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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스스로부터 보듬기

엘리베이터에서 이웃 아가씨를 만났다. 이십대 여성 특유의 새치름함과 쑥스러움이 없어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엘리베이터 안 그 짧은 시간 동안 말동무가 될 정도로 털털하고 밝은 아가씨였다. 오늘도 문이 열리자마자 예의 환하고 씩씩한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데이트 하러 가나 봐요.`라고 화답을 했더니 그녀의 반응이 이랬다. “아니에요. 이 몸에, 이 얼굴에 누가 데이트 신청이나 하겠어요? 살 빼고 더 예뻐진 다음에 생각해 볼 거예요.”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녀 스스로를 비하하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충분히 예뻤으며, 더 이상 뺄 살 같은 건 없었다. 참 밝고 유쾌한 아가씨다, 라고는 느꼈어도, 한 번도 그녀가 못생겼다거나 뚱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충격을 먹은 것은 그 아가씨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타자의 생각은 나와 같지 않다. 특히 자신만이 생각하는 약점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타자는 나와 생각이 같을 리 없다. 타자는 내가 집착하는 나의 약점 같은 데 관심이 없다. 내 약점은 내 필터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지 타자에게 건너가면 시쳇말로 `의미 없다`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타자는 나만큼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다만 누군가의 비난 서린 한 마디가 평소 자신이 생각한 약점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모든 타인이 나를 `못생겼다`고 생각하거나 `뚱뚱하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 10퍼센트의 타자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약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타자도 그럴 것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오해이다. 타자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약점에 대해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그러니 부디 스스로부터 긍정하도록. 나를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수록 타자의 시선도 곡해하게 된다. 호의적인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마음껏 스스로를 옭아매고 불인정하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스스로 버리는 사람부터 버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5

한 호흡, 반 박자

“핵심은 상대의 말에 말려들어가 두 번째, 세 번째 발언이 이어지지 않게 하는 데 있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다. …. 정말로 무례하고 공격적인 말을 들었다면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 왜냐고? 침묵은 금일 뿐 아니라 잘못 인용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에는 이처럼 매력적인 문구들이 많이 나온다. 여타 인간관계 관련 책보다 진솔하고 현실적이다. `웬만하면 참아라, 포용하면 언젠가 상대가 맘을 알아준다.` 류의 원론적 자기 수양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이 책은 그런 소극적 방식을 넘어선 적극적 자기 표현법을 제시한다. 타자의 입장만을 우선하는 인간관계론은 반쪽짜리 가르침일 뿐이다. 자기 확신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은 일깨워준다.일상의 철학을 담백하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 삶은 그런 것에서 멀어질 때가 있다. 매사가 피로하며, 어쩐지 귀찮고, 확실히 다혈질이며, 언제나 부서지기 쉽고, 자주 옹졸하다. 겉으로 단단하게 보이는 사람이라고 이 `저급하고도 진실한` 인간 심성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사회지도층일수록 예상치 못한 일탈로 일반 대중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는가 하면, 잘나가는 정치인일수록 허술한 수신제가 때문에 자가당착에 빠지게도 된다.자기모순을 줄이고 자기 확신에 이르는 길목에서 필요한 것이 `한 호흡, 반 박자`의 원칙이다. 이 말은 내가 지어냈다. 위기가 닥치거나 흥분이 몰려오는 그 순간 한 호흡만 쉬고, 반 박자만 멈추면 된다. 침 한 번 삼키고 잠시 허공에 눈길 한 번 주면 될 것을, 찰나가 주는 침묵의 향연을 야무지게 새기면 될 것을. 그 리듬을 잃고 성급히 굴다가 자기모멸이란 자술서를 쓰게 된다. 회한과 후회와 번민의 모든 뒤안길에는 지키지 못한 한 호흡, 반 박자가 원죄처럼 남아 있다. 휘말리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을 가장 쉬운 전략은 한 호흡 가다듬고, 반 박자 멈추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실천이 어려운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08-22

