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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실(Fact)과 진실(Truth)

`방법론적 회의`란 말을 처음 쓴 철학자가 데카르트(Descartes).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이라 해서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해서 다 진리가 아니며 연극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그림자는 실제가 아니다. 역사는 `사실`이지만 다`진실`은 아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많이 고민한 사학자가 사마천이다.한신은 한(漢)나라 개국공신이다. 어느날 한신이 유방에게 말했다. “황제께선 10만 병사를 거느릴 장수입니다” 황제가 한신에게 물었다.“경은?” 한신이 대답했다. “소신이야 다다익선이지요” 내가 당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뜻이니, 이때부터 한신은 `반역의 기운이 농후한 자`로 찍혔고, 결국 토사구팽. 역모죄를 쓰고 3족이 죽었다. “한신이 역모를 했다”하는 기록은 `사실`이지만“과연 역모를 했는가”파헤친 것은 `진실`이다.사마천은 `드러난 사실`만을 기록하지 않고 `숨어 있는 진실`을 파고 들었다. `이릉`장군이 적에 투항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부하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무모한 전쟁을 피하고 투항을 선택한 것은 `진실`이다. 사마천은 이 진실을 말했다가 황제의 분노를 사 사형보다 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당했다. 후에 진실이 밝혀져 사마천은 환관이 됐고, 사가(史家) 집안의 후예 답게 `중국 3천년의 역사`를 담은`사기`를 썼다.사마천은 “한신이 실제 역모를 꽤했느냐?”를 알아내기 위해 그의 고향 장쑤성을 찾아가 탐문을 했다. 진실을 알았지만 “한신은 황제를 겁먹게 할 정도로 뛰어난 장수였기 때문에 역모죄에 엮였다”라고 쓰지는 못했다. 그랬다면 분서갱유를 당했을 것이다. 다만 사마천은 비유적으로, 엇비슷하게, 한신의 위대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에게 `역사상의 신원`을 해주었다.이번 달 열릴 국회에서 `김영란법`과 `어린이집 CCTV법`이 바로 잡혀질 것인가. 협박·로비 같은 `감춰진 진실`이 따로 있어서 사학자들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도록 사실과 진실이 부합되기를 바란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02

정의의 칼 세례?

이슬람 강경파 IS가 말썽이다. 사람을 납치해다가 처형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돈을 갈취하는 국제깡패가 요즘 치도곤을 맞는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그것을 `멋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본거지를 찾아가는데 우리나라 김모 군도 합류했다. 테러분자들은 늘`정의`를 앞세우는데, 이들은 과거의 십자군전쟁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슬람은 `참혹성`을 무기로 사용했다. 포로를 최대한 참혹한 모습으로 만든 후 적진에 돌려보내는 수법인데 그 처참한 몰골을 보고 질려서 손을 들게 만든다.IS도 칼이나 총으로 공개처형하고 심지어 기름을 뿌려 화형하는 장면까지 공개했다. 그런데 처형당하는 피해자들이 의외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몸부림치거나 애원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는데 “실제로 처형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사진 찍기 위한 것”이라고 피해자를 안심시켰다고. 그런데 그 처형에 소년까지 내세워 권총 방아쇠를 당기게 했다. `테러 2세대`를 키우는 짓이다.한국에는 미국 대사를 칼로 찌른 테러범이 있다. 과거 주한 일본 대사에게 벽돌을 던졌던 김기종이다. 그는 김일성의 `갓끈전술`신봉자다. “남조선은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갓끈에 의지하는 갓과 같다. 그 갓끈만 없애버리면 갓은 날아간다”는 것. 그래서 한·미관계와 한·일관계를 단절시키면 한국은 그냥 망한다는 것인데, `이간질`에 국제관계가 쉬 좌우되는 것이 아니어서 갓끈론은 공허한 `이론`일 뿐이다.김기종은 평소 “남한에는 김일성 만한 훌륭한 지도자가 없다” “남한은 미국의 半식민지이고, 북한은 자주적 정권이다” 라고 했는데 그 좋은 북한에 가서 살지 않고 굳이 남한에 사는 이유는`남조선 혁명과 적화통일을 위하여`라고 공언하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국가보안법에 걸리니 그냥 `행동`만 할 뿐이다. 특히 북한은 핵무기를 가졌으니 남조선 적화통일은 시간문제라 여긴다. 북한과 김기종은 손발이 잘 맞는다. 북한 조평통은 그를 안중근 의사에 비유했다.“정의의 칼 세례”라며. 저들은 언제 백일몽에서 깨어날까./서동훈(칼럼니스트)

