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사이드 브레이크

아들녀석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웃는다. 같이 웃자며 넌지시 고개를 돌려보니 사이드 브레이크 해제를 하지 않고 주행하는 차 동영상 장면이다. 운전면허 교습 중이라 자동차 주행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다 만난 장면 같았다. 운전 경력은 오래됐지만 시쳇말로 `김여사 운전법`에서 별 나아질 게 없는 나로서는 그 장면이 충격이었다. 장면 자체보다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지 않은 상태에서 주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 안 것이 충격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자동차 구조를 모르는 나로서는 `주행할 때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려야 한다.`는 그 사실만 깊게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해제하지 않으면 애초에 차가 움직이지 않는 줄 알았다. 김여사 운전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도 한두 번쯤은 브레이크가 올라간 상태로 주행을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뻑뻑하고 무거운 차체의 느낌이 발끝에 감지되는 순간 곧바로 겁을 먹고 주변을 살폈던 기억이 난다.동영상 속 차는 잘만 달린다. 터널을 통과하는 것 같은데 사이드 브레이크 해제 없이도 정속 주행이 되고 있다. 다만 뒷바퀴가 돌지 않는다. 사이드 브레이크의 주된 기능은 뒷바퀴를 고정하는 것인 모양이다. 계속 달린다면 타이어 마찰열 때문에 불이 날 것만 같다. 그 장면을 찍은 사람이나 옆에서 달리던 다른 운전자들이 그 사실을 운전 당사자에게 알려 줬을까. 남의 일 같지 않아서인지 그 생각이 앞선다.제대로 알지 못하면 무모해진다. 강직하고 자신만만하다고 생각할수록 그런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다. 운전대에 앉아 있는 동안은 자신이 무모한지조차 모른다. 뒷바퀴가 구르지 않아도 정주행하는 데 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운전`이라는 세계에 돌입한 운전자는 경고등이 울려도 차체에 무리가 가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어떤 징후를 감지할 감각조차 나만의 운전이라는 세계에 할당해버렸기 때문이다. 탄내 나고 출력 저하되고 연비 악화되고 부품 마모되어도 모르고 가는 인생길, 누군가의 진심어린 제동이라면 반기고 반길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6

실천해야 꿈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두 권의 책과 손수 뜬 손목 워머를 받았다. 고마우면서도 부끄러웠다. 언제나 한발 늦은 마음 씀, 한 박자 늦은 배려심을 자책했다. 보답으로 집에 오자마자 책을 일독했다. 두 권 다 자기계발서인데, 먼 곳에서 열린 저자 강연회에 참석해서 내 이름으로 사인까지 받아왔다. 자기계발서 종류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친구의 정성에 감복해 절로 귀히 여겨 읽게 된다. 거부할 수 없는 한 가지 쯤의 매력, 그것이 자기계발서들의 특징인데 이번 책들의 요지도 그랬다. `꿈을 이루려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 변해야 한다.` 꿈꾸는 자는 많아도 꿈을 이루는 자는 드물다. 꿈을 향한 실천적 행동, 그것이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이런 책들은 꾸준히 독자들에게 어필된다. 당장 실행에 옮기지 못하더라도 책을 읽는 그 순간만은 충분한 자극제는 되어주기 때문이다. 열심히 꾼다고 꿈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 실천 없는 꿈은 한여름 밤의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의 괄호 속에는 `실천해야` 라는 엄청난 인내를 요하는 한정어가 숨어 있다.왜 극히 일부분의 사람은 꿈을 실현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만 꿀까. 개인적으로`절박함의 정도`에 따라 일차적으로 길이 나뉜다고 본다. 절박함은 방해꾼과도 같다. 걸림돌이 크고 잦을수록 꿈을 꿀 기회도 그 열매를 딸 가능성도 높다. 넘어지려하거나 넘어진 자의 절박함이 실현된 꿈으로 나타나는 예는 얼마나 흔하던가. 그저 아무 일 없거나 다만 평화롭기만 한 사람들은 꿈 꿀 이유가 없다. 꿈조차 꿀 필요 없는 충만한 안식으로 제 안이 가득 찬데 무에 꿈이 필요할 것인가. 그들은 꿈 따위로 애면글면 자학 모드를 설정할 이유가 없다.꿈꾸는 자라면 절박함이 있고, 절박하면 꿈꾸게 되어 있다. 꿈만 꾸고 실천하지 않으면 절박하지 않은 거다. 꿈이 꿈으로만 남아있는 건 내 절박함이 그 꿈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꿈으로만 있는 꿈은 꿈이 아니다. 실천해야 꿈이다. 새해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한 마디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5

