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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군견의 노후

개는 사람에 비해 후각은 1만배, 청각은 40배, 시각은 10배 우수하다. 그래서 군과 경찰에서 요긴하게 이를 활용한다. 순수혈통의 종견(種犬)에서 태어난 강아지는 3개월째부터 신병훈련소에 입소한다. 앉아! 서!, 물어! 놓아! 뛰어! 돌아와! 같은 명령어를 알아듣는 기초훈련을, 7개월부터는 작전훈련에 돌입한다. 1년여 훈련을 이수하면`적격 심사`를 받는데, 10마리 중 2마리가 통과한다. 군견에는 세퍼트가 80%이고, 말리노이즈가 20%, 리트리버가 2% 정도 있는데, 용맹한 진돗개는 실격이다. 충성심이 너무 많아서 고락을 함께 했던 군견병이 제대를 하면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고, 오래 그를 잊지 않고 있다가 기회를 봐서 탈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퍼트는 친화력과 넉살이 좋아서 짝꿍이 바뀌어도 일주일만 같이 있으면 그 군견병과 친해진다. 세퍼트가 가장 많은 이유다.군견도 상징적 계급이 있는데 보통 부사관급으로 대우해준다. 그런데`소위`에 추서된 군견이 있다. 제4땅굴 발견 당시 북한군이 매설해놓은 지뢰에 몸을 던져 1개 분대병력을 살려내고 산화한 `헌터 소위`가 그 충견이다. 제4땅굴 입구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고, 예쁜 묘지도 있으며, 헌터의 행적과 공적을 새긴 동판과 `충견`이라 쓴 비석이 세워져 있다.그리고 1968년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기습했을 당시 숨어 있는 공비를 찾아내 사살하는데 큰 공헌을 한 군경 `린틴`은 `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군견이 받은 최초의 훈장이다.가장 가슴 아픈 일은 군견병과 군견의 이별이다. 군견병이 예편할 때, 군견이 8세가 되어 제대하고 안락사 당할 때이다. 전에는 제대한 군견은 실험용으로 가거나 안락사를 시켰다. 안락사테이블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군견을 차마 보지 못해 눈물을 펑펑 쏟는 군견병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법이 개정되어서 반려견으로 기증돼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됐다. 12살된 폭발물 탐지견 `평화`가 제대하고, 새 주인을 만났다. 평화로운 노후를…./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30

영의정·국무총리

조선시대 영의정은 170명인데, 그 중 최장수 영의정은 황희. 그는 태종이 3남을 후계자로 세울 뜻을 품고 있을때 “장남 양녕대군을 올리셔야 합니다” 주장하다가 유배됐다. 세종은 정적(政敵)인 그를 불러들여 무려 18년이나 영상의 자리를 지키게 했다. 당시에는 `영의정의 권한`이 볼품 없었다. 좌의정은 이조, 예조, 병조판서를 겸했고, 우의정은 호조, 형조, 공조판서를 겸임했으나, 영의정은 서열만 높을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눈썹`과 같아서 자리는 제일 높은데 하는 역할이 없었다.그래서 세종은 황희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영의정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앞으로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함께 국사를 협의해서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라” 왕명에 의해 영의정의 역할이 만들어졌다. 모든 국사는 3공(公)이 관장하는 의정부에 일단 올라간 후 거기서 가부를 결정한 후 왕에 보고했고, 왕명은 의정부를 통해 6조에 하달됐다. 다만 세종은 이조의 인사권과 병조의 병권에 관한 사항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보토록했다. 권한의 절묘한 안배였다.영의정 중에서 백성들이 가장 좋아했던 분이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사신 떠날때 장안의 백성들이 길거리가 터지도록 몰려나와 “편히 다녀오소서” 환송을 했는데, 이 장면을 본 사람이 상왕 태종이었다. 심온 영의정은 `인기가 너무 높은 죄`로 상왕에 의해 역모죄를 쓰고 숙청됐다. 그래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불행한 영의정`이란 말을 들었다.조선조 초대 영의정은 경상도 성주 출신의 성산배씨 배극렴이었다. 위화도 회군을 주도하며 태조의 신망을 한몸에 받은 개국공신1등이었다. 그의 묘소는 충북 증평군 증편읍 송산리에 있고, 충북도 기념물 98호로 지정돼 있다. 이 전통을 이어 충청도 국무총리 한번 내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그곳 출신 여러 인물들이 청문회에서 낙마하거나, 간신히 국회를 통과하고도 중도 하차한다. 아무래도 살풀이 씻김굿이라도 한번 벌여야 할 모양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29

