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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검은 다이아몬드 문체

“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나는 작중 인물들의 내부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말할 때도 나는 일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계속 유지할 뿐이다.”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저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소설을 쓸 때 결코 인물 내부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은 옳다. 반면에 등장인물과 함께 슬픔에 빠지고 두려움에 떤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말처럼 보인다. 철저하게 외부적 시선을 유지하는 사람은 슬픔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떨게 될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감정적 시선에서 떨어져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슬픔이나 두려움을 다스리고 잠재워야 할 것인가.하지만 그녀의 대표작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나면 첫머리에 인용한 저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의 문장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하다. 묘한 것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한 그 문장들이 독자에게 건너가면 바늘 끝 같고, 손톱 같은 `콕콕 찌름`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벌목장에서 베이는 나무처럼 무뚝뚝한 문장들이 툭툭 넘어졌을 뿐인데, 그것을 목도한 독자는 손댈 수 없을 만큼 아린 통증을 품어야 한다.건조한 문투 덕분에 오히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매혹을 앓게 하는 그녀. 너무 아프면 아프다고 말 못하고, 너무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 잇지 못하는 원리와 같다고나 할까. 과장이나 과잉 없는 서술로 사건 많은 쌍둥이의 일생을 전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 감정선을 드러내는 그 어떤 묘사 없이, 짧고 단호한 직설로 뱉어내는 발화법. 그 속에서 처절한 절망의 노래를 느끼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어느 비평가가 그녀의 문체를 `검은 다이아몬드`에 비유했다는 말이 어쩜 이리 와닿는지. 처절하고 냉엄하고 허위적인 삶의 조각들을 불러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그녀의 방식에 뒤늦은 찬미가를 보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06

욕망이라는 양철지붕

예술의 효용은 진실 탐구에 있다. 보편적 정서라는 잣대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고, 추한 것을 추하게 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시각이라 굳이 예술의 범주에 넣지 않아도 된다. 현상의 그 모든 이면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과정 그것이 예술 행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한 예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들은 인간 욕망의 밑바닥까지를 들춰낸다.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군상, 몸서리치는 자책으로 탈출을 꿈꾸거나, 환상과 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개인의 초상 등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작가의 경험과도 무관치 않은 이런 설정은 우리 일상과도 겹쳐 있기에 정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누구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살아간다. 같은 제목의 윌리엄스 희곡은 제어할 수 없는 인간 욕망을 고양이에 비유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고양이는 없다. 하지만 삶이란 무대는 만만치 않다. 욕망하는 무엇을 탐색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판쯤은 견뎌내야 한다.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폴리트 할아버지의 생일 즈음, 모인 식구들은 평안과는 먼 분위기에 휩싸인다. 평생 남편에게 냉대 받으면서도 그를 사랑한 부인, 지나치리만큼 냉혹하고 현실적인 큰 아들 부부, 그들은 동생에게 거대한 아버지의 재산이 상속될까봐 전전긍긍한다. 둘째아들은 이런 상황과는 무관하게 개인적 고민으로 갈등한다. 동성애적 관심을 호소하던 절친한 친구의 죽음이 자신의 외면 때문이라는 자책에 시달리며 점점 비현실적 인물이 되어 간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는 사랑의 결핍에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시아버지의 재산에 집착하게 된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스스로의 운명에 발을 동동 구른다.삶 자체가 달궈진 양철지붕이다. 억눌리면 억눌리는 대로, 냉혹하면 냉혹한 대로, 절실하면 절실한 대로 우리는 그 판 위에서 저마다의 발바닥을 단련시킨다. 뜨거운 지붕 위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발바닥의 동동거림만 더해질 뿐, 좀체 벗어나기 힘든./김살로메(소설가)

2014-11-05

삶과 죽음의 의미

“정말 영원히 산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놓치는 것도 없으며, 서두를 필요도 없다. …. 회복할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수없이 많은 실수도 영원 앞에서는 무가 되고, 뭔가 후회한다는 것도 무의미해진다.”파스칼 메르시어의`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실은 동명제목의 영화를 먼저 봤다. 언제부턴가 영화와 원작이 있다면 영화부터 보는 습관이 생겼다. 영화와 원작이 동시에 알려진 경우라면 영화를 먼저 보는 게 낫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작만한 영화가 없기 때문이다.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에 실망하게 되지만,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으면 둘 다 만족할 수 있다. 영화를 먼저 보면 등장인물이 축소되고, 주인공 심리가 덜 전달되고, 줄거리가 비약적 도약을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책을 읽기 전이기 때문에 영화의 약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뒤 영화를 보면 심리적 곤욕에 시달리게 된다.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 분위기나 섬세한 풍광 진득한 심리 묘사 등이 영화에서는 제대로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경우도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본 건 잘한 일이었다. 영화와 책 둘 다 이기는 게임이 된 셈이다. 비 오는 날, 묘령의 여자가 남기고 간 빨간 코트와 책 한 권의 흔적을 찾아 무작정 리스본행 열차를 타게 된 남자. 시간여행의 형식을 빌려 타인의 삶을 추적하는 이야기인데, 그 속에서 우리는 역사적 진실과 다양한 개별자의 고뇌를 만나게 된다.예정에 없던 일탈을 감행하고픈 날들도 오는 게 삶이다. 용기 있는 자 미인을 얻고, 머뭇거리지 않는 자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그 누구도 타자의 삶에 간섭할 수 없다. 우연의 매개물이 나타나 운명처럼 삶과 죽음의 의미를 캐묻거든 지체 말고 떠나 볼 일이다. 리스본이 꼭 목적지일 이유는 없다. 물론 영화나 책이 그 경유지가 되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04

