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씩 일렁이는 집 묵묵했던 바닥에 의심이 묻어난다 각박한 모서리마다 둥글게 닳고 닳아 빠져나갈 수 없는 층과 층 사이 안락함과 두려움의 두터운 벽 사이 두 눈 질끈 감고 침묵 중인 건 아닌지 오래전 속 깊이 생긴 실금 어긋나지 않게 다독이는 건 그 틈으로 빛바랜 해가 지기 때문인지 어깨 짓누르는 세간살이 젖은 짐으로 낡아 가는 바닥에게 묻고 싶다 삶에 안정을 얻고, 벽에 둘러싸인 집안에서의 생활을 자연스레 받아들게 되었을 때, 과연 ‘지금 이 삶이 내가 추구하던 삶이었던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위의 시도 그런 질문을 던진다. 현재 생활 아래 있는 바닥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을. “안락함과 두려움”으로 인해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 “층과 층 사이”의 ‘두터운 벽’이, 지금껏 견지해왔던 삶의 바닥에 실금을 내고 있지 않는지 의심하면서. 문학평론가
2025-02-17
길은 길게 기더라 배밀이로 기어서 갈 길 올 길을 빤히 보여주거나 대문 앞까지 안전하게 길손을 배송하더라 (중략) 길은 제 방식의 길을 버리지 않는 고집이 있더라 나서부터 물 발자국 아래 기었고 밟혔고 움직이는 목숨들의 길이 되는 생 자기는 맨바닥까지 낮추는 이타의 길, 눈부셔라 연달래 꽃장화를 신은 듯 갓길 꽃빛도 곱더라만. 시는 사물의 이미지를 재창출하여 삶과 세계를 새로이 생각하게 이끈다. 위의 시는 ‘길’의 이미지를 재창출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나, 우리 삶을 밑에서 받쳐주는 존재자가 있다. 길이 그렇다. 길은 “자기는 맨바닥까지 낮추는/이타의 길”을 살아간다. 길은 자신을 배밀이로 간신히 밀어내면서, “움직이는 목숨들의 길이 되”어 살아가는 것. 가끔 길의 이 고단한 길을 “갓길 꽃빛”이 곱게 단장해주기도 하지만. 문학평론가
2025-02-16
아름다운 것은 쉽다 수리 발톱 같은 뿌리로 흙을 틀어쥐고 흙 속의 피를 빨아올려 태양계속에 벨벳보다 부드러운 수백 겹의 겹눈을 굽는다 푸르고도 연하고도 날카로운 가시는 대기 속의 화농을 쿡 찌른다 조롱도 자부심도 이 밀도 앞에선 잠잠 들어간 자는 나올 수도 나온 자는 들어갈 수도 없으니 이 감옥에서는 늘 불 냄새가 난다 (하략) 위의 시에 따르면, 장미는 역설적이게도 공격성을 통해 아름다움을 얻는다. “흙 속의 피를 빨아올”리고 태양빛을 받아 부드러운 이파리들을 구워내는 불로 사용하니. 이 공격성은 연하면서도 날카로운 가시로 대기 속의 화농을 찔러 터뜨리는 데서도 나타난다. 하여 그 가시로 대기는 더 깨끗해지는 것, 세계의 정결함을 지켜내는 가시는 장미 넝쿨을 함부로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요새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2-13
함성과 비명, 피비린내는 가라앉고 주검이 널렸던 골짝은 역사가 되었다 공주에서 부여로 통하는 우금치골 도대체 어디로? 분노에 떨며 솟아올랐던 호미, 낫, 쇠스랑, 대나무 창 회오리치던 바깥세상에서 볼 때 그들의 주먹이야 바위를 치는 계란 여기를 빠져나갔어도 어차피 죽음이 기다렸을 거라면 떠도는 혼백들에게 위로가 되랴 너무 몰랐다 안방에서 큰소리치던 권력자들도 운명이라 체념하던 천한 것들도 좁혀오는 그물에 갇혀 파닥이던 물고기 방향도 모르고 내달리던 울분. “안방에서 큰소리치던 권력자들”은 모른다. 민중 속으로 퍼져나가는 분노를. 해소되지 못한 분노는 언젠가는 터질 터이다. 피비린내를 동반하면서. 동학 민중 봉기처럼. 비록 그 봉기가 “바위를 치는 계란”과 같았다고 하더라도, “좁혀오는 그물”처럼 “어차피 죽음이” 다가왔을 세상, 죽임을 당한 동학 농민들은 자신의 봉기를 후회하지 않으리라. 민중의 울분을 무시하는 권력이란 결국 몰락함을 역사는 가르쳐준다. 문학평론가
2025-02-12