양철북

`오스카`는 태어날 때 이미 성인급 두뇌를 가졌고, 처음 세상을 보는 순간 “아차! 잘못된 시절에 태어났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어머니의 자궁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이미 탯줄이 잘려서 포기하고, 살아보기로 한다. 어머니가 “3살이 되면 양철북을 사주마”라고 약속했기 때문에 더 용기를 냈다. 세살이 되던 해 양철북을 받았지만, 세상의 부조리를 더 알게되었다. 어머니의 불륜을 목격하면서 더 절망하고, “지금부터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겠다” 며, 지하실에 굴러 떨어져 크게 다치면서 `성장판`이 닫혔다.오스카는 부조리를 볼때 마다 쇠소리를 지르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유리창이 깨어졌다. 나치군대가 행진을 할 때 따라다니면서 양철북을 쳐댔고, 행진곡은 엉망이 되고, 행렬도 흐트러졌다. 히틀러가 오스카의 고향마을에 와서 선전선동 연설을 할때마다 양철북을 쳐서 연설을 망쳐버렸다. 그러나 세살짜리 젖먹이가 하는 짓이라 잡혀가지는 않았다. 무슨짓을 해도 면책이 되기 때문에는 3살짜리로 머물러 있기로 했던 것.귄터 그라스(1927~2015)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양철북`의 줄거리다. 그는 1차대전후에 태어나 청년기에 2차대전을 겪는 불우한 세월을 살았다. 두 차례나 패전한 독일에서 살았던 작가는 “전후의 부조리와 모순과 갈등과 빈곤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절실히 그린 소설은 없었다”란 평가를 받았으며, `양심의 상징`이란 소리도 들었다. 사실 그는 독일의 양심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는 17세때 나치 친위대에서 복무했던 적이 있다”라고 고백했다. 맞아죽을 일이었지만 그는 양심을 선택했다. “나는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가지면 세계평화를 위협한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반유대주의자로 찍힐까봐 입을 닫는 비겁한 인간이었다”란 자백까지 했다.우리에게도 이런 양심(良心)이 필요하다. 같이 죽자며 `물귀신 리스트`를 남기고,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고, 뭣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우리의 현실이 `양철북 소리`를 간절히 기다린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28

정경(政經)의 고리

1961년 6월 이병철 삼성 회장은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났다. 당시 여러 경제인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속돼 있었다. 이 회장은 이렇게 설득했다. “경제인들이 탈세와 부정축재자로 몰린 것은 비합리적인 세율 때문입니다. 경제인들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고 세수가 줄어 국가 운영이 타격을 받습니다. 이들에게 경제건설의 역할을 맡기면 어떨까요” “그것은 국민이 납득하지 않을 겁니다”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바로 정치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박정희는 미소를 지었다.경제인들은 구속에서 풀려났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병철도 103억400만환의 처벌을 받았다. 이 회장은 다시 박정희에게 건의했다. “현금 대신 그 벌금으로 공장을 지어 그 주식을 정부에 납부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제안도 최고회의 의결을 거쳐 `투자명령`이라는 좀 이상한 법령으로 실현되었다. 정치와 경제가 유착관계에 빠진다 해서 다 잘못된 것은 아니고, 타협에 의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선회될 수 있는 사례였다.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행보가 바로 전형적인 정·경 유착이었다. 자기 자신은 5만원짜리 양복을 입으며, 가난했던 청소년시절의 검약정신이 체질화됐지만, 사업에 도움이 될 정권실세들에게 집어주는 돈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성완종 다이어리`에 오른 국회의원만 220명이나 되고, 그 힘에 의해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에 무려 두 차례나 특별사면을 받은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인데, 그 또한 돈의 힘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아무리 `돈 안 쓰는 정치`를 외쳐보지만, 우리나라처럼 `청렴도 하위권`국가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헛구호다. 성 전 회장의 장례식에 온 의원은 20여명에 불과하고, 권력자들은 “그 사람 잘 모른다”며 도망갈 개구멍만 찾는다. 온 나라가 공황에 빠져 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 아니겠는가./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27

사람과 개는 천친(天親)

“왜 유독 개가 사람에게 충성스러운가”를 알아보려고 일본의 한 연구팀이 개와 사람을 한 방에 넣어 눈을 맞추게 한 후 소변검사를 했더니,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이 분비됐음을 발견했다. 옥시토신은 출산을 돕고, 젖을 잘 돌게 하며, 산모가 아기에게 사랑을 느끼고, 남편에게 모성본능을 갖게 하고, 협상을 할 때 코끝에 뿌리면 신뢰감이 커진다.다른 동물에는 반응이 없는데, 유독 개와 사람 사이에는 분비되니, 개는 사람에 대한 `충성유전인자`를 갖게 된 모양이다. 연구팀은 “수천년전 사람이 개를 길들여 가축화하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받아 DNA가 함께 바뀌는 공(共)진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했다. 노자(子)는 “아기는 엄마가 못생겨도 외면하지 않고, 개는 주인이 가난해도 무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의 법칙이 그런 본성을 만들어 두었다는 것.미국에서는 “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대통령 될 생각을 말라”한다. “내 가족에게는 욕을 해도 내 애견 팔라는 욕하지 말라”고 말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내가 죽어 동상을 세우려거든 필라의 것도 함께 세워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그대로 됐다. 에이브러험 링컨은 늘 애견 피도를 품에 넣고 다녔고, 버락 오바마는 애견 보와 미식축구를 즐긴다. 조지 W. 부시는 무섭게 생긴 바니와 옥시톡신을 흡족히 교환하는 사이다.세계에서 가장 비싼 개는 머리가 사자같이 생긴 티베트산 마스티프(사자개)인데, 중국에서는 이 개가 부의 상징이었다. 좀 있어 보이려면 이런 개를 몰고 다녀야 한다. 그러나 최근 된서리를 맞았다. 반부패운동이 확산되면서 사자개는 개집속에 깊이 숨겨졌고, 값도 형편 없이 추락했다. 한 마리에 20억원이나 했으니, 사자견 사육자는 재벌 축에 들었지만, 요즘에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한 개도축업자로부터 “30위안(5천400원)에 한 마리 팔아라”란 소리를 들은 사육업자는 허파가 뒤집어져서 몸져 누웠다는 소식이다.사람과 DNA가 비슷한 견공들. 버려진 개가 배회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24

