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기 바늘이 눈 흰자위를 찔렀을 때 흰 꽃받침 아래 작고 붉은 꽃이 피었다. 다음 날 한 친구의 급작스런 부고를 전해 들었다. 자살이었다. 오래전 옛 친구의 예기치 않은 전화. 목소리가 예전 그대로여서 늙음을 잠시 잊고 청년으로 돌아간 듯 수다 떨었다. 그렇건만 뒤늦게 전해들었다. 그 친구 폐암 진단받고 주변 정리하다 전화했단 얘기. 꽃가지 꺾어 선물로 주고받을 때 그 사람 눈에 오래오래 살아남아 있길 바라거늘, 꽃 꺾어 화병에 꽂는 건 생존을 잇는 게 아니라 자연스런 가장 완벽한 소멸을 목격코자 하는 것. 죽음은···. 시는···. 시간에서 시간을 떼어내는 일. …. 누구나 친구의 죽음을 자주 전해 듣는 때가 올 테다. 자신이 먼저 죽지 않는다면. 이때가 오면 죽음이란 “시간에서 시간을 떼어내는 일”이라는 인상적인 구절을 비로소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시인은 죽음과 시를 연결한다. 시도 시간에서 시간을 떼어내니까. 그에게는 오래 살아남길 바라며 화병에 꽂은 꽃-시-은 생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가장 완벽한 소멸”을 보여주는 죽음의 ‘화관’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11-03
우리가 처음으로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강했는지, 열정에 얼마나 취했는지, 좁은 침대에 하루 종일 또 밤새도록 누워서, 거기서 잠자고, 거기서 먹으며: 여름이었지요, (중략) 하지만 우린 한편으로는 길을 잃었지요,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침대는 뗏목 같았어요; 우리가 우리 본성과 멀리 떨어져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표류하는 것 같았어요. (···.) 그러자 그 둥그런 것들이 닫혔어요. 서서히 밤이 서늘해졌지요. 버드나무 길게 늘어진 이파리들이 노랗게 변해 떨어졌어요. 우리 각자 안에서 깊은 고립이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해 또 후회 없음에 대해 우린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다시 예술가가 되었어요, 여보. 우리는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요. …………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의 시. 여름은 열정의 삶을 상징하는 계절이나, 그 계절엔 도취에 빠져 길을 잃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운 침대는 뗏목처럼 표류하기도 한다는 것. 하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푸른 이파리들이 “노랗게 변해 떨어”지면, “깊은 고립이 시작”된다. 가을엔 이제 서로의 고립 속에서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고, “다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11-02
떠나고 싶다 생각을 했다 아픈 누나가 준 카메라를 들고 가 마지막 사진은 행복하게 즐겁게 라떼를 마시면서 저녁을 맞았다 갈아 온 원두에 물을 부었다 (중략) 커피숍에 들러 야외의 소리들과 맞담배를 피우며 어두워지고 싶었다 수고했다고 처진 등을 다독이면서 들숨 한 번 크게 쉬고 오래된 여관에 들고 싶었다 …… 낮의 삶이 있고 저녁의 삶이 있다. 낮은 활동하는 삶의 시간, 저녁은 어둠 속에 잠기기 전에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 아마 시인은 “아픈 누나”를 보내면서 그녀가 준 카메라로 “행복하게 즐”거운 삶의 마지막을 찍었을 터, 그러고는 들른 저녁의 커피숍에서 황혼에 물들어가는 야외와 “맞담배를 피우”고 있다. 어둠에 잠기는 삶에게 “수고했다고 처진 등을 다독이면서”, “오래된 여관에 들”어 잠들기를 희망하면서. <문학평론가>
2025-10-30
