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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눈 내리던 날

낮에는 친구들과의 점심 모임에 나가고, 오후에는 모처럼 딸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내켜하지 않는 아이들을 구슬려 예매를 하고 일단 점심 모임에 갔다. 저들은 저들대로 시내에서 볼일을 본 뒤 영화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을 나서는데 진눈개비가 날린다. 설마 쌓이는 눈으로 변하랴 싶었다. 오늘따라 주차 공간이 없다. 상가 동네를 두 바퀴나 돌아도 마땅찮다. 슬슬 짜증이 돋는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니 다행히 저 안쪽에 빈 공간이 보인다. 얼른 주차를 한 뒤 우사인 볼트처럼 달린다. 여전히 진눈깨비는 날린다. 이십 분이나 늦었다. 그래도 괜찮다. 다른 친구들 사정도 비슷했으니.점심을 먹으며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내린다, 교통 흐름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내린다면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그때 아들에게서 문자가 온다. 눈이 많이 내리니 조심해서 오란다. 영화관까지 가는데 몇 발자국이라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상영 시간에 딱 맞춰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차 지붕마다 함박눈이 쌓였다. 그런데 웬 걸, 내 차 뒤에 누군가 호기롭게도 대각선 주차를 떡하니 해놓았다. 앞 유리에 쌓인 눈을 걷어내고 연락처를 찾으니 전화번호 쪽지가 아래로 쏙 빠져 있다. 번호를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영화를 포기할 수 없어 택시라도 잡기로 한다. 눈 오는 날 택시 잡기는 공중을 지나는 제트 비행기를 세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 포기하고 다시 내 차로 돌아온다. 몰골은 이미 옷 입고 사우나 한 꼴이다.영화도 못 보고 집에도 못 가고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그제야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112를 누른다. 친절한 대한민국 경찰이라니! 차 번호를 댔더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란다. 얼마 뒤 차주인이 나타났다. 내 편견대로 여성 운전자다. 민망해하는 표정에다 대고 버럭 소리를 질러 본다. 조금 분이 풀린다. 그 와중에 김여사인지 박여사인지 왈, 어떻게 경찰이 내 전화번호를 알았지, 한다. 나는 대답대신 속으로 대한민국 경찰은 전지전능하거든요, 라고 대꾸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03

환상과 현실 사이

환상과 현실은 다르다. 생텍쥐페리, 라고 말하는 순간 작가의 프로필보다 어린왕자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금발머리에 길고 푸른 외투를 걸친 어린왕자. 생텍쥐페리의 다른 이름이 곧 어린왕자가 될 정도이다. 어린왕자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쏟아내는 별빛 같은 명대사들도 곧 생텍쥐페리 자신의 내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입장을 편집자가 정리한 `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을 읽는다면 그에 대한 무한 긍정의 환상을 지녔던 나 같은 이는 다소 충격을 받게 된다. 어린왕자를 쓴 생텍쥐페리만을 기억하는 일이 독자로서는 행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마보이, 우울증환자, 바람둥이, 대머리, 변덕쟁이 기타 등등 인간적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내 콘수엘로 입장에서 그녀의 자취를 따라 편집된 책이라 다소 과장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는 콘수엘로의 마음을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했다. 방황하는 자유영혼이 그의 콘셉트였다. 시댁식구도 주변인도 인정해주지 않는 결혼 생활에서 남편인 그마저 무관심과 바람과 떠남을 반복하며 그녀를 외로움이란 수렁 속에 방치했다.그는 콘수엘로가 보이지 않을 때야 비로소 그녀에 대한 사랑이 확인되는 사람이었다. 방치한 뒤에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명대사가 되어버린 `네가 길들인 장미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한다`는 그 부분은 어쩌면 갈무리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참회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콘수엘로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을 잡아두고 길들이기 위한 남편의 언술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의 사랑은 그들 입장에서는 온전한 사랑이었겠지만 객관적인 면에서는 불공정한 사랑이었다. 공정이나 공평으로 사랑의 본질을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콘수엘로에 감정 이입되다 보니 생텍쥐페리에게 헌사를 남발했던 지난날이 괜히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독자는 작품으로만 만날 때 행복하다. 완벽한 작품일수록 작가에 대한 환상은 금물이다. 오늘의 결론, 약점과 실수로 뒤범벅이 된 삶일수록 작품성에 기여하는 바는 크도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02