올해도 살아서 벚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평생 몇 번쯤 벚꽃을 보는 걸까요 철 드는 게 열 살쯤이라면 아무리 많이 잡아도 일흔 번쯤 서른 번, 마흔 번인 사람도 흔하니 얼마나 적게 보는 것일까 훨씬 더 많이 본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조상의 시각도 섞이고 겹쳐서 흐릿해진 탓이겠지요 요염하다 해도 아리땁다 해도 섬뜩하다 해도 포착하기 어려운 꽃 색깔 꽃보리 아래를, 슬슬 걸어가면 일순 고승처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보통 상태 일본 시인 노리코가 노년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쓴 시. 매년 피고 지는 벚꽃을 본다는 일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 시인은 계속 살아 벚꽃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계속 보다보면 “훨씬 더 많이 본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인데, 그것은 조상의 시각이 자신의 눈에 겹쳐지기 때문이라는 것. “포착하기 어려운 꽃 색깔”을 가진 벚꽃은 삶 속의 죽음을 드러내기에 그렇다. 죽음이야말로 ‘보통 상태’라는 것을. 문학평론가
2025-02-11
가을이 소멸되어 가는 끝자락 적상산 안국사에 올라가 보면 산천은 갈갈 가을 색으로 앓고 있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신선하여 깊고 마음마저 깊어지는 극락전 앞에 서서 먼 산을 향하면 구름안개 물결치는 파도도 보이고 겹쳐 있는 산 능선이 유독 아름답다 욕심 없이 살라는 가르침 뒤로 자연과 사람이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겠다 삶의 한 구비를 돌아 삶의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하는 이라면, 저 “가을이 소멸되어 가는” 풍경과 삶을 겹쳐놓게 될 테다. “자연과 사람이/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갈갈 가을 색으로 앓고 있”는 산천이 보여주는 풍경은 아름답다. 바람도 신선하다. 새로 청명한 삶을 맞이할 마음이 생긴다. ‘나’에게 저 아름다운 자연이 스며들며, 남은 삶을 자연처럼 “욕심 없이 살라는 가르침”을 건네준다 문학평론가
2025-02-10
떠남과 머묾이 한자리인 강물을 보며, 무언가를 따지고 누군가를 미워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나쁜 생각인 줄 모르고서 흘러도 답답히 흐르지 않는 강을 보면서, 누군가를 따지고 무언가를 미워했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상하지 않고 오직 나만 피 흘리는 중이란 걸 모르고서 그리고 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 줄도 까맣게 모르고서 사실, 저 강물이 암시하듯이 누군가를 떠나고 누군가에게 머무는 것이 삶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평화롭지 않다. 시에 따르면 “무언가를 따지고/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고생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고생 속을 헤매는 삶은 흘러도 흐르지 않는 것 같고, 이 따짐과 미움이 결국 자기만을 상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 그것이 “아무것도 상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정말 다행이라고 시인은 한 번 더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2025-02-09
거대한 유리천장입니다. 사람들이 눈송이로 내려 유리 위에 소복소복 쌓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려도 방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 안은 저렇게 따뜻한데, 몸을 녹여 물로 수증기로 되돌아갈 수 있는데. 다른 길을 찾아보자 라고 말하며 구름 위의 물방울들은 동요합니다. 그러다 한 물방울이 뛰어내립니다. 어쨌든 우린 함께 있잖아. 난 저기로 갈래. 결심한 나도 뜁니다. 아득한 추락의 느낌, 단단한 물의 분자가 눈으로 바뀌는 팽창의 순간을 지나고….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그리고 느낍니다. 두껍고 거대한 유리천장에 잔금이 가는 소리.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해방에 도달할 수 있을까. 위의 시는 해방은 광장을 거쳐야 함을 말해준다. “우린 함께 있”다는 각성과 더불어, ‘유리천장’ 때문에 도저히 따듯한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여겨졌던 마음을 바꾸고, 그 유리천장 위로 함께 뛰어내리는 것. 그때 물방울은 눈으로 팽창하며 유리천장을 무너뜨리고 해방의 삶으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 광장은 이 해방을 향한 ‘함께 함’의 상징적 공간이라 하겠다. 문학평론가
