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화
쓸쓸을 만난다. 골목어귀 끝에 쓸쓸이 서 있다. 쓸쓸을 따라간다. 쓸쓸의 손을 잡으면 환한 불이 켜질 줄 알았다. 쓸쓸을 끌어안을수록 더 쓸쓸의 몸이 된다. 서로의 몸속을 들어간다는 건 더 깊은 쓸쓸을 만나는 일이다.
산을 오른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쓸쓸이 달라붙는다. 쓸쓸의 계곡을 건너고 쓸쓸의 들을 걷게 한다. 더 쓸쓸한 사람을 찾고 더 쓸쓸한 전화번호를 펼치고 결국은 번호를 누른다. 쓸쓸한 인사가 물소리에 묻힌다.
꽃으로 피는 시기는 따로 있다고 말하면서 피는 시기를 알지 못한다. 꽃으로 피려고 버둥거릴수록 빠르게 진다. 빨리 걸어도 보고 숨이 차도록 책을 읽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쓸쓸을 만난다. 다시 피려고 온몸이 쓸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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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이에게 그래도 기댈 이가 아니면 쓸쓸 자체 아닐까. 쓸쓸은 쓸쓸한 사람의 마음을 잘 알 테니. 하여 시인은 “쓸쓸의 손을 잡으”려 하지만 정작 “쓸쓸을 끌어안을수록” 더 깊은 쓸쓸에 빠진다. 하나 쓸쓸이 달라붙을수록 “더 쓸쓸한 사람을 찾”게 되는 쓸쓸함, 그것은 “꽃으로 피려고 버둥거릴수록 빠르게” 지는 삶에서 온다. “피는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다시 피려고 하는 몸짓이 “온몸이 쓸쓸”로 만들기에.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