 죽은 병원프랑스 현대 시인 프레베르의 시. ‘누군가’는 누구일까. 시는 그 누군가를 조명하지 않는다. 조명하는 건 그의 손과 발이 닿은 사물들과 장소들. 클로즈업 된 이것들을 통해 그 누군가가 자살하기 직전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누군가’는 문을 열고 들어와 의자에 앉고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편지를 읽는다. 편지를 읽자 충격 받은 그는 급히 방을 뛰쳐나가 강물에 몸을 던진다. 편지의 메시지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문학평론가
2024-10-31
기아와 폭식을 반복하는 달의 이클립스 겨울 아침을 배회하는 바바리맨의 덜렁거리는 실존 설치류 떼에 물려 이 그지 같은 세상을 하직한 초식공룡 화석 Exit으로 오타 한 후의 가벼운 절망 침침한 은하계를 지그재그로 건너 나의 꿈속에서 현관에 버려진, 빨간 아기로 현현하는 일그러진 혜성 ‘exist’라는 말을 천천히 발음하면서, 시인은 우선 월식을 떠올린다. ‘이클립스-식’은 빛의 소멸을 뜻하는 바, ‘exist’는 가려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달처럼 소멸의 반목을 가리킨다. 하여, 초식공룡이 소멸했듯이 인간도 소멸할 터, ‘exist’를 ‘exit’로 잘못 쓴 건, 절망으로부터 “은하계를 지그재그로 건너”는 ‘혜성’처럼 탈출하고픈 원망이 투영되어 있다. 하나 그 혜성은 버려진 아기처럼, 일그러진 꿈일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4-10-30
참 따뜻하네 눈 내리는 골목길 담벼락에 서서 한 봉지 군밤을 건네받은 연인이 하는 말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군밤을 건네준 청년의 마음은 연탄불처럼 뜨겁습니다 참 따뜻하네 담장을 타고 온 그 말 한마디에 고개를 내밀고 눈 내리는 골목길을 봅니다 군밤을 나눠 먹으며 팔짱을 끼고 가는 젊은 연인들의 뒷모습에 대고 나도 한마디 합니다 눈이 내려서 세상이 참 따뜻하네. 위의 시가 보여주듯 이상하게도 눈 내리는 날은 따뜻하게 느껴진다. 시인은 그 따뜻함이 사람들 사이에 번지는 소소한 정을 눈이 가시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시화의 초점은 군밤. 청년이 건네준 군밤을 받아든 연인의 ‘따뜻하다’는 말 한 마디가 청년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그 “군밤을 나눠 먹으며” 골목길을 팔짱 끼고 가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 눈과 어울려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참 따뜻”한 시다. 문학평론가
2024-10-28
흔들리자 흔들리면서 살자 아무렇게나 자란 갈대처럼 흔들리다가 흔들리다가 미련 없이 날리자 가볍게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수로부인이여, 또는 아사녀여 아니면 너여 나를 혹해다오 내 마음은 비무장지대 지뢰와 갈대가 몸을 섞는 곳 터뜨려다오 갈대만 남기고 숨 막히는 지뢰는 터뜨려다오 불꽃처럼 터지는 가벼운 삶 행복한 불혹, 혹 흔들리지 않는 나이, 40. 그 나이를 지나갔을 시인은 이 ‘불혹’을 불같은 흔들림이라고 바꾸어 생각한다. 바람의 ‘혹’에 흔들리다가 “불꽃처럼 터지”며 “미련 없이 날리”는 삶을 사는 나이가 불혹이라고. 하여 그는 수로부인이든 아사녀든 너든, “나를 혹해”주기를 바란다. 그의 마음은 “지뢰와 갈대가 몸을 섞는” ‘비무장지대’, 마음 속 “숨 막히는 지뢰”를 터뜨려주기를 빌면서. 안정이 아니라 열정의 나이 불혹. 문학평론가
2024-10-27
나는 어디에서 온 빗방울입니까 나뭇잎 발코니 허공이 조금은 막막하여 주저앉아 울었던 기억이 나는 듯도 합니다만, 어쩌자고 아직도 마르지 않고 태양을 견딘답니까 스스로를 깨뜨릴 수 없는 물방울을 위해 당신께서는 손가락을 빌려 주십시오 닿는 순간 한 채의 눈물 누옥에 갇혀 있던 날개가 폐허를 털고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2024년 제2회 선경작가상을 수상한 한혜영 시인의 작품. 시인은 자신을 마르지 않는 빗방울로 비유한다. “허공이 조금은 막막하여/주저앉아/울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시인. 하지만 ‘자신-빗방울’은 여전히 마르지 않고 있다는 것. 그래서 “태양을 견”디며 폐허가 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 시인은 갈망한다. ‘당신’의 “손가락을 빌려” 날개를 달고 날아갈 수 있기를. 열망으로 샘솟는 서정시의 정수를 보여주는 시. 문학평론가
