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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름(부분)

우리가 처음으로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강했는지, 열정에 얼마나 취했는지, 좁은 침대에 하루 종일 또 밤새도록 누워서, 거기서 잠자고, 거기서 먹으며: 여름이었지요, (중략) 하지만 우린 한편으로는 길을 잃었지요,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침대는 뗏목 같았어요; 우리가 우리 본성과 멀리 떨어져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표류하는 것 같았어요. (···.) 그러자 그 둥그런 것들이 닫혔어요. 서서히 밤이 서늘해졌지요. 버드나무 길게 늘어진 이파리들이 노랗게 변해 떨어졌어요. 우리 각자 안에서 깊은 고립이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해 또 후회 없음에 대해 우린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다시 예술가가 되었어요, 여보. 우리는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요. …………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의 시. 여름은 열정의 삶을 상징하는 계절이나, 그 계절엔 도취에 빠져 길을 잃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운 침대는 뗏목처럼 표류하기도 한다는 것. 하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푸른 이파리들이 “노랗게 변해 떨어”지면, “깊은 고립이 시작”된다. 가을엔 이제 서로의 고립 속에서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고, “다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11-02

지금(부분)

지금은 냉동실에 칸칸이 쟁여진 검정 비닐봉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쟁여둔 것조차 잊었다가 아차, 유통기한 넘겼나 싶어 봉지들을 꺼낸다 그게 먹다 남긴 고등어 토막일지 오래전 넣어둔 조랭이떡일지는 뒤집어봐야 안다 장을 새로 본 양지머리를 집어넣어도 부지불식간에 색과 향을 잃고 만다 살얼음을 뒤집어쓴 채 침묵하는 그것 검정 비닐봉지 속을 헤쳐 유예된 지금을 찌개 냄비에 붓고 끓인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도처에 서식한다 해진 가죽 소파 위 쿠션처럼 얹혀 있다가 장롱 속 남편의 넥타이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고 베란다 화분들 사이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바글바글 김이 오르는 지금이란 잡탕찌게를 국자로 떠 담는다 (하략) ….. ‘지금’은 과거와 연결된 시간이겠으나, 과거는 냉동고 속 음식들처럼 얼어붙어 있다. 과거는 ‘지금’이 되고 싶으나 되지 못한 것들, 시인은 얼어붙은 과거들이 ‘지금’이 될 수 있도록, “유예된 지금을 찌개 냄비에 붓고 끓”인다. 하여 이 ‘지금’이란 찌개는 ‘잡탕찌개’가 된다. “어제의 지금”과 “내일의 지금”이 뒤섞인 잡탕찌개. ‘지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시인은 ‘지금’이 집 안 “도처에 서식”하고 있으며, 언제나 ‘임박’해 있다는 것 역시 발견한다. 시 쓰기란 시간을 발견하여 ‘지금’이란 찌개를 만드는 일이겠다. <문학평론가>

2025-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