꺾이거나 흔들리거나

선조들은 우화를 만들고 후손들은 거기에서 지혜를 얻는다. 그렇다고 모든 우화가 개인을 완전히 설득시키는 것은 아니다. 라 퐁텐느 우화 중에 유명한 `참나무와 갈대`편을 보자.크고 강한 참나무는 개울가의 갈대를 은근히 비웃었다. 저건 뭐, 바람이 없어도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금세 가는 허리를 허공에다 굽실대는 것이다. 저렇게 줏대 없이 살 바엔 콱 죽어버리는 게 낫지, 참나무는 생각했다. 폭풍우가 몰아쳤다. 튼튼한 뿌리와 너끈한 허리로 참나무는 바람을 견디려했다. 웬 걸, 안간힘을 썼지만 뿌리는 통째로 뽑히고 허리는 갈가리 찢어졌다. 떠내려가던 참나무가 죽을힘을 다해 갈대에게 물었다. “니들은 어째 안 뽑혔노?” 맞장 뜨지 않고 흔들리며 바람이 지나는 길을 터줬기 때문이라는 현명한(?) 대답이 들려온다.우화 내용에 공감이 갈듯말듯 미묘해진다. 라 퐁텐느가 말하려는 가장 큰 주제는 강한 게 강한 게 아니고 약한 게 꼭 약한 것만은 아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지혜로우면 살고 어리석으면 죽는다, 라는 말도 성립되겠다. 저항하면 죽고 피하면 살 수 있다는 논리로까지 연결되고, 갈대의 행보에 과연 지속적인 행운이 따라줄 것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갈대에게 무슨 큰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인가. 약하지만 현명하게 살아남아 강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갈대, 그렇다고 갈대가 강자 입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심한 농부의 낫질 한 번, 장난스런 아이들의 손끝 한 번에 바로 스러지고 마는 게 갈대의 운명이다. 살아남아도 갈대는 갈대요, 죽어도 참나무는 참나무일 수밖에 없다.굽히면서 당당하고, 빳빳하면서 비굴할 일은 세상에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만사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은 그 모순의 경계에 우리 삶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참나무나 갈대의 상황 중 어떤 것이 옳다고 속단할 수도 없다. 현실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승자나 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의 상황 논리에 따라 꺾이거나 흔들리며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30

롤랑 바르트 식으로

롤랑 바르트의 `밝은방`은 펼치는 순간만은 설렌다. 하지만 사진에 대한 문외한인데다 작가만큼 `엄마`에 대한 궁극의 핍진한 애정을 체화하지 못해서 그런지, 막상 그의 사유를 온전히 내 것으로 옮겨오는 데는 좌절하곤 한다. 난해한 그의 글은 폐부 깊숙이 찌르다가도 어느 순간 리듬이 끊긴다. 번역 탓도 있으리라. 같은 내용이지만 절판된 `카메라 루시다`는 덜하다는데 싶어 검색해보니 중고 값이 무려 15만원! 열 배 이상이나 올랐다. 두 책을 비교해가면서 나름의 독해를 시도하려했던 일은 미뤄진 숙제가 되어 버렸다.사진에 대한 막연한 매력을 품게 된 것은 롤랑 바르트 덕이다. `밝은방`에 나오는 `스투디움`과 `푼크툼`에 관한 개념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난 뒤의 일이다. 롤랑 바르트는 지식인 마마보이라 해도 좋을 만큼 엄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교통사고로 죽기 직전까지 그가 한 일은 엄마에 대한 애도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밝은방`에서도 어머니의 사진을 들여다 보며 자신만의 사진론을 역설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사진에 대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공통된 심상 또는 보편적 정서를 스투디움이라 한다면, 구경꾼 개별자의 `폐부 깊숙이 찌르는 세부적 무엇`을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객관적이고, 평면적이고, 대중적이며, 이해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입체적이며, 개인적이며, 소통 부재해도 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게 사진은 푼크툼의 눈썰미를 발설하는 일이었다.`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정하지 않았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사진에서 발견한 그녀의 눈빛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롤랑 바르트만이 제 어머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찌름`의 모습이지 무관심한 타인이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 이미지는 아니다. 푼크툼의 정서는 내밀하고 부분적이며 섬세하다. 한 장의 사진에서 발견하는 자신만의 `알아보거나 눈치 챔`의 특수한 감흥, 이 느낌을 자극해주는 매개체로서 롤랑 바르트의 `밝은방`은 곁에 둘 만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9

다 말하면 시가 아니다

시는 저마다의 맛과 멋으로 해석될 때 시적 기능을 담보한다. 시 한 편마다 정답의 해설이 있다면 그 시는 시가 아니다. 산문이 되어 버린다. 명쾌한 산문이 되는 순간 장막의 시는 그 매혹을 상실해버린다. 시적 긴장, 시적 함축이란 말 속에는 적어도 `아리까리함`의 용인이라는 포석이 깔려 있다. 따라서 시를 풀이하는 데는 모범 답안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각설하고 고영민 시인의 `입춘`을 묵독한다. “봄은 오네 / 강가에는 한 무리의 철새가 모여 있네 / 모여 있는 곳으로 봄은 오네 / 강물은 반짝이고 / 흐름은 졸리네 / 한 구의 시신을 끌고 오네 / 나는 열두 살 / 오후 세 시” 시적 상황 속으로 감정이입을 한다. 바로 어제도 달려갔던, 지금은 달라져버린 고향의 풍광 속으로 스며든다. 여과지를 넘는 물처럼 내 심상은 열두 살 오후 세 시 무렵의 입춘을 투과하고 있었다. 시에서처럼 강물은 반짝였고 그 흐름은 졸렸다. 달라진 게 있다면 한 무리의 철새 대신 한 쌍의 산노루가 마른 풀 섶으로 후다닥 사라진 정도랄까.한 구의 시신을 끌고 오네, 라는 시구에서 잠시 멈췄다. 처음에는 스러지는 겨울을 상징하는 동네 어르신의 장례행렬 이미지가 떠오르다가, 봄을 맞기도 전인 어린 동무의 멍석말이 주검도 그려졌다. 하지만 오랜만에 바라본 고향의 언 강에서 쪼개진 얼음덩이를 본 순간이 떠오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날 풀려 떼밀려오는 얼음조각을 본능적 시적 감성으로 낚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여기까지 닿자 시인의 뜻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시인에게 새해 인사를 가장한 문자를 보냈다. 시체의 의미를 묻는 내 같잖은 질문에 즉각적인 답문이 왔다. 역시 시인다운 답변이었다. 시인답다고 말하는 건, 답을 듣고도 시인이 말하는 시체의 의미를 결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쾌한 답을 내는 건 산문가의 일이고, 시인은 역시 에두를 때 시인의 품격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어떤 답을 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기련다. 그렇다, 그렇게라도 시인 흉내를 내보는 거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8