말 둘러대기

“남자는 우산과 거짓말을 항상 갖고 다녀야 한다”란 말이 한때 영국에서 유행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찔끔거리는 영국에서 우산을 상시 지참해야 하는 것 같이, 언제 어디서 난처한 일을 만날지 모르니 `둘러댈 거짓말`을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처칠 같은 유명 정치인도 “유능한 정치인은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약속이 지키지지 않을 때 적절히 둘러댈 말을 준비하고 있어야 유능한 정치인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선거법이 엄격해지고, 정치인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자,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권력을 쥐겠다는 사람도 줄어들었다.미국인들은 어릴때부터 “거짓말 하지마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기 때문에 거짓말을 최악의 악덕이라 생각한다. 미국 대선 당시 “닉슨 후보 진영에서 워트게이트 아파트에 있던 반대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했느냐”란 의회 질문에 닉스 대통령은 “그런 일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FBI간부가 `내부고발`을 함으로써 거짓말이 들통났다. 미국인들은 그의 거짓말을 용납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이완구 총리가 3천만원을 받은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거짓말 하고 말 둘러대기를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국민정서인 것 같다. “금방 들통날 일은 왜?” 2012년 대선때 관여하지 않았다 했지만 찬조연설하는 유세장면 사진이 나왔고, 충청포럼에 전혀 아는 사람이 없다 했지만 성완종 회장, 반기문 고문이 있는 충청권 VIP 모임에 아는 사람이 없다니…. 성 전 회장과는 19대 국회때 본게 전부라 했지만 최근 23번 만난 사실이 드러났다. 이쯤되면 `거짓말 중독증` 수준이다.그의 고향은 충남 청양군 비봉면 양사2리이다. 맵기로 유명한 청양고추의 고장에서 태어났는데 말은 왜 그래 맵지 못한가. 그래도 고향의 일부 친지들은 “여주 이씨는 본디 강직한 성품이다. 총리께서 그럴리 없다”며 끝까지 믿어보려 한다. 그는 JP·반기문과 함께 `충청도의 희망`인데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면…./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23

효소왕과 뇌물죄

신라 32대 효소왕때 일이다. 통일신라는 안정돼가고, 백성들도 평화를 원했다. 화랑도는 국군에 편입되고, 사조직 형태로 조금 남아 있었는데 당시`죽지랑`의 무리 중`득오곡`이라는 화랑이 한 열흘 결근을 했다. 알아보니 부산성(건천읍 오봉산 산성) 수비대장 `익선`이 징집해갔다는 것이다. 죽지랑은 떡과 술을 마련해서 그를 면회갔고, 익선에게 “득오에게 휴가를 좀 주게”하며 간청했으나, 익선은 완강히 거절했다. 그때 밀양지역에서 세금을 거두어 돌아오던`간진`이 죽지랑의 부하사랑에 감복하고 익선의 고집불통이 미워서“조(租) 30 섬을 주겠으니 휴가를 주시오”라고 했으나 역시 거절하므로, 말안장을 얹어주니 그제서야 허락했다. 아무리 화랑이 힘 없는 시절이지만 김유신 장군 휘하에서 싸웠고,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죽지랑인데 일개 부대장이 뇌물을 받고 부탁을 들어주다니…. 이 일은 곧 궁궐에 알려졌다.체포조가 들이닥쳤을 때 익선은 도망가고 그 맏아들을 잡아 더러움을 씻긴다며 연못에 빠뜨렸는데 그 때는 한겨울이라 얼어죽었다. 효소왕의 징벌은 혹독했다.“익선이 모량 출신이므로, 모량사람은 관직에서 쫓아내고, 승복을 입지 못하며, 중이 된 자라도 절에 못 들어간다”당시에는 중이 귀족이었는데, 원측법사는 고승이었으나 모량출신이라는 이유로 승직을 주지 않았다.모량부는 22대 지증왕의 처갓곳이다. 지증왕의 음경이 너무 크서 배필을 얻기 어려웠는데, 요행히 모량부 상공(相公)의 딸이 거물급이라 무사히 혼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곳은 신라 초기 왕족·귀족들의 분묘가 수십 기 있는 성지이다. 그런데도 효소왕은 그 마을을`독직사건 뇌물죄`를 물어 가혹하게 처벌했다.뇌물을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아무 조건 없이….”라고 말하지만,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인데, 어떻게 아무 조건이 없단 말인가. `효소왕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한국에서 공직에 나갈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번은 치러야 할`홍역`이기를…./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22

상대별곡(霜臺別曲)