고통 받지 않을 권리

존엄사 관련 소식이 화제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뇌종양 말기로 힘겨워하는 메이나드라는 젊은 여성이 자신의 존엄사 예고일을 동영상에 올렸다가 다행히 날짜를 연기했다. 하지만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여전히 `존엄사`를 포기하지 않겠단다.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좋아하던 노래를 들으면서 자신의 침대에서 세상과 작별하는 게 그녀의 바람이란다. 존엄사도 크게 보아 안락사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존엄사는 소극적 안락사를,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를 의미한다. 환자의 사전 의사가 있었다는 전제하에, 의료진에서 생명단축수단을 사용하거나 생명 연장 조치를 더 이상 하지 않을 경우를 일컬어 안락사라 한다. 위의 경우는 죽음에 이르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행위 주체가 환자 당사자이기 때문에 주목을 끈다.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적극적 존엄사` 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죽음이 기정사실화된 가운데 극한 고통에 시달릴 경우 과연 연명 치료는 의미가 있을까. 삶이 소중한 건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삶이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 부쩍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회복 불가능한 단계에 이른 환자에게 어느 누구도 죽음의 방식을 강요할 순 없다. 죽음 직전에 감당해야할 고통 너머의 고통을 당사자 대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생명의 고귀함을 설파하기 위해 환자의 고통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다른 모든 논쟁거리를 뒤로하고 남은 자의 양심이나 도덕적 판단보다는 `환자의 고통`이 우선 배려되어야 한다는 것. 무의미한 연명치료만이라도 생명 중시라는 이데올로기 앞에서 지속되지 않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존엄사나 안락사가 죽음의 방식으로 완벽한 모델일 리는 없다. 그렇다고 환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도 없다. 생명 연장이냐 고통 완화냐 그 딜레마 앞에서 한발자국도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지만, 그래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고통 받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1-03

불편해야 진실이다

젊은 시절 사보 만드는 일을 잠깐 한 적이 있다. 주경야독을 하는 십대와 이십대들이 주를 이루는 섬유업체에서였다. 어느 날 현주라는 아이가 직원란에 실릴 시 한 편을 가져왔다. 수줍은 미소로 그미가 내민 원고의 마지막은 이러했다.`언제나 아름다움이 머무는 곳, 이곳이 바로 00입니다` 구체적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회사어천가 쯤 되는 내용이었다. 집 떠나 외롭고 고달픈데 사장님이 진심을 다해 그들을 배려하고 잔정을 내니 그 또래 감성으로는 충분히 그런 시를 쓸 만했다. 그런데 우연히 가불을 하러 사무실에 들렀던 아줌마 직원이 그 시를 보더니 혼잣말인 듯 제법 큰 소리로 말했다. “아름다워야 아름답다고 하지. 쉬운 말로는 뭣인들 못할까. 월급만 올려주면 나도 그렇게 쓰겠다.”예상치 못한 발언에 충격을 받았다. 회사에 관한 시라면 당연히 아름다움을 노래해야 한다고 생각한 내게 아줌마의 진솔한 한 방은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줌마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불편하고 불공평한 것 투성이였다. 딱히 회사 자체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불만이 아줌마로 하여금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한 것이었다. 남편 없이 두 아이 키우고, 시댁 건사하고, 미래를 설계하기엔 이 사회가 결코 아름다운 곳이 못되었다. 가불하기 위해 들어서는 회사 문턱조차 얼마나 높았을 것인가.진실은 언제나 잠자는 평화를 배반하고, 진정한 미학일수록 아름답다는 편견을 거스른다. 고요하대서 진짜 평화가 아니고, 눈을 호사시킨다고 모두 아름다움은 아니다. 제 아무리 힘들어도 천성이 선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아름답고 평화롭게 보인다. 그들의 그 맘은 진심이다. 하지만 세상의 곤고함을 경험한데다 생의 이면을 보는 촉이 발달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조건 아름답거나 평화롭지만은 않다. 서정의 눈길이 앞선 이들은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 보려하고, 통찰의 눈이 깊은 사람들은 추함까지도 미의 범주에 담으려 한다. 진실은 추하고, 추함은 불편함을 능히 감당할 자만이 이끌어 낼 수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31

