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여, 날 내버려두지 마요 당신의 팔로 안아줘요 당신의 손으로 나를 잡아줘요 그 손이 차가울지라도. (중략) 내게서 멀어지지 마요, 고독이여 나의 유일한 친구는 당신이니까요 나의 아픔을 이해하는 당신이 약속해줘요 언제나 나와 동행할 거라고. 날 저버리지 마요, 고독이여 당신이 가버리면 누가 밤새 나의 꿈을 지켜주겠어요? 그리고 누가 밤마다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겠어요? ...... 현재 한국외대 교수인 멕시코 출생 문학인 알폰소의 시. 우리는 고독하지만 고독하지 않다. 적어도 고독이 함께 하니까. 하여 위의 시의 화자는 고독과 사랑에 빠져버린다. 고독에게 자신을 안아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 그도 그럴 것이 고독에 빠진 자에게 “유일한 친구는” 고독밖에 없으며, 고독한 자의 아픔은 고독이 가장 잘 이해할 것이기 때문. 고독은 고독한 자의 꿈을 지켜주며 그의 독백을 들어주기에. <문학평론가>
2025-04-17
아득한 밤, 쿠키하고 나 하고 의논 중이다…. 쿠키를 먹는 순간 소리가 날 테고, 부스러기도 나올 거고, 꿀꺽 넘기는 소리가 날 테고, 꿀꺽 넘기는 소리가 날 테고, 주스도 마실 테고, 그러면 나는 뭔가를 포기해 버린 아이에게 오늘은 무슨 응원의 말을 보낼 수 있을까, 화를 내면 안 되는데, 무슨 희망의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하며 쿠키를 쥐고 있다 (중략) 어눌한 밤, 쿠키 하고 나 하고 이불 하고, 무서운 적막과 속삭이는 중이다…. 밤색 몸과 마음에 대해서, 쿠키하고 나 하고, 거실 형광등과 고민하는 중이다…. 분노도 오해도 잘 숨기는 관계에 대해서 위의 시의 화자는 홀로 방에서 쿠키를 먹으며 “뭔가를 포기해 버린 아이”에 대해 생각한다. 한데 그는 홀로 있지만 홀로 있지 않다. 그를 둘러싼 사물들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먹는 쿠키, 그가 덮고 있는 이불, 거실 형광등과 무서운 적막까지 그의 대화 상대자다. 우리는 고독하게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위의 시는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과 대화하며 산다는 것을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5-04-16
가을볕 이 엄숙한 투명 앞에 서면 썼던 모자도 다시 벗어야 할 것 같다 곱게 늙은 나뭇잎들 소리내며 구르고 아직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아무도 남은 길 더는 가지 않고 온 길을 되돌아보며 까칠한 입술에 한개피씩 담배를 빼문다 어떤 얼굴로 저 가을볕 속에 서야 사람은 비로소 잘 익은 게 되리 바자랑대도 닿지 않는 아슬한 꼭대기 혼자 남아 지키는 감처럼 닥쳐올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면 나는 이 맑음 속에 어떤 자세로 앉아야 하리 ..... 군사독재 시대 끝자락인 1980년대 중반에 발표된 시. 우리는 그러한 독재 시대로 되돌아갈 뻔했다. 우리 시가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기다려야” 하는 시대가 다시 올 수 있었던 것. 그래서인지 위의 시는 지금도 깊은 감회를 가져온다. 가을 대기의 ‘엄숙한 투명’ 속에서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시인. 그 모습은 ‘아슬한 꼭대기’에서 혼자 남아 익어가는 감과 같다. <문학평론가>
2025-04-15
내 유년의 들판 손톱을 깎으면 그대로 나비 떼 되어 날 것 같았던 이제 그 노쇠한 들판 꽃무리 누워 빛바랜 고해성사의 시간 그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불멸의 고유명사 그때 그 나비 넘나들며 꽃향기 움막 한 채 짓기 여념 없는데 내 외로운 생의 일기는 시방 일몰의 페이지에 이르다 들꽃이 한때 들판을 의지함같이 나비여 꽃이여 형편없이 떠돌다 이제는 들판처럼 누워야 할 생이여 “일몰의 페이지에 이”른, ‘빛바랜’ 시간에 다다랐다는 의식을 갖게 되는 나이. 위의 시인은 그 나이에 다다랐다. 그의 시간은 더욱 짙은 서정과 만난다. 그 시간에 다다르면 더욱 유년을 기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깎은 손톱이 그대로 나비가 되어 날아갔던 아름다운 기억을. 그 나비는 바람 불면 날아가 “형편없이 떠돌다” “들판처럼 누워야 할” 들꽃으로 변화되어 있다. 우리 ‘생’의 운명을 보여주는 들꽃으로. 문학평론가
2025-04-14
가을비 그친 아침이다 뒷산 언덕길이 시작되는 트랙 펜스 아래 자그마한 짐승 한 마리 죽어있다 간밤의 비로 온몸에 젖은 흙투성이를 묻히고 꿈꾸듯 모로 누워 네 발을 가슴께로 모은 채 모처럼 깊은 잠을 자고 있구나 뾰족한 턱과 길고 날카로운 발톱 뭉툭한 꼬리를 가진 네 이름을 알 수 없어 나는 미안하다 우리는 도로에서 죽은 짐승을 보곤 한다. 이 짐승에게도 삶이 있고 고통이 있었을 터, 시인은 그 주검을 그저 지나치지 않는다. 무명의 짐승이라도 그 영혼을 위로해주고 인간으로서의 미안함을 표명한다. 도로 위 짐승의 죽음은 문명에 의한 것이기에. 하나 죽음은 또한 “온몸에 젖은 흙투성이를 묻히”며 살아야 하는 고단함의 끝을 의미하기에, “모처럼 깊은 잠을 자고 있구나”라고 시인은 죽은 짐승을 위로한다. 문학평론가
