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 색깔이 짙은 50대 중반의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몇 해 전이다. 식당에서 며칠 일해서 돈을 벌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조증이 염려되긴 했지만, 즐겁고 자신감 있어 보이는 것은 다행이었다. 우울한 기간이 길어지고 입퇴원을 반복하더니, 일 년여 사이 눈에 띄게 쇠락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그랬던 그가 오늘은 단정한 매무새에 모처럼 화장도 한 얼굴이다. 먼저 말을 건네지는 않지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대답을 해주는 것이 참 고마울 정도다. 여름 추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당에 멍석 깔고 둘러앉아 칼국수를 먹었어요. 큰 오빠가 녹음기 갖다 놓고 아버지부터 쭈욱 차례대로 노래 부르게 해서 녹음하고 다시 들었어요.”
특별히 우울했던 운동회 날의 기억도 꺼낸다. 모두들 맛있는 도시락을 펴놓고 가족들과 함께 먹는데, 한 가지 반찬뿐인 시커먼 도시락을 혼자 먹는 일이 창피해서 울었다고. 늦게 들어온 엄마는 운동회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셨다고.
현재까지 연구된 우울증의 원인으로는 생화학적, 유전적, 환경적 원인의 세 가지가 있다. 스트레스만으로 주요 우울증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증상이 나타나는 데에는 많은 영향을 준다고 한다.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에 노출되었던 기억을 오래 가지고 있거나, 우울한 기분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고 덮는 것은 증상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쓸쓸했던 운동회 날의 어린 S씨를 충분히 이해하고 토닥여주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혹은 수많은 그런 날의 기분을 혼자서 억누르지 않고 표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길게 남는다. 오래전 여름 저녁, 식구들이 녹음기 앞에서 불렀던 노래 제목까지 이야기하는 S씨는 오늘 참 편안한 얼굴이었다.
/윤은현(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