엄마는 사과껍질을 누구보다도 길게 깎았다 사과껍질을 안 끊어지게 길게 깎으면 복이 들어온다고 했다 엄마는 긴 사과껍질 똬리를 틀며 자식들의 길이 끊긴 데 없이 한없이 이어지길 바랐다 엄마는 사과껍질을 안 끊어지게 아주 길게 깎았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은 짧게 뚝 끊어졌다 아버지만 엄마가 깎은 긴 사과껍질이었다 한 번도 안 끊어지고 정년퇴임까지 무거운 우체부 가방을 메고 다니셨다 …. 이 시를 읽고 필자의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사과 껍질을 얇게, 끊어지지 않게 깎으셨던 엄마. 현재 할머니 나이인 엄마들은 모두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위 시 내용은 슬프다. 그 사과껍질처럼 “자신들의 길이 끊긴 데 없이” 이어지길 바란 ‘엄마’는 정작 일찍 돌아가셨다니 말이다. 하지만 ‘엄마’의 염원은 빛을 보긴 했다고. 아버지는 ‘정년퇴임까지’ 직장에서 잘리지 않고 오래 사셨다고 하니. <문학평론가>
2025-10-28
쓸쓸을 만난다. 골목어귀 끝에 쓸쓸이 서 있다. 쓸쓸을 따라간다. 쓸쓸의 손을 잡으면 환한 불이 켜질 줄 알았다. 쓸쓸을 끌어안을수록 더 쓸쓸의 몸이 된다. 서로의 몸속을 들어간다는 건 더 깊은 쓸쓸을 만나는 일이다. 산을 오른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쓸쓸이 달라붙는다. 쓸쓸의 계곡을 건너고 쓸쓸의 들을 걷게 한다. 더 쓸쓸한 사람을 찾고 더 쓸쓸한 전화번호를 펼치고 결국은 번호를 누른다. 쓸쓸한 인사가 물소리에 묻힌다. 꽃으로 피는 시기는 따로 있다고 말하면서 피는 시기를 알지 못한다. 꽃으로 피려고 버둥거릴수록 빠르게 진다. 빨리 걸어도 보고 숨이 차도록 책을 읽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쓸쓸을 만난다. 다시 피려고 온몸이 쓸쓸이다. …. 쓸쓸한 이에게 그래도 기댈 이가 아니면 쓸쓸 자체 아닐까. 쓸쓸은 쓸쓸한 사람의 마음을 잘 알 테니. 하여 시인은 “쓸쓸의 손을 잡으”려 하지만 정작 “쓸쓸을 끌어안을수록” 더 깊은 쓸쓸에 빠진다. 하나 쓸쓸이 달라붙을수록 “더 쓸쓸한 사람을 찾”게 되는 쓸쓸함, 그것은 “꽃으로 피려고 버둥거릴수록 빠르게” 지는 삶에서 온다. “피는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다시 피려고 하는 몸짓이 “온몸이 쓸쓸”로 만들기에. <문학평론가>
2025-10-27
매일 해가 지고요 매일 해가 뜨지요 닭 세 마리가 한 조로 갇힌 신식 철창 사육장입니다 영양 사료가 여덟 개 라인에 배식됩니다 숲 속엔 죄다 걷지 못한 나무들 야윈 발목에선 소독약 냄새가 진동합니다 오늘이 지나면 오늘이듯 삼파장 전구에 불을 켭니다 이만 오천 마리 부리들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부르다 만 노래를 이어 부를까 암탉이 무정무정 신음합니다 숲이 산란하는 시간입니다 ……. 위의 시의 사육장에서는 전구에 불을 켜면 ‘이만 오천 마리’ 암탉들이 배식된 ‘영양 사료’를 먹고는 “무정무정 신음”하며 ‘산란’한다. 오늘만 있는 매일, 낳기만 하며 살고 있는 닭들. 시는 이 닭들을 “야윈 발목에” 소독약 뿌려진 “걷지 못한 나무들”로 비유한다. 사육장은 그 나무들이 서 있는 숲이고. 이 숲은 현대인의 삶을 보여주는 비유 같다. 닭 세 마리 갇힌 ‘신식 철창 사육장’이 아파트를 떠올리게 하니까. <문학평론가>
2025-10-26
만화에서 투명인간을 그리는 건/ 골칫거리였지./ 작가들은 점선을 찍어 해결을 봤어/ 들창코를 종이에 바짝 붙인 우리, 오직 우리만 알아볼 수 있게,/ 투명인간들이 존재하는 공간과/ 우리 사이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유리, 점선으로 된 윤곽을 가진/ 투명인간,/ 그가 바로 날 기다리고 있다. 식탁 당신의 자리에/ 부재의 형상,/ 내 맞은편에 앉아/ 평소처럼 토스트와 달걀을 먹거나/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하늘이 살짝 무겁게 내려앉은/ 진입로 앞까지 앞서 걷는. 