2025-04-13
나는 본 적이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한 쌍의 돼지를 죽은 돼지 곁을 맴도는 돼지를 어찌하여 내가 이곳에 이르렀는가 묻지 않는 돼지를 도망가지 않고 도살자의 발치에서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돼지를 존엄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덕목일까. 위의 시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저기 돼지들이 길을 잃고 도심 한복판에 있다. 한 마리는 죽어 있고 그 “돼지 곁을 맴도는 돼지”가 또 한 마리 있다. 그 돼지는 자신이 이곳에 왜 있는지 묻지 않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또한 “도망가지 않고” 도살자에 의한 자신의 죽음을 끝내 맞이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죽은 동료 옆을 지키는 저 돼지가 생의 존엄성을 더욱 드높이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4-10
혼자 고통을 견디다 쓰러진 자들은 대개 엎드린 상태로 발견된다 지구에서 쓰러지면 지표면만큼 휜다 육교처럼 엎드린 채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아무도 부축하지 않는 생은 지구가 업고 간다 구부러진 자들은 두 손으로 지구의 목을 꼭 끌어안는다 엎드린 채 죽어간 자들을 바로 누여 장례를 치르려면 기다려야 한다 지구가 내려놓을 때까지 우리는 모두 대지의 자식이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맞아주는 존재자도 대지다. “고통을 견디다 쓰러진 자들은” 대지에 엎드리고는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생의 끝자락에서, 그래도 마지막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지구의 목”이다. 지구는 그렇게 죽어가는 이들을 받아들이며 안아준다. 지구의 마지막 모성이다. 고통스런 지상의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래도 위안 받는 것은 대지의 따듯함이다. 문학평론가
2025-04-09
밤도 당신을 닮았다. 깊은 가슴 속에서 소리 없이 우는 머나먼 밤, 피곤한 별들이 지나간다. (중략) 밤은 괴로워하고 새벽을 열망한다. 소스라치는 불쌍한 가슴. 오, 닫힌 얼굴, 어두운 고뇌여, 별들을 슬프게 만드는 열기여, 말없이 당신의 얼굴을 살펴보면서 당신처럼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닫혀 있는 죽은 지평선처럼 당신은 밤 아래 길게 누워 있다. 소스라치는 불쌍한 가슴, 머나먼 언젠가 당신은 새벽이었다. 체사레 파베세는 2차 세계대전 전후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작가. 위의 시는 한국처럼 서구에서도 ‘당신-님’이 시의 기둥이 되어왔음을 알게 해준다. 위의 시에서 당신은 밤과 같다. “피곤한 별들이 지나”가고, “깊은 가슴 속에서/소리 없이 우는”, “닫힌 얼굴”의 “어두운 고뇌”로 가득한 밤. 그래서 “새벽을 열망”하는 밤. “당신처럼 새벽을 기다리는” 시인은, 하나 “언젠가 당신은 새벽”이 될 것을 믿는다. 문학평론가
2025-04-08
엉겅퀴를 쓰다듬다가 찔레도 며느리밑씻개풀도 쓰다듬는다 찔리는 맛이 좋아서 이러다가 엄나무 아카시아 철조망도 쓰다듬을까 세상 무정이 베풀어주는 무관심의 은혜에 감사하다가도 무소속으로 누려온 자유가 때로는 역겨워져 자해하고 싶었다고 피범벅 두 손이 고백한다 장미에게 바치고 싶었다고 아직도 내 피가 붉은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단 한 번이라도 순수와 황홀에 봉사와 헌신의 의무를 스스로 무겁게 짐 져 보고 싶었다고. 회한이 마음에 사무쳐올 때가 있다. 이젠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 문득 지금의 삶이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시인은 그 사무침이 깊어 일부러 가시 있는 풀들을 쓰다듬는다. “찔리는 맛이 좋아서”다. ‘무소속으로’ 자유를 누리면서 “순수와 황홀에 봉사와 헌신”하지 못했다는 회한에 따른 자해. 이로써 그는 “아직도 내 피가 붉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4-07