고려말에 벼슬길에 올랐다가, 친원파·친명파 갈등 속에서 한때 유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세종대왕이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대사헌을 맡겼던 양촌 권근. 그가 지은 `상대별곡`은 사헌부의 위세를 잘 보여준다. 검찰과 감사원을 겸하고, 언론기능까지 있어서, 왕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사정 없이 탄핵했던 사헌부. 그래서 서리상(霜)자를 쓰서 상대(霜臺)라 불렀다. 비록 왕족이라도 비리가 드러나면, 그 죄목을 판자에 써서 가시더미와 함께 그 집 대문앞에 세워놓았다. 우두머리 대사헌이 부임하는 날에는 모든 관원들이 도열해서 예로 맞이하게 돼 있는데, 흠결이 있는 자를 왕이 총애해서 낙하산 임명을 했다면, 취임하는 날 관원들은 도열해 맞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 본 척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코를 쥐고 돌아가는데, 그러면 왕이 직접 사헌부에 와서 통사정을 할 정도였다. 탄핵당한 왕족을 좀 봐달라고 왕이 대사헌을 은밀히 불러 당부를 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사헌은 “그렇게 하면 관원들이 소신을 탄핵할 것입니다”라며 거절한다.이런 서릿발 같은 기관이라, 사헌부 관리들의 몸가짐은 어느 관원보다 엄했다. 의관은 늘 추레하고, 얼굴은 영양실조로 파리했지만, 그 기상은 어느 누구보다 당당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3사는 청요직(淸要職)이라 불렸고, 이런 기관에 등용된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았다. 그만큼 출세길도 빨랐으며, 정승 판서에 오르려면 적어도 청요직을 거치는 것이 `필수 엘리트 코스`였다.`성완종 리스트`가 정·관계의 핵폭탄이 되고 있다. 지난해 4월에는 “유병언의 돈 안 먹은 자 있냐”란 소리가 나오더니 올 4월에는 “성완종 돈 안 받은 자 있냐”란 말이 들린다. 힘깨나 쓰는 자 치고 그의 `밥` 안 먹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정경유착의 귀재`였다고 한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두번씩이나 특별사면을 받았으니, `로비 일기`가 썩은 곳을 다 들춰낼 것이다. 검찰이 이번에 `사헌부정신`을 제대로 발휘해주기를 바랄 뿐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21

지록위마(指鹿爲馬)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 시황제가 죽자 나라가 망조들기 시작했다. 황제가 객지에서 중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자, 국경을 지키는 장남 부소(扶蘇)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군권은 부장 몽념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 내 장례를 치르라”란 내용이었다. 상주(喪主)를 맡긴다는 것은 후계자란 뜻이다. 유언장을 쓴 후 시황제는 곧바로 숨을 거뒀다. 황제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환관 조고(趙高)와 왕자 호해(胡亥)와 승상 이사(李斯), 그리고 환관 두어 명 뿐이었다. 조고는 야심이 발동했다. 황제의 편지를 위조해서 “부소와 몽념은 자결하라”란 편지를 전방에 보냈다. 부소는 자결했으나, 몽념은 거부하다가 반역죄로 처형됐다. 조고는 호해를 후계자로 세웠는데, 그는 멍청한 허수아비였으니, 조고는 자신이 황제가 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가 걱정이었다. 어느날 조회때 그는 사슴을 몰고와서 “이 말을 폐하께 드리려 합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그건 말이 아니오”라고 하자, 조고는 신하들을 돌아보며 여부를 물었다. 조고의 말에 부화뇌동해서 “말입니다”라고 한 사람은 살려주고, 사슴이라고 바로 대답한 사람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 후 조고 자신도 황제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암살당했으며, 진나라도 전국에서 일어난 반란군에 의해 멸망했다. 그래서 `지록위마`란 말은 “거짓이 참을 압도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면 망한다”란 뜻으로 널리 인용된다.이완구 총리가 단단히 뿔났다. 일본이 중학교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땅”란 내용을 수록토록 하자, 총리는 “이장폐천(以掌蔽天·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림)하지 말라”일갈하더니 이틀 후에는 일본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두고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했다.일본교과서에 “4~6세기 아마토정부는 가야에 관서를 두고 신라 백제 등을 지배했다”고 적힌 것을 총리가 통박한 것.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역사학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지방방송`인데, 버젓이 교과서에 실었다. 일본이 이렇게 `지록위마`하다가 나라 망치는 것 아닌가./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20

외교의 묘수(妙手)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제 목숨 하나 살겠다고,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할 심산이었지만, 광해군은 전장을 누비며 의병을 모집하고 백성들을 격려하면서 왜군의 북상을 막을 방어망을 쳤다. 백성의 신망은 당연히 광해군에게 쏠렸는데, 선조는 그런 아들을 시기 질투해서 무던히도 괴롭혔다. 신하들과 백성의 성원으로 광해가 등극하는데, 전장을 누빈 경험이 있는 왕과 입만 놀리는 신하들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었다. 왕은 국제정세를 잘 읽기 위해 많은 세작(간첩)을 보냈다. “멀리서 열 사람이 보는 것보다 한 사람이 가까이서 보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명나라는 지는 해이고, 청나라는 떠오르는 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신하들은 “임진왜란때 우리를 도와준 명의 은공을 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의리론을 놓지 못했다.광해군은 국제정치에는 밝았으나 국내정세에는 어두웠다. 반정세력의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속절없이 쫓겨났다. 쿠데타로 등극한 인조는 노골적으로 청나라와 반목하다가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까지 맞아 삼전도의 치욕을 당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잡혀갔다. 소현세자는 광해군과 비슷했다. 당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려고 애쓰고, 청나라 실권자들과 사귀며 국제정치의 안목을 넓혀갔지만, 봉림대군은 방에 앉아 공자와 맹자왈이나 했다.볼모에 풀려서 귀국했을 때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진언하다가 벼루로 머리를 얻어맞고, 침을 잘못 맞아 온몸이 까맣게 타서 급사했다. 차남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고, 정책목표를 북벌(北伐)에 두었지만, 백일몽으로 끝났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청을 무슨 수로 당하겠는가.광해군과 소현세자를 잃은 것이 `역사적 치명상`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어 적절히 대응·교류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요체다. 지금 우리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북한 등과의 복잡 미묘한 관계에 있다.`외교의 묘수`를 찾기 위한 외교력 향상에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17