첫 마음으로

희붐한 새해가 밝아 온다. 다행히 쾌청한 날씨다. 해마다 그랬듯이 마루로 나가 동녘하늘을 바라본다. 첫 마음이듯 한 해의 첫 해를 그렇게 맞이한다. 아주 옅은 빛의 아침노을이 깔리고도 한참 지나서야 2015년의 새 빛은 그 붉은 머리끝을 드러냈다. 우리집 마루에서의 일출 시각은 일곱 시 사십 분경이었다. 해 뜨기까지의 기다림과 설렘의 시간은 길었다. 하지만 막상 뜨기 시작한 해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하늘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분명 새 빛이건만 변함없는 그 빛 자체의 모습에서 오히려 신선함을 느끼는 그런 감정이었다. 달아나듯 떠오르는 빛을 향해 상투적이긴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소망을 빌었다. 새해엔 모두에게 좋은 일이 더 많이 가닿기를.스마트폰 알림판에도 온통 붉은 해가 솟았다. 저마다의 덕담으로 피워 올린 햇살꽃이 폰 곳곳에 만발했다. 연중 최고로 화사하게 피어나는 햇살꽃 앞에서 나도 일일이 상대의 안부와 안녕을 기원한다. 첫 마음결 같으면 뭐든 안 될 게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때마침 지인분이 보내온 새해맞이 덕담 시구가 보인다.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 첫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 학교에 입학하여 새책을 앞에 놓고 /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마음으로 공부한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 늘 새마음이기 때문에 /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새로운 마음을 지닌다고 있던 `헌 마음`이 당장 사라지는 것도, 새로운 그 무엇이 곧장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첫 마음의 다짐은 우리에게 힘이 된다. 늘 좋은 일만 이어지는 것이 삶이라면 첫 마음 같은 건 필요치도 않다. 그러니 새해에는 저마다 꿈 꿔도 좋다. 그 꿈이 꼭 이뤄지기를 기원하는 건 너무나 인간적인 바람이니 그 또한 당연하다. 다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첫 마음이 지닌 실천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것. 간절한 첫 마음의 실천력, 그 덕목이 올 한 해 내 가슴에도 그들 가슴에도 올올이 심어지기를 바라고 바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2

최선의 갈무리

또 한 해가 저물었다. 파다 만 우물처럼 물은 솟지 않고 갈증만 남았다. 우물은 내년에 계속해서 파면 될 것이고 우선 급한 갈증부터 해소하기로 한다. 올해를 넘겨서는 안될 것부터 체크한다. 갈무리는 잘해야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로 한다. 기실 초대랄 것도 없다. 바깥 밥 먹고 겨우 티타임이나 마련하는 자리이다. 하지만 건성으로 주부 타이틀을 쥐고 있는 나 같은 이에겐 그 정도도 쉬운 게 아니다. 마루부터 둘러본다. 치우고 손봐야 할 것 투성이다. 장식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약봉지와 각종 파스, 몇 달은 방치해 놓았음직한 보조식탁 위의 더께 쌓인 고지서들, 주인 손길에서 멀어진 지저분해지고 풀 죽어 있는 창가의 화분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 왕도는 없다. 그저 찬찬히 해나가야 한다. 불필요한 물건들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린다. 내 깜냥으로 감당하지 못했던 화분들도 정리한다. 목 꺾여 숨넘어가기 직전인 폴리셔스에 물을 주고, 누렇게 말라가는 관상용 대나무의 잎 끝을 잘라준다. 물을 너무 자주 줘 물러버린 알로에의 가지를 솎아낸다. 여름 지나 한 번도 닦지 않아 희붐한 먼지 알을 까고 있는 인도고무나무의 넓은 잎을 닦아준다.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온들 근본적으로 달라질 건 없다. 약봉지는 장식대 위에 내리꽂히는 햇빛에 바랠 것이고, 날아든 고지서는 빚처럼 식탁에 쌓일 것이며, 화분은 여전히 창가에서 목이 타들어갈 것이다. 살아가는 한 나는 약봉지고, 고지서고, 화분이다. 먼지 쌓이고 수선스러우며 말라가는 그것들을 손님이 온다고 해가 바뀐다고 확 버릴 수는 없다. 다만 최선을 다해 갈무리 할 뿐이다. 유효기간 남은 약은 약보관함으로, 철 지난 고지서는 분리수거함으로, 단장을 마친 화분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둔다. 치우고 버리고 솎아내기만 했는데도 마루 풍광이 달라졌다. 목간 마치고 거울 앞에 선 색시처럼 새치름하고 깔끔하다. 이 정도면 됐다. 친구들도 새해도 맞을 정도는 되었다. 갈무리는 완벽히 바꾸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정리하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31

마음 공부

누구나 맘속 평화를 갈망한다. 모든 문제는 화평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왜 심리적으로 한결 같은 평화가 지속되지 않는 걸까. 욕심 때문이다. 모든 화의 근원은 욕심이다. 미운 사람이 생기는 건 내 욕심에 그가 차지 않기 때문인 거고,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도 내 욕심이 부른 화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조절되지 않는 게 사람이다.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이라며 조물주는 인간의 그런 행동을 느긋이 즐긴다. 평화를 바란다면 우선 기대할 것이 없어야 한다. 기대할 것, 즉 기댈 곳이 없으면 절로 평정심은 따라온다. 산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새벽녘에 금궤 덩이가 머리맡에 놓여 있기를 바라고, 방주를 지휘하는 노아처럼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나만 선택해줄 것 같은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평정심은 이내 허물어진다. 일단 평정심을 유지하기만 하면 사물이나 상대에게 흔들림이 없게 된다. 그 무엇이 내 곁에 없어도 살 수 있고, 그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게 된다. 중심이 잡힌 그 마음이면 비로소 사물이나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일상의 괴로움 대부분은 그 무엇이 내 곁에 없어서 그렇고, 그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아서 그렇다. 모든 건 내 편협한 생각의 우물에서 비롯된다. 그 물은 깨끗하지도 향긋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내 우물만은 그럴 것이다, 라고 믿고 싶어 한다. 갇혀 있는 상태에서 열린 상태로 만드는 부단한 마음의 노력 그것이 곧 중심을 찾는 길이다. 중심이 잡히면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중심을 향하는 공부가 마음공부이다. 그것만 제대로 되면 사물 때문에 번잡할 일도 사람에게 흔들릴 일도 없게 된다.`사람의 마음은 그의 책이고 벌어지는 사태는 그의 선생이며 위대한 행동은 그의 웅변이다.` 매콜리가 한 말이다. 올 한해 내 마음이란 책에도 많은 선생이 다녀갔다. 숱한 선생이 다녀갔지만 아직 위대한 행동인 웅변의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터진 목으로 웅변이 되어 나오도록 하는 길, 그 마음의 중심 길에 닿기 위해 남은 날도 정진할 따름인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2-30