기적 소리 배인 작업복을 벗고 밖으로 나서니 하늘이 갈라졌다 갈라진 하늘의 반은 뒤로 가고 반은 앞으로 갔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걸어갔다 내 안으로 난 길을 따라 내 밖으로 난 길을 따라 그대를 만나러 갔다 거기에서 다시 소란과 기차와 슬픔과 음행을 만나야겠다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서, 돌아오고 있는 그대를 만나야겠다 그리하여 용서 없이 사랑해보련다, 할! 시인은 어느 날 하늘이 갈라지는 일을 경험한다. “반은 뒤로 가고 반은/앞으로” 가는 하늘. 물론 이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어서, 하늘에 난 그 길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것. 시인은 그렇게 갈라진 마음의 안팎으로 난 길을 따라 “그대를 만나러” 간다. 예전에 “소란과 기차와 슬픔과” 운명을 같이 했던, “돌아오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돌아오는 그대를 만나 “용서 없이”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문학평론가
2025-04-06
흘러간다 물고기들 사이로 물풀에 찢기며 모래알을 들썩이게 하며 흘러가는 것만을 할 수 있다는 듯이 흘러가다 문득 뿌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끌려 올라가다 막다른 골목을 밀며 나아가고 골목은 자꾸 뾰족해지고 길어지고 갈라지고 고여서 깊어지는 감정 같아서 가라앉고 쓸려 가고 넘쳐흐른다 시냇물 성에 폭포 입김 빙하 바다로 출렁이는 이름들 새벽이면 잎사귀 위에 흔들리는 네가 있다 ‘너’를 기억한다. ‘너’의 ‘이름들’을. 이름들을 기억에 떠올릴 때마다 감정이 동반된다. 기억의 흐름은 마음의 흐름과 함께 하는 것, “흘러가는 것만을 할 수 있다는 듯이 흘러”가는 마음은 “물풀에 찢기”면서 “막다른 골목을 밀며” 아프고 어지럽게 나아간다. 그렇게 마음을 채우는 ‘너’의 이름들은 시냇물이라든지 폭포, 바다가 되어 출렁이는데, 결국 ‘너’는 새벽의 ‘잎사귀 위’에 다다라 고요히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4-03
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 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 수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 어떤 색깔은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법, 김상미 시인에게는 녹색이 그렇다. 그에게 이 색은 쓸쓸함을 깊이 느끼게 한다. 쓸쓸함의 감정이란 그에게 무엇인가. “모든 것을 갉아먹는” 바람 같은 것, 그래서 몸과 마음을 슬게 하는 것이다. ‘굳센 내면’도 무너뜨리게 만드는 쓸쓸함은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일어난다. 시간이 멈추는 실연으로 인한 쓸쓸함, 하여 “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를 사는 삶. 문학평론가
2025-04-02
그때 뱀이 뱀을 벗고 새로운 생을 구불구불 뒤틀면 풀숲으로 사라져 갔다 (중략) 빛 속으로 뱀처럼, 나는 나를 벗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벗고 영원한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영겁의 둘레에 가라앉아 한 개의 피리가 되는 꿈을 꾸면서, 조용히 똬리를 틀고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혼다 하시시는 한국 시인들과도 친한 일본의 시인. 우리 모두 갑자기 “나를 벗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 않는가. “뱀이 뱀을 벗”듯이 말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 시인은 “영원한 저편으로/사라지”는 생을 열망한다. 그는 사라져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 ‘영겁’ 속에서 “똬리를 틀”면서 “피리가 되”고 싶은 것. 즉 영원히 음악을 연주하는 생이다. 우리는 나를 벗는다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문학평론가
2025-04-01
연습된 표정에 빙의 되어 살아왔으니 나의 유일한 성공은 정면이 나의 얼굴이라고 믿는 너의 오해 손에 닿는 촉감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굴곡진 슬픔의 근육들 때문이지 아직도 모르겠니? 뒷모습을 네가 보았다면 또박또박 새겨진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텅 빈 이면만이 나의 진실이었으므로 답하지 않음으로 답했으므로 연인이나 친구처럼 친밀한 관계에서도 위 시의 표현대로 “연습된 표정에 빙의 되어” 사는 것이 사실이다. 그 표정의 정면을 ‘너’가 “나의 얼굴이라고 믿”기를 원하면서. 하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그 정면의 ‘이면’에 있는 진실을 네가 읽어주는 것일 터이다. 그 진실이란 표정 뒤에 있는 텅 빈 이면지에 슬픈 근육들로 새겨지는 마음. 이 마음은 시각이 아니라 “손에 닿는 촉감”, 그 낯선 감각에 의해 읽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5-03-31