잘 듣기

잘 말하기도 어렵지만 잘 듣기는 더 어렵다. `적당히 말하고 나머지는 잘 들어주기` 이런 소통 자세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 다양한 개별자만큼의 다양한 소통 방식이 세상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그에 따른 소통 방식도 달라진다. 일방통행으로 말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묻어가는 자세로 듣기를 좋아하는 이도 있다. 자신의 관심사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노골적으로 재미없어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재미없어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조용히 묻어가거나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남의 얘기를 듣는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말할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을 뿐, 결코 말하고 싶지 않거나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 남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는 것, 거기다 기왕이면 잘 들어주는 것 이런 소통법을 실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잘 말하는 것 못지않게 잘 들어주는 연습도 필요하다. 듣는다(listen)는 것은 영어에서 침묵하는(silent) 것과 같은 철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잘 듣기 위해 잠시 침묵하는 일, 그다지 어려울 것 없어 보이는데 범부로선 얼마나 실천하기 힘든지.잘 듣는 행위의 주체는 나이고, 대상은 너이다. 그 대상인 `너`는 당연히 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만 한다. 약자 곁에서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직면한 아픔과 의혹을 덜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 비굴하고 비열하고 연약한 우리 영혼은 강자의 말을 듣는 것엔 잘 길들여져 있다. 반면에 약자에겐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학습 없이 약자 곁에서 잘 들어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번 방한 활동이야말로 `잘 듣기`의 최고봉이라 할 만한 큰 울림을 주는 행보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1

차이는 차별 아닌 구별

“차이가 없으면 소통의 필요가 없다고 아렌트가 생각한 것은 옳았다. 차이가 없다면 말과 행위도 필요 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우리 모두 똑같다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앞 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코스트 전범 중 한 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취재기인 이 책은 대중성과 흥미를 갖추었음에도 쉽게 읽히지 않는다. 당시 유럽이 처한 정치적 환경과 아렌트가 추구하는 철학적 배경에 대한 독자로서의 지식 부족 탓도 있고, 내용 및 용어 등에서 매끄럽지 못한 번역에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 그럼에도 밑줄 긋기 할 곳이 많은 건 전적으로 아렌트가 발하는 통찰 덕이다. 크고 작은 갈등의 바닥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함`이라는 인간의 기본 성질이 깔려 있다. 욕심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차이의 불인정에 기인한다. 한나 아렌트의 생각처럼 인간에게 `차이`라는 게 없으면 `소통`도 필요치 않다. 같은 생각 같은 모습, 즉 모든 인간이 내외적으로 획일화 되어 있다면 갈등도 소통도 애초에 없는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갈등과 소통 이전에 모든 답이 똑같아 버리는 현실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따라서 갈등하는 인간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소통이 문제이다. 잘 소통하려면 차이를 인정해야 하고, 차이를 인정하려면 `타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감각했던 아이히만의 가장 큰 문제는 `차이`에 대한 무지였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에 의하면 악한 게 아니라 그저 `특별히 천박했던` 아이히만은 사유도 의지도 판단도 할 수 없었다. 타자의 관점에 대한 학습에 노출될 기회가 없는 만큼 악의 평범함에 길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차이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을 의미한다. 너와 나를 차별해도 좋다가 아니라, 너와 내가 다름을 구별하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관점을 훈련하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악의 평범성에 감염될 수 있다는 무서운 가르침!/김살로메(소설가)

2014-08-20

교황이라는 말

프란치스코 교황이 출국했다. 평화와 화해를 위한 명동 성당 미사를 끝으로 4박5일 간의 방한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시종일관 약자와 낮은 곳에 대한 관심과 배려, 어린이와 상처 받은 이에 대한 사랑과 시선을 우선한 행보를 보이셨다. 순수와 위안과 평화를 전하고자 한 당신의 발걸음에 감동을 받은 이들도 많았고, 직간접으로 그 순간을 체험한 이들은 마음가짐을 다잡는 계기도 되었을 것이다. 낮고 비루한 일상을 보듬는 그 마음결을 되새기자니 문득 `교황`이라는 말 자체가 당신의 행보와는 걸맞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 권위적이고 정치적인 용어 같다. 일반인의 생각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교황이란 말이 오랫동안 쓰여 입에 붙어 간간이 쓰긴 하지만 일부러 황제의 이미지를 떼어버리는 자극을 주기 위해 교종이라는 단어를 고집스럽게 쓴다.” 교황방한 준비위원장인 강우일 주교도 이처럼 `교황`이라는 명칭 대신 `교종(敎宗)`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었다. 교황(敎皇)이라는 명칭에 담겨 있는 권위적이고 세속적인 의도를 경계하는 마음이 느껴져 공감이 간다.교황이라는 말에서 황제, 임금이라는 뉘앙스가 떠올려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낮고 평범한 것을 지향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 가르침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교황(pope)이라는 말은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파스`(paps), `파파`(papa)에서 유래했다. 지역교회의 최고 지도자를 부르던 말이 아시아에 번역되면서 교종, 교황으로 정착되었다. 일본에 교황으로 번역되어 온 말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교과서에도 자연스레 교황이란 용어로 자리잡았다. 어색할 겨를도 없이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애초의 `pope`라는 말에는 `교황`이란 말이 풍기는 봉건적 군림의 의미가 있었을 리 없다. 교황이니 교종이니 하는 용어 자체가 사실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그 옛날 전제군주제 식의 무조건적 추앙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라는 진심이 아니다. 그건 낮은 행보를 하시는 당신의 뜻에도 반하는 행동일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19

