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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부분)

등록일 2025-11-02 16:20 게재일 2025-11-0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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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글릭(정은귀 옮김)

우리가 처음으로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강했는지, 열정에 얼마나 취했는지,

좁은 침대에 하루 종일 또 밤새도록 누워서,

거기서 잠자고, 거기서 먹으며: 여름이었지요,

(중략)

하지만 우린 한편으로는 길을 잃었지요,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침대는 뗏목 같았어요; 우리가 우리 본성과 멀리 떨어져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표류하는 것 같았어요.

(···.)

그러자 그 둥그런 것들이 닫혔어요. 서서히 밤이 서늘해졌지요.

버드나무 길게 늘어진 이파리들이

노랗게 변해 떨어졌어요. 우리 각자 안에서

깊은 고립이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해

또 후회 없음에 대해 우린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다시 예술가가 되었어요, 여보.

우리는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요.

 

…………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의 시. 여름은 열정의 삶을 상징하는 계절이나, 그 계절엔 도취에 빠져 길을 잃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운 침대는 뗏목처럼 표류하기도 한다는 것. 하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푸른 이파리들이 “노랗게 변해 떨어”지면, “깊은 고립이 시작”된다. 가을엔 이제 서로의 고립 속에서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고, “다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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