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제 목숨 하나 살겠다고,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할 심산이었지만, 광해군은 전장을 누비며 의병을 모집하고 백성들을 격려하면서 왜군의 북상을 막을 방어망을 쳤다. 백성의 신망은 당연히 광해군에게 쏠렸는데, 선조는 그런 아들을 시기 질투해서 무던히도 괴롭혔다. 신하들과 백성의 성원으로 광해가 등극하는데, 전장을 누빈 경험이 있는 왕과 입만 놀리는 신하들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었다. 왕은 국제정세를 잘 읽기 위해 많은 세작(간첩)을 보냈다. “멀리서 열 사람이 보는 것보다 한 사람이 가까이서 보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명나라는 지는 해이고, 청나라는 떠오르는 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신하들은 “임진왜란때 우리를 도와준 명의 은공을 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의리론을 놓지 못했다.광해군은 국제정치에는 밝았으나 국내정세에는 어두웠다. 반정세력의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속절없이 쫓겨났다. 쿠데타로 등극한 인조는 노골적으로 청나라와 반목하다가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까지 맞아 삼전도의 치욕을 당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잡혀갔다. 소현세자는 광해군과 비슷했다. 당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려고 애쓰고, 청나라 실권자들과 사귀며 국제정치의 안목을 넓혀갔지만, 봉림대군은 방에 앉아 공자와 맹자왈이나 했다.볼모에 풀려서 귀국했을 때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진언하다가 벼루로 머리를 얻어맞고, 침을 잘못 맞아 온몸이 까맣게 타서 급사했다. 차남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고, 정책목표를 북벌(北伐)에 두었지만, 백일몽으로 끝났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청을 무슨 수로 당하겠는가.광해군과 소현세자를 잃은 것이 `역사적 치명상`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어 적절히 대응·교류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요체다. 지금 우리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북한 등과의 복잡 미묘한 관계에 있다.`외교의 묘수`를 찾기 위한 외교력 향상에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