2015-04-01

사랑의 인사

사소한 행복감은 언제 밀려오는가? 온 겨우내 뒷베란다에 방치했던 노랗고 빨간 미니 화분을 자동차 뒷좌석에 싣고 꽃집을 향할 때. 그 빈 화분에다 팬지나 데이지를 심고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공기 중에 떠도는 봄 향기를 맡을 때. 그 화분이 실은 지난가을 모 카페에서 친구가 건넨 황국과 홍국의 쌍 화분이었다는 걸 기억해 낼 때. 그때 카페 창가에 비친 친구의 옆얼굴이 내가 좋아하는 데이지를 닮았다고 믿고 싶을 때. 기침 돋는 목소리로 최선을 다해 엄마의 안부를 물을 때. 안부를 묻는 내 최선의 목소리보다 더 빠르고 깊이 전해지는 늙은 엄마의 노심초사를 알 때. 한껏 게으르고 늘어져 소파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뒹굴 때. 그때 몹시 아끼는 폴란드 산 십자꽃 무늬 잔에 커피를 내려 건네는 순정한 아들의 눈빛을 마주할 때.오직 혼자 그 큰 영화관에서 조조 영화를 보게 될 때의 황홀한 두려움. 십분 간격으로 객석을 드나들며 어둠 속 관객의 안위를 살피던 영화관 직원의 숨결. 영화 속 왕페이가 입었던 티셔츠에 꽂혀 당장 홈쇼핑에서 충동구매 했을 때의 만족감. 그 소박한 셔츠가 외출할 때마다 뭘 입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준다는 안온함.소설에서는 개연성 때문에라도 있음직한 일만을 다루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숱한 변수 때문에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통찰을 얻을 때의 짜릿함. 단순한 행복감을 넘어 저릿한 생각거리에 이를 때까지, 그 매일의 두 시간을 모아 내 식의 팔면경을 만들어 나갔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내 사랑의 인사였다. 이제 그 인사를 마감할 때가 되었다. 너무 오래 썼고 스스로 지쳤다. 떠나야만 하는 명백한 이유이다. 칠백여 편의 단상이 한 장 한 장 스냅사진이 되어 파노라마로 넘어간다. 중언부언한 그 많은 말들 속에 그래도 못다 한 사랑의 말들은 내면의 꽃밭에 심어 소설로 꽃피우겠다. 그간 응원하고 격려해준 독자님들과 신문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봄꽃이 다퉈 피고 있다. 당분간은 아무 생각 없이 꽃 피는 찰나의 봄을 만끽하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31

예절은 서로가

아버지 살아계실 제 비유적으로 말하기를 즐겼다. 그것이 속담인지 당신만의 어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를테면 `손 큰 어미 장 퍼 나르듯 한다`, `꽃도 한철 문장도 한철` 이런 말을 흔히 썼다. 각각 살림살이와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인사에 선후 없다, 라는 말도 아버지에게서 자주 들었다. 인사에는 어른 아이 순서가 정해진 게 아니니 서로 예의를 지키는 게 좋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두 젊은 연예인이 야외 녹화를 하다가 다툼이 붙었다. 세 살 어린 쪽이 반말 뉘앙스를 풍기며 대꾸를 해서 언니 쪽이 폭발해 욕설을 했단다. 마주친 손바닥이 소리 나듯 잘잘못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네티즌들의 갑론을박 속에서 `예의` 부분을 받아들이는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다. 나이 어린 쪽이 싸가지 없이 반말을 했으니 언니 쪽에서는 흥분할 만하다는 거다. 화가 난 이유는 분명히 복합적인데 왜 당사자는 상대의 반말 부분에서 자제하지 못했고, 그것을 자신의 실수 이유로 꼽았을까. 이런 사건들을 볼 때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예의를 다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무리 연예계라도 세 살 차이 나는 정도에서 절친 관계가 아니라면 서로가 존대를 하는 게 맞지 않나. 어느 한 쪽은 상대가 맘에 들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쏟아낼 수 있고, 다른 한쪽은 나이가 조금 적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제 언행을 억눌러야 한다면 이건 잘못된 소통 방식 아닌가.`도덕교육의 파시즘`에서 김상봉 교수가 말했다. “한국의 도덕교육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지켜야 할 예절은 가르쳐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지켜야 할 예절은 가르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윗사람으로서 무례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둘 다 잘못한 사안에 대해 어느 한 쪽이 예의를 지키지 않은 점만 부각해 분하다고 한다면 그곳은 여전히 경직된 사회이다. 예의는 서로가 지키는 것이지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행하는 일방적 헌사나 참음은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30

너무나 인간적인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기록으로 남겼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등을 비롯한 그의 이야기 안에는 소크라테스를 둘러싼 당대 철학가·정치인들의 행적이 실감나게 묘사된다. 그 중 `향연`은 그들의 에로스 찬미가에 해당된다. 비극작가 아가톤이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했다. 축하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예닐곱 명이 모였는데 곧 에로스에 대한 격렬한 토론장이 된다. 그때 마지막으로 향연장에 등장하는 인물이 군인이자 정치가인 알키비아데스였다. 담쟁이덩굴과 제비꽃으로 된 화관을 미남자 우승자인 아가톤에게 씌워주고 싶어서였다. 알키비아데스에게도 에로스 찬양을 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는 실은 에로스에 빗대 소크라테스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더 말하고 싶었다. 술을 빙자해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았다.못생기고 괴팍한 신들의 이름에 비유해 스승의 외모를 비하하면서도 그의 존재감에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자책하는 내용이었다. 그가 보기에 스승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눈을 가졌고, 보통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기는 육체나 부 등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무지를 가장하고서 진짜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쳤으며, 한 번 사색에 빠지면 결론을 얻을 때까지 꼼짝하지 않을 정도로 참을성이 강했다.“실제 독사보다도 더 아프게 무는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심장을, 아니 마음을 물렸어요. 지혜를 사랑하는 그의 말에 물린 겁니다.” 스승을 향한 질투와 시기, 그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그는 울부짖듯 고백한다. 먼 훗날, 모차르트 곁의 살리에리가 이 장면을 읽었다면 깊이 공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완전체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이 철부지 제자에게 이렇게 설교한다.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정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라고. `자네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 때 그때서야 자네 마음눈이 밝아진다. 그러니 자네는 아직 갈 길이 멀다`며 알키비아데스를 설득하는 소크라테스가 얄미워 보이는 건 약점 많은 보통 사람 정서를 두고 인간적이다, 라고 변호하고 싶은 그 맘 때문은 아닌지./김살로메(소설가)