오독의 자유

시 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은 오독(誤讀)에 있다. 그 어느 분야보다 축약과 비약이 허용되는 장르가 시이다 보니 읽는 이마다 행간의 의미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이 의도한대로 꿰뚫어 볼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독자 맘대로 이해했다고 그 시를 잘못 읽은 거라고 말할 수도 없다. 젊은 시절 김동리 소설가와 서정주 시인이 술집에서 만났다. 그때 김동리는 시도 쓰고 소설도 썼다. 시 한 편을 쓴 소설가가 시인에게 그것을 읊어 주겠다고 했다. 취중 시인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가가 짧은 시를 읊었다.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 한 구절을 들은 시인이 무릎을 쳤다. “명작이다, 명작.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울다니!” 꿈보다 해몽이요, 시보다 해설이다. 시인을 떠난 시는 독자의 몫이다.“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이성복 시인의 시 `남해금산`첫 구절이다. 젊은 시절 이래로 나는 그 시에 나오는`돌`을 줄곧 `돌멩이`로 이해했다. 해변에 널려 있는 검은 몽돌 정도로 상상했다. 작고 반질거리는 반투명 검은 자갈돌에 들어앉은 여자를 상상했다. 소우주라는 거창한(?) 알레고리로 돌멩이를 해석했다. 남해금산에 대한 그 어떤 지리적·환경적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시를 접했기 때문에 이런 무지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남해금산이 바윗덩어리 산이고, 시에 나오는 돌이 자갈돌이 아니라 `바위`를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상상했던 시적 그림을 바꿔야 한다는 것에 저항감이 밀려왔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내게 `남해금산`의 `돌`은 `몽돌`이미지로 남아 있다.정서적 충만을 유도하는 즐거운 오독은 시적 비약이 허용되는 것만큼이나 독자에게 허용될 자유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를 왜곡하고 굴절하는 오독이 아니라, 시인이 의도한 것과 다른 미적 쾌감을 담보하는 오독이라면 굳이 바꾸지 않아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발화자인 시인들 스스로 그들의 시를 기꺼이 오독해주기를 바랄지도 모르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4-10-30

담백하게 단순하게

동방의 한 임금은 인간에 대해 알고 싶었다. 현자더러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라 했다. 나라 일로 바쁜 왕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현자에게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는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임금은 너무 늙어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을 다시 줄여오라고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서 왔다. 병상에 누워 죽어가던 임금은 한 권으로 줄인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깊이 생각한 현자는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였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에서 인용된 동방의 현자 이야기이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다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강박에 가까운 선현들의 가르침이 우리를 스스로 지닌 무게보다 더 큰 무게로 자각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서머싯 몸의 말처럼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우리가 가는 길에 꼭 뚜렷한 목적의식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삶이니 나름대로 성심을 다해 살아가면 그만이다.삶은 거창한 것보다 소박한 것에 기댈 때가 더 많다. 저 광활한 우주로 영역을 넓히면, 자기존재증명 같은 노력이 얼마나 하찮고 시시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굴레에도 예속되지 않는, 지금 이대로의 작고 소박한 삶의 고귀함.그러니 가장 치명적인 아픔인 `먹고 사는 걱정`만 해결되었다면 욕심을 버릴지어다. 애초에 인생에는 큰 의미 같은 게 숨어있지 않았으니. 가을볕에 흔들리는 단풍잎의 소소한 반짝임이 서로 다른 만큼의 차이일 뿐인 너와 나의 삶. 누구나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이 단순한 진리를 되새기기만 해도 어느 정도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담백하고 단순한 일상을 꾸리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삶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0-29

개별성의 눈

심리학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리 -토끼`그림은 왼쪽에 초점을 맞추면 토끼가, 오른쪽에 초점을 맞추면 오리가 보인다. 그보다 더 유명한 `루빈의 꽃병`그림은 중앙을 주시하면 꽃병으로, 양쪽 배경을 주시하면 사람 얼굴 옆모습으로 보인다. 이런 그림의 원조 격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밀라노의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정물화 `채소 기르는 사람`은 똑바로 놓은 상태에서는 사람 얼굴이, 거꾸로 놓고 보면 바구니에 과일과 채소가 담긴 풍경으로 보인다. 원래 그림은 검은색 그릇에 각종 채소와 과일이 담겨진 평범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림을 거꾸로 놓고 보면 검은색 그릇은 모자로 보이고 각 채소와 과일은 사람 얼굴 하나하나를 가리키게 된다.우리의 시각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런 단정적인 얘기보다는 적어도 두 개의 믿음 이상을 허용하는 열린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정서적 반응의 정도에 따라, 시각적 범위에 따라, 또는 심리적 기제에 따라 우리 눈에 비치는 대상은 달라 보일 수 있다. 그곳에 무엇이 있고, 그 무엇의 내용과 배경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 대상을 무엇으로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개인의 내면 심리에서도, 사회 무리 안에서도 이런 갈등은 적용된다.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이라도 밥벌이의 절실함 앞에서는 제 신념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아무리 자신이 보아온 그 무엇의 형상과 이미지가 선명하다 해도 상대가 경험한 그것의 형상과 이미지가 다르다면 제 눈만이 제대로 보았다고 고집을 피울 수도 없다. 한 대상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두 가지 이상이다. 그림의 왼쪽이나 배경이나 `거꾸로`를 봤다고 해서 그 그림을 잘못 봤다고 할 수도 없다. 원초적 모순을 내장하고 있는 개별자의 눈, 그것 때문에 갈등하고 그것 덕에 웃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저마다의 눈에 비친 세상만을 볼 수밖에 없는 화가이자 감상자로서의 인간의 한계라니!/김살로메(소설가)