향취인지 악취인지

제 사정은 제가 제일 잘 안다. 그 말은 대개 옳다. 상식과 교양의 울타리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제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 스스로를 너무 잘 알아 괜히 움츠러들고 소심해지는 게 보통 사람의 행동 패턴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잘 알고 단속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치기도 하게 되는 게 사람살이이다. 방학을 맞아 기숙사에 있던 아들이 귀가했다. 학기 중에 짬을 내 집에 들른 적은 있었지만 완전히 짐을 싸들고 온 것은 이 년만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 때부터 외지 생활을 한 터라 기숙사 생활이라면 넌더리가 난다고 했다. 온몸의 기가 다 빠져나간 듯하다고 했다. 이번 겨울만은 집밥을 먹으며 원기를 회복하고 싶다고 했다. 귀가한 아들의 묵은 한뎃잠 보따리를 풀었다. 새 옷이든 빨랫감이든 가리지 않고 지독한 홀아비냄새 난다. 다른 친구들에게 냄새 풍기는 게 미안하지도 않냐고 물었다.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다. 기숙사 생활 특성 한 공간에서 지내며 공동 세탁기를 쓰다 보니 다른 친구들 사정도 다르지 않단다. 즉 저들끼리는 홀아비 냄새가 나는지조차도 모른단다. 좁은 공간에서 혈기왕성한 청춘들이 북적대다 보니 궁상 섞인 냄새가 밸 수밖에 없나보다.한 울타리 안에서는 잘 모른다. 그 냄새가 향취인지 악취인지. 울타리 밖에 나와야 비로소 그 냄새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것도 스스로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제 삼자가 말해줘야 알게 된다. 중요한 건 그 삼자의 말조차 실로 진실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제 삼자 또한 자신의 울타리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어떤 사안이 고통인지 환희인지 울타리 안에서는 잘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울타리 안에서는 누구나 같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향취와 악취를 다 지녔지만 향취를 풍기는지 악취를 풍기는지 정녕 스스로는 모르기도 하는 게 우리 삶이다. 제 일자 눈썹은 보지 못한 채 남의 팔자 눈썹 보고 웃고, 제 낯 예쁜 것 맞는데 거울을 의심하기도 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29

하얀 지팡이

경상북도 시각장애인 복지관 문예교실 팀의 창간 문집이 발행되었다. 진심을 담아 축하드린다. 회원들을 만나 함께 공부한 지도 벌써 이 년이 지났다. 따뜻한 감성과 진지한 열정으로 글쓰기 강좌에 임하던 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손 끝에 감각을 모아 점자 교재를 읽어 내리던 박만철 님, 행여 교재의 좋은 글을 놓칠세라 포인트 굵은 글씨를 집중해서 들여다 보던 양현주 님, 시각장애인용 컴퓨터를 활용해 강의 내용을 섬세하게 기록하던 오세종 님, 봉사의 여왕이신 임복희 선생님이 준비해온 명작을 온 귀를 열어 고요히 감상하던 김창원 님, 진심이 담겨 더욱 느리고 어눌해진 말투로 자신의 작품을 해설하던 장태욱 님 등, 글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어느 누구에 뒤지지 않았던 회원님들 얼굴 하나하나가 떠오른다.모인 우리가 한 공부는 글쓰기와 문학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곧 사람살이에 관한 공부였다. 어차피 문학도 사람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밤새 써온 작품을 함께 읽으며 웃고 울었던, 사람을 향한 그 마음이 곧 문학하는 본질이었다. 눈이 아닌 오롯이 마음으로만 보는 그 여정에 동참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결실을 모아 창간호인 `하얀지팡이`를 엮어낸 것을 회원들과 함께 기뻐하련다.다른 긴 말보다 문집에 실린 회원의 글 몇 구절을 전하는 게 더 의미가 있으리라. “(지나던 객이 무심코 던진 말이) 저 아들 눈이 멀었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엄마가 돌아가시든지 고생하시든지 아니면 저 아들이 죽거나 고생하셨을 겁니다. 원인은 조상님들 묏자리입니다, 라고 단정하는 것이었다. 함부로 내뱉는 그 여자의 말에 어머니와 나는 충격을 받았다. 옆에 있는 돌과 대빗자루를 들어 저 몹쓸 여자를 힘껏 때려주고 싶었다. 그때 내 심정은 돌 맞은 개구리였다. 인생 여정을 거치는 동안 나도 어언 죽지 않을 만큼의 면역이 생긴 개구리가 되었다. 이제는 웬만해선 남이 울 때 함부로 웃지 않고, 남이 웃을 때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장태욱 님 글)”/김살로메(소설가)