2015-03-27

리콴유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가 서거했다. 그에 관한 평가는 다양하다. 경제를 일으키고 국민성을 개조한 측면에서는 `아시아의 거인`으로 칭송 받는다. 반면 지나친 독단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변과 국민에게 주입한 면에서는 `아시아의 히틀러`로 폄하되기도 한다. 그 둘 다 제 삼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옳기 때문에 뭐라 할 말이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국민을 만족시킬 수 있는 지도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 어떤 것을 우선에 둘 경우 그 반대쪽의 일에는 아무래도 소홀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그 이면에는 그것에 버금가는 나쁜 일이 생기고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존재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리더란 사람들을 격려하고 자극하는 자리이지, 자신의 복잡한 생각들을 공유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1965년 신생국의 초대총리에 올라 25년간 재임하는 동안 싱가포르를 전 세계에 우뚝 서게 만든 그의 원동력은 강직함이었다. 오늘날 싱가포르의 일인당 국민총생산은 거의 6만 달러로 세계 8위이자 아시아 1위이다. 강력한 리더십이 낳은 빛나고 빠른 성과였다.그가 강조한 `클린 앤 그린` 정책은 일류선진국을 향한 주춧돌 같은 것이었다. 쓰레기 무단 투기, 침이나 껌 뱉기, 흡연 등 자잘한 공공질서 위반부터 다스리는 것이 깨끗하고 청렴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공직자 처우를 최상으로 올리는 만큼 부정부패에는 철저하게 무관용의 원칙을 고수했다. 이 모든 원동력을 바탕으로 일류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에 전생을 바쳤으니 국부로 추앙받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하지만, 합리적 서구 민주주의 시각에서 보면 그는 독선적인 지도자였다. 그 스스로 공공연하게 서구식 민주주의를 흉내 내는 것보다 아시아적 가치에 맞는 민주주의를 택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기야 떡도 쥐고 북도 칠 수는 없는 것. 강력한 지도력이 국가발전과 국민 경제 부흥을 약속하는 것만큼, 억압된 개인권이나 제한된 자유를 감수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 그 선 안에서라면 그는 분명히 훌륭한 지도자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26

사랑하기가 더 쉬워

사랑하면 왜 작은 것에도 웃게 되고, 사랑받으면 왜 충만감에 휩싸이게 될까. 그건 사랑이 그만큼 단순하고 담백한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미워하기보다 사랑하는 게 더 쉽다. 누군가를 미워해야만 할 때 사람들이 취하는 방식은 사랑할 때의 그것에 비해 훨씬 복잡해진다. 사랑할 때는 변명이 필요치 않지만, 미워할 때는 변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변호해줄 핑곗거리를 만들어내 위안을 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덫에 걸렸다. 야옹야옹 애처롭게 내지르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 다람쥐도 독수리도 사람도 심지어 동료인 고양이마저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들으려 하지 않았다. 딱 한 명, 세상 모든 것에 연민의 귀를 열어 놓기를 즐기던 여우에게 그 소리가 들렸다. 착한 여우는 자신의 먹이를 날마다 고양이에게 나눠주었다. 숲 속 왕 사자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덫에서 고양이를 구해주었다. 고양이가 가엾기도 했지만, 여우의 마음씨에 더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사자는 여우에게 평생 사냥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식권을 상으로 내렸다.한편, 무리 속으로 돌아간 덫 고양이를 다른 고양이들이 괴롭히기 시작했다. 왜 여우에게만 들리는 울음소리를 냈느냐고. 확실하게 고양이 소리를 냈으면 자신들이 듣고 달려갔을 터인데, 왜 그 공이 여우에게 가도록 했느냐고 다그쳤다. 겁에 질린 고양이는 좁쌀만 한 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고양이 울음소리를 냈지만, 힘이 없어 목소리가 작았을 뿐이야. 너희들은 못 들은 거고 여우는 들은 거지.덫 고양이는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으나 속으로 삼켰다.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동료 고양이들이 그를 다시 덫으로 던져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희들은 내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어. 내가 사라졌는지 관심조차 없었지. 하지만, 세상의 아픈 목소리에 귀를 연 여우에게는 내 울음소리가 쉽게 들린 거지. 내가 더 크게 울었다 해도 여우의 결과가 있지 않은 한, 너희들은 내 목소리를 결코 듣지 못했을 거야.`/김살로메(소설가)

2015-03-25

칼 비테의 교육론

한 걸음 물러나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이론서의 도움을 받고, 아무리 현명한 이웃의 조언을 듣는다 해도 내 아이를 직접 키우는 동안에는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더 이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 없을 시기가 오면, 그제야 숨어 있던 자녀교육에 관한 여러 객관적인 생각이 모아지곤 한다. 사람의 일이란 게 언제나 지나고 난 뒤에야 후회하는 것. 키우는 동안 제대로 된 자녀교육법을 실천할 걸, 하는 아쉬움이 생기곤 한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한들 당시 행한 육아법에서 더 진일보한다는 보장은 없다. 자녀교육에 대해 아는 것과 자녀교육을 하는 것은 이상과 현실만큼의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녀 교육은 부모의 제일 큰 관심거리이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명쾌한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녀 교육 관련 책에 나오는 모든 이론과 방법들은 조금씩 다른데다 그 방법들을 자신의 자녀에게 적용한다고 다 궁합이 맞는 것도 아니다. 독서모임에서 읽은 칼 비테의 자녀 교육 관련 책들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교육법에 완전히 공감 가는 것은 아니어서 살짝 아쉬웠다.조기 교육의 필요성이나 자녀에 대한 인격적 존중 등에 관해 예화를 들어 설득할 때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자녀의 잘못이 곧 부모의 잘못이라는 논지를 펼치는 장면에서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부모의 책임에 대해 어느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환경적 요인과 자녀의 기질적 성향도 무시할 수 없다. 여러 요인이 있을 터인데 유독 부모 역할만이 자녀 교육의 전부인양 강조하면 부모 입장에서는 자책하게 된다. 칼 비테 자신의 교육법이 그의 아들에게 성공적으로 적용되었다고 해서 다른 부모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그렇다고 칼 비테 교육의 위대함이 깎이는 건 아니다. 시종일관 강조한 조기교육과 가정교육의 중요성은 이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24