인간의 광기

포화 속 가자지구 사망자 수가 거의 2천 명에 이른단다. 전쟁을 멈추라는 세계 곳곳의 목소리가 간절할수록 양측의 전의는 맹렬하기만 하다.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서로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스라엘은 `안보가 확보돼야 군사작전을 멈출 것`이라 말하고, 하마스 측은 가자지구 봉쇄를 풀지 않는 한 `휴전은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죄 없는 민간인 피해자만 늘어나는 안타까운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 상황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얽힌 요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세 종교의 탄생지인 예루살렘은 인류의 광기 때문에 폭력과 전쟁의 주요 진원지가 되었다. 가톨릭 사제였던 제임스 캐럴의 신작`예루살렘 광기`는 이러한 종교의 허상과 인간의 광기에 대한 고백서이다.예루살렘 성지순례를 하던 그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환멸을 맛본다. 성지 안에 있는 복제화들과 `십자가의 길`로 상징되는 열네 곳이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적 서사임을 알게 된다. 중세 후기 그리스정교회의 관광 독점을 막기 위한 프란체스코회의 조작임을 알고 회의를 느껴 사제직을 물러난다. 신앙을 들먹이며 예루살렘을 성지화한 것은 바로 인간들이며, 그곳만이 메시아의 재림과 계시가 보장된다고 병적으로 열광하고 집착한다는 것이 캐럴의 시각이다.종교적 열망은 배타적 적대감을 낳고,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그 신념은 무자비한 살육을 부추긴다. 그렇게 인간의 허상이 만들어낸 예루살렘이라는 환상은 역사 속에서 아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서운 광기가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종교가 폭력 앞에 무기력한 장면 앞에서 인간의 근본이 선하다는 주장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살육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그 희생제의가 곧 종교라는 캐럴의 일침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신의 명분을 빌려 야만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광기와 이기심, 이것이 인류의 실체기이도 하다는 씁쓸한 진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18

질투의 속성

`거지는 거지를, 시인은 시인을 시기한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가 한 말이다. 투박하긴 하지만 내 식 표현은 이렇다. “질투라는 것은 옆집에 사는 또래 아줌마에게 느끼는 감정이지, 강남 고급 아파트에 사는 젊은 새댁에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하고픈 말들의 알짜배기는 언제나 선현들 차지이다. 어디 말 뿐일까. 인생 전반에 걸쳐 후대들은 선대들이 이미 이룬 것들을 인정하고 적용하고 재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예술을 말할 때 지상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질투는 같은 레벨 선상에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같은 목적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산을 오르거나 같은 배를 탄 사람끼리 생기는 게 질투지, 다른 목적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산을 오르거나 다른 배를 탄 사람끼리는 애초에 질투라는 감정이 생겨나지 않는다. 내 모의고사 성적의 비교 대상은 경쟁 상대인 내 짝지이지, 먼 학교에 다니는 나와 비슷한 성적을 내는 아이이거나 처음부터 비교대상이 아니었던 전교 일등 친구가 아니다.마찬가지로 똑똑한 한 남자가 질투하는 대상은 똑같은 레벨에 있는 사람이지 자신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다른 분야 또는 계급의 사람이 아니다. 정치인이 동료 정치인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권모술수를 동원하는 경우는 있어도, 노숙자에게 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까봐 경계하지는 않는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끝없는 사랑과 관심을 자신보다 계급적 하위에 있거나 또는 범접할 수 없는 상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베풀 수 있지만, 그것을 같은 경쟁자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할당하지는 않는다. 그들 서로는 질투가 어울리는 관계이기 때문이다.민주주의 기초는 질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질투는 뒤지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 있다. 따라서 질투라는 말은 좋게 보면 자기발전의 다른 말로 보아도 무방하다. 질투할 깜냥조차 되지 않을 경우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질투의 대상 위에 있을 때 인정하거나 고개 숙여 버리는 것 또한 인간 보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14