2014-10-28

단풍이 있는 풍경

늦가을 풍광이 다채롭다. 그 중 색채의 화려함으로만 보자면 단풍나무가 으뜸이다. 그런데 조금만 눈여겨보면 단풍나무도 다 같은 단풍나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잎사귀가 갈라지는 개수도 다를뿐더러 물드는 정도에도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풍과 나무는 크게 다섯 종류란다. 뾰족잎이 세 개인 것은 신나무, 다섯 개는 고로쇠나무, 일곱 개는 단풍나무, 아홉 개는 당단풍나무, 열한 개는 섬단풍나무이다. 그 중 가장 붉은 잎을 자랑하는 것은 `당단풍`이란다. 이름에서 오는 느낌처럼 당 성분이 많으면 단풍도 잘 드나 보다. 이처럼 같은 단풍잎 모양 나무라도 나무가 처한 환경이나 성격에 따라 잎 갈퀴 개수도 다르고 물드는 정도도 다르다. 사람 사는 동네인들 다르랴.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본질에서는 누구나 같다. 하지만 사람마다 본래 지닌 성정이나 살아온 이력 그리고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개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한데 우리는 가끔씩 착각한다. 내가 당단풍 무리에 속해 있으면 모두가 거기에 맞춰줬으면 하기도 한다. 단풍나무도 아닌 것이 단풍나무처럼 물드는 신나무나 고로쇠나무가 얄밉고, 잎 갈퀴를 아홉 개로 맞추지 못한 채 불투명하게 물드는 단풍나무나 섬단풍나무가 야속하기만 하다. 같은 당단풍나무로 온 산을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이면 좋을 텐데 곁가지들이 섞이는 바람에 가을산 풍광을 망쳐놨다고 푸념하기도 한다.이런 결속은 상대의 개성이 우리라는 보편성과 동떨어질수록 확연히 드러난다. 신나무나 고로쇠나무라는 개성이 당단풍나무라는 집단에 섞이려들지 않고, 제 특이질을 발휘하게 되면 견제를 받게 된다. 눈에 띄는 개별자는 객관적인 옳고 그름을 떠나 비난의 타깃이 되기 십상이다. 타깃을 자처한 적 없기에 제 몸에 타깃을 지녔는지조차 모르는 죄 없는 개별자에게, 우리라는 결속의지는 무례하게도 화살을 겨누기도 한다. `보편성의 당단풍`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그 순간에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평정심보다는 흥분이 그 결속을 지배하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7

기억이라는 윤색

얇디얇은 꽃잎이 겹겹이 쌓였다. 한 송이에 무려 삼백 여장의 꽃잎이 피어난단다. 미나리줄기 같은 연한 꽃대에 꽃받침마저 바짝 붙어 있어 담백하기 그지없다. 꽃잎이 휘돌아간 매무새는 장미를 닮았고, 활짝 핀 꽃잎이 겹겹이 벌어지는 모양새는 국화를 닮았다. 우아하기로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백합과 수국 옆에서도 전혀 기품이 달리지 않는다. 습지꽃 라넌큘러스를 두고 한 말이다. 내 멋대로 그 꽃을 `기억꽃`이라 부른다. 음지나 습지의 기억일수록 잘 살아난다. 개구리란 뜻의 `라이나`에서 유래한 라넌큘러스는 이름에 걸맞게 습지와 연못을 좋아한다. 수 백 장의 꽃잎마다 수 백 가지의 기억을 지닌 꽃. 한 두 잎으로 시작해 자꾸만 부풀어가는 습습한 기억들. 한 잎 한 잎 아픈 기억을 보듬고 돌보는 과정에서 가공되고 늘어난 꽃잎들. 꽃말조차 매력, 매혹, 비난이 아니었던가.매혹과 비난은 이음동의어이다. 매력은 시선과 시샘을 동시에 얻는다. 매혹과 비난의 꽃말이 같은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마치 팬을 많이 거느리는 연예인일수록 안티 팬도 많은 것과 같다. 수 백의 잎으로 피어나는 낱장 하나하나마다 다른 기억의 조각보를 지닌다. 인간의 기억은 예민한데다 부서지기 쉽다. 상처와 악의의 기억은 영광과 선의의 기억보다 깊고 오래간다. 따라서 상처나 악의가 더 깊어지기 전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조작하고 왜곡한다.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이다.진실을 본다고 그것이 언제까지나 진실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우리의 기억은 보고 싶은 대로 가공하고 윤색한다. 본 것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봐야 했던 것만 기록한다. 남 보기 좋은 게 아니라 나 보기 좋으라고. 조각보 같은 꽃잎이 모여 한 송이 꽃이 되고 정원이 되고 들녘이 된다. 라넌큘러스 꽃잎이 벌어진다. 잎 얇고 빛 고운 저 기억의 꽃잎들, 한 장 한 장 보듬는다. 죽은 꽃잎은 떼어내고, 덜 핀 꽃잎은 여며준다. 각각의 틀에서 재편집되고 수정되는 연민 서린 꽃잎들, 그렇게 기억의 꽃송이는 피고 진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4