행복은 전염될수록

행복은 전염될수록 좋다. 유행가 가사처럼 행복해야해, 라고 소망한다. 큰 변고 없이 살아왔으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이소라가 난 행복해, 라고 페이소스 짙은 목소리로 노래할 때 그것이 진짜 행복해서인 것은 아니지 않나. 대부분 행복한 듯 아닌 듯 무덤덤하게 생활한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기는 한 건가 의문을 가지고 조금 심각해지기도 한다. 한데 아무래도 행복해지려면 깊은 자기성찰과 함께 구체적인 몇 가지 다짐이 있는 게 낫겠다. 우선 소유에서 오는 행복감이 전부가 아님을 깊이, 반복적으로 훈련해야겠다. 샤넬 가방과 모피 코트가 주는 행복감 - 아, 아직까지는 꿈에서라도 이런 소유물에 대한 환상이나 집착은 없다! -은 길어봤자 일주일이나 한 달을 넘기지 못한다. 울적한 맘에 기분 전환용 쇼핑을 한 뒤 맛보았던 짜릿한 기분이 순간을 넘기지 못했음을 상기해보라.반면에 사람이나 여행 또는 독서가 주는 행복감은 일 년 아니 잘만 하면 평생 간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한시라도 돈 없이 살 수는 없다. 따라서 경제활동을 위한 신성한 노동은 찬양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목적이 단순히 물질을 얻기 위함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물질적 소유물보다 `경험`을 사는 데 돈의 목적을 두는 게 훨씬 의미 있는 일이다. 물론 그 경험의 범주는 사람마다 다르다.건강하다는 전제가 깔린 하에서 최대 행복의 또 다른 실천 방법은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좋아하자, 라는 것. 행복을 전파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내가 행복해진다. 반면에 불행을 공작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나 역시 불행해진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 곁에 줄을 서고, 불행해지고 싶으면 순경(順境)에도 비탄과 부정의 연설을 하는 이 곁에 붙으면 된다. 오죽하면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도 내게 행복의 기운이 전해진다는 말이 있을까. 행복은 전염될수록 좋다. 그렇다면 나부터 행복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7

최선의 선택

인간은 자신이 규정해 놓은 원칙이나 신념에 따라 행동화한다. 오랜 시간을 거쳐 경험하고 축적된 여러 상황들은 자기내면화라는 깔때기를 거치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개성이라는 고유 행동 패턴을 만들어낸다. 그 행위는 이타적인 것을 지향할 수도 있고, 이기적인 것을 욕망할 수도 있고, 보편타당한 것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 어떤 방식이라도 타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난 받을 일은 아니다. 고유한 행동 패턴은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개별자의 행복감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보편적이든 누구나 제 좋아서 하는 일에는 신이 난다. 몸과 마음이 절로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하지만 삶은 제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내 좋은 쪽으로만 되는 게 삶이라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 앞에서 고민할 이유가 없다. 바라는 대로 그 길을 가기만 하면 되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누구에게나 삶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그들 좋은 쪽으로 되어가게끔 운명 지어졌다. 그러다 보니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려야 할 때도 있고 그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닌 상황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놓고 평생 고민하다 죽음에 가닿는 것 그것이 삶의 길이다. 이 길을 가야 편한데 저 길을 가게끔 불편하게 만드는 시지포스의 운명, 이것이 삶의 실체적 진실이다.원하지 않은 맞선 자리 앞에서 부모가 성화를 하면 단호한 아들이라면 끝내 나가지 않을 것이고, 맘 약한 아들이라면 억지로라도 그 자리에 나가게 될 것이다. 둘 다 편치 않다는 점에서는 같다. 부모의 요청을 거절한 아들은 불효에 대한 자책으로, 마지못해 선 자리에 나간 아들은 그 상황에 대한 거부감으로 맘이 불편하다. 찜찜함의 자책도, 홀가분한 부담도 결국은 자신의 일이다. 이런 상황은 운명처럼 계속된다. 그래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나마 자신의 내면이 더 요청하는 쪽으로 따르는 수밖에 없고 그 판단의 기준도 여럿이다. 그래도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내게 좋고 행복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5-01-26