수로부인

신라 33대 성덕왕은 석가모니처럼 수행(修行)하겠다며 궁궐을 빠져나갔지만, 곧 잡혀 와서 왕이 되었고, 에밀레종으로 유명한 봉덕사를 세웠으며, 모든 죄수들을 다 풀어준 적도 있다. 그 무렵 수로부인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적혀 전한다. 천하일색인 수로는 수시로 신물(神物)에 잡혀갔다가 돌아왔다. 남편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길이었는데, 당시는 동해안 길을 따라 며칠을 걸어서 강원도까지 갔다, 가다가 절경을 만나면 거기서 점심 식사를 했으니, 부임길이 유람길이었다.천길 넘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앉았는데, 바위위에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부인이 주위 시종들에게 꽃 좀 꺾어줄 수 없느냐 물으니, “저기를 어떻게 올라갑니까” 한다. 그 때 소를 몰고가던 노인 한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짙붉은 바위가에/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꽃을 꺾어 받자오리다”가사를 지어 부르더니 냉큼 바위를 타고 올라가 꽃을 꺾어와 바쳤다. 노인은 바위위로 올라가는 루트를 잘 알고 있었던 모양.거기서 이틀을 더 가다가 임해정(臨海亭)이라는 절경을 만나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바다용이 나타나 수로를 안고 물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일행이 속수무책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면 쇠도 녹습니다. 바다 짐승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겁니다”라고 하면서 노랫말을 짓기를 “해신아, 해신아, 수로를 내놓아라/남의 부녀를 앗아간 죄 얼마나 크냐/만약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너를 잡아/구워먹겠다” 노인이 시킨대로 했더니, 바다용이 순순히 수로를 받들고 나와 공에게 바쳤다 하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한다.영덕군은 지난해 심포지엄을 열어 “헌화가의 현장은 영덕 굴곡포이고, 이틀을 더 간 곳 `해가`의 현장은 관동8경의 하나인 월송정이다”란 결론을 얻었다. 역사유적은 아는 만큼 보인다. 고전을 알면, 굴곡포와 월송정이 `역사유적 겸 절경`으로 날개를 달게 된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16

어긋난 송아지

옛 중국은 청나라 부이황제를 끝으로 일본과 러시아에 의해 해체된다. 그 무렵 이종오(李宗吾)라는 학자가 “이 거대한 중국대륙이 덩치값도 못하고, 작은 섬나라 영국과의 아편정쟁에서 굴복하고, 일본에 만주를 뺏기고, 왜 이 꼴이났나” 생각하다가, `후흑학(厚黑學)`이란 책을 썼다. “역대 중국 승자들은 대부분이 얼굴 두껍고 속 검은 자들이었다. 이런 나라가 무사하겠는가. 멸망의 원인은 우리 속에 있었다”란 결론이었다. 그 승자들이 국내적으로는 이겼으나 국제적으로는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말이었다. 지난 대선때 각 정당들은 `든기 좋은 말들`을 마구 쏟아냈다. 그중에서 압권은 “국회의원 수 줄이겠다”는 소리였다. 귀가 솔깃했다. 국민혈세만 갉아먹는 국회의원을 줄이면 복지예산을 확 늘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 정당들은 “의원을 100명 줄여 200명으로 하자”했다. 국민들은 “200명도 많다. 100명으로 해라”고 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국회의원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선거 끝나봐라. 깨끗이 잊어버릴 것이다”지금에 이르러 100명 줄이기는커녕 100명 늘리겠다는 소리가 터져나온다. 새정련 문재인 대표는 “국회의원 400명은 돼야 한다”고 했다. 인구에 비례해서 의원을 뽑는다면 OECD국가 중에서 우리나라는 적다는 것이다. 인구수와 비교하면 적을 지 모르지만, `특권`이나 보수와 비교하면 어떨까. 한국은 국회의원 천국이다. 장관이나 기업인을 불러놓고 호통치는 위세와 재미, 불체포특권, 항공기 등 교통비 공짜, 막말 상소리를 내질러도 그냥 넘어가는 국회윤리위, 불법정치자금을 받아도 대충 유야무야 빠져나가는 권세, 일년 내내 법안 한 건 심의 의결하지 않고 지역구관리만 해도 세비 꼬박꼬박 챙기는 무노동 유임금, 이런 국회의원이 세상에 어디 있나.그러고도 “국회의원 수 100명 더 늘리자” 하는 것은 `얼굴 두껍고 속 검은 자들`이니 그럴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엉덩이에 뿔 난 어긋난 송아지들`을 계속 뽑아주는 유권자들에 있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15