진실로 두려운 것

방관자 효과라는 게 있다. 어떤 일에 상관하지 않고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을 말한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도와주지 않을 때 흔히 쓸 수 있는 용어이다. 주변에 구경꾼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울 확률은 낮고, 행동으로 옮기는 시간도 그만큼 길어진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돕겠지 하는 심리 때문이다. 아무리 옳고 좋은 일이라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제 오지랖을 펼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가 나서지는 못하지만 나보다 나은 누군가가 나서서 그 사람을 도와주겠지 하며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방관자 효과 이론에 역행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 그들은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일에 더 적극적이고 민첩하게 행동한다. 보통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유권자를 의식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제 선행의 활약상을 보아주는 구경꾼이 많으면 많을수록 제 입지를 굳히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한다.진실로 중요한 것은 방관자 효과와는 무관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나 말고 저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 그들을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 저 많은 사람들 중 내가 나서서 도와야 내 행동이 돋보일 거라는 생각 그 둘 다 옳지 않다. 군중 속 구경꾼이 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상황을 회피하려 하고 아주 극소수는 구경꾼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그래도 희망은 있다. 정의감과 선함을 겸비한 이들이 도처에 숨어 있다 말없이 행하러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제 에너지를 쏟아 약한 자와 상대적으로 없는 그들을 돕는다. 그런 이들이 흔치 않기에 감동이 두 배가 되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숙연한 두려움도 알게 된다.권세에 눌리지 않고 강자 앞에서 솔직할 것, 소외나 아픔에 공감하고 약자 앞에서 발 벗고 나설 것, 저 단순하고 담백한 명제 앞에 어찌 그리 담대한(?) 핑계는 많기만 한지. 이해타산 없는 순수한 영혼들을 만나거나 읽는 날, 내 두려움과 비겁함의 실체가 얼마나 일상적이고 이기적인 것인가를 확인하곤 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3

수련에 지름길 없다

`수양`의 사전적 뜻은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품성이나 지식·도덕 따위를 높은 경지로 끌어올림`이라고 되어 있다. 반면에 수련은 `인격, 기술, 학문 따위를 닦아서 단련함`이란다. 제목에 수양이란 낱말을 넣으려다 수련으로 선회했다.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수양이란 말보다는, 최선을 다하면 족하다는 의미가 깃든 수련이란 말이 덜 부담스러워서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묻는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냐고. 공자는 그것도 괜찮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고 답한다. 자공은 `시경`에서 `자르고 쓸고 쪼고 간 듯하다(절차탁마)`고 했는데 그런 걸 말씀하시냐고 되묻는다. 같이 시를 논해도 될 만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며 공자는 자공을 칭찬한다.`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내 식으로 재구성해봤다. 마음을 다스리거나 인격을 도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던가. 결심과 행동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행해야지 결심하기가 무섭게 결과는 언제나 저렇게 행동한다. 가난하면 비굴해지기 쉽고, 부유하면 교만해지기 쉬운 게 사람이다. 각각 두 상황에서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런데 공자는 그것을 넘어 없이 살아도 즐거워하고, 부자더라도 예를 지키기를 좋아하라고 가르치신다. 똑똑한 제자 자공은 스승의 이런 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노력 없이, 수련 없이는 인격이 완성될 수 없음을 스승의 입을 통해 확인한다.학문이든 인격이든 예기든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높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톱으로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며 숫돌에 가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오늘도 만족할만한 수련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마감했다. 맘먹은 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라고, 성인들은 부러 절차탁마라는 어려운 수련법을 범인(凡人)들에게 제시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수련에 왕도 없단다. 그저 자르고 쓸고 쪼고 갈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2

본성 속 덕성

`어려울 때 친구가 참된 친구`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어려울 때`라는 말은 당사자 둘 중 하나만 그런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 나머지 상황이 괜찮은 사람이 그 친구 곁에서 격려해주고 도와주는 경우 이 속담은 유효하다. 그렇다면 둘도 없던 친구가 곤경에 빠지고 그 때문에 나 또한 힘들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옛날에 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재상이 있었다. 상하귀천을 따지지 않아 종들과 비슷한 일상을 꾸리기를 좋아했다. 자신이 고기를 먹으면 종들에게도 고기를 주었고, 종들이 김치를 먹으면 자신도 김치를 기꺼이 즐겼다. 그것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 예의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모종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설상가상으로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기와 김치를 가리지 않고 함께 먹었던, 식구라고 여겼던 종들부터 모두 떠나가 버렸다. 몹시 야속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시간이 흘러 복권이 되어 다시 재상 자리에 올랐다. 종들이 가장 먼저 돌아와 같이 일하기를 청했다. 재상은 배신감에 고래고래 고함부터 질렀다. 그러자 한 종이 말했다. “주인님, 어찌 사람의 본성을 모르십니까. 어른께서 우리와 고기를 나눠 먹든, 김치를 같이 먹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려워지면 제 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어른께서 덕을 베풀지 않았다면 이 많은 종들이 다시 재상님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인간은 매번 도덕적·이성적 판단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게 정답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저렇게 행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그 모든 것에 앞서 `내가 살아야 하는 실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낭패가 뒤따르고 부덕의 자괴에 몸서리치더라도 인간이 인간이려면 덕성의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제 것을 지키는 지극히 인간적인 본성 속에서도 타자의 덕성이라는 후의는 결코 잊히지 않으리라는 선한 믿음. 그 믿음이 주는 밝음 때문에 덕을 짓는 사람들의 행보는 오늘도 이어진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0-21