치환의 기만

문화의 다양성은 시각의 차이에 기인한다. 한류 바람을 타고 `K-팝`못지않게 `K-드라마`도 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분석 하나. 우리 드라마는 서구 시각에서 볼 때에 불편함을 유발하고 의아함을 살 수도 있다는 것. 얼핏 떠오르는 몇 장면. 연적에게서 여주인공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여성의 손목을 낚아채는 남자, 테스토스테론 과다 분비를 검증 받기라도 하듯 여주인공을 벽에 밀어붙이는 남자, 마음을 열지 않는 여주인공의 내숭만큼 쌓인 제 울분을 자랑하듯 주먹으로 유리창을 내리찍는 남자, 등이 불편 유발 장면의 대표적 예이다. 한국 드라마 시청을 위한 안내 매뉴얼이라도 만들어야 할 만큼 서구적 시각에서 보면 이런 장면들은 이해가 되지 않고 불쾌한 모양이다. 문화는 길들여짐이다. 관습화된 암묵적 약속이 모여 문화가 된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사랑한다는 전제하에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낚아채거나, 벽에 밀어붙이는 행위 등은 `남성다운 멋`으로 치켜세워지거나 용인되는 분위기다. 드라마에 몰입하는 그 어떤 시청자도 그 장면에서 폭력이나 성차별을 먼저 읽지는 않는다. 남자는 강하고 멋있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묻혀 그 장면들이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일 수 있다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것들이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반면에 그들이 이런 장면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남성의 소유물로 본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나는 강한 남자이고 내 여자 내 맘대로 보호(?)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라는 시각이 통용되는 사회를 이해 못하는 것이다. 무서운 건 그런 장면을 보면서 공감하고 박수치는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여성 스스로라는 것. 관습적 수요가 있으니 맹목적 공급이 따르는 셈이랄까. 어떤 환경에서는 물리적 액션이 낭만적 정서로 봐지기도 하지만, 다른 환경에서는 폭력적 의아함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게 얼마나 주관적 기만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생각게 되는 대목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3

투사와 감정이입

심리학 용어에 투사((projection)라는 게 있다. 타인에게 무의식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을 일상용어로 바꾼다면 `남 탓`쯤이 될 것이다. 투사에 대한 개념을 지금보다 덜 이해했을 때는 감정이입이란 말과 헷갈렸다. 타자의 상황을 빌려온다는 점에서는 투사나 감정이입이나 같다. 하지만 이 둘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감정이입이 타자의 상황에 동조하고 수긍하고 몰입하는 내 감정이라면, 투사는 타자의 상황을 통해 잘못된 나를 빼버리거나 부정한 채 타자를 비난하는 내 심리를 말한다. 남의 슬픔이나 기쁨 앞에서 내 것인양 동화되는 것은 감정이입에 속한다. 어린이집에 보낸 아이가 열악한 보육 여건에 방치되었다거나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도했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그 아이 편에서 분노하고 동조한다. 겪지 않아야 될 상황에 처한 아이가 내 아이 같고 내 이웃 같기 때문에 저 깊은 곳에서 본능적인 흥분이 솟구친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상처 입은 아이나 엄마에게 절로 공감하게 된다. 감정이입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반면에 남의 슬픔이나 기쁨 앞에서 내 행위의 저속함을 방어하기 위해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은 투사에 속한다. 어린이집 아이가 열악한 보육 환경에 방치되고 폭행을 당하는 것은 내 순간의 실수는 있을지 몰라도 내 잘못은 아니다, 라고 책임 전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근무 여건이 맞지 않는 사회 환경 탓이고, 보살피기엔 너무 손이 많이 가는 아이 탓이다, 라고 나 아닌 다른 것으로 잘못을 돌린다. 인간이기에 이런 무의식적인 자기방어본능이 발동하게 된다. 투사의 전형적인 예이다.인간은 감성의 동물인 동시에 자존감의 동물이다. 예술이나 일상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투영해 타자에게 동화되는 것도 인간이요, 용납할 수 없는 부정적인 행동이나 감정을 남에게 뒤집어씌워 죄의식을 덜고 싶어 하는 것도 인간이다. 심리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두 본능을 적절히 제어하는 인생 과정이 곧 도덕적·보편적 가치 판단 훈련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2

핍진성을 찾아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에 보면 핍진성(逼眞性)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구체적 방법은 작가에 의하면 `갈피 너머에 있는 훨씬 뒤쪽의 단어와 표현`을 찾는 행위이다. 두루뭉술하게 뭉뚱그려서 표현하는 것은 개연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책갈피 앞쪽에 해당된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핍진성인데 이는 갈피 훨씬 뒤쪽에 해당된다. 전체적인 플롯을 통해 개연성이 확보 되면 묘사를 통해 글의 핍진성은 완성된다. 내 식의 예를 들자면 “나는 그 여자가 좋아”라고 말하는 건 개연성에 머물러 있는 거지만 “코를 찡긋하며 웃던 그 모습에도 미칠 지경이었지”라고 말한다면 핍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핍진성을 구축하는 데는 더 많은 염력과 생각의 힘을 필요로 한다. 문학 용어에서 나온 핍진성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진실의 정도를 말한다. 있음직한 이야기로 독자를 납득시킬수록 소설로서의 힘을 갖는다. 플롯과 캐릭터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소설 요건이야말로 핍진성이라고 작가는 강조한다.핍진성을 구체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훈련이다. 눈썰미가 없으면 좀 전에 만난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 사람을 제 삼자에게 설득시킬 길이 없어 그냥 `내 앞에 앉았던 사람`이라고 어물쩍 말하게 되고 만다. 하지만 눈썰미를 훈련하는 경우라면 그가 진자주색 털조끼를 입은 데다, 짧은 단발이었다는 것을 금세 기억해낼 수 있다.소설도 마찬가지다. 훈련하면 글썰미(?)도 생겨나고 나아가 핍진성 획득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눈에 띄는 진자주색 털조끼와 지나치게 짧은 단발을 한 사람을 묘사하는 과정을 통해 그가 성격이 특이한데다 단호한 면이 있음을 독자에게 알려줄 수 있게 된다. 구체적 정황을 담은 묘사 덕에 독자의 공감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믿게 하는 원동력은 핍진성이고 그것을 얻으려면 끝없는 연습의 힘 외의 방법은 없다는 걸 김연수 작가의 귀띔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1