그 형상이 장차 당신이라는 걸,/ 우리 둘 다 안다./ 당신은 여기 없으면서 여기 있을 거라는 걸,/ 더 이상 거기 없는 고리에/ 모자를 걸 듯, 그런 몸의 기억으로. ….. 캐나다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애트우드의 시. 현대인의 존재 방식을 ‘투명인간’을 호출하여 흥미롭게 드러낸 시다. 만화 속 인물들은 알지 못하지만 독자는 알아볼 수 있도록, 작가가 점선으로 윤곽을 표시해 드러낸 투명인간. 현실 속 우리 역시 서로 점선 윤곽으로 나타나는 투명인간이라는 것. ‘부재의 형상’으로, “여기 없으면서 여기 있”는 존재로, 살아 있는 몸이 아니라 몸의 기억으로 여기 있는 ‘당신’처럼. <문학평론가>
2025-10-23
(전략) 내가 거울 밖에서 나를 쳐다보며 우는 여자를 가여워하지 않는 건 떠나겠다는 것 내가 전화기를 끄고 전화기를 던지는 것 내가 계단이 없는 곳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듯 춤을 추는 것 내가 이 음악이 무거워서 견딜 수 없는 듯 허우적거리는 것 겨울 속 편두통 내가 떠나겠다는 것 물속에 잠긴 공주는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거울 밖으로 거품을 내뿜으며 춤을 추는 것 내가 이 거울을 떠나겠다는 것 …… ‘거울’은 이상의 시 ‘거울’ 이래로 주체를 문제시하는 상징적인 제재가 되었다. 위의 시에선 거울 속의 ‘나’가 주체다. ‘나’는 거울을 떠나려 한다. 거울 속 “나를 쳐다보는 우는/여자를” “떠나겠다는 것”, 그녀의 반사상으로서의 틀이 물속에 빠진 자의 무게처럼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서 부패해가기보다는, “거품을 내뿜으며/춤을 추”면서 ‘나’는 거울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한다. 이 ‘나’는 무의식 아니겠는가. <문학평론가>
2025-10-22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논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대지가 숨쉰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태양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의 땀과 사랑이 영생(永生)한다. ….. 사과 한 알이 자라는 데에는 낮의 햇빛과 밤의 달과 별, 그리고 대지의 양분이 필요하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주의 모든 기운들이 들어와 숨 쉬고 불타고 속삭이고 있는 것, 하늘의 구름도 이에 동참하여 사과 속에 들어와 노닌다. 또 한 가지, 사과를 키우는 우리 인간의 “땀과 사랑”도 사과 속엔 들어와 있다. 이로써 사과를 키우며 우주의 기운과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은 사과 속에서 영생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10-21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나무 화분 안에 갇힌 한 마리 새처럼 어둠 속에서 날개 터는 작은 소리 들었다 큰 화분으로 옮겨주면 날개 접고 노래 부를 수 있을까 화분과 한 몸처럼 붙어 모종 삽날로 흙덩이를 파낸다 제 뿌리를 맴돌며 시간을 쌓고 있었다 뿌리가 뿌리를 껴안은 것 같지만 서로 밀어내고 있었다 품을 수 없는 어둠이 싱크홀처럼 자라고 있었다 화분을 깨트리고 나서야 나무는 자유로워졌다 아니 새는 몸이 가벼워졌다 함부로 뻗은 생각을 쳐내자 이제 뿌리가 가지런해졌다 새는 날기를 멈추고 또 다른 세계를 찾아 발을 멀리 놓겠지 ….. ‘나무’는 시인의 마음을 비유할 터, 뒤엉켜 있어 서로 밀어내고 있는 화분 속의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나무”의 뿌리처럼 시인의 마음에도 여러 모순적인 생각들이 뒤엉킨 상태겠다. 시인은 나무-생각-를 가두고 있는 화분-틀-을 깨트리자 나무는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화분에 갇혔던 새-정신-도 몸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고. 하여, 이제 새는 날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무-되기’를 통해 “다른 세계를 찾”으려 한다. <문학평론가>