우울증

조선 21대 영조(英祖)는 42세에 사도세자를 얻었다. 맏아들을 잃은지 7년만의 경사였다. 세자가 읽을 서책을 왕이 직접 필사했다. 세자의 영특함이 뛰어났으니, 세자는 칭찬만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5세 이 후부터 영조의 교육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식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면서 `잘 해도 질책, 못 해도 책망, 말을 안 해도 호통` 그런 돌변한 교육 밑에서 세자의 정신상태는 점점 일그러져 갔다. `아버지 공포증`을 이기지 못해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시도까지 했고, 사람 발자욱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뛰고 혼절할 지경까지 되었다. 어릴때부터 동궁에서 홀로 생활하는 동안 폐쇄공포증에 걸렸고,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궁궐을 떠나 지방으로 가면 안도감에 병세가 많이 호전되는데, 한 번은 궁궐 담을 뛰어넘어 평양까지 놀러갔다 와서 대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니 영조의 질책은 더 혹독해져갔고, 궁궐내에서는 “세자가 부왕을 죽이려 한다”라는 흉훙한 소문이 돌았고, 그 말이 영조의 귀에 들어가면서, 마침내 세자를 뒤주속에 가둬 죽인다.당시 내의원(內醫院)에는 `정신신경과`라는 진료과목이 없었으니, 우울증에 대한 전문적인 진단과 치료를 할 수도 없었다. 영조도 그때 70세이니 망령이 들 나이도 됐고, 항우울증 치료제도 없던 시절이라, 세자의 우울증은 치료가 불가능했다. 이것이 `우울증이 낳은 왕실 비극`에 대한 첫 공식기록이다.우울증은 자신의 불행뿐 아니라 남의 생명까지 희생시킨다. 독일의 한 항공사 부기장이 150 명을 태운 항공기를 알프스산맥 근처에 고의로 추락시켰다. 혼자 자살하지 않고 남들과 죽음길에 동행한 것. 기장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문을 안으로 잠그고 결행한 동반자살 행각이었다. 그는 우울증 치료를 해왔고, 최근에는 `근무에 지장 없음`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우울증을 단순히 `마음의 감기`로 가볍게 볼 병이 아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병이니, 많은 생명을 책임지는 업무 종사자들에 대한 정신과적 진료를 강화해야 한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14

갈잎 먹은 송충이

신라 35대 경덕왕은 어느날 충담사라는 시인 스님을 만나 `나라 잘 다스릴 방책`을 물었고, 충담은 “임금은 임금 답게, 신하는 신하 답게, 백성은 백성 답게” 저 마다 분수를 잘 지키면 나라가 편안하리라는 `안민가(安民歌)를 지어올렸다. 왕이 감동해서 “스님을 스승으로 삼고자 합니다”했으나 충담은 “중에게는 중이 갈 길이 있습니다” 굳이 사양, 분수를 지켰다. 그 무렵 월명사라는 음악 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피리의 명인이었다. 밤중에 그가 피리를 불면 가던 달도 걸음을 멈추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렸다. 그가 피리를 불며 마을 앞 길을 걸을 때는 사람들이 그 소리에 취해서 함께 걸었고, 그 길은 `월명의 길`이 불리었으며 사람들이 자꾸 이 마을로 이사를 왔다.경주 문화예술인들은 충담과 월명을 기리는 축제를 매년 거행한다.오늘날에도 피리의 명인이 있다. 중앙대 총장을 거쳐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까지 지낸 박범훈씨가 바로 피리 명인이다. 그는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박헌봉 국악상을 받았으며 `추임새``소리연``한국불교음악사 연구``작곡 편곡을 위한 국악기 이해``피리산조 연구`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그는 중앙대 예술대학장 시절 `국악과 양악의 어울림`이라는 큰 업적을 남겼다.많은 음악가들이 국악·양악의 교류는 어렵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이 일을 훌륭히 성취해냈으며, 지금도 TV 음악무대에 `국·양악 협연`은 “소리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그러나 그는 욕심이 많았다. 재벌과 손을 잡았고, 권력의 단맛에 끌려갔다.두산그룹이 중앙대를 인수하는 과정에 개입했고, 총장에 오른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MB정권시절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갔다.칼을 쥐면 휘두르고 싶기 마련. `10년을 가기 어려운 권력`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치욕`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검찰의 칼이 그의 목을 겨눈다. 충담과 월명을 알았더라면 송충이는 솔잎만 먹었을 것인데 그의 음악적 재능이 아깝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13

덕종어보(德宗御寶)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는 두 아들을 두었으나 다 골골하다가 일찍 갔다. 맏아들 의경세자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나날이 말라갔는데, 그는 왕위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20세에 별세했고, 둘째 아들이 왕위를 이어 예종이 되지만 그 또한 등극한지 14개월만에 숨을 거둔다. 예종이 죽던 날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초상날 차기 왕이 결정됐는데, 그것도 상식을 크게 벗어난 결정이었다.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가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해서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린 것이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이라는 반듯한 맏아들이 있고, 예종에게도 아들 제안군이 있었는데, 그 적격자들을 모두 제치고 13세 된 차남 자을산군을 세운 것은 `그가 한명회의 사위이고, 대비 윤씨가 수렴청정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 있으며, 세조의 측근들이 변함없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윤씨와 실세들은 어린 임금 성종을 `얼굴마담`으로 앞세워 의경세자 왕위추존을 서둘렀다. 존호를 덕종(德宗)이라 짓고, 세자빈을 소혜왕후로 했다. 왕과 왕비가 세워지면 그 권위를 상징하는 인장(印章)을 새기기 마련. 국새(國璽)는 공식적인 국가사무 처결에 사용하고, 어보는 개인적으로 쓰는 도장인데, 왕, 왕비, 세자, 세자빈 등이 만들어 썼다. 덕종어보(德宗御寶)는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덕종비의 어보도 새겨졌을 것이다.나라가 망하면 국새고 어보고 다 무용지물이 되기 마련. 그러나 일제는 조선시대의 어보들을 “우리 문화재”라며 종묘에 잘 보관하다가, 전쟁에 패하자 거기에 손 대지 않고 물러갔다. 그러다가 6·25가 터지자 미군 병사들이 종묘에 들어와 구경하다가 `거북이 않아 있는 커다란 금도장`을 기념품 삼아 들고갔는데, 그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가져간 덕종어보가 이번에 돌아왔다. `사망후 새긴 도장`이니, 한번도 찍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머리를 힘 있게 치켜든`거북의 기세를 보면, 도장주인의 한이 풀릴듯도 하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10