어쩐지 몽롱한 사유

2014 노벨 문학상은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가 받게 되었다. 노벨문학상 작가라고 그 작품을 다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 상을 탔다니 예의로라도(?) 일단 책을 산다. 모디아노의 작품은 읽어 본 적이 없어 은근히 기대를 했다.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도착했다. 첫 문장부터 맘에 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가 죽었다` 의 `이방인` 이나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줘`의 `모비 딕` 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매력 있는 첫 문장이다.잃어버린 과거 찾기가 주 내용이고, 나의 정체성 확인하기가 주제처럼 보인다. 부담 없는 두께라 시간적으로는 금세 읽힌다. 그렇다고 쉬운 책은 아니다. 뭔가 몽롱해진다. `나` 롤랑은 과거 찾기에 성공한 것인가, 거듭되는 자아 발견의 고민은 해결된 것인가. 결말 없이 책을 덮고 나면 머리만 무거워진다. 한참 멍하게 있다 정신을 차린다.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어찌할 수 없는 `몽환의 자아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내가 기억하는 내 과거는 온전히 내 것일 리 없고, 타자 기억 속의 내 과거 역시 타자가 기억하는 내 모습일 뿐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딘가에 실존하되 어디에서도 진실로 발견되지 않고, 그 누구도 실체를 알 수 없는 자아라는 수수께끼. 그 근원적 모호함에 대한 서술 방식이 참으로 프랑스 소설답다. 페드로가 잠시 살았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독자로 하여금 자신 또한 그런 거리를 찾아 배회하게 하는 힘, 그것이 모디아노를 놓지 못하게 하는 원천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확실한 것은 “어느 날 무(無)에서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리는 게 우리 삶이란 것. 인파로 붐비는 백사장 사진 속, 모래알 같은 배경이 되었다가 한순간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는 `해변의 사나이` 같은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이 가을, 몽롱한 사유의 거리에서 자아 찾기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0

살아간다는 것

`레지나 브렛이 전하는 삶의 교훈`이라는 내용이 인터넷에 떠다닌다. 50 여개 항목인데 공감할 만한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작가가 90세라기에 신기함 반, 호기심 반으로 검색을 해본다. 역시 와전된 거란다. 어떤 사람이 이메일로 잘못된 정보를 보냈는데 그것이 세계로 퍼졌다나. 1956년생인 작가는 `나더러 90살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주 젊다는 것은 놀랄만하고 좋은 일이다.` 이런 두루뭉술한 인터뷰를 했다. 나이에 대한 독자들의 오해를 방치함으로써 다른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관심을 끌었으니 성공한 마케팅인가. 어쨌든 50여 가지 인생 지침서 중에 내 맘에 닿는 것도 많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좋다.” 공평한 게 인생이라면 얼마나 무기력해지고, 살 맛 나지 않을 것인가. 공평하지 않은 그 게임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공평함에 조금이라도 다가서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다독이고 정비하게 된다. 이런 자세는 삶의 활력이 되어 여전히 살만한 인생이란 긍정의 마음을 갖도록 해준다.“너 말고는 어느 누구도 너의 행복을 책임지지 않는다.” 행복의 기준도 행복을 보는 관점도 사람마다 다르다. 다른 이의 행복 커트라인에 내 점수를 맞출 필요는 없다. 내가 행복해지는 대상과 그 접점이 누구이고 어디인지는 나 자신이 제일 잘 안다. 그 기준에만 닿는다면 충분히 행복한 것이다. 누가 뭐래도 행복은 내 안에 있지 너 안에 있지 않다.“쓸모가 있거나 예쁘거나 기쁨을 주는 것 외에는 어떤 것이든지 버려라.” 자기계발에 대해 충언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해준다. 버리지 못하면 집착과 아집에서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깊은 데까지 가지 않더라도 잘 버려야 공간이 생긴다. 공간은 곧 여유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곳에 있거나, 불필요한 것들로 꽉 찬 곳에 머물게 되면 가슴부터 답답해온다.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걸 알고 긍정할 것, 잘 비울 것, 스스로 행복해질 것. 이 삼박자만 맞춰나가도 살 맛 나는 삶과 가까워지는 것을./김살로메(소설가)

