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훈
백수는 사랑을 하고
사랑은 백지를 탐하게 하고
백지 안에는 사랑을 꾸며 써야 하고
그럼에도 은유하지 않고 사랑의 시를 쓰고
(이것은 과연 감탄할 기백인가 알량한 고집인가)
시는 이렇게나 믿을 만한 것이 없고
믿음이 없으면 배반을 하게 되고
배반은 한평생 백수처럼 할 짓이 못되고
할 짓이 없으면 혼자임을 구걸하고
구걸은 울부짖는 혼자가 되고
혼자는 요컨대 백수임이 틀림없고
그러다가 백수가 백수가 아니게 되면
(이 시는 짧게 끝나야 한다)
사랑을 시인하게 되고
….
1996년생 시인의 시로 MZ세대의 감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시 아닌가 한다. 이 젊은 ‘백수’는 시를 왜 쓰게 되었는가. 누군가를 사랑해서다. 그 누군가에게 보낼 사랑의 시를 쓰고 싶어 백지를 탐하게 되고, 하나 이 사랑의 시가 꾸밈이 아닌지 의심하여 시를 배반하지만 배반은 혼자-백수-로 돌아오게 하고, 백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국 다시 시를 붙잡고 “사랑을 시인하게 되”는 역설의 연쇄를 담고 있는 시.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