배꽃의 계절

고려 말엽, 경상도 성주군 월항면에 성주이(李)씨 `이장경`이라는 선비가 살았다. 그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오래 살라는 뜻으로 맏아들은 백년, 둘째는 천년, 세째는 만년, 네째는 억년, 다섯째는 조년(兆年)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가 타계하자 묘소를 마을 석산사 왼쪽에 있는 야산에 썼는데, 지관이 “용이 알을 품은 천하명당”이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서 명문세가로 이름을 날렸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이장경의 묘소는 다른 곳에 옮겨지고, 그 명당은 세종대왕과 후손들의 태실이 되었다. 이장경의 다섯 아들 중에서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는 이는 5째 이조년(李兆年)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의 시조 `연가(戀歌)` 한 수 때문이다. `문학의 힘`이란 이렇게 위대하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은하수)은 삼경(三更)인제/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 못 이뤄 하노라” 그는 고려 말 친명파와 친원파가 갈려서 정권다툼을 벌이는 혼란기에 정치에 환멸을 느끼면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성주로 내려와 백화헌(百花軒)이란 당호를 써붙이고 꽃을 벗삼아 노후를 보냈다. 이 시조도 그 무렵에 지어진 작품이라 여겨진다.개성에 황진이가 있었고 전북 부안에 이매창이 있었다. 둘 다 시문(詩文)과 음악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매화기생이었다. 오늘날 문학인들은 그녀들의 이름에서 `기생`이란 말을 떼내고 `여류시인`이란 존칭을 붙여준다. 매창을 흠모했던 명사들로는 허균, 이귀가 있었고, 유희경도 있다. 유희경은 천민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 불렀으며, 임진왜란때 의병으로 참전해 공을 세우면서 천민신분을 벗어났다. 매창은 특히 유희경에게 온 마음을 다 바쳤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여라”배꽃이 한창 피어나는 계절이다. 두 연가를 읊조리기 알맞은 시절. 따뜻한 마음을 되살려보기 좋은 철이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09

마늘·쑥·어둠

옛날에 환인(桓因·창조주 제석천 하느님)이 아들 환웅(桓雄)을 태백산(太佰山) 신단수(박달나무) 아래에 내려보내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이 무렵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한 동굴 속에 살면서 늘 환웅천왕에게 “사람이 되게 해지이다”빌었더니 어느날 환웅 신이 신령스러운 효험이 있는 마늘 스무 개와 쑥 한 묶음을 주며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성질이 불 같은 범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곰은 꿋꿋이 견뎌냈는데, 100일을 다 채우지 않고 불과 21일만에 여자(웅녀)가 되었다. 웅녀는 신단수 아래에 와서 또 빌었다. “혼인하여 자식을 낳고 싶은데, 천지강산에 남자가 없습니다” 환웅천왕은 그 사정 또한 딱하다 여겨 스스로 남자로 변신하여 웅녀와 동침, 곧 임신해 아들을 낳는데, 그 이름이 단군왕검이다.왕검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은 조선(朝鮮)이라 지었고, 얼마 후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해 1천5백년 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1908세 때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단군고기`에 실린 내용을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쓸 때 인용했지만, 태백산이나 백악산에 대해서는 일연 스님도 그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어서 묘향산, 백두산, 태백산 등으로 비정했고,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가 평양성이란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북한이 `한반도의 주인`임을 내세우는 근거가 여기에 있고, 종북 좌파들도 이를 추종한다.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취임 50일 째 되는 날 “단군신화에 곰이 100일 간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으로 변했는데, 앞으로 50일간 더 마늘과 쑥을 먹는 노력이 필요합니다”라고 했다. `21일간 먹은 일`은 있지만, 100일이나 먹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단순히 마늘과 쑥만 먹은 것이 아니라 `햇빛은 보지 않고` 동굴속에서 수행했던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둠 속에서 매운 음식을 먹는 고행`을 치러야 수권정당으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인데…./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08

인(人)의 장막

태종 이방원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양녕은 `왕이 돼야 할 운명`에 항거했다. 미친짓이나 하고, 남의 여자 임신이나 시키고, 스승 앞에서 개짓는 소리나 내니, 태종도 결국 그를 버렸다. 둘째 효령은 불교에 심취했으니 `조선의 이념`과 맞지 않았고, 결국 3남 충령이 세종이 돼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뤘다.이승만 건국대통령은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59세때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고, 양녕대군의 17대손 이인수씨를 양자로 들였다. 그는 고려대 상대를 나와 공군 통역장교로 복무했으므로, 대통령과 영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당시 이 대통령은 한국어보다 영어가 쉬웠고, 주로 영자신문을 봤다. 그런만큼 국내정세에 어두운 면도 많았는데 대부분의 국내 소식을 측근의 `입`에 의존해 들었다.대통령은 4·19가 `혁명`인 줄 모르고, 측근들이 “학생들이 벌인 잠깐의 소요”라 하자 그대로 믿었다가, 총소리가 요란하자 비로소 사태가 심각함을 알았다. 대통령은 비로소 여러 소식통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죽고 다쳤다”는 사실을 들었고, “자유당정권을 해체하고 대통령 하야하라”는 것이 국민의 소리임을 파악하게 됐으며, 자유당정권이 주도한 정·부통령 선거가 역사상 유래 없는 부정선거였다는 것도 알게 됐다. 대통령은 지체 없이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양자 이인수씨도 4·19때 시위에 참여했지만, 하와이에서 부자(父子)인연으로 만났다. 이승만 박사는 양자를 만나자 제일 먼저 국내정세를 물었다. 아들이 “젊은이들이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잘 돼 갈 겁니다”라고 대답하자, 대통령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남들이 잘 돼간다는 말 믿지 마라. 그런 말 믿었다가 내가 이렇게 결딴났다” 인(人)의 장막이 `정치의 적`이란 것을 설파한 `회한이 담긴 말`이었다.통치자는 `중심`을 잘 잡아야 하지만, 쓴소리도 잘 듣고, 듣는 귀도 넓어야 한다는 뜻이겠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07