작은 차이

희로애락을 느낀다는 면에서는 누구나 비슷하지만, 그 감성이나 판단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딘 사람이 있고, 뛰어난 직관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리바리함 속에 헤매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눈치가 빠르고 직관 또한 뛰어나다고 한다. 단순 말싸움에서 아내가 남편을 압도하며, 어떤 상황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이 빠르게 판단·결정한다는 점 등을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야 눈치나 직관의 문제는 남녀 차이가 아니라, 개별자의 성정이나 처한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여러 경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남자의 직관보다 여자의 직관이 앞선다는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당신은 이미 읽혔다`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여자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밥은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때마침 밥의 여성 친구가 옆을 지나가다 이렇게 속삭였다. 밥, 포기해. 저 여자는 너를 얼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밥은 깜짝 놀랐다. `저렇게 날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데 믿을 수 없어.` 보통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밥은 입술을 꽉 다물고 치아를 드러내지 않은 채 짓는 여성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 꽉 다문 입술을 옆으로 당겨 일자를 만들고, 치아를 거의 드러내지 않고 웃는 거짓 미소를 남자는 자신에 대한 호의로 착각한 것이다. 속마음을 감출 때 흔히 이런 미소를 짓는데, 여자들은 이것이 거절의 신호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리지만 남자들은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한다.눈치나 직관이 반응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그들만의 정서적 기제가 발동하는 것일까. 여성이 비교적 눈치가 빠르고 직관이 뛰어난 것은 어느 정도는 선천적인 것과 관련이 있고, 달리 보면 사회화 과정에서 터득한 훈련의 결과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일상적인 면에서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하게 반응하는 남성에 비해, 오묘하고 복잡하게 반응하는 여성의 심리 기제가 이런 사소한 차이점을 낳게 한 것은 아닌지./김살로메(소설가)

2014-08-13

참으로 천행이다

“죽은 적병의 시체들을 헤치고 함대는 북서진했다. 깃발을 내리고 돛을 접었다. 물살이 함대를 목포 앞 암태도까지 데려다 줄 것이었다. (···)허기진 사부들이 갑판에 주저앉아 마른 미역을 씹었다. 새떼들이 끝없이 배를 따라왔다. 다시 거꾸로 흐르는 북서 밀물 위에서 나는 몹시 피곤했다.”`칼의 노래` 명량해전 마지막 부분 묘사 장면이다. 흥행가도를 달리는 동명의 영화 덕인지 요즘만큼 `명량`이란 말이 회자 된 적도 드물 것이다. 백의종군하게 된 이순신의 눈에 비친 순천·여수 앞바다 정경 묘사로부터 칼의 노래는 시작된다. 볼수록 전율이 돋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문장은 내가 만난 가장 강렬한 소설의 첫 구절이 되었다. 전반부에 비치된 명량해전에 대해 작가는 무려 4장에 걸쳐 그리고 있는데, 그 어디에도 소설적 과장이나 영화적 긴장감 같은 걸 빌려 담진 않았다. 오직 객관화된 인간 이순신의 내외적 발화가 있을 뿐이다. 담담하고 냉정한 그 방식 때문에 오히려 더 절절하다. 주관이 배제된 물리적 사실을 진술함으로써 실체에 가닿으려 한 방식은`난중일기`의 문체적 특성이기도 하다.“적선 30척을 쳐부수자 그들은 달아났다.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다. 그곳에 머물려고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 당사도로 진을 옮겨 밤을 지내다. 이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난중일기의 명량 전투 당일 자 마지막 문장이다. `외롭고 위태로워`라는 말이 참으로 걸린다. 이어진 날들의 일기를 보면 진도에서 싸움을 끝낸 뒤 무안을 거쳐 영광과 변산을 지나 닷새 뒤에는 군산 선유도까지 북서진해 물러났음을 알 수 있다. 군량미 확보와 배 정비의 필요성 등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장군인들 외롭고 위태롭지 않았을 것인가.`참으로 천행이다`라는 그날의 저 마지막 문장은 우뚝한 장수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심회에 자주 젖었던 인간 이순신으로서의 참모습을 말하는 것 같아 백번 공감이 가는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12