2025-03-30
2025-03-27
사내의 생활에는 별 변화가 없다 사내는 단지 사회 상황의 변화를 통해 자신의 위치가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내의 머리통에는 뉴스의 내성이 생겨 매일 좀 더 많은 양의 뉴스를 원한다 뉴스가 없는 날 아아 사내는 미칠 것 같다 사내는 전쟁이든 최첨단의 정보든 유언비어든 스캔들이든 뭐든지 새로운 것을 원한다 좀 더 새로운 것에 미쳐가고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내는 라디오 이어폰을 뇌에 박고 뉴스를 기다리며 잠자리에 든다 뉴스에 둘러싸여 사는 우리의 삶. 위의 시를 시인이 쓸 땐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들었다면, 현재 우리는 유튜브에 중독되어 뉴스를 보며 산다. 여전히 “매일 좀 더 많은 양의 뉴스를 원”하면서. 새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소비하면서 현대인은 그 “좀 더 새로운 것에 미쳐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현대인의 “생활에는 별 변화가 없”는 것. 뉴스는, 새롭게 변모하나 늘 동일한 현대의 모순을 확연히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2025-03-25
한 발만 더 디디면 벼랑인데 바로 저기서 뿌리를 내리는 소나무가 있다 자세히 보면 소나무는 늘 바르르 떨고 있는데, 에멜무지 금방 새로 변해 날아가도 아무도 탓하지 않을 아슬함으로 잔뜩 발돋움한 채 바르르 떨고 있는데, 아직도 훌쩍 날아가지 않고 서 있는 저 나무가 기다린 것은 무어냐 예로부터 시인은 자연 사물의 속성이나 현상에서 인간이 따라야할 드높은 정신이나 의지의 표상을 찾아내곤 했다. 위의 시에 나오는 소나무 역시 그러한 표상. 아슬아슬하게 벼랑에 매달려 있는 소나무. “새로 변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벼랑 끝에 매달려 있지만, 소나무는 마치 이 극한의 지점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목숨의 끝에 이르기까지 무엇인가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듯이. 문학평론가
2025-03-24
눈썹과 아이라인을 그린다 상사 앞에서는 눈꼬리가 처지지 않게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킬 때는 두 눈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중략)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얼굴부터 살핀다 이마와 눈가에 주름 개선제를 바른다 아내의 잔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두 개의 직장을 가진 남자는 잠자기 전 화장을 지우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우면 맨 얼굴로 돌아가는 남자 화장한 얼굴이 자기 얼굴인지 클렌징한 얼굴이 자기 얼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뒤척뒤척 남자도 화장을 한다. 화장은 세상의 시각에 맞추어 자신의 얼굴을 가꾸는 행위. 직장에 가면 상사와 ‘아랫사람’ 앞에서 그들에 걸맞은 표정을 꾸며야 한다. 집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내의 심기에 표정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 중년이 된 남자는 돈벌이에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화장하는 삶을 힘겹게 살아야 한다. 위의 시는 유머러스하지만, 이젠 진짜 자기 얼굴이 헷갈리게 된 현대인의 생활을 씁쓸하게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5-03-23
스무 살의 나는 하루에도 아홉 번씩 죽었다 서른 살의 나는 이따금 생각나면 죽었다 마흔 살의 나는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 죽는 법을 자꾸 잊는다 무덤 속에서도 자꾸 살아난다 사는 일이 큰 이득이란 듯, 살고 살아나면 살아버린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 산문이 있었다 그걸 쓰느라 죽을 시간이 없었다! 위의 시의 ‘죽음’은 물론 상징적 죽음이다. 기성의 나를 죽이고 다른 내가 되는 과정이 고통을 동반한 성장이다. 시에 따르면, 스무 살 때 이런 시적인 죽음이 많이 일어난다. 하나 이 죽음은 ‘마흔 살’이 되면 ‘웬만해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나이엔 “죽는 법을 자꾸 잊”거나 죽어도 무덤에서 소생하기에. “서른과 마흔” 사이는 ‘산문’을 써나가야 하는, ‘살아버려야’ 하는 시기, 이땐 “죽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5-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