허삼관매혈기 대 허삼관

영화 `허삼관` 덕에 소설 `허삼관 매혈기`도 새삼 관심을 끈다. 원작자인 위화만큼 내게 신뢰를 주는 작가도 없다.`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라는 에세이를 읽은 후 단박에 그가 좋아졌다. 그의 글을 인터넷 신조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웃프다`정도가 된다. 자연스런 웃음을 유발하는데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슬픔의 격조가 느껴진다고나 할까.`허삼관 매혈기`에도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학교에서 배운, 문학적 풍자에 관련된 모든 것이 이 한 권에 담겨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해학, 촌철, 골계, 익살, 조롱, 패러디, 비장, 엄숙 등의 문체적 속살이 잘 드러나는 이 소설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일찌감치 `허삼관`을 보러 갔다. 영화가 원작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단순한 관람기가 맞는 이유는 일단 원작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적 주제를 스크린이 다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허삼관`의 경우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배경을 옮기다 보니 원작의 중요한 대목인 문화혁명의 광풍 시절이 빠져 버렸다. 한국전쟁 직후라는 배경이 중국의 지난했던 한 시절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허삼관이 매혈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소설만큼 절절하지도 실감나지도 않았다. 확실한 재미 요소인 시대적·공간적 배경이 바뀜으로서 당위성을 잃고 가족 신파 쪽으로만 강조할 수밖에 없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허삼관 매혈기`는 `평등`에 관한 알레고리라고 작가는 말한다. 허삼관이 굳게 믿는 평등은 쉽게 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이다. 못된 짓을 한 하소용이 불치병에 걸리는 건 당연하고, 단 한 번의 아내 과오에 복수하는 길은 자신 역시 바람 한 번 피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방식의 평등이다. 하지만 그 평등에마저 못 가진 자는 온전히 다가갈 수 없다. 작가가 숨겨 놓은 진짜 평등이란 죽음 앞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성애라는 한 내용을 작가와 감독이 어떻게 달리 표현했는지 궁금한 이들은 이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고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0

탄력적 사고

쌍둥이 중 누가 장자여야만 할까. 흥미 있는 포스팅을 발견했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쌍둥이 중 늦게 태어난 아이가 맏이가 된다는 것. 상상으로라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단 일초라도 먼저 태어나면 형이 된다는 동양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이야기를 접하니 무척 신선하고 신기하다. 사람의 생각이란 다양한 것. 현대 유럽 사회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도 우리만큼 위계질서를 잡아주는데 집착하지 않는다. 형 동생이라는 개념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전통 왕가에서나 우리식으로 하자면 시골 종갓집 같은 데서는 여전히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은 모양이다. 단 그들이 생각하는 형·동생에 대한 정의는 보편 정서와 다르다. 먼저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늦게 태어난 아이가 형이 된다. 먼저 수정된 아이가 자궁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느긋하게 나온다는 속설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한다는데 그건 과학적 근거가 없으니 넘어 가더라도 나머지 한 이유에는 솔깃해진다. 약한 아이가 먼저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도록 안에서 강한 아이가 밀어내 준 뒤 천천히 나오게 된다나. 강한 자가 곧 형이라는 편견이 살짝 깔리기는 했지만 공감이 가기도 한다. 형이 꼭 동생에 비해 덩치가 크고 의리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힘 세다고 먼저 박차고 나가는 형을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흐뭇한 이야기다.쌍둥이 중 누가 맏이인가, 하는 것은 과학적 진실 차원에서 논할 이야기는 못 된다. 산아의 위치에 따라 운명적으로 먼저 나오고 나중 나오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가 형이고 동생이냐를 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일일뿐 절대적 진실은 아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같은 조건에서 내가 먼저 빛을 봤으니 내가 형이라는 생각도 옳고, 내가 형이니 네가 먼저 빛을 보라고 떠밀어주는 생각도 옳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쌍둥이를 규정하는 순간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탄력적 사고를 하면 세상에 진실이 아닌 게 없게 된다. 사람 생각은 다 다르고 저마다 옳으니./김살로메(소설가)