2025-10-20
나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오직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키워온 말입니다 아직은 익지 않았습니다 내가 할 말은 세상에 없는 첫 향기일 것입니다 어떤 냄새와도 다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마음입니다 비슷한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껍질만 닮았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이나 사랑한다는 말은 저온 창고의 과일들처럼 이미 죽은 말입니다 나는 당신께 살아 있는 말을 건네러 왔습니다 나는 처음을 꺼냅니다 나는 당신을 빨강합니다 이토록 싱싱한 나의 빨강을 당신께 드립니다 ….. 시에 따르면 말을 키운다는 것은 싱싱한 빨간 사과를 키우는 일이다. 이미 따서 ‘저온창고’에 저장한 사과 같은 말도 있다. “보고 싶다는 말이나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다. 시인은 그러한 상투어에서 벗어나 사과의 빨강과 같은 말을 마음속으로 키운다. “아직 익지 않았”기에 보여주지 못했던 말. 이제 시인은 “세상에 없는 첫 향기”일 “살아 있는 말”을 꺼내 ‘당신’에게 건넨다. “나는 당신을 빨강함니다”라는 말. <문학평론가>
태양이여 나를 다시금 완전하게 해다오 나를 사랑한다 말하는 이들의 뜨거운 거짓말 속으로 용의 이빨처럼 흘러넘치는 산산조각 난 내 진실을 사랑할 수 있게 모든 것이 끝나면 파편 하나하나가 뜨거워서 손댈 수 없는 여전사처럼 완전무장을 갖추고 솟아올라 사람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음악의 밤 골목으로 스며들 것이다 모차르트는 백인놈이었지. …… 미국 흑인 페미니스트 운동가이자 시인인 오드리 로드의 시. 시인의 마음-진실-은 산산조각 나 있다. 뜨거운 거짓말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태양의 힘을 빌려 진실의 파편들을 뜨겁게 사랑하고자 한다. 그 파편들이 “뜨거워서 손댈 수”조차 없도록. 그리 되면 파편들이 녹아 “완전무장을 갖”춘 완전체로 융합될 터, 하여 “사람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음악”처럼 “골목으로 스며들”리라고 시인은 다짐한다. <문학평론가>
2025-10-16
아무래도 흘러간 날들 중엔 흘려보낸 날들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혹은 내버려두어도 당신의 뒷모습이 표정보다 더 오래 남는다 다 그리기도 전에 자리를 터는 피사체를 보면서, 시간과 질감을 한 획에 그리는 놀이만 손에 익히면서, 벌건 숯이 어느 날 더 하얗게 잠들기까지 품고만 있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을 모르면서, 우리는 결국 꺼져야 다시 만날 이른 봄의 밤바람이 될 거면서, …….. ‘흘려보낸 날들’이란 당신에 대한 기억들을 떠나보내는 날 아닐까. 당신의 표정은 점차 “다 그리기도 전에” 사라져서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하는, 그래서 그 뒷모습을 추상화 그리듯 “시간과 질감을 한 획에 그리”게 되는 그런 날. 그 날은 “벌건 숯이” 점차 “하얗게 잠들”어 가는 시간, 그 시간 동안 시인은 당신의 뒷모습을 “품고만 있”다. 불이 다 꺼졌을 때 비로소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문학평론가>
2025-10-15