2014-12-26

김밥이 웃는 시간

종강을 앞둔 모 프로그램, 반장을 맡은 분이 수업에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을 해왔다.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오면서도 결석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한 그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다. 아이가 아파 주사라도 한 대 맞히고 오려나 싶었다. 삼십 분 정도 늦은 그녀의 표정에 근심 끼가 돌지는 않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마칠 때였다. 여느 때처럼 점심은 어디서 먹지, 하고 고민하는데 반장님 왈 오늘은 `자기 동네 후미진 곳에 자신만 아는 맛집`이 있으니 거기로 가보잔다. 모두 환호했다. 차림은 소박하고 맛은 담백하며 값까지 착할 것, 내가 생각하는 대중적이면서도 진정성 깃든 맛집의 조건은 그러했다. 동네 후미진 곳에 자신만 아는 맛집이라면 그 조건에 딱 맞을 것이었다.맛집에 대한 기대감의 수다꽃을 피우며 우리는 꼭꼭 숨어 있는 그곳을 향했다. 그런데 앞서 운전하던 반장님이 멈춘 곳은 어떤 아파트 주차장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맛집에 가려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만 아는 후미진 맛집`은 다름 아닌 자신의 집이었다. 초대한다고 귀띔을 하면 회원들이 부담을 느낄까봐 깜짝 이벤트를 한 것이다. 말 할까 말까 밤새 고민하며 준비하느라 수업에도 살짝 늦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 급히 마트에 들러 작은 선물을 마련했다. 그조차 서로 준비하겠노라고 실랑이를 벌였다. 겨울바람이 몹시 찼다. 그럼에도 뭔지 모를 따뜻한 기운이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그미가 차려낸 것은 소박하고 깔끔한 김밥 밥상이었다. 신선한 야채와 고기 등속으로 김밥 속을 꾸려놓았다. 주인장의 야문 손길이 빛나는 도자기 그릇 앞에서 각자 미니 김밥을 제조하기(?) 바빴다. 김밥을 마는 빠른 횟수만큼의 웃음꽃이 피어났다. 준비한 재료와 밥을 싹쓸이하고도 아쉬워할 정도로 맛난 점심이었다.어떤 사람, 어떤 그룹마다 풍기는 특유의 기운이 있다. 그 분위기는 자체로 고유한 성질을 지니는 건 아니다. 사람이 분위기를 만든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게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24

문제가 문제다

표현법만 바꿔도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르침은 매우 유용하다. 말과 몸은 세상을 지배하고 그 영향력은 우주까지 미친다. 말하고 느끼는 방식이 긍정에 가까울수록 우리 삶도 한층 긍정에 가깝게 된다. 마음에 찬 생각도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 서걱이는 모래밭에서 화사한 꽃밭으로 거듭 나게 된다. 본성이 우리를 부추기고 자극하더라도 스스로 방식을 순하게 작동시키면 세상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전자제품 고객 센터를 예로 들자. `고객불만팀`이란 이름보다는 `품질 보증팀`이란 이름이 여러 모로 효과적이다. 고객 입장에서도 부담스럽지 않고, 부서원 입장에서도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된다. 고객 불만팀이란 용어는 고객 입장에서는 별 불만스럽지 않은 사항인데도 내가 까다롭게 구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들게 하고, 부서원 입장에서는 해결해야할 업무를 지닌 느낌이 들어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품질 보증팀이란 용어로 바꾸었을 때는 고객 입장에서는 더 나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위안을 지닐 수 있게 되고, 부서원 입장에서는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맛볼 수 있게 된다.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뭐든 문제가 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으되, 그것이 문제로 남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쪽으로 해결되는 그 무엇이라고 하게 된다면 있던 문제도 문제가 아닌 게 된다. 따라서 `문제`라는 말만 삼가도 좋은 삶의 태도를 지닐 수 있다고 심리학 책은 강조한다. 문제는 문제 자체가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개별자의 태도에 있다.`아까 네가 전화했다는 말 들었어. 무슨 문제라도 있니?` 이런 말보다는 `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어? 궁금한데.` 이렇게 대화법만 바꾸어도 긍정 지수가 높아지고 상큼한 나날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문제가 없는 관계나 사회는 없다.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건 문제를 해결하려는 부드러운 의지이다. 부정적인 이미지인 `문제`라는 말 자체만 자제해도 문제의 반은 해결된다는 가르침을 마구 전파하고 싶은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23

그럼에도 `저녁`

문화 강좌 한 프로그램의 수료식이 있었다. 딱딱한 이론 과정을 거쳐 힘든 자격증 시험을 무난히 치른 회원들의 얼굴엔 짧은 회한과 설렌 희망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후회 없는 과정이 어디 있을까. 그만하면 충분하다며 서로를 응원했고, 플래카드 양끝을 팽팽하게 당겨 인증샷까지 남겼다. 그래도 아쉬워 가까운 밥집으로 옮겨 점심을 함께 했다. 바람이 매서운데다 추운 날씨라 따뜻한 물이 절로 당겼다. 그런데 식탁에는 물통이 하나 밖에 없었다. 누군가 벨을 눌러 물을 요청했다. 도착한 직원은 물통에 물이 가득 차 있는데 왜 불렀냐는 뚱한 표정을 짓는다. 거기까지면 괜찮겠는데 “(물이 있는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그래서 물을 더 달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따지듯이 말한다. 물 한 병이 모자라니 더 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하는데 -거의 정중한 부탁에 가까웠다! -그조차 성가시다며 적반하장이다.이럴 땐 울며 겨자 먹기로 역지사지하는 수밖에 없다. 아마 주인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거나, 동료 간에 안 좋은 일이 있는 상태에서 바빠 죽겠는데 하찮은 물까지 달라고 하니 감정선에 혼란이 온 것이리라. 감정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 매양 한 가지의 낯빛을 유지할 수는 없다. 억지로라도 그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손님 입장도 기분이 엉망이 되고 마니 참고 만다. 그때 인증샷으로 올라온 폰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고만고만한 키를 자랑하는 무리에서 유독 키 크고 늘씬하고 상냥하기까지 한 회원이 나머지 분들의 낮은 키에 맞추느라 기꺼이 무릎을 굽혔다. 그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 오래 잔상으로 남았다. 작은 것에서 기분 상하고 작은 것에서 위안을 얻는 것 그것이 우리네 일상이다.“그리고 항상 바람이 분다 항상 / 우리는 많은 말들을 듣고 말하며 / 육신의 쾌락과 피곤을 좇는다 /…. 그럼에도`저녁` 이라고 자주 말하는군요” 호프만스탈의 시구이다. 크고 작은 온갖 것에 흔들려도 그럼에도 우리는 `저녁`을 기다린다. 서럽고 따뜻하고 정겨운 그 저녁의 위안이 있기에 항상 부는 바람에도 견딜만한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2-22