공처럼 먼지처럼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내 눈에 비치는 거울, 내가 지닌 프리즘, 내가 가진 가늠자를 통해서 본다는 것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어진 대상에 대해 특별하거나 누적된 경험은 그것에 대한 고유한 이미지를 남기고, 그 이미지는 특정 대상에 대한 하나의 범주를 가능케 한다. 관찰자의 눈은 축적된 여러 경험의 씨날줄들을 엮어 그 사람은 참 착해, 그 사람은 에너지가 넘쳐, 이런 심상의 카테고리들로 대상을 범주화하게 된다. 그것이 비록 환상이나 오해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다. 예를 들어 유도화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치자. 그가 그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그 나무에 대해 축적해온 자신만의 이미지 때문이다. 좋아했던 여자애의 티셔츠에 그 꽃무늬가 등장했고, 한 때 근무했던 분위기 좋았던 사무실 복도에 그 화분이 있기도 했으며, 추억 속 방죽의 가로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가 그 꽃을 좋아하게 된 거지 그 꽃 자체와 호불호는 별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한데 그 유도화 가지에 독성분이 있고, 그것 때문에 인체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정보 -비록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일일지라도 -를 얻은 뒤로 그는 유도화를 다시 보기 시작하게 된다. 긍정의 이미지가 강했던 대상이 어떤 상황에서 부정의 현실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하게 될 때 관찰자가 받는 심리적 타격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크다. `믿음`이라는 환상이 깨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당하는 정서적 충격은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환상에 가까운 긍정의 편견을 그 대상에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또 다른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틀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대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본질은 환상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관중석으로 뛰어드는 축구공처럼, 먼지떨이질에 살아나는 먼지처럼 느닷없고 자유분방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11

이등병의 편지

▲ 김진호 편집국장온 나라가 `윤 일병 사망 사건`으로 시끌시끌하다. 윤 일병 사망 사건이 국민들에게 던져 준 충격은 크다.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 잠을 잘 수 있겠느냐”고 개탄한다.필자 역시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18살 먹은 철없는 막내아들이 머지않아 군대 가야할 나이여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라. 멀쩡히 군에 입대한 아들이 어느 날 군 부대에서 학대끝에 숨졌다는 소식을 접한다면 그 부모가 무슨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겠는가.국민들의 걱정이 커지는 것은 이런 상황을 방증하듯 지난해 군인범죄가 5년새 최다인 7천530건이나 발생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서영교 의원실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군 검찰에서 다룬 군인 관련 사건은 7천530건이었으며, 이는 2012년 6946건보다 8.4% 증가한 것으로 2009년 이후 가장 많았다. 신분별로는 일반 병사가 연루된 사건이 61.4%로 가장 많았으며, 부사관 25.8%, 장교 9.6% 순이었다. 이들이 저지른 범죄는 음주운전이나 도로교통법위반 같은 교통범죄가 1천664건으로 최다였고, 폭행이나 상해 같은 폭력범죄가 1천644건으로 뒤를 이었다. 성폭행이나 청소년 대상 성범죄 등 성 관련 사건도 543건에 달했다. 반면에 군사기밀보호법이나 국가보안에 관련된 것은 15건에 불과했다.탈영이나 군용물범죄, 군인들간 추행 같은 군의 특수성이 반영된 범죄는 1천94건으로 전체의 14%에 그쳤다. 즉, 범죄의 70%가 군 특수성과 관련이 없는 폭행, 성범죄 등 일반 형사사건이어서 이를 군사법원에서 재판하는 것이 적절한지도 논란이 되고 있단다.분단국가로서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병역문제는 매우 중차대한 정책이다. 현재 군복무기간은 육군 및 전·의경, 그리고 해병대는 1년9개월로 가장 짧고, 해군은 1년11개월, 공군과 공익근무요원은 2년을 복무한다. 즉 대한민국 남자라면 의무적으로 21개월에서 24개월동안 군복무를 해야 한다. 문제는 이 복무기간동안 꽃다운 젊은 이들이 피워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이처럼 군에 가는 일이 개인의 일생에서 큰 일이란 인식때문에 한때 군에 가는 친구들을 대상으로 한 송별식이 유행이었다. 이 자리에선 80년대까지 으레 최백호의 `입영전야`가 많이 불렸다. 나 역시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고 목청껏 외치고 들이부은 술이 얼마나 될지 기억하기 힘들 정도다. 90년대 초반에는 김민우의 `입영열차안에서`가 한때 유행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에는 대구출신으로 요절한 가수 김광석이 부른 `이등병의 편지`가 단연 압권이었다. 이 노래는 멜로디도 좋지만 가사가 절절하다.“집 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밖을 나설 때/ 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포기 친구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친구들아 군대가면 편지 꼭 해다오/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않게/ 열차시간 다가올 때 두손 잡던 뜨거움/ 기적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에 편지 한장 고이 접어 보내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가사를 음미해보면 군에 가는 젊은이들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가사 말처럼 군대에 간 우리 젊은 이들이 부모님의 은혜와 친구들의 우정, 고향마을에 대한 그리움을 접고, 피할 수 없는 군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삼아 모두가 무탈하게 전역하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2014-08-08