콩국은 열두 살 순임이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 무를 썰거나 배추를 다듬으면서 한눈을 팔면 금세 넘쳐버린다 순임이는 어머니 눈을 보면서 자란다 부풀어 오를 때마다 화로 구멍을 반쯤 막거나 살살 저어 달래주어야 한다 그래도 가라앉지 않으면 따뜻한 온기 담아 후우후우 불면서 가만히 어루만져주어야 한다 국자로 저어서는 절대 안된다 화로 앞에 앉아 콩국을 끓이실 때 지상의 어머니는 가장 아픈 손가락을 먼저 생각한다 …. 위의 시의 어머니에겐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자식이 있다. “가장 아픈 손가락” 같은 자식이 그렇다. 콩국 끓일 때처럼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열두 살 순임이” 같은 아이. 콩국처럼 “살살 저어 달래주”고 “가만히 어루만져주어야” 순임이는 넘치지 않기에. “어머니 눈을 보면서 자란” 순임이는 마음이 아픈 아이인 것일까···. 음식을 만들어주는 어머니의 마음이 자식에 대한 사랑과 겹쳐지며 잘 드러난 시. <문학평론가>
2025-10-14
어릴 적 아버지 등에 업혀 새벽어둠 가르며 의원 가던 날 있었다 얼마나 빠르게 뛰시던지 아픈 것보다 등에서 떨어질 것 같기만 했던 나 언제나 변함없이 뒤로 앞으로 내밀어주신 크신 두 손 지금까지도 큰 산이 되어 생각만 해도 온기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전화 첫 마디가 언제나 나다, 라시던 나의 아버지 …… 많은 이들이 아버지의 정을 느꼈던 기억이 있을 테다. 예전 아버지는 대부분 무뚝뚝하신 모습이다. 하나 아플 땐 아버지의 진짜 마음이 드러난다. 위의 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이 어릴 적, 아플 때 그를 등에 업고 새벽을 가르며 의원으로 달려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 기억으로 인해 아버지는 시인에게 여전히 그를 지켜주는 “큰 산이 되어”주며 “온기로 가득/채워주”시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10-13
지금은 냉동실에 칸칸이 쟁여진 검정 비닐봉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쟁여둔 것조차 잊었다가 아차, 유통기한 넘겼나 싶어 봉지들을 꺼낸다 그게 먹다 남긴 고등어 토막일지 오래전 넣어둔 조랭이떡일지는 뒤집어봐야 안다 장을 새로 본 양지머리를 집어넣어도 부지불식간에 색과 향을 잃고 만다 살얼음을 뒤집어쓴 채 침묵하는 그것 검정 비닐봉지 속을 헤쳐 유예된 지금을 찌개 냄비에 붓고 끓인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도처에 서식한다 해진 가죽 소파 위 쿠션처럼 얹혀 있다가 장롱 속 남편의 넥타이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고 베란다 화분들 사이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바글바글 김이 오르는 지금이란 잡탕찌게를 국자로 떠 담는다 (하략) ….. ‘지금’은 과거와 연결된 시간이겠으나, 과거는 냉동고 속 음식들처럼 얼어붙어 있다. 과거는 ‘지금’이 되고 싶으나 되지 못한 것들, 시인은 얼어붙은 과거들이 ‘지금’이 될 수 있도록, “유예된 지금을 찌개 냄비에 붓고 끓”인다. 하여 이 ‘지금’이란 찌개는 ‘잡탕찌개’가 된다. “어제의 지금”과 “내일의 지금”이 뒤섞인 잡탕찌개. ‘지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시인은 ‘지금’이 집 안 “도처에 서식”하고 있으며, 언제나 ‘임박’해 있다는 것 역시 발견한다. 시 쓰기란 시간을 발견하여 ‘지금’이란 찌개를 만드는 일이겠다. <문학평론가>
2025-10-12
살아생전 독서를 즐긴 그였다 촛불 하나 곁에 두고서 종종 그 위로 자신의 손을 갖다 대곤 했다 납득하기 위하여 자신이 살아 있음을, 자신이 살고 있음을. 그가 죽은 이래로 밝혀진 촛불 하나 줄곧 그의 곁을 지킨다 두 손을 가리운 채. ……. 쥘 쉬페르비엘은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프랑스 시인. 위의 시에 등장하는 독서가는 촛불을 곁에 두고 살았을 것이다. 전기가 일반화되기 이전엔 촛불을 곁에 두고 책을 읽어야 했을 테니까. 그는 “자신이 살아 있”고 “살고 있음을” 알기 위해 종종 ‘뾰족한’ 촛불 위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대”었다고. 그의 삶을 증명해준 그 촛불은 그의 죽음 이후로도 그의 존재를 잊지 못하고 “줄곧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2025-10-09