숨결 사이

노트북 자판이 말썽이다. 서너 개의 글자판이 아예 먹통이다. 어르고 달래도 고장 난 부분의 글자는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대부분의 자판이 온전하니 안 되는 곳만 건너뛰어도 독해는 되겠지 싶어 써나가는데, 웬 걸 무슨 외계어 향연장 같다. 고작 몇 개의 글자판이 막혔을 뿐인데도 무슨 말을 쓴 건지 쓴 나도 읽어 내릴 수가 없다. 당황스럽다. 휴일이라 AS센터에 달려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글은 써야겠고. 이 응급사태를 어찌할까 싶다. 다행히 남편 왈 노트북에다 일반 자판기를 연결하면 되니 걱정 안 해도 된단다. 먼지 쌓인 자판기를 꺼내 연결 실행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자판이 술술 먹힌다. 아주 작은 곳 하나만 막히고 끊겨도 온전한 교감에 이르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겠다. 여기까지만 접수했다면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부 자판기가 연결되었기 때문에 이제 화면과 나 사이는 노트북에 딸린 자판을 쓸 때보다는 멀어졌다. 노트북 화면에 붙어 있는 일체형 자판기만큼의 공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멀어진 화면만큼의 그 거리가 나쁘지 않다. 글씨가 더 선명하게 보이는데다 그만큼 어깨도 덜 굽혀진다. 살짝 노안이 온지라 사물을 너무 가까이 보는 것보다 조금 떨어져서 보는 게 더 편하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다.한 숨결이 곧 삶이란 얘기가 있다. 범우주적으로 보면 날숨과 들숨의 그 짧은 호흡 사이가 한 생애이다. 그 찰나 같은 생의 마당에 숱한 가지를 뻗어나가는 게 사람의 한살이이고 그 경계 안에서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 확립에 이른다.이런 생각에 이르니 산다는 게 신비하기만 하다. 화면과 내 눈 사이 그곳에 흐르는 시공간의 부피와 질량만큼이 곧 스스로 관장할 수 있는 제 삶의 범위이다. 작거나 큰 그 시공간 안에서 누구나 제 나름의 한 숨결을 가꿔나간다. 그 한 숨결이 곧 우주로 연결된다고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진다. 허물어진 담벼락처럼 사라져 버린 글자판 덕에 이 봄날 구름 같은 상념 속을 홀로 첨벙거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23

희망 토끼

어찌 천재작가들은 요절할까. 볼프강 보르헤르트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스물여섯에 죽은 그는 요절 치고도 너무 이른 나이라 안타깝기만 하다.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렀다. 죽기 전 남긴 단편들과 대표 시를 모아 발간된 책이 `이별 없는 세대`이다. 실린 단편들은 보르헤르트의 짧은 생애만큼이나 아주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편이라고 말하기보다 손바닥소설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 정도로. `밤에는 쥐들도 잠을 잔다`는 열다섯 편의 손바닥소설 중 가장 여운을 남긴다. 아직 젊었기에 순수했던 작가정신이 주인공 위르겐과 꼭 닮았다. 아홉 살 위르겐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매일 폐허 앞을 지킨다. 허물어진 잔해 속에 네 살짜리 동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동생이 죽었다 해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선생님이 말했다. 쥐들은 죽은 시체를 먹는다고. 그러니 쥐들에게서 동생을 구하려면 매일 폐허를 지킬 수밖에 없다. 동생을 두고 집에 갈 수는 없다.우연히 그곳에서 `토끼 키우는 사내`를 만난다. 위르겐의 사연을 들은 토끼사내가 말한다. `밤에는 쥐들도 잠을 잔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라고. 그곳을 떠나면서 사내는 약속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토끼 한 마리를 데려오겠다고. 위르겐에게는 기다림이란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사내가 가져올 토끼를 위해 울타리를 만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짧은 얘기와 어울리게 문체 또한 단문인지라 작가의 의도가 꼬이지 않고 담백하게 잘 와닿았다. 야행 동물인 쥐가 밤에 곤히 잠들 리 없다. 어쩌면 위르겐이 희망토끼 사내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쥐들은 동생을 해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슬픔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간직한 영혼을 위해서라면 작가는 하얀 거짓말 정도는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순수한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토끼 사내는 필연으로 등장해야만 한다. 절망의 구렁텅이일수록 토끼 같은 희망의 은유가 배달되기를 바라는 건 인지상정이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5-03-20