2024-10-24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게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시. 한강은 20대 초반에 시로 등단했는데, 위의 시는 등단 무렵 쓴 시로 판단된다. 한강 문학의 뿌리가 사랑임을 잘 보여주는 시. 화자가 오길 갈구하는 ‘너’가 사랑 자체가 되어 온다면, 화자 자신에게 일어날 변화를 시인은 말해준다. 사랑에 잠겨 “내 가슴 온통 물빛”이 되리라는. 그리고 ‘너’에게 무엇이 될 것인지도. “네 먹장 입술에” 강물 같은 “벅찬 숨결”이 되리라는. 문학평론가
2024-10-23
이사할 적에는 새 바람 새 빛을 바랐나보다. 그래서 나는 실망한다, 십칠년 만에 이사한 동네가 옛날에 떠났던 바로 그 동네여서. 그래도 반가워서 이 언덕 저 골목 서성이는데 놀랍구나, 모든 게 이렇게 새롭다니 아기들이 새롭다, 연립주택 낡은 문을 밀고 나오는. 젊은 엄마들이 새롭다, 뒤따라 나오는 헐렁한 옷 속의. 그루터기가 새롭다, 가지 잘린 플라타너스의. 간판이 새롭다, 새로 단장한 머리방의. 새롭지 않은 것은 오직, 오래되고 낡은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걷는 내 걸음뿐.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신 신경림 시인의 시. ‘지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격언을 뒤집어 놓은 시다. 시인은 ‘새 바람’을 바라며 “옛날에 떠났던 바로 그 동네”로 이사했으나, 격언과 마찬가지의 풍경이어서 실망했다고. 하나 곧 아기들과 엄마들, 그루터기와 머리방 간판이, 즉 ‘모든 게’ 새롭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 더 깨달은 게 있다. “새롭지 않은 것”이 있다면, “새로운 것을 찾아 걷는 내 걸음뿐”이라는 것을. 문학평론가
2024-10-22
가능한 적은 말을, 많은 말은 골(空洞)을 막아버리기 때문, 그래야 작별의 인사와도 같은 울림이 생기고. 가능한 적은 말을 그래야 말 한마디 한마디는 울림통 속을 돌고돌아 자신만의 메아리를 만들어내지. 넓은 공간 속에서 언어와 공동(空洞)은 서로 섞여들고, 언덕 너머 들릴 것만 같은 종소리, 그것도 한없이 느리게. 프랑스 현대시인 기유빅의 시. 말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말들의 인플레이션. 시인에 따르면 말은 ‘공동’과 “서로 섞여들” 때 “자신의 메아리를 만들어”낼 수 있고, 넓게 퍼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적은 말을” 해야 한다. 말이 많으면 말들이 “공동을 막아버리기 때문”에. “울림통 속을/돌고돌아” 나오는 ‘말 한마디’는, 듣는 이의 마음 역시 천천히 울릴 테다. “언덕 너머” “한없이 느리게” 울려오는 종소리처럼. 문학평론가
2024-10-21
봄날 저수지 주변으로 소네트가 흐른다 나무는 맹목적으로 자라고 한때 내 사랑도 그러하였다 (중략) 지키지 못한 약속들 때문에 물빛이 어두워지고 서로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지 못해서 나무는 안간힘으로 그림자를 뻗는다 봄날 저수지에서는 당신에게 한 줄 기별을 넣어도 될까 손가락 사이로 돋는 푸른 새순을 못 본 척 눈 감는다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은 사랑의 맹목성. 사랑에 목적이나 목표는 없다. 다만 사랑할 뿐. 하나 두 사람의 사랑은 떨어지는 꽃잎처럼 스러지곤 한다. “서로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지 못”해서. 그때 사랑은 “안간힘으로 그림자를 뻗”을 터, 사랑을 잃은 시의 화자가 “봄날 저수지에서” “당신에게/한 줄 기별을 넣”고 싶다는 생각이 그 그림자일 테다. 그때 사랑의 ‘푸른 새순’이 다시 돋아나기 시작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0-20
사람의 손을 잡는다는 것/ 참 쑥스러운 일이라/ 자주 못 하고 살았네 따뜻한 눈빛으로/ 좀 천천히/ 그 눈 마주 보지 못했고/ 웃음도 인색했었네 나를 세우고 버티는 힘은/ 정작 견고한 침묵이 아니었네 혼자만의/ 가을이 되고 겨울이 오네 해 뜨고 달 지는 창가에 서 있다가/ 볼 때마다 낯선 거울 앞에 서 있다가 물음도 대답처럼/ 나 아직 여기에 있네.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할 일이 많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사람의 손을” “자주 못 하고 살았”으며, “따뜻한 눈빛으로” 상대를 “마주 보지 못”하고 “웃음도 인색했”음을 후회한다. 필자 역시 그런 후회를 할 때가 있다. 어느덧 시인처럼 혼자임을 깨닫고 삶의 겨울에 다다랐다는 느낌이 든다. “견고한 침묵”으로 “나를 세우고 버티”려 했던 과거가 어리석었다는 깨달음으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 낯설어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