청명·한식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란 속담이 있다. 하루 차이거나 6년에 한번씩 겹치니, 별 차이 없다는 뜻이다. 코미디프로 `도진 개진`도 같은 의미다. 윷놀이에서 가장 잘 나오는 것이 `도 아니면 개`여서 “그게 그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한식(寒食)은 조선시대 설·추석·단오와 함께 4대명절에 속할만큼 중요한 날이었다. 청명(淸明)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구름을 다 날려 보내므로 하늘이 가장 맑은 날이란 뜻이고, 그 날 모든 백성들은`묵은 불씨`를 끄고 `새 불씨`를 기다린다. 청명날 나라에서는 `버드나무 판자에 느릅나무 막대기를 비벼` 새 불씨를 얻는다. 재질이 무른 버드나무는 여성을 상징하고, 강한 성질의 느릅나무는 남성을 상징하는데, 음양의 교합을 통해 불씨를 얻으면 `성스러운 불`이 되고, 이 불씨를 온 백성이 함께 나눠가져서 `국민통합·국태민안·태평성대`를 이루자 함이다.임금은 새 불씨를 대신들에게 나누고, 대신들은 고을 수령들에게 전하고, 수령들은 파발마를 총동원해 전국 방방곡곡 집집 마다 전달한다. 그것은 현대의 성화봉송보다 더 성대한 `새불씨 봉송`이다. 스포츠행사는 화합과 통합이 그 목적이듯이 `불씨전달`도 의미가 같다. 백성들은 묵은 불을 끄고 찬음식을 먹으며 `나랏님이 내린 새 불씨`를 기다렸다가 예를 표하고 화로의 잿불로 소중히 보관한다. 이 불씨는 연중 내내 끄트리지 말아야 하는데, 이사 갈 때도 불씨를 화로의 재속에 담아 갈 정도였다.한식날은 조상 묘소를 성묘하는 날이다. 관리들도 이 날은 `성묘휴가`를 얻는다. 겨우내 묘소가 얼어 허물어진 곳은 없는지, 산짐승이 헤치지는 않았는지, 잔디가 얼어죽지는 않았는지, 두루 살펴서 보수하고 잔디를 새로 심는 `개사초`를 한다. “정성이 있으면 한식날에 세배 간다”는 속담도 있지만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에 세배라니 말이 안 되지만 `한식날은 조상을 생각하는 날`이란 뜻이다. 청명·한식의 의미를 오늘날에 되새겨 분열과 대립을 화합과 단결로 승화시켰으면 한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06

소나무를 그만 심자

신라 49대 헌강왕 대에 들어서면서 나라가 망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지방까지 집과 담이 이어졌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아침 저녁으로 굴뚝에 연기가 오르지 않았다. 숯으로 밥을 지었기 때문이다. 또 풍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이다. 이렇게 사치 방탕하니, 남산신과 북악신과 지신이 나타나 춤을 추어 경고메시지를 보냈으나, 사람들이 그 의미를 모르고 `좋은 조짐`이라며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더욱 빠져들었다.“산이 헐벗으면 나라가 망하고, 살림이 무성하면 나라도 흥한다”하는 것은 세계사가 증명한다. 신라 말기에 숯으로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할 정도였다면, 백성들은 참나무와 소나무로 숯을 구워 나라에 바치기 바빴을 것이고, 산은 민둥산이 돼갔고, 국가는 멸망의 길을 걸었을 터. 그러나 당시에도 `국가가 관리하는 숲`을 지정해 보호했고, 후대에는 그린벨트로 묶었으며, 전국 곳곳에 산림애호(山林愛護) 구호를 써붙이고, 산도감이란 직책을 두어 감시를 했다. 그후 연탄이 보급되면서 `연료혁명`이 시작됐고 산을 푸른 옷을 입어갔다.그런데 소나무를 너무 심은 것이 탈이었다. 솔잎혹파리가 창궐해서 소나무가 붉은 빛으로 죽어가더니, 급기야 소나무재선충이 극성을 부려 소나무가 말라죽는다. 유독 소나무에 피해가 집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4철 푸른 산이 보기 좋다고 소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은 탓이다. 산이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섞여 있어야 서로 단점을 보완하며 건강하게 유지되는데, 소나무 일색이니 `도와줄 다른 나무`가 없다. 또 소나무에는 진이 많아 산불에 엄청 취약하다. 소나무 머리에 불이 붙으면 그것이 불꾸러미가 되어서 바람에 날아가 근처에 옮겨 붙는다.산불에 강한 나무가 참나무와 은행나무다. 꿀밤은 산짐승의 먹이가 되고 도토리묵이 된다. 은행나무는 그 잎이 혈액순환제로 쓰이고 약차로 마신다. `소나무 망국론`을 이야기하는 산림전문가들도 있는데, `푸른산`은 이제 그만하면 됐으니, 경제수종을 많이 심을 일이다./서동훈(컬럼니스트)

2015-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