불안할 권리

`불안`은 현대인의 흔한 화두 중 하나이다. 대개의 우리는 불안하다. 희망의 거짓 미소를 지을수록 맘 깊은 곳에서는 불안의 사상누각을 짓는다. 불안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불편할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범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정치는 지리멸렬하고, 경제는 불투명하며, 사회는 부조리의 경연장 같다. 이런 분위기는 개별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지나간 회한을 떠올려도 불안하고 별반 기대할 것 없는 오늘 역시 불안하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또한 불안하기 그지없다. 달마대사와 신광 스님의 일화가 떠오른다. 신광 스님이 보기에 옛사람들은 도를 구할 때 뼈를 깨뜨려 골수를 빼고, 주린 이를 위해 피를 뽑고, 머리카락을 진흙땅에 펴고, 벼랑에서 떨어져 굶주린 호랑이의 먹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하며 달마대사에게 청한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그런 신광에게 달마는 그`마음`을 가져오면 고민을 해결해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음이란 건 찾을 수도 보여줄 수도 없는 것. 찾지도 보여줄 수도 없는 한갓 마음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해하느냐고 달마는 일갈한다. 크게 깨친 신광은 달마가 보는 앞에서 왼쪽 팔을 칼로 잘라 도를 깨친 징표로 삼는다.도를 구하던 신광 스님의 불안 심리와는 성격이 다르겠지만 현대인 역시 저마다의 불안의 집을 마음으로 짓는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불안의 실체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의 영역이다. 완벽한 자유를 획득할 수도 누릴 수도 없는 인간만이 지니는 고유한 심리기제가 불안이다. 바람처럼 물상에서 떨어져 떠돌 수 있을 것, 물처럼 강바닥을 버리고 흐를 수 있을 것, 구름처럼 지상에서 멀어져 피어날 것, 이런 능동적 고립을 즐길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신광 스님처럼 도를 구하는 자는 극한의 산정에서 홀로 고고하고, 제 안위를 구하는 범인(凡人)은 평지에 몰려 아우성으로 난장을 이룬다. 그러니 스스로 보통 사람으로 알고 생활하는 이들은 불안할 권리라도 누릴 수밖에./김살로메(소설가)

2014-12-19

밝거나 어둡거나

밝거나 어둡거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삶이 그렇다. 누구나 제 삶이 밝기만을 원한다. 하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그렇지 않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된다. 밝은 것 꼭 그만큼의 어두운 것이 삶의 이면에 포진되어 있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한다. 배고프면 울고 배부르면 웃는다. 장난감을 얻으면 뛸 듯이 기쁘고 그것을 얻지 못하면 슬퍼 나뒹군다. 산다는 건 그처럼 단순한 일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보이는 그 이분법적 삶은 실제 한층 다층적이고 복잡오묘하게 짜여 있다. 밝거나 어두움의 표면을 장식하기까지 수많은 심적 세포가 점조직처럼 움직인다. 내 밝음과 어두움이라는 표피는 내 안에서 들끓는 감성과 이성의 혼합물이다.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 나타나는 삶의 겉면에 대해 우리는 기왕이면 밝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어두운 이면을 감추고 싶어 하는 만큼 전면은 밝게 포장되기를 즐긴다. 예를 들면 SNS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일상은 생의 전면인 밝음에 속한다. 내남없이 맛난 음식 먹은 것을 자랑하고 가족애를 과시하며 추천도서를 올린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딱 그만큼의 생의 이면인 어둠이 우리를 잠식한다. 하지만 어둠이 휩쓸고 간 흔적을 굳이 소셜네트워크에 남기지는 않는다. 내 밝음은 자랑하고 내 어둠은 감추려드는 것 그것이 인간 심리의 실체적 진실이기 때문이다.한 다발의 삶, 한 줄기의 삶, 한 다짐의 삶, 그렇게 묶음으로 울다 지쳐 남은 허기로 평화로이 웃는 것. 반대로 한 묶음으로 평화로이 웃다가 남은 허기로 쓸쓸히 울기도 하는 것. 그것을 한 생애라 하자. 벽에 걸린, 환히 웃는 가족사진의 먼지를 훔치다가 구석진 곳에 젖어 내린 벽지를 발견하고 덜컥 주저앉아 솟구치는 눈물을 주저앉히는 일, 그것을 한 꽃잎이라 하자. 깊어진 곰팡내와 축축한 습기의 골방에서 한 줄기 햇살을 만나거나 그 빛 속에 남실대는 먼지의 춤을 한 입김이라 하자. 그러니 짧은 삶 깨춤을 추며 기뻐할 일도, 주저앉아 슬퍼할 일도 아니다. 곰팡내와 습기만큼 딱 그만큼의 햇살과 다사로움이 곁에 머무는 것 그것이 한 호흡의 삶인 것을./김살로메(소설가)