언덕과 산

“원고를 세 번이나 네 번쯤 고치고 난 후에야 진짜 작품의 가닥이 잡힙니다. 시도 마찬가지죠. 단지 시는 40번이나 50번 정도까지 수정한다는 게 다르지요. 도널드 홀은 한 편의 시에 100여 개의 수정본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상상이 가나요?”`작가란 무엇인가`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인터뷰 중 한 구절이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이 윤곽이 그려지는 시기는 초고 때가 절대 아니라는 얘기다. 적어도 서너 번은 고치고 난 뒤 그제야 작품이 시작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때서야 작품의 가닥이 잡힌다고 보니 그 뒤 완성에 이르기까지 퇴고 과정은 또 얼마나 많은 횟수가 필요할 것인가. 그와 반대로 일반적인 경우는 초고만 쓰고도 한 작품 완성한 것처럼 방치하게 되고, 두세 번의 퇴고를 거치기라도 했다면 이는 영원한 완성품으로 간주해 더 이상 쳐다보고 싶지 않게도 된다. 자기 작품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미흡한 줄은 알지만 거기까지 오는 것만도 지칠 대로 지쳐 제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쉽게 산에 오를 수는 없다. 레이먼드 카버의, 산 정상에 오른 자의 저 위엄서린 고백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이는 재능의 문제이기보다 적극적 의지의 문제이다. 한 여행가가 네팔로 산행을 갔더란다. 산행을 해야 하는 깊은 성찰이 없었으므로 불평불만이 많았다. 왜 이 산에 오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댔다. 그때 현지 가이드가 말했다. 여긴 산이 아니라 그냥 언덕이라고. 매일 높은 산을 오르는 그들에게 초록색이 보이는 한 여전히 그것은 언덕으로 간주될 뿐이었다. 그들에게 산이란 적어도 하얀 설산 정도는 되어야 했던 것.적극적 자기 긍정의 의지가 있어야 설산에 닿을 수 있다. 오르려고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시간 낭비이고, 오르면서도 지친 나머지 중턱에도 오르지 않은 채 산이라고 여기고 싶은 맘은 시간을 성급히 당겨 쓴 것이다. 백 개의 수정본이 있는 시를 짓는 마음으로 정진하고 매진했을 때라야 산에 오를 수 있다. 푸른 언덕이 아닌 흰 눈 풍경이 펼쳐지는 산./김살로메(소설가)

2015-03-19

마음병 예방법

난처한 병 중의 하나가 마음병이다. 마음병은 뚜렷한 신체적 변화가 있어서 아픈 곳을 딱 집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픈 증세를 명확하게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픈 당사자만이 실체 없는 그 고통 앞에서 괴로워해야 한다. 심고(深痼)라는 말이 있다. 주로 고치기 어려운 깊고 중한 병을 말하는데 주로 마음의 병을 일컫는데 쓰인다. 그만큼 마음의 병이 고치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실 깊고 중한 병이라면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암이나 기타 위중한 병명이 마음병보다 더 앞자리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마음병이 중한 병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그 고통의 크기가 다른 어떤 질병과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마음병은 우리나라에서는 화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쌓인 화를 삭이지 못해 생긴 몸과 마음의 여러 징후들이 모여 화병이 된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있는 정신과적 질병이라는데 왜 억울한 일이나 한스러운 일을 우리나라 사람만 자주 겪는 걸까. 암묵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우리 특유의 문화가 이런 현상을 불러일으킨 측면도 있다.화병이 깊어지면 우울증이 되고 이것은 사회공포증이나 대인기피증을 유발할 수 있다. 사람 없는 치유, 관계없는 자기 성장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화병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사람과 사회의 관계망이 어긋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렇다고 그 관계망을 완전히 벗어나서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끼리 상처를 주는 것도 맞지만 사람이 사람을 긍정하게 하는 요소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관계망이 긍정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마음병이 오기 전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적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맞추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에 나오는 말이다. 마음병을 덜 오게 하려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를 포기하면 된다는 현명한 가르침이랄까./김살로메(소설가)

2015-03-18

은유보다 환유

“깊은 슬픔을 밑에 깔고 어머니가 누리는 잔잔한 평화 속에서 죽은 삼촌과 내가 뒤섞이는 이 인접성, 나는 그것을 어머니의 환유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어느 날 아버지 대신 나를 부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순수하고 완벽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환유는 결여된 은유다.” 황현산 선생의 `잘 표현된 불행`에서 `어머니의 환유` 일부분을 인용했다. 환유를 일컬어 결여된 은유라고 표현한 저 독창적 말씀에 매료되어 내 식의 해설을 쓰고 싶어졌다. 자세하게 분류하자면 여러 가지로 뻗겠지만 일반적으로 환유라 하면 표현하는 대상을 그것과 가까운 다른 말로 바꿔 말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앞치마가 환유가 되면 주부를 뜻하고, 월스트리트가 환유로 읽히면 영향력 있는 금융세력이 되는 것과 같다.그러니까 선생의 저 말을 나는 은유로 소진되고 남은 것들이 모여 환유가 된다, 라고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은유는 낭만이나 환희나 쾌락 같은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라는 식의 낭만적 은유가 지나고 난 뒤의 파편 같은 현실이 환유가 된다. 저 인용문에서 결여된 은유는 어머니의 환유가 되는데 그것은 곧 자식인 작가 자신이다. 물론 그 원천은 작가의 아버지가 된다. 일반적 희생의 이미지인 모성에게 지아비의 결여는 세상의 결여이고 그것은 곧 당신의 결여가 된다. 그 결여의 기도는 자식을 향한다. 즉 어머니의 환유는 결국 아버지 모습을 한 자식에 대한 기대치라 할 수 있다. 그런 어머니가 자식 입장에서는 정신적인 우주가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제 결여를 다독이기 위한 텃밭으로 기능한다.언어학자인 로만 야콥슨에 의하면 은유는 유사성에 의존하고, 환유는 인접성에 의존한다고 했다. 유사성을 표현하는 언어는 어쩐지 낭만적이고, 인접성을 표현하는 언어는 왠지 사실적이다. 낭만적 자족이 은유라면 결핍의 우주야말로 환유가 된다. 그러니까 환유의 발자국은 몽상의 구름에 가닿는 게 아니라 사실의 들판에 맞닿아 있다. 환유가 살아있는 실체적 진실이 되는 순간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17