2025-02-06
황혼이 길을 잘못 찾아들어 항구의 저녁이 유난히 아름다웠다고 하자 주머니에 손을 찌른 사람들의 눈이 붉었던 것은 드럼통에 지핀 불이 메웠기 때문이라 하자 왜 아늑한 것들은 멀리서 반짝이는지 어떤 저녁에는 코에 익은 비랜내도 오래된 노래처럼 서러워지는 거라고 하자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은 새들이 좁쌀 같은 온기를 물고 날아갔기 때문이라 하자 삶의 황혼에 들어서기 시작하는 이는 황혼이 깔리는 늦가을 날 하늘을 보면 유독 쓸쓸함을 느낄 테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 앞에서는 슬픔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위의 시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이제 삶을 뒤돌아보게 되는 나이엔 “아늑한 것들”이 “멀리서 반짝이고”,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아 모든 감각들이 “오래된 노래처럼 서러워”진다. 하나 이때가 가장 삶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나이인 것. 문학평론가
2025-02-05
나는 맞은편 기슭으로 가련다 강물이 하늘의 색깔을 고쳐 쓴다 나도 고쳐 쓴다 나는 움직인다 나의 그림자가 기슭에 물든다 번개에 타버린 나무같이 나는 맞은편 기슭으로 가련다 맞은편 기슭의 숲 속에서 고독한 산비둘기 한 마리 푸드득 놀라서 내게로 날아온다 세계를 유랑하는 중국의 저항 시인 베이다오의 시로, 시인의 다짐이 잘 드러나 있다. 그에게 저항이란 “맞은편 기슭으로 가”는 일, 그곳은 “강물이 하늘의 색깔을 고쳐” 쓰기에 “나도 고쳐” 쓸 수 있어서다. “번개에 타버린 나무같이” 된 자신의 그림자가 물들 수 있는 곳. 번개란 진실을 말함일까. 여하튼 기슭에서의 삶은 고독을 사는 일이나, 그곳에서 고독한 ‘산비둘기’가 시인에게 날아와 동지가 되어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5-02-04
지나온 날 돌아보면 뜨거운 여름은 혁명 성장기 가을과 겨울은 비폭력 혁명 수행기 꽃 다투어 피는 봄은 혁명 대폭발기 그렇다 푸른 숲 연초록 논밭은 영구평화론을 위한 무위이화 근거지였던 것이다 날은 저물고 길은 아득한데 나는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영구혁명론은 세습되는 것이다 혁명은 폭동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것, 현실에 쫓기며 자신의 삶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이들 중 일부는 혁명을 꿈꾸기도 한다. 진정한 혁명은 무엇인가. 시에 따르면, 자연의 시간은 영원히 순환하는 혁명을 보여준다. 저 “푸른 숲 연초록 논밭”이야말로 영구혁명을 통한 영구평화를 이루어낸 존재자이며, 노자가 말한 저절로 이루어지는(무위이화) 혁명과 평화의 근거지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세습되는 영구혁명론. 문학평론가
2025-02-03
나른한 세포들이 살아난다 슬픔과 지루함이 사라진다 권태와 묵은 때가 사라진다 무지와 타성이 사라진다 하얗게 생각이 증발해 간다 어디까지 가야 영원에 닿을까 생고생을 자처하며 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와 잔등은 규칙과 불규칙 사이에서 엇박자를 낸다 앞선 사람들이 찍어놓은 발자국에 발을 포갠다 땀방울이 고인다 호흡이 턱까지 차오른다 발품을 팔면 나를 만날 수 있을까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구절초가 나를 본다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가 나를 본다 나의 보폭은 줄어들지 않는다 일시적이라도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의 상태에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시인은 ‘산행’을 추천한다. “생각이 증발”하면서 “나른한 세포들이 살아”나는 산행. 