2014-12-18

손톱

매니큐어를 칠한다. 손톱 관리하는 걸 즐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귀찮아서 자주 하지 않을 뿐, 스트레스 해소용이나 기분 전환 목적으로 가끔씩 손톱에 치장을 하곤 한다.`네일 아트`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랬듯이 나도 스스로 손톱을 관리했다. 손톱 두덩이인 큐티클을 무식하게 도루코로 긁어내기도 했고, 양 손톱 옆을 매끄럽게 한답시고 손톱깎이로 후벼 파듯 도려내기도 했다. 세월이 좋아진 지금은 곳곳에 네일 아트 숍이 생겨났다. 남의 손톱을 관리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아도 될 정도로 다양하고 매혹적인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스스로 손톱을 관리하는 것보다 네일 샵에 들르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쌓인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고, 눌린 기분을 풀어주는 대가로 그 정도의 호사를 누리는 건 절대 사치가 아닌 사회가 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손님 좋고 주인 좋은 신나는 행위 중의 하나가 네일 아트라고 생각한다.얼마 전`젤 기법`으로 손톱을 칠한 적이 있다. 기존의 방법에 비해 비싼 대신 작품 지속력이 있고 미용성도 있다기에 그렇게 했다. 혹사당한 손톱의 순서대로 조금씩 칠이 마모되긴 했지만 매끄러운 정도는 봐줄만 했다. 한데 어느 순간 손톱 끝이 갈라지더니 심한 것은 부러지기도 했다. 오래 간다고 가만 둔 게 화근이었다. 그럴수록 중간 점검을 하거나 새로 관리를 받았어야 했는데 시기를 놓친 것이다.손톱도 숨을 쉰다는 걸 왜 몰랐을까. 예쁜 겉만큼 손톱 안에서는 호흡 곤란이 왔던 것이다. 속담에 손발톱이 젖혀지도록 벌어 먹인다, 는 말이 있다. 손발톱이 으스러지고 문드러지도록 일을 해 벌어 먹인다는 뜻인데, 그것이 젖혀지도록 방치만 했으니 나로선 부끄러운 일이다. 멋도 좋지만 실체 보듬기를 잊어서는 곤란한 것을. 내 좋으라고 한 일이 실체를 망가뜨린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꼬. 우선 보이는 가짜에 밀려 탈색되고, 금 가고, 부러지는 진짜를 챙기지 못했다니. 손톱이 새로 자라는 동안 눈썰미 허투루 쏜 그 시간을 불러내 반성문을 쓰고 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17

복지와 일인 가구

스웨덴의 일인가구 증가 추세가 흥미롭다. 전체 가구의 거의 절반이 일인 가구 구조를 유지하는 나라가 스웨덴이다. 스톡홀름의 경우엔 그 비중이 무려 60퍼센트가 넘는단다. 우리 사회 통념으로 본다면 이런 현상은 가족 해체 내지는 가족 위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를 쓴 노명우의 시선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일인 가구주가 되어 혼자 산다는 것은 고독하고 씁쓸하고 어둡고 허망한 것일까. 소득, 건강, 자유, 기후, 정치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의 하나가 스웨덴이다. 전통적 동양 사고로 봤을 때 이는 매우 모순적인 결과이다. 가족과 헤어져 나 홀로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어찌 살기 좋은 나라의 상위권 순위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가족 해체의 징후가 농후한데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사회 문제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지만 스웨덴발 일인 가구에 대한 이런 경고음이 세계로 퍼진 적이 없다.일인 가구의 형성 이유가 강제성에 있다면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다. 하지만 스웨덴의 경우 `자발적 선택`에 의한 일인가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원해서 하는 독립생활이니 고독사니, 유폐 의식이니 하는 부정적 사례에서 한참 멀다. 스웨덴 사람들은 혼자 살 수 있는 여건을 국가적 시스템이 보장해준다. 독립자금을 지원해주는데다 혼자 사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는 사회보장제도라는 안전망이 마련되어 있다.복지가 구현 되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율성에도 날개가 달린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지만 개별성을 확보하고 싶은 욕망의 존재이기도 하다. 가족과 핏줄 앞이라 해도 `혼자이고 싶은 갈망`을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나 홀로 족이라 해서 가족을 버리거나 사회적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웨덴의 경우 일인 가구가 가족의 붕괴가 아니라 가족의 안정화를 꾀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롭다. 이 모든 과정에 복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복지 시스템이지 모여 살든 홀로 살든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2-16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왜 인간은 모든 타자와 완전한 합일을 이루기 어려울까. 하기야 `모든 타자와의 완전한 일치`라는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면 신의 할 일이 무어겠는가. `인간적`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온갖 한계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한계 중 하나는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 두 사이에서 모든 인간적인 문제들이 생긴다. 만약 여러 상황에서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얼추 비슷하게 반영된다면 거기에 따르는 갈등과 번뇌는 문제될 게 못 된다.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의 기 싸움에서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라보는 나가 앞에서는 이기는 것 같지만 실제 보이는 나는 뒤에서 진다.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게 사람이기 때문에 앞에서는 대놓고 진실을 말하기 어렵다. 옳고 그름을 떠나 바라보는 나는 변명이 되기 십상이고, 보이는 나는 진실이 되기 마련이다. 이 예감을 알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나`에 더 치중한다. 예를 들어 `미생`에서 `장그래`가 사무실에서 두렵고 불편하게 느끼는 건 회사를 바라보는 나와 회사에 비치는 나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하게 된 장그래는 보이는 나에 대해 단속하게 되고 신경 쓰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나는 타자를 규정할 수 있지만 내가 규정한 그 타자는 정확한 타자가 아니다. 내가 본 그 타자는 옳게 본 타자도 아니고 옳은 타자도 아니다. 다만 내가 바라보는 내 안의 타자일 뿐이다. 반대로 나를 규정하는 타자에 비친 나는 정확한 타자가 될 수 있다. 나를 본 타자 역시 옳게 본 것도 아니고 옳은 타자도 아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내 밖의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그 시선은 정확한 것이 된다. 그것은 약자 인간이 느껴야 하는 운명의 고리 같은 것이다. 그러니 평범한 대부분의 생활인은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타자를 보는 내 시선보다 나를 보는 타자의 시선이 더 옳다. 세상 모든 장그래들이 남은 연말이라도 편한 일상을 꾸릴 수 있기만을./김살로메(소설가)