아이는 열두 컷 편지를 가졌다 그것은 열두 잎을 가진 나무의 이야기 (중략) 살구나무가 좋아 저녁으로 사람들이 고인다고 아이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 내가 화분마다 물을 준다 고장 난 시계태엽을 돌리고 저녁도 없이 밤을 부른다 어둠이 발등에 차린 밥상, 물컹한 가지 조림을 먹고 찬물을 마신다 찬물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식탁 끝이, 언제부터 절벽이었나 생각할 때 멀리서 달려오는 편지가 내게 팔베개를 한다 별을 그리면 손바닥만 하게 커지는 그 저녁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나무라 불러야 하나 열두 컷 그림 속에서 잎사귀만 한 아이가 손을 흔든다 …. ‘살구나무’를 좋아하는 아이는 나무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그 그림에 ‘나’는 물을 준다. “고장 난 시계태엽을 돌”려 꿈의 밤을 다시 불러오려고. 현실의 밤은 찬물 같다. 그 밤에 앉는 식탁 끝은 절벽이 되었다. 하여, 시인은 나무 그림 속 아이로부터 “멀리서 달려오는 편지가” “우리 속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해주길 기다린다. “열두 잎을 가진 나무의 이야기”를 담은, “별을 그리면 손바닥만 하게 커지는” 편지를. <문학평론가>
2025-10-01
할머니 제사는 매년 돌아오지만 엄마 배 속에서 죽은 오빠는 돌아오지 못한다 달력 속 음력은 늘 작은 글씨 죽은 사람은 물결로 떠오르고 산 사람은 땅에서 씨를 뿌린다 생일이 매년 바뀌는 사람과 살고 있는 나도 음력 뒤에 오는 봄이 좋아진다 오곡밥과 고사리, 무, 건취, 곤드레, 표고 이것들은 모두 달의 뿌리에서 나온 것 밖에 눈이 온다 음력 눈이다 물이 많은 눈이다 ….. 제사는 대개 음력에 맞추어 지낸다. 달력에 음력 날짜는 마치 숨기려는 듯이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데, 그것은 음력이 죽은 이를 부르기 때문 아닐까. 음력을 따르는 세계에서 “죽은 사람은 물결로 떠오”른다. 음력은 달의 운행 주기에 따른 역법, 태양이 빛을 내려준다면, 달은 이와 대조적으로 물을 연상시키기 때문이겠다. 음력에 맞춰 지내는 명절날 먹는 ‘오곡밥’과 나물들도 “달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문학평론가>
2025-09-30
떠난 것들이 왜 내게는 남아 있는지 몰라서 강릉 바다 앞에 선다 무엇이 이리 막막한 걸까요? 어머니, 아버지! 이토록 그을은 그리움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요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묻는다 모르는 것 투성이가 그을음이었다 그을음 자욱한 물음은 바다에서 산으로 메아리를 울린다 나는 바다의 창문을 열고 내다본다 육이오 때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남몰래 밝혔던 등불이 내 상처 위에 남아 있다 그것이었다구요? 그리움의 그림자를 보라구요? 막막한 그것이라구요? ……. 윤후명은 소설가로 유명하지만, 시로 먼저 등단했다. 위의 시는 말년에 다다른 시인이 부모님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절절하게 토로한다. 시인은 그 그리움을 그을었다고 말하는데, 그을음은 “모르는 것 투성이”로 인해 생긴 것, 그는 자신의 그리움이 무엇 때문인지 막막한 것이다. 하나 그리움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리움의 그림자인 그을음이라고 한다. “남몰래 밝혔던” 등불에 의한 상처인 그 그을음이.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