2015-01-19

남은 시간

혼자 집을 지킨다. 남편은 출장 가고, 딸내미는 근무하고, 아들은 놀러 갔다. 낮에는 몰랐는데 밤이 되니 몸이 으슬으슬하고 떠도는 공기에도 한기가 서려있다. 입에서 쓴 내가 나고 어깻죽지에 동통이 밀려온다. 몸살기니 쉽게 잠들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잡념만 뭉친다. 이럴 땐 식구들의 응원보다 나은 기 보충제는 없다. 괜히 가족 대화방에다 투정서린 문자를 남겨 본다. `이 밤 모두 나 빼놓고 잘 있제? 외롭다.``내일 (집에) 간다.` 애교나 과장을 모르는,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딸내미의 답문이 일착이다. 비교적 싹싹한 아들 답문도 나을 게 없다. `어머니, 파이팅.` 선심 보너스처럼 달린 하트 이모티콘이 민망하다.`숙소 들어가는 중` 남편의 답문마저 초간단하다. 그래도 마음 온도만큼은 문자에 비할 바 아니리라.아니나 다를까 숙소에 든 남편에게서 금세 전화가 온다. `외롭다`는 말의 의미를 직해할 수 있는 사이는 역시 부부밖에 없구나. 일상 그대로의 몇 마디를 나눌 뿐인데도 위안이 된다. 전화기를 끊자마자 덤으로 문자 하나를 보내온다.모 회사가 제작한 가족사랑 홍보물이다. 클릭하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영상이 뜬다. 일 년, 이 년 아니면 몇 개월. 결과표를 받아든 사람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무슨 내용인고 하니 남은 생애에서 우리가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다는 것. 일하고 자고 사람 만나 사교하고 등의 시간을 빼고 나면 가족과 마주하는 시간은 너무 모자란단다. 친절히도 가족시간 계산기가 덧붙여져 있기에 적용해보았다. 남은 시간을 많이 할당 받고 싶어, 잠이나 기타 여가 시간을 내 패턴보다 조금 줄여서 입력했다. 그래도 겨우 7개월.으슬으슬하던 몸에 열감이 확 돋을 정도로 정신이 퍼뜩 든다. 이해하겠거니, 하는 전제를 깔고 다른 것에 비해 늘 후순위로 미루기만 했던 가족의 일. 평균 수명으로 봐도 삼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는데 가족을 위한 남은 시간이 고작 7개월이라니. 숙연한 책임감으로 잠 못 든다한들 이 밤은 할 말이 없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16

방과 밥

가족을 이뤄 산다는 것은 방과 밥을 완성하는 일이다. 편히 쉴 수 있는 우리들만의 공간, 꾸밈없이 마주할 수 있는 가족을 위한 밥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 갖춘 노래이다. 하지만 순간순간 그걸 잊고 살 때가 많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의 심심함이야말로 최상의 버라이어티 쇼였음은 상실의 고통을 맞이한 후에야 알게 된다. 자책과 상실과 극복에 관한 토론 거리를 준비하느라 본 `아들의 방` 영화가 너무 먹먹하다. 이탈리아 항구 도시, 상담의인 지오반니 가족은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의 일상을 엮어간다. 휴일 아침 아들과 조깅을 하기로 했지만 응급 환자의 호출에 응하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새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갔던 아들은 익사하고 만다. 함께 있어주지 못한 죄책감에 지오반니는 주저앉는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천직이었던 지오반니도 자신의 상처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내와 딸의 상실감도 만만찮다.아들의 죽음이 있기 전 그들의 식탁은 평화와 안식의 상징처였다. 무탈하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들이 죽기 전까지는 결코 알지 못했다. 식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무너져 내린 가족의 식사 장면 앞에서 심장이 조여 오는 통증을 참아야 했다.아들의 여자친구의 등장으로 그들에게도 치유의 기회가 생긴다. 안드레아의 죽음을 모르는 그녀는 안드레아가 찍은 그의 방 사진을 보여주며 그 방을 보고 싶어 한다. 아들의 방을 함께 둘러보면서 새삼 그 아이의 존재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알게 된다. 남은 가족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온다. 그녀의 방문을 계기로 지오반니 가족은 진정으로 안드레아를 떠나보낼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동행인과 히치하이킹 중인 그녀를 배웅하다 보니 프랑스 국경까지 오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안드레아를 놓아줄 수 있게 된다. 죄책도 비탄도 상실도 애도도 결국 자신이 극복해야 된다는 것 더불어 평범한 날의 한 끼 밥, 무탈한 날의 소박한 공간이 얼마나 최상의 행복 조건인지를 가슴으로 알게 된 하루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15

비굴한 사회

박노자 교수의 신작 `비굴의 시대`가 배송되어 왔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는 암울하다. 하기야 사회학자의 분석이라는 도움을 빌리지 않아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갑갑하고 절망적인 것인지를 날마다의 경험으로 알게 된다. 우리 현실을 지배하는 가장 큰 흐름은 자본 이데올로기이다.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사회는 내남할 것 없이 그것에 경도되어 모든 가치 판단을 돈과 연관 짓는다. 국민 대부분은 중하급 월급쟁이이거나 영세한 자영업자들이다. 그들에겐 능동적 힘을 발휘할 기회도 패기도 없다. 나머지 십 퍼센트도 안 되는 자산 계급이 이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착각하고 길들여진다. 노력하고 몰입하면 그 십 퍼센트, 아니 일 퍼센트의 그룹과 같아질 수도 있을 거라고. 어쩌면 그런 무모한 착각 덕에 자본주의의 페달을 밟는데 적극적 동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못 가진 자가 득을 취할 일은 거의 없다. 극소수인 가진 자를 위해 수많은 보통 사람 또는 그 이하의 구성원들이 그들을 떠받치는 구조, 이것이 천민자본주의의 실상이다.국가와 자본은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데다 교묘하고 조직적이다. 가진 자나 권력자가 갑질을 해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지속되면 불의에 거부하거나 투쟁할 힘마저 잃어버린다. 자본이 만든 비겁의 굴레에 구성원은 머물고 자본은 그 시대를 백분 활용한다.비굴한 시대상의 좋은 예시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처럼 정당한 분노는 그들의 것이지만 그 분노를 제대로 부려놓을 수가 없다. 불합리와 부조리의 난장 앞에서도 적극적 연대나 공감은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자본의 노예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별자가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희망 잃은 시대를 진단하는 활자 앞에 밑줄 긋기조차 착잡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14