2014-12-15

겨울강

박남철 시인이 떠났다. 시적 성과로`쩡쩡`울렸던 만큼 크고 작은 악행으로`쩡쩡`울기도 했을 시인이 끝내 세상과 등졌다. 투병으로 바닥까지 내려앉았을 시인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연민한다. 이제 편해졌으면 한다. 저자에 오르내리는 시인의 소문을 들을 때마다 여성 입장에서 분노하고 피해자 입장에 동조하던 그 마음조차 내려놓기로 한다. 모든 걸 떠나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온전히 너그러워진다는 건 살아남은 자로서 가장 하기 쉬운 애도법이다. “겨울강에 나아가 /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 돌 하나를 던져 본다 / 쩡 쩡 쩡 쩡 쩡강물은 / 쩡, 쩡, 쩡, / 돌을 튕기며, 쩡, /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 쩡, 쩡, 쩡, 쩡, 쩡 / 강물은, 쩡, /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아, 쩡 / 봄이오면 녹아 흐를 것들아, 쩡, 쩡, / 아예 되기도 전에 다 녹아 흘러버릴 것들이 / 쩡, 쩡, 쩡, 쩡, 쩡 / 겨울 강가에 나아가 /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 본다 /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서 제 / 바닥에 닿을 돌들을, / 쩡 쩡 쩡 쩡 쩡 쩡 쩡”시인의 대표시 `겨울강`을 필사한다. 누군가 말했다.`악행보다 더 나쁜 건 위선`이라고.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눈썹이 떨리고 옆구리가 결릴 만큼 뜨끔해진다. 숱한 위선의 행적 앞에서 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행을 저지르기는 어려워도 위선을 행하기는 얼마나 쉽던가. 밥 먹듯 위선을 떨면서도 떳떳할 수 있는 건 그 거짓이 간접적인데다 비겁함은 어느 정도 포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문 악행을 하고도 떳떳할 수 없는 건 그 공격성이 직접적인데다 치명적인 상처를 안기기 때문이다.겨울강이 제 아무리 쩡쩡 얼음장 조이는 소리를 내도 강은 강이고 물은 물이다. 얼음 위, 던져진 돌들은 마법이 풀리듯 봄 오면 기어이 바닥에 가 닿는다. 겨울강을 내려다본다. 아직 얼지 않은 저 물빛, 악행보다 위선을 경계한 시인의 눈물인양 따끔거리듯 반짝이며 흘러간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12

시적 진실이 되는 순간

인간은 여타 동물에 비해 이성적일까. 공평무사한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기는 하는 걸까.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시선을 확보하고는 있을까. 시의성 짙은 흉흉한 뉴스들로 시끄럽기만 한 요즘이다. 보도매체들마다 옳다. 눈과 귀를 더 열면 보도매체들마다 또한 그르다. 서로 자신들이 진실하다고 우기는데 국민 입장에선 그게 그거다. 어떤 현상 앞에서 대개 이론적 당위성과 실제 상황은 다르게 작동한다. 인간은 이성적이지도 않고, 공평무사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객관적이지도 않다. 이성적인 인간, 공평무사한 입장, 객관화하는 자아 등은 철학서에 나오는 당위의 문제일 뿐,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한 게임 양상을 보인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 논리에 따라 제 행동을 규정짓고 거기에 맞춰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논리적 사고를 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집단에 유리하다고 판단할 때만 그것을 작동시킨다. 그렇게 되면 논리적 사고가 비합리적 직관을 앞선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인상 깊었던 영화 장면 하나. 오랫동안 탑에 갇혀 지내던 사내가 인간 사회로 나와 사회화 과정을 학습하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기성의 논리를 사내에게 강요한다. 그를 가르치는 심리학 교수가 그를 탑으로 데려간다. 탑을 보고 사내는`이 탑보다 자신이 살았던 방이 더 크다`고 굳게 믿는다. 또한 큰 건물을 짓는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 탑을 거인이 쌓았다고 확신까지 한다. 탑 안의 방에 갇혀 살 때는 전후좌우 돌아봐도 방은 그대로 있었는데 밖에서 본 탑은 돌아서자말자 제 눈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사내에게는 탑이 방보다 클 수는 없는 것. 비합리적인 감각의 직관이 합리적인 이성의 논리를 압도하는 그 장면이 무척 시적으로 다가왔었다.살다 보면 시적 감수성이 논리적 합리성을 능가할 때를 만난다.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삶 마당, 가끔은 직관의 진정성으로 논리적 사유의 허점을 짚어주는 역설의 아우라를 떠올린다. 오래 갇힌 사내에겐 탑보다 방이 큰 것, 그게 시적 진실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11