마음엔 꽃

가령 이런 문장을 읽을 때였다. “아이들의 몸엔 언제나 벌레가 있었다. 그것들을 쫓아 버리기 위해 셔츠 안쪽, 배꼽 부근에 마늘을 채운 조그만 주머니 하나를 꿰매어 달아주곤 했다. 나는 프루스트나 모리아크를 읽을 때면, 이 작품들이 내 아버지가 아이였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버지의 환경은 중세였던 것이다.” 작가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서 가난하고 초라한 아버지를 중세의 환경이라고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알려졌다시피 아니 에르노의 작가적 고집은 겪은 것만 쓴다는 데 있다. 그녀의 적나라한 화법은 제 아버지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예외가 없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느 과자를 적신 홍차 향에 취해 부르주아 창가를 서성일 때, 동시대를 살았던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는 자식들 몸에서 빈대나 이를 퇴치하기 위해 마늘향 주머니를 꿰매 달아야 했다. 핍진(乏盡)한 가계사마저 핍진성(逼眞性)을 획득하는 건 에르노식 화법이 주는 아픈 감동이다.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친구가 생일 선물로 소포를 보냈는데 꽃이 담겨 있다. 사각 유리꽃병과 함께 전지가위도 들어있다. 기대하지 않은 상태의 황홀감인지라 잠시 암전 상태가 된다. 사실 책을 읽는 동안 기분 전환이 필요했었다. 아버지의 중세를 이야기하는 아르노의 고백이 너무 담담하고 현실적이라 따끔거리고 쓰렸다. 이런 침체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비현실적이리만큼 낭만적인 정서가 펼쳐지다니. 다발을 이룬 꽃 이름도 핑크 라넌큘러스, 호와니, 핑크 튤립, 홍버들 등으로 이국적 위안을 부추겨 주었다.꽃은 그 뒤로도 시리즈로 배달되었다. 한 달에 걸쳐 생일을 축하 받은 셈이었다. 두 번 세 번 꽃이 이어질 때마다 내 중세적 염세가 낭만적 환상으로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구차와 굴욕의 인생 트라우마에 가장 좋은 치료법은 꽃이라 했다. 친구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러니까 오늘의 말씀, 마음이 중세인 사람이 미래로 건너가게 하는 가장 큰 명약은 꽃이다. 그 꽃을 전하는 이야말로 진짜 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16

아기공룡 맛있겠다

아기는 거짓을 모른다. 갓 태어난 아기라면 더더욱. 하지만 거짓만을 모를 뿐 희로애락의 감정은 확실히 느낀다. 순수한 영혼인 아기의 감정은 날 것 그대로이다. 숨김도 없고 과장도 없다. 제가 느낀 그대로 그냥 받아들인다. 거짓을 배울 기회가 없으므로 적대감 같은 것도 모른다. 거짓과 적의는 한 통속이어서 아직 어린 그에게는 먼 이야기이다. 어느 볕 좋은 날 천지가 진동하고 아기공룡 한 마리가 태어난다. 그런데 웬 걸, 태어나보니 혼자이다. 외로워서 슬퍼서 울었다. 외로움이나 슬픔은 학습된 감정이 아니므로 절로 그렇게 되었다. 울면서 타달타달 걸었다. 그때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면? “헤헤헤, 고 녀석 맛있겠다!” 이 장면에서 보통 독자는 아, 끝났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맛있겠다, 라고 선언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가 누구든 갑의 위치에 있을 것이고 그 자체가 위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정작 아기공룡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맨 처음 한 말은 “아빠!”였다. 맛있겠다, 라는 말을 잡아먹겠다는 위협으로 이해한 게 아니라 제 이름을 부른 걸로 받아들인 것. “아빠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잖아요. 내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우리 아빠지!” 아기공룡을 잡아먹으려던 공룡은 뜻밖의 반응에 아빠가 되기로 맘먹는다. 다른 육식공룡과 싸워 아기공룡을 지켜내고, 아기공룡을 이해하기 위해 풀도 뜯어 먹고 열매도 삼킨다.슬픔이나 무서움은 본능적 감정이지만 거짓이나 적의는 학습되는 감정이다. 따라서 아직 세상의 때에 노출될 기회가 없는 영혼에게 맛있겠다, 라는 말은 공포가 아니라 친근함의 의미가 될 수 있는 것. 무심코 내뱉은 `맛있겠다`라는 내 위협은 뜻하지 않게 상대에게 가서 믿음이 되기도 하는 것. 이름을 불러줘야 꽃이 된다는데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이미 꽃인 영혼들이 그런 상황을 만든다. 그 순정한 몸짓을 이해하고 보살피는 무장해제 된 어른에 관한 책이 고 녀석 맛있겠다, 이다. 힐링을 원한다면 서로에게 `하나의 눈짓`이 되는 이 그림책을 꼭 확인하라고 말하고 싶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13