웬만해선

동창모임을 앞두고 한 친구가 더 이상 모임에 합류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분위기 메이커에다 주변인을 챙기는 넉넉함 덕에 모두 의지하던 친구였다. 멤버들이 전국에 퍼져 있어 겨우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한 상황인데 못나올 정도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다. 친한 한두 명은 사정을 알 터이나 대부분은 상황을 잘 모르니 카톡 단체방에는 불이 났다. `희정이가 빠지면 나도 탈퇴다, 회장은 책임지고 희정이를 고대로 모셔 놔라, 희정이 없는 모임은 연탄 없는 난로다.` 등 남자애들의 농 섞인 걱정 문자가 올라왔다. 카톡방에서 나가 버린 희정이가 그 문자들을 못 본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 중 한 문자에 눈길이 간다. “웬만해선 안 올 애가 아닌데.” 이 한마디 안에 희정이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총체적으로 녹아있음을 느꼈다. `웬만해선`이라는 매혹적인 한정어 때문이었다.누군가로부터 `웬만해선`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만 살아도 잘 살고 있는 거다. `웬만해선 그럴 사람이 아냐, 웬만해선 그렇게 힘들어 할 애가 아니지, 웬만해선 지치지 않을 사람인데, 웬만해선 늘 남을 우선하던 사람이지.` 등의 예문처럼 `웬만하면`이라는 말이 타자를 향할 때는 참으로 듣기 좋다. 그 사람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최대 표현법 같기 때문이다.반면에 `웬만해선`이라는 말이 스스로를 향할 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웬만해선 내가 이런 실수 하지 않는데, 웬만해선 내가 흥분하지 않는데, 웬만해선 내가 약속을 어기지 않는데.`등등의 사례처럼 `웬만해선`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남발하면 신뢰가 반감된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타자에게 바라는 변명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웬만해선` 이라는 말은 타자를 이해하거나 감싸주고 싶을 때 더 어울린다. 스스로를 향하는 `웬만해선`이라는 말은 아낄수록 좋다. 꼭 써야 한다면 변명이 아니라 자기반성용이라야 한다. 역시 실천이 어렵다. 그나저나 웬만해선, 이라는 다사로운 수식어를 받는 희정이에게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김살로메(소설가)

2015-01-13

직속(直屬)

변함없이 고만고만하기만 한 저녁, 어두워지는 시간의 깊이만큼 검은 공허감이 밀려온다. 습관처럼 한 편의 시를 읽고, 한 문장의 산문에 밑줄을 긋는다. 길 떠나 한뎃잠 설친 간밤의 피로가 여전하다. 그래도 문맥은 제대로 와 가슴에 꽂힌다. 누가 뭐래도 읽고 쓰는 일의 직속일 때가 가장 평화로운 자극이다. 최승자의 시 한 편을 묵독한 후 글벗이 건넨 김연수의`소설가의 일`을 펼쳤다. 앞장 색지에 빼곡하게 남긴 글벗의 친필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님을 알게 된 것, 제 인생의 크나큰 행운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밑줄 팍팍 그었고, 도전도 얻었고 용기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끝내 희망에 겨워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 신파에 잘 빠지는 어설픈 초보라 과하게 감격했는지도 모르겠으나, 님께도 분명 의미 있는 책일 거라 여겨 삼가드립니다.” 친구가 되는 일의 숭고함, 한 권의 책이 주는 용기와 도전 정신, 그 책이 친구에게 가서 같은 의미를 줄 것이라는 확신, 인용한 몇 구절 속에 무릎 담요 같은 포근한 진심이 담겨 있다.김연수 산문의 일부 요지는 이렇다.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그러니까 쓰기에 왕도 없다. 매일 읽고 쓰면 된다. 쓰고 싶다고 타령할 그 시간에 그냥 쓰면 된다. 쓰는데 재능 같은 건 없고 재능은 잠겨 있지도 않다. 그것이 글쓰기의 비밀이다.“꿈인지 생시인지 / 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 / 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 / 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 // 꿈인지 생시인지 / 나도 베란다에서 /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최승자의`물 위에 씌어진 3`의 시편이 김연수의 산문 내용과 겹쳐진다.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간다. 뭉근한 열정의 김연수는 매일 소설을 쓰고, 꿈인지 생시인지 기로에 선 최승자는 시간 맞춰 화분에 물을 준다. 골방에 틀어 앉은 또 다른 열정가는 글밭에 씨를 뿌린다. 종이의 직속이 되어 글씨를 뿌린다. 쓰는 자에겐 그것이 정치요 경제이며 사회의 전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12