2014-10-17

품성에 근거한 교류

인간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나만의 새로운 통찰을 발견한 건가 싶어 나름대로 정리해보지만 늘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모든 희로애락의 성찰들은 이미 오래 전에 선각자들이 완벽하게 정리해놓았다. 후세대인 우리는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과정을 취할 뿐이다. 가령 이런 문장은 어떤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은 즐거움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은 유익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한다. 이런 근거로 성립하는 친교는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이 얻어지지 않으면 해체된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상대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것이었는데, 그 소유물은 지속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품성에 근거한 친교는 사랑 자체로 성립하기 때문에 지속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친교에 있어서 교환의 원칙`을 얘기하는 부분이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번이나 맞장구를 치게 된다.남녀 간의 사랑이 성립하는 데는 품성적 근거가 주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미모나 미소나 손발짓 등 자신만이 느끼는 감각적 코드에 의해 마음이 움직인다. 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처럼 사랑을 구하는 사람이든 사랑을 받는 쪽이든 그 중심에는 `자신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관계의 객관성과는 무관하며 사랑의 근원적 개념과도 거리가 멀다. 따라서 구하는 자, 받는 자 어느 한 쪽이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해체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얻을 게 없으면 만남을 지속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반면에 품성에 바탕을 둔 만남(물론 남녀 간의 사랑에도 이런 사례는 흔하다)은 사랑 자체로 성립한다. 서로간의 품성이란 매력에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감성적 코드에만 머문 필요에 의한 만남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고, 서로를 신뢰하는 높이도 높을 수밖에 없다. 일방적으로 구하려고 하거나 받으려고 하는 건 진정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가 주려고 하는 품성의 합일점 그곳에 완벽한 사랑이 있음을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16

그녀의 답

전설의 탁구 선수 덩야핑. 1990년대 탁구사에서 그녀를 능가한 활약을 보여준 이는 없었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현정화 선수마저 번번이 좌절케 한 탁월한 기량을 보여줬던 선수. 24세 정상에 있을 때 은퇴를 선언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못다 한 공부였다. 특기자로 칭화대에 입학했을 때 그녀는 거짓말 조금 보태 알파벳도 제대로 모를 정도였다. 다섯 살 때부터 탁구만 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그녀는 운동할 때의 근성을 공부에도 접목시켰다. 지독한 공부 끝에 학부를 졸업하고 영국 유학까지 갔다. 끝내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거머쥐었다. 것도 운동 관련이 아닌 경제학 박사. 영어와 거리가 먼 선수생활을 했던 사람이 이룩하기에는 힘든 성과였다. 평생 공부만 해온 사람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캠브리지 대학 800년 역사상 세계 정상급 운동선수로서는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단다.인민일보 계열인 지커닷컴 CEO가 된 그녀에게 기자가 물었다. 탁구와 박사와 사업 가운에 무엇이 가장 쉽고 무엇이 가장 어려운가를. “세상에서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 그녀의 명료한 대답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세상에 쉬운 일 없다는 건 떼쟁이 어린아이도 안다. 하지만 세상에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은 쉽게 믿기질 않는다. 세상사는 안 되는 것 투성이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력해도 우리가 바라는 것의 반도 이뤄내기가 어렵다. 내 의지대로 되는 것도 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상황이 흘러가는 경우도 있고, 내 의지가 박약해 애초부터 그 뜻을 관철할 에너지가 부족한 상태도 많기 때문이다.평범한 사람은 못 이룬 것에 대한 핑계를 찾는다. 하지만 비범한 사람은 처음부터 핑계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세계를 백 번 이상 제패한 최고의 선수에게 두려움 따위는 적수가 되지 못한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걸 어릴 때부터 실천해온 사람에게는 뭐든 된다는 강한 자기 긍정의 기가 서려 있다. 흔들릴 때마다 덩야핑의 무한 긍정의 신념을 신선한 자극제로 삼아도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15

삶은 이미지로 각인된다

“우리에게 기억되고 각인되는 건 이를테면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죽음이 닥치는 순간, 그는 매끄러운 책상 위에 놓인 클립을 집으려고 책상 위를 긁고 있었고, 미끄러운 클립 때문에 얼굴 가득 불만스러운 표정이며, 고통으로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고, 그리고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이 죽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레이먼드 챈들러의 편지 한 구절이다. 챈들러 소설의 묘미는 묘사와 대사에 있다. 그런 그의 글쓰기 방식을 선호하지 않은 편집자는 더러 작가의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그 부분을 빼곤 했다. 편집자는 독자들이 오로지 `행동`(결과)에만 주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편집자나 평론가들에 대한 불만 섞인 예를 들어 챈들러는 저런 편지를 썼다.챈들러에 백번 공감한다. 우리 삶이 그렇다. 행동의 결과가 모든 의미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소소하게 쌓인 이미지에서 그 의미가 살아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오늘 하루 고달프고 힘들었다 치자. 과연 `오늘 하루는 몹시 피곤하고 힘겨웠다.` 이 말로 내 하루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그것은 언젠가는 휘발되고 말 회상이다. 몹시 피곤하고 힘겨운 하루는 오늘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반면에 풍경으로 남는 이미지는 오래 각인된다. 고춧대를 뽑아내던 엄마의 등 뒤로 번지던 쑥부쟁이 향기, 장날마다 맨발로 신작로를 달리던 애꾸눈 총각의 낡은 런닝셔츠, 깜짝 학교를 방문해 내 기를 살려주던 곁방 새댁의 자주색 주름치마, 어스름 안개를 뚫고 어깨동무 잡지를 싣고 오던 둘째오빠의 고달픈 어깨. 이 모든 이미지는 명백한 풍경이 된다. 그 풍경을 되새기면 구체적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곧 삶이 된다. 의미가 부여되는 삶.거기 고통이 있었고, 거기 환희가 있었다. 이렇게 결과론적 서술만으로 삶이 다 설명되어지는 건 아니다. 그것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건 풍경과 묘사이다. 순간의 선명한 이미지가 모여 삶의 모자이크를 이룬다. 미끄러운 클립 하나의 풍경이 끝내 의미가 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14