이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는 무(無)의 상태가 아니다. 영원으로 가는, “땀방울이 고”이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 나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나. 이 ‘나’의 발견은 구절초나 소나무가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인지하면서 이루어진다. 문학평론가
2025-02-02
나무 밑에서는 아이들이 떠들며 논다 나는 까치에게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꼬마들은 아예 아무 생각 없으리라 까치에게도 아무 생각 없을 것이다 까치는 아이들을 사람으로 안 보는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앉는다 작년의 그 까치일까 내년에도 올까? 아이들만 있다면 더욱 허전할 내 마음이 까치가 있어 치료 받는다 까치가 온 것도 모르고 옆 호의 부부는 방 안에서 키득거린다 까치가 왔으니 생각들을 끄자 까치가 먼 데서 찾아왔으니 인천하고도 송림동 이 산동네를 까치가 와서 어린이들과 같이 놀고 있으니 우리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며 산다. 문학적, 철학적 생각이 아니다. 대개 생활 문제, 돈과 관련된 생각이다. 그러니 그 생각은 우리를 부자유에 얽맨다. 저 떠들며 노는 아이들과 “아무 생각 없을” 까치들이 어울리는 장면은, 생각으로 가득 찬 어른에겐 자유로운 존재로 보인다. 시인은 저 장면을 보면서 잠시라도 “생각들을 끄자”고 마음먹는다. “먼 데서 찾아” 온 까치가 “내 마음”을 치료해준다고 느끼면서. 문학평론가
2025-01-23
살아 있는 동안 말할 줄 알았던 자 묵언 한 발짝 한 발짝 길을 잃고 길을 가는 벚꽃 터지는 정적 실바람처럼 가랑이를 빠져나가는 마곡사 계곡 길 종잡을 수 없는 청명(淸明), 떠날 때 잠깐 주인이었던 이유 여행 가방에서 살짝 삐쳐 나온 셔츠 끝에서 나풀댄다 간명한 표현으로 인생의 깊은 의미를 길어올렸던 김종삼 시인. 장무령 시인은 그로부터 ‘묵언’으로 “살아 있는 동안 말할 줄 알았던 자”를 읽는다. 시에 따르면, 이 묵언의 말은, “마곡사 계곡 길”에서 시인이 만났던 “길을 잃고 길을 가는” 정적과 같다. “종잡을 수 없”지만 ‘청명’한 바람 같은 말. 이 청명한 말이 가방 위로 삐쳐 나온 셔츠를 나풀대게 할 때, 삶은 잠깐이나마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1-22
발바닥이 간지러운 삼월이야 벌써 세 번째 밤을 질러 장례식장을 들렀지 까치발로 담 너머를 훔치듯 뒤뚱대던 풍등이 날아오르듯이 구멍 하나 남기지 않고 하늘을 끌고 사라지듯 축하드립니다 봄! 입김이 얼음 알갱이로 바뀌는 문 뒤로 조심스레 봉투를 전하고 국밥 그릇 속 고깃점으로 망자를 맛보다 돌아오지 봄밤은, 딱히 헤드라이트가 필요 없을 만큼 산수유 개나리도 조등을 내걸어 사나흘은 배웅을 나서는 때 겨울이 가고 도래한 삼월의 초봄. 하나 기쁜 날일수록 슬픈 일이 겹친다. 이 아름다운 봄밤에 시인은 세 번씩이나 장례식장을 들르고, 국밥을 먹으며 “망자를 맛보다 돌아”온다. 망자와의 인연과 그의 삶에 대한 기억을 되씹어보는 것이리라. 삶의 풍등은 “하늘을 끌고 사라지”고, 봄을 알리는 “산수유 개나리”는 조등을 내걸어 밤을 밝힌다. 봄날과 죽음의 풍경을 대조하며 삶의 아이러니를 씁쓸히 조명하는 시다. 문학평론가
2025-01-21
어느 분의 댓글에서 하룻밤을 묻어가시라는 인사를 보았다 분명 ‘하룻밤을 묵다’라고 적을 것을 오타가 난 것이리라 어둠 속 갈 곳 없는 하루가 버거워 무작정 달려가 어머니 치마폭에 고개를 묻고 펑펑 눈이 짓무를 때까지 울어본 사람은, 거친 어머니 손이 잔등을 쓸쓸 쓰다듬으며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던 잠이 있었던 사람은, 하룻밤을 묵은 것이 아니라 하룻밤을 묻은 것이다 (하략) ‘묵다’는 여정 가운데 쉰다는 것.‘묻다’는 무엇인가를 땅 안으로 넣어버린다는 것. 어쩌면 댓글을 단 분은 오타를 내지 않은 것 아닐까. 그도 어느 ‘하룻밤’, “어머니 치마폭에 고개를 묻”어본 일이 있는 이라면. 살면서 쌓인 설움을 쏟아내고 묻을 수 있는 넒은 품을 가진 존재자, 그는 어머니밖에 없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잔등을 쓸쓸 쓰다듬으며” 눈물을 다 받아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줄 수 있는 이는. 문학평론가