램프리턴 유감

`슈퍼 갑질`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뭐든지 시비를 걸 수 있다. 그들이 그토록 신봉해마지 않는 `매뉴얼`을 정작 자신들이 시비걸 때는 지키지도 않는다. 애초에 말도 되지 않는 사안에 시비를 거는 것이니 매뉴얼 따위가 있을 리도 없지만. 슈퍼 갑질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자신 위에는 그 어떤 사람도 있지 않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하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았다고 자사 항공사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한 슈퍼 갑질 부사장 이야기로 온종일 시끄럽다. 뉴욕발 인천행 대한항공 여객기가 활주로로 향하던 중 다시 탑승 게이트로 후진을 하는 램프리턴(Ramp Return)이 있었단다. `램프리턴`은 정비가 소홀했거나 승객의 안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취하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란다. 이 다급한 사안이 이번 경우에는 견과류를 내놓는 방식 때문에 발생했다나.일등석에 자리 잡은 자사 항공사 여부사장에게 견과류를 `봉지 째` 건넨 게 발단이었다. 매뉴얼대로라면 승객에게 의사를 물어본 뒤 음료와 함께 접시에 담아내 줘야 한단다. 견과류 따위를 봉지 째 일등석 승객에게 안기는 것은 무례라 치자. 그렇다고 그 많은 승객들 앞에서 큰 소리를 지르고, 매뉴얼을 찾아보라고 윽박지르고, 당황한 승무원이 제대로 응대하지 못하자 책임을 물어 활주로로 향하는 비행기를 후진시켜 사무장을 내리게 했단다.승객을 위한다는 모양새이지만 실은 승객을 무시하는 오너로서의 오만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에피소드이다. 승객의 안전은 관심도 없는 `갑`의 횡포만 횡횡한 그림이 그려진다. 황망하고 수치스러웠을 사무장의 인격은 또 어찌할 것인가. 매뉴얼을 따르지 않은 것은 직원의 실수요 잘못이다. 하지만 그건 차후에 얼마든지 징계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오너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승객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그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는 것은 슈퍼갑의 횡포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가진 권력이나 누리는 지위를 남용하는 사람들부터 이 사회라는 비행기에서 내침을 당해야 하는 것 아닌가./김살로메(소설가)

2014-12-10

부모의 죄책감은 무죄

학부모 관련 강좌에서 느끼는 특징 중의 하나는 부모님들, 특히 엄마들이 아이와 관련해 크고 작은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자녀들은 절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아이들은 누가 뭐래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커간다. 그게 진리고 순리다. 그런데도 부모인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의 `자식 기르기 프로젝트`에 성공하지 못한 점에 대해 자책하기 일쑤이다. 좀 더 일찍 눈높이 대화법을 알았더라면 그때 아이에게 실수를 하지 않았을 터인데,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그 일에서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 텐데…. 부모로서의 이런 죄책감을 상기시키게 하는 것은 부모들이 자녀교육에 관한 이론 공부를 너무 많이 한 탓도 있다고 본다.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다루는 책에서 둘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 대부분은 부모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다. 부모를 위한 책이다 보니 그럴 것인데, 부모 입장에서는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 심한 경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과연 그럴까. 그 어떤 부모라도 의도적으로 내 자식이 엇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평범한 부모 세대가 그렇듯 이렇다 할 자녀 교육 강좌를 들어본 적이 없고, 어떻게 키우는 것이 현명한 자녀교육법인지 알지 못한 채 자식을 낳고 길렀다. 그저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신념대로 아이에게 행해왔고 그것이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키웠다. 가로 늦게 이론서들을 접하니 모든 게 부모 잘못인 걸로만 보인다. 하지만 부모는 최선을 다해 키우고 자식은 운명처럼 제 갈 길을 간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자책감만 남게 될 뿐이다.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은 층일수록 그 자책의 정도는 깊어진다.실수와 실패 없는 자식 교육이 어디 있을까. 더 이상의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과 그 실수는 결코 부모의 책임만이 아니라는 걸 동시에 받아들일 때 부모라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최선을 다하는 부모이면 족하다. 완벽한 부모를 꿈꿀수록 죄책감만이 친구처럼 따라다닐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09

어두워졌던 모든 풍경

윤석홍 시인의 `밥값은 했는가`(아르코 출판)가 내게 왔다. 기다리던 터라 급하게 겉봉을 뜯다보니 손끝 지난 봉투에 상처가 너덜하다. 얼른 갈무리해서 친필 주소 적힌 봉투를 배경으로 시집의 인증샷을 찍어 시인께 전송했다.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내 소심한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내 뜻과는 무관하게 맨 뒷장부터 펼쳐졌는데 으라차차, 시집 발간에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이 가나다순으로 적혀 있다. 갑자기 속상해진다. 백여 명이 넘는 저 귀한 명단에 끼고 싶은데 내 자리가 없다. 추측건대 시인의 퇴직 기념행사 때 오신 분들의 정성으로 이 시집이 출간된 게 아닌가 싶다. 날짜를 알고도 축하 자리에 가지 못한 점이 못내 민구하다. 맘이 반이다. 아무리 시간이 맞지 않았다 해도 찾아뵐 방법을 연구하면 달리 없지도 않았을 터이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반가운 맘에 시집을 급히 펼쳤으면서도 한동안 망연자실했다.이틀에 걸쳐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맘 자락마다 콕콕 박히지 않는 시가 없다. 시인은 인생의 숙제인 밥값을 생각하고, 참선하는 자연의 모든 것을 노래하며, 비움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쓸쓸히 몸부림 짓는 섬들을 불러 모으고, 금강경 쓰는 아내에게서 풍경소리를 듣는다. 시인의 내면 풍경이 이토록 기꺼운 시어들로 꽉 차 있을 줄 예감하지 못했다.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말들은 고요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호흡은 지축을 흔드는 지진 같고, 몸에서 떨어져 나간 살점 같다. 겸손한 시인의 밥 한 술 속에 들어 있는 `흔들고 찔러대는` 그 울림 앞에서 내 주눅만 가득하다. 한정본이라 시중에서 살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능소화 1`전문을 옮겨와 아쉬움을 달래본다.“불안하다, 늘 / 이제 막 꽃 지는 능소화 /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 옛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피는 향기 / 아직도 그 영예가 그립다 / 어디에도 나는 없다 / 한때 내 눈의 그림자에 가려 / 어두워졌던 모든 풍경들이, 비로소 / 제 빛깔을 찾는 늦여름 / 쓸쓸하구나, 그대 없는 세상은”/김살로메(소설가)

2014-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