어쩐지 짠한

맑은 날 해야 할 일을 비 내리는 날에 가서야 하고, 유행 지난 옷은 별 고민 없이 헌옷수거함에 잘도 던져 넣는다.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 중 하나이다. 웬만큼 게으르고 적당히 편안을 모색해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다. 오히려 너무 부지런하고 너무 완벽할 필요가 없다며, 적당히 쉬어가고 인간적으로 흐트러지라고 부추기는 책들이 나오는 세상 아닌가. 요즘은 무조건 부지런하고, 한없이 절약하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는 어땠을까. 유배가 길어지는 동안 본가의 식구들은 곤궁한 살림을 살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누에를 치고, 아들들은 농사를 배우고 닭을 쳤다. 물려줄 재산이 없는 다산은 자식들에게 편지를 쓴다.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두 글자의 부적이라며 `근`(勤)과 `검`(儉)을 강조한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보다 훨씬 나아서 평생토록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젊은이는 힘든 일을 하고 부인들은 밤 한 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는 것, 잠시도 한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다산이 말하는 부지런할 `근`이었다. 올 고운 옷이 해져서 처량한 것보다 거친 올의 옷을 입어 흠이 되지 않는 것, 이것이 다산이 말하는 검소할 `검`이었다. 근검 두 글자는 `성실함`에서 나오니 절대 속임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딱 한 가지 속여도 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입`이란다. 상추로 쌈을 싸서 밥을 먹는 것은 `보잘것없는` 음식을 입에게 속이기 위한 방편이란다.선생의 산문집 `다산의 마음`에는 스스로를 올곧게 다지는 선비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 맘을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당신과 가족을 채찍질할 필요가 있나 하는 반발심도 인다. 짠한 연민 때문이다. 근검의 실천 항목으로 매일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부녀자들 입장이 가슴 아프고, 먹는 즐거움을 별 것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아비의 애상이 전해진다. 특히 입을 속이면 맛있게 된다는 장면에서는 당혹감이 밀려온다. 늘 덜 먹기를 고민하는 현대인들의 수많은 입 중의 하나라는 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13

그 누구의 사생활도

연예인 생활하는 것도 어렵다. 각종 보도 매체의 진화와 범람으로 이제 연예인의 사생활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마음껏 그들의 사생활을 파헤쳐 대중의 먹잇감으로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알려져서 좋은 사생활은 알려지지 않아서 좋은 사생활 보다 드물다. 대중 심리는 고약해서 알려져서 좋은 사생활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다. 따라서 누군가의 사생활이 알려졌을 때 당사자와 주변인들은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혹자는 말한다. 연예인은 공인(公人)이기 때문에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과연 연예인은 공인일까. 또 공인의 사생활은 무한정으로 알려져도 좋은 것일까. 우선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다. 공인은 `국가나 사회를 위해 공적을 일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연예인은 대중에게 재능을 서비스로 주고 사랑과 대가를 받아가는 직업인이다. 따라서 인지도 높은 연예인이나 스포츠인을 무조건 공인으로 보려는 시각에는 무리가 있다.공인이든 연예인이든 개인이든 그 누구의 사생활도 보호 받아 마땅하다. 물론 공인은 예외가 따른다. 공인의 경우 사회적 지탄을 받을 행위를 했을 경우 반드시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외의 지극히 사적인 일은 공인이라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단정한 매무새, 긴장한 심리 상태로 사회적 생활을 한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풀어진 옷자락, 놓아버린 마음으로 간섭 받고 싶지 않은 게 사람 마음이다. 따라서 불특정 다수의 관음증을 만족시키기 위해 연예인의 사생활을 수집하고 때에 따라서 과장 보도를 하고, 대중을 자극하는 보도 매체들의 관행은 지양되어야 한다.한 연예인의 친부논란 보도로 연예계가 시끄럽다. 다행히 지탄받을 행동이 아니라 본보기가 될 언행으로 대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멋진 부성을 보여주는 그 연예인을 보는 시선이 어느 때보다 호의적이다. 이런 특수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사생활 노출은 그 자체가 당사자들에게는 상처일 수밖에 없다. 대중의 욕구를 위해 그 누구의 사생활도 희생양이 되는 건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