`언브로큰`

오랜만에 조조로 개봉영화 한 편을 봤다. `언브로큰`. 일본 극우파들이 자국 내 상영을 결사반대한다는 바로 그 영화다. 감독을 맡은 안졸리나 졸리에 대해서도 입국 금지 서명 운동을 펼칠 정도라나. 호들갑을 떨며 그들이 흥분할 만큼 일본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영화일까 싶은 호기심에 개봉 첫날 일찌감치 달려가 보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주된 내용은 베를린 올림픽에 달리기 선수로 출전한 바 있는 한 미국 남자의 일본 제국주의 포로 생환기이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점잖은 수위의 묘사가 이어졌다. 원경험자의 증언을 충실히 반영하느라 그런지 스토리텔링에 과장이 없었다. 밋밋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조금 지루했다. 고춧가루와 젓갈이 잘 배합된 김장김치를 기대하고 독을 열었는데 심심한 동치미가 담긴 독을 만난 기분이랄까. 그 어디에도 우리가 알고 있던 전시 일본국의 잔혹한 포로 학대기는 없었다. 어느 집단에서도 있을 수 있는 고만고만한 포로수용소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미국인 포로를 산 채로 장작처럼 태웠다거나, 죽인 다음 인육을 먹었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장면은 그림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주인공 루이 잠페리니가 당하는 폭행과 수치심은 관객이 몸서리 칠 정도의 극한의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 장면들에 저 난리를 칠까 싶을 정도로 순화된 장면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 우익집단의 극단적인 보이콧 현상이 도리어 입소문이 되어 이 싱거운 영화의 롱런을 돕게 될지도 모르겠다.반성을 하면서 몽니를 부리면 그나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반성은 간데없고, 원폭 피해자라는 결과적 아픔만을 내세워, 진짜 피해자의 근원적 고통을 외면하려 드는 그들의 합리화에 할 말을 잃게 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만이 만행이 아니다. 인간 실존의 위엄을 짓밟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실상도 그에 못지않았다. 가장 직접적인 피해 국민으로서 영화보다 더한 잔혹성을 연출했던 그들의 잘못이 반성으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온건한 묘사이긴 하지만 그들의 실체를 전하는 이 영화가 오래 상영되었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9

파이의 유머

이백 여일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소년 파이. 물론 혼자가 아니다. 무시무시한 벵골 호랑이와는 육지를 만날 때까지 함께 한다. 끝내 둘은 살아 돌아온다. 이 어마어마한 진실은 소년 파이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솔한 경험이다. 하지만 누가 파이의 말을 믿어 줄 것인가. 보고도 제대로 믿지 않는 게 사람이다. 아니 보고도 제 식으로만 믿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어찌 본 적도 없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을 믿으란 말인가. 있는 그대로만 믿으라고 곧잘 말들 한다. 하지만 그 말조차 믿을 게 못된다. 있는 그대로의 기준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그 무엇은 본성 그대로의 형상과 내용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개별자의 눈에 비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있는 그대로` 라는 의미는 현실에서는 `개별자가 본 대로`가 되기 일쑤이다.이런 철학적 사유를 깊이 있게 파고든 소설이 `파이 이야기`이다. 얀 마텔의 유머 감각에 한 번 빠지고, 단순하고 쉬운 문체에 두 번 넘어가고, 진중하고 의미심장한 주제에 세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작품이다. 소년 파이의 태평양 표류기랄까. 인도의 한 도시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네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고 이참에 팔린 동물들과 함께 화물선에 오른다. 배는 난파되고 가족 중 파이만이 살아남아 벵골호랑이와 망망대해에서 표류동거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에피소드들을 삶의 철학에 빗대 풀어 놓았다. 삶의 방식과 종교 문제 및 인간의 본성 등, 살면서 느낄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도마 위에 오른다.비현실적인 파이의 후일담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의심을 감안해 파이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버전으로 등장인물들을 각색해 능청을 떤다.“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밝은 모습으로 말하는 파이의 유머가 슬퍼 보이는 건 왜일까. 세상엔 너무 많은 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별자 숫자만큼의 진실을 믿고 싶어 하는 한, 파이의 유머는 단순한 유머로 보이지만은 않는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8

물은 높은 곳에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의심해본 일 없는 그 물리적 진실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강어귀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이사한 몇 년 전부터 짬이 나면 강물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남달리 풍부한 서정적 심성 때문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가늠하기 어려운 물결 방향 때문이었다. 상식으로야 바다가 보이는 쪽이 낮은 쪽이니 그곳으로 강물이 흐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물길은 하루에도 심심찮게 그 방향을 바꾸곤 했다. 아침나절 분명 뭍에서 바다로 흐르던 물줄기가 오후가 되면 바다에서 뭍을 향해 바뀌어져 있곤 했다. 신기하면서도 의문스러웠다. 급기야 `모든 강은 바다로 모인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론으로만 성립하는 헛말이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강 하구에서는 물이 역류해 내륙 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는 제멋대로의 결론을 내려놓기까지 했다. 아침에 바다로 흐르던 물이 오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륙 깊숙한 곳으로 밀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았다. 물결 때문이었다. 지형 특성상 하구는 강폭이 넓은데다 강심의 높낮이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 물 흐름이 완만하니 바람 없는 날에는 호수처럼 강 물결이 잔잔하다. 하지만 강한 서풍이 불어오면 바다로 향하는 물결은 파도가 몰려오는 것처럼 드세게 일렁인다. 도도한 물줄기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동풍이 몰아치면 물결은 방향을 틀어 내륙을 향해 밀려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물결 표면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거꾸로 흐르는 강은 없다. 바람결 따라 표면의 물결이 거꾸로 반사될 뿐, 속 깊은 물은 변함없이 바다로 흐른다. 어떤 사안 앞에서 그것이 잘못되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진실하다면 제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겉 물결이 역류한다고 물길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의 물은 위에서 아래로 묵묵히 흐른다. 그 깊은 속은 결코 역류를 허락하지 않는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