2025-01-20
꽃차와 뿌리차의 차이에 대하여 생각한다 뿌리는 제 뿔로 어둠을 부러뜨리며 나아갔을 것이므로 그도 땅 속의 꽃에 다름 아니다 꽃차를 마실 때 나의 표정이 우아하여 보이기를 꿈꾸지 않는다 도라지차를 마실 때 땅속에서 핀 힘겨운 꽃잎과 지상에서 만나야 했던 보랏빛 연민들도 함께 마셨다 별처럼 하얀 꽃잎일 때도 있었다 꽃잎의 가녀린 아름다움. 그것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 생명을 밀어 올리며 나타난 고투의 결과다. 도라지 뿌리는 꽃과는 반대 방향으로, 지하의 어둠 속으로 “제 뿔로” 파고 들어간 고투의 결과로 형성된 것. 하여 이 뿌리 역시 아름답다 할 수 있지 않는가. 지하를 비추는 “별처럼 하얀 꽃잎”처럼. 그 아름다움은 꽃차를 마실 때와는 달리 쓴 맛이 돌기도 하겠지만, 그 맛이야말로 삶의 깊이를 담아 그윽하지 않는가. 문학평론가
2025-01-19
끝도 없이 적막한 수평선 그 적막 모서리마다 나무를 심고 싶어 둥둥 떠다니는 수중 나무를 걸릴 것이 없이 떠다니다 길 잃은 배를 인도하는 바다 나무를 풍랑에 뒤집힌 뱃조각에 매달린 어부들 허리 감아올리는 나무를 물 없는 사막에도 나무를 심는데 지천으로 뻗은 수평선에 나무를 심으면 등대 없이도 항해의 길, 순탄하겠지 (하략) 수평선에 나무를 심는다는 발상이 재밌다. 수평선 위의 나무는 어떤 역할을 할까. 사막에 심은 나무는 생명이 열리는 장소를 만들어내기 시작할 테지만, 수평선 위의 나무는 이와는 다른 역할을 한다. 난파된 배를 인도하고 뱃조각에 매달린 어부들을 끌어올리는 역할. 그러니까 파괴된 삶을 구원해주는 역할. 나아가 항해의 길을 밝혀주는 등대 역할도 할 것이다. 우리 삶의 바다에도 이런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문학평론가
2025-01-16
어디가 피곤한 나그네의 마지막 거처가 될까 남국의 야자나무 그늘일까 라인 강변의 보리수나무 밑일까 나는 낯설은 사람의 손으로 묻히는 것은 아닐까 사막 같은 데에 아니면 해변의 모래 속에서 잠드는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좋다 그 곳이 어디건 하늘이 나를 에워싸고 밤에는 별이 등불을 켜고 내 위를 비출 것이다. 독일의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하이네의 시. 혁명 시인 김남주가 감옥 안에 있을 때 옮겼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삶은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흘러간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시인은 이 나그네로서의 삶이 안락하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하나 삶의 의미는 안락한 끝에 있지 않다. “그 곳이 어디건” “내 위를 비출” 별처럼 빛나는 이상을 따라 나가는 삶이야말로 시인에겐 가치 있는 삶이다. 문학평론가
2025-01-15
뜨거운 모래 하릴없는 둥근 손안으로 가벼이 흘러가는데, 마음은 하루가 너무 짧았음을 느꼈네. 금빛 해변 흐리게 하는 습기 찬 가을의 문턱 가까워지자 갑작스러운 불안함이 내 맘을 사로잡네. 손은 시간의 모래 담는 항아리, 박동하는 내 마음은 모래시계라네. 온갖 헛된 축이 커져만 가는 그림자 말 없는 시계 판의 바늘 그림자 같구나.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이탈리아 탐미주의-허무주의 시인 단눈치오. 위의 시는 그의 허무주의가 잘 드러난다. 시간은 손으로 움켜쥔 모래, “시간의 모래 담는 항아리”인 손 아래로 시간은 스르륵 빠져나간다. ‘박동’하는 마음은 모래시계처럼 점점 비워지는데, 하루는 너무 짧아 마음은 불안함에 사로잡힌다. 오직 남는 것은 “헛된 축이 커져만 가는” 시간의 그림자 뿐, 저 아름다운 금빛 해변은 점점 흐려지고…. 문학평론가
2025-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