호라티우스의 시학

문예미학에 대한 성찰은 시대를 초월한다. 글 관련 사색이나 작법은 역사 이래 철학자들의 최대 관심거리 중의 하나였다. 고대 그리스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다. 철학자마다 시작(詩作)에 관한 나름의 생각들을 풀어놓기를 즐겼다. 당시는 연극이 유행하던 시대였고, 그 중에서도 비극은 문학의 최고 형식이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각 철학자들의 `시론`은 대개 비극에 관한 사유와 작법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딱히 비극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문예 전반에 관한 사유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근대 이후의 문학인들이나 철학자들이 지녔음직한 고뇌들이 그때 이미 넘쳐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신기하다. 내게 있는 `시학` 관련 책은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호라티우스 그리고 롱기누스 등의 것이 같이 실려 있는데, 호라티우스 편의 글쓰기 기술에 관한 부분은 글로 고민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뜨끔하면서도 웃음이 난다.호라티우스의 말을 맥락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내 식으로 편집해보았다.`쓰는 자들은 대개 올바른 것의 겉모양만 보고 속아 넘어간다. 간결하게 쓰려고 애쓰다가 모호하게 쓰고, 섬세하게 쓰려다가 맥없고 힘없는 글을 선보이고 만다. 장엄하게 쓰려다 보면 부자연스러워지고, 감정의 비약을 피하려다 보면 소심하게도 땅바닥을 기는 꼴이 되고 만다. 단일한 소재에다 대담한 변화를 꾀해 생기를 불어넣고자 한다더니 숲에다 돌고래를 그려 넣고 파도에다 멧돼지를 그려 넣는다. 기술이 없으면 잘못을 피하려다 또 다른 실수를 한다.`맞는 말만 하는 호라티우스. 그의 지적 앞에서 다시 반성문이다. 써놓고 보면 모호하고, 고치고 보면 맥없고, 다시 보면 부자연스럽고, 완성이다 싶어도 땅바닥을 기는 글을 생산할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퇴고할 때마다 멧돼지가 있어야 할 곳에 돌고래가 날뛰고, 돌고래가 있어야 할 곳에 멧돼지가 튀어나오는 경우는 쓰는 한에서는 평생 지속되리라. 디테일한 호라티우스의 짧은 시론에 깜짝 매력을 느낀 한나절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12

갈망한다면

의연하면 이기고 흔들리면 진다. 목표 앞에서 단단하면 끝내 살아남아 손을 흔들고, 어리바리하면 자기연민에 빠져 결국 손을 놓는다. 목표 지향적인 이들은 우선 스스로를 확신한다. 낯설고 두려운 것에 맞설 내공이 있는데다 마음이 단단하니 흔들림이 없다. 그들은 일단 목표를 정하면 저지르고 본다. 여행이든 글쓰기든 취업이든 마찬가지다. 머뭇거리며 시도하지 않았을 때의 후회나 자책보다 재지 않고 저지른 뒤의 공허와 허탈이 그래도 낫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성취감 뒤에 오는 공허일지라도 다다르지 못한 자책에 비하면 훨씬 나은 자긍심 아니던가. 하지만 마음이 무른 자는 그 마음을 굳히는 것부터 버겁다. 자기 확신이 따라주지 않으니 목표는 부정확하고, 실천하는 방법 역시 부실하기만 하다. 당연히 주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고, 쓸 데 없이 소심해지기도 한다. 상담가 고코로야 진노스케가 말했다. “자신이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의 100명 중 98명이 응원을 해도 깨닫지 못한다. 응원해주지 않는 두 명이 있다는 현실만을 계속 비관한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98명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장기판이나 바둑판에서 구경꾼이 판을 더 잘 읽을 때가 있다. 이 경우 자기 확신이 있는 대국자는 구경꾼을 의식하지 않는다. 판을 아무리 잘 읽는다 해도 구경꾼은 구경꾼일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연민에 갇힌 대국자는 스스로 구경꾼 역할까지 자초한다. 주관적 뚝심으로 제 목표를 밀고 나가기보다 객관적 잣대로 제 행위의 타당성을 검열하기 바쁘다. 갈망과 자기검열이 함께 하는 자리에 의외의 승전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껏해야 답보상태나 현상유지라는 밋밋함이 있을 뿐이다.그러니 건전한 목표라면 주저하기보다 시도할 지어다. 스피노자의 통렬한 한 마디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그걸 하기 싫다고 되뇌는 것과 같다.” 갈망한다면 우선 자기 부정이나 자기 연민의 감정부터 걷어내라. 뻔뻔하게 단단할수록 목표점에 한층 가까워진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11

욕망의 투사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타일러라는 미국 청년이 있다. 똑똑하고 야무진데다 선하기까지 한 그를 보노라면 엄마 마음이 되어 절로 흐뭇해진다. 웬만한 한국인을 능가하는 어휘구사력에다 지성과 감성까지 갖춘 그의 유일한 단점은 키가 많이 작다는 것이다. `키가 많이 작다`는 이런 판단이야말로 얼마나 부끄러운 행위에 해당되는지 타일러가 가르쳐준다. 그가 말한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지 않은 것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었다.” 라고. 우리와 문화가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타일러에게 단신 콤플렉스가 없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중적 잣대가 곧 가장 옳은 생각`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상태라면 그의 단신은 배려해야 할 사항이 되고 만다. 방송용 화보 촬영을 할 때 자신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소위 말하는 깔창이 들어간 신발을 주는 것을 보고 타일러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키가 작다는 사실이 졸지에 동정 받거나 감춰야 할 사안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우리 식으로 보면 배려한다고 한 행동이 미국적 환경에서 자라난 그에게는 무례한 오지랖으로 비쳤을 것이다.본인은 괜찮은데 타자가 괜찮지 않은 것, 대중적 잣대는 이런 욕망을 부추긴다. 아나운서는 반듯한 이미지여야 하고, 남자라면 모름지기 키 정도는 커줘야 하는 것, 이런 시각들에 대중은 길들여지는 것이다. 길들여진 그 생각은 참 생각이 아닌데도 어느 순간 내 욕망의 잣대가 되어 버리고 타자의 욕망까지 관장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만다.타자의 욕망을 내가 정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한데 욕망의 기준을 정해 놓은 우리는 타자에게까지 그것을 적용하는 무례를 범한다. 중요한 것은 그런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도 많다는 것. 어떠한 그럴듯한 외형도 깊이 숨은 내면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데도 우리는 보이는 대로 일반화하고 규격화하기를 즐긴다. 그것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내 욕망이 곧 타자의 욕망이라고 단정해버리기까지 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10

영혼이 잠식당할 때

“어느 날엔가 국가를 상대로 일을 하는, 잘나가는 회사의 직원인 한 친구가 내 월급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아레스, 당신은 착취당하고 있어요.`하고 그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실제로 착취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살면서 모든 사람들은 착취당하기 마련이므로 나는 허영과 영광과 경멸과 질투와 불가능으로부터 착취를 당하느니 차라리 직물 사업을 하는 바스케스 씨에게 착취당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에서 발견한 문구이다. 작가 자신을 투영한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는 고뇌하고 기록하는 영혼의 산책자이다. 같은 생각 앞에서 작가는 기록하고 독자는 공감한다. 그게 작가와 독자의 차이점이다. 공감의 독서만큼 값진 것도 없으니 이 경우 작가와 독자는 서로 이기는 게임이 된다.유능한 고양이가 살찐 쥐를 차지한다, 는 서양 속담이 있다. 페소아의 저 인용글에서 `잘나가는 회사의 직원`은 살찐 쥐에 해당된다. 반면에 작가의 분신인 소아레스는 비쩍 마른 쥐에 해당될 것이다. 페소아 입장에서는 살쪘든, 말랐든 쥐는 쥐일 뿐이다. 고양이에게 먹힌다는 면에서 그 둘의 운명은 같은 셈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살면서 모든 사람들은 착취당하기 마련`이므로.있는 자의 쾌락은 없는 자의 눈물 없이는 지탱할 수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이고 신자유주의의 실체이다. 허무주의적 견지에서 현실을 보면 어차피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구조로 세상은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페소아의 통찰을 더 깊이 허무주의적 입장에서 살피면 다음과 같은 말도 성립된다. 외부의 그 어떤 상황도 자신 내면보다 우선하지는 않는다는 것. 지속 가능한 내면의 일상성이 유지되는 한 바스케스 씨를 위해 일하는 소아레스는 평화롭다. 힘겨워도 허영과 불가능을 위해 혹사당하는 것보다는 양심적이기 때문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스스로 제 영혼을 갉아 먹는다는 인식을 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자의식에 곰팡이가 스미는 그 때야말로 소아레스는 바스케스 씨를 떠나야 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09

이미테이션 게임

다른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훈련이 인간사회만큼 더딘 곳도 없다. 세상의 반 이상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관념이나 시스템은 별 검증 없이 이상한 것으로 기정사실화되어 버린다. 가장 보편적 진리는 다양성임에도 독보적 천재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닫혀 있다. 천재성의 실천에만 주력하는 그들 남다른 삶의 방식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는 늘 역부족이다. 하지만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기계가 잘못이 아닌 것처럼, 평범한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가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기계와 사람의 구조가 다른 만큼의 사람과 사람 사이엔 다양성이 존재한다. 몰두형 천재는 감정에 서툴 수밖에 없다. 모든 관심을 한 곳에 `몰빵`하다 보니 사회적 가면을 학습할 기회가 없다. 미화와 과장 없는 직설화법을 구사하는 그들은 친구 관계를 확장시킬 이유 같은 것도 댈 줄 모른다. 학창시절부터 이런 성향 때문에 폭력과 왕따에 시달렸던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은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크리스토퍼를 우정이 아닌 애정의 감정으로 의지하게 된다. 수학과 퍼즐에 능한 튜링은 나치 독일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 해독에 투입된다. 자신이 만든 암호해독기를 크리스토퍼라 부를 정도로 죽은 친구나 학창시절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이해받지 못한 고독한 천재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기계인가 인간인가, 범죄자인가 전쟁영웅인가? 동료나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채 에니그마 해독에 온힘을 다한 그가 세상을 향해 하고 싶었던 가장 절실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날 혼자로 내버려두지 마, 혼자가 되기 싫다고, 이런 절규는 아니었을지. 남다른 사람이라고 아픔, 외로움, 사랑 등의 감정이 없을 리 없다. 비범한 사람들 덕에 세상은 점점 더 나아졌지만 평범한 우리는 정작 그 비범한 자들의 서툰 감정을 깊게 헤아리지 못했다.컴퓨터의 아버지인 앨런 튜링의 비화를 영화화한 `이미테이션 게임`. 한 인간의 실존에 관한 담담한 보고서인 이 영화는 근래 만난 가장 인간적인 작품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