가까울수록

말로만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라는 카피가 있는 것처럼, 때에 따라 언어보다 비언어적 요소가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상대가 나에게 호의적인지 아닌지는 말 아닌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눈빛, 밝은 안색, 다정한 손짓, 다가오는 어깨, 끄덕이는 고갯짓 등 누군가의 긍정적인 이런 리액션은 상대를 신뢰한다는 표식이기도 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말하는 관계의 가장 대표적인 범주가 식구일 것이다. 식구끼리는 공기 중에 흐르는 분위기, 거기서 파생되는 직감만으로도 어떤 상황이고 무엇을 말하려는지 서로 알 수 있다. 가까운 사람끼리의 이런 비언어적 표현을 잘 이해하면서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다. 가깝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가 크고 기대하는 바가 큰 만큼 조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엄마의 표정이 우울한 건 맘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제 상황 때문이지 무심하게 보이는 다른 식구 탓은 아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상대의 비언어적 속성에다 제 욕구불만을 투사해버린다. 누구보다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사이면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 아니냐며 예민하게 군다.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일수록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야 하는데 습관화된 안일함은 가까운 식구 앞에서 종종 무기가 되곤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민하거나 예리한 시선이 아니라 섬세하거나 배려하는 눈을 지녀야 한다. 예리한 눈은 무언가를 평가하는 데 필요하다면 섬세한 눈은 상대와 교감하기 위해 필요하다. 예리한 눈이 상대의 약점을 파헤치고 상대를 머리로 훑는 것이라면, 섬세한 눈은 상대의 약점을 그러안고 상대를 가슴으로 보듬는 것이다. 사람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교감의 대상이다. 하물며 가까운 사람끼리라면 말해 무엇하랴.별 뜻 없는 타자의 몸짓을 내가 곡해하는 것은 내 눈이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타자의 약점이 크게 보이는 만큼의 내 결점이 내 등에 달려 있다. 등에 붙은 내 티끌은 나 스스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내가 정한 오늘의 탐구 과제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07

악행의 범위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돈의 사회학에 노출되어 있다. 세상 물정 모르는 태아 때부터 죽음에 이르는 한 순간까지 우리는 돈으로부터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평생을 살면서 돈 없어서 서러웠던 기억, 돈 때문에 가슴 쓸어내렸던 아픔 한 번 지녀보지 않은 이 몇이나 될까. 돈으로 인격을 살 순 없지만 돈이 없으면 그 인격이 망가지는 것은 찰나이며, 돈 없다고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자명한 진리이다. 한 마디로 돈이 모든 것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돈 귀한 줄 알고,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선에서 돈 부리는 방법을 학습한다. 그 일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각자의 방식대로 노동을 한다. 이때의 `돈 벌기`는 타자에게 그 어떤 해악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한다.이런 보통의 생각만 지녀도 평화로이 어울릴 수 있을진대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돈은 필요한데 노력 또는 노동을 하기 싫은 사람들 때문에 세상살이가 무서워졌다. 돈 때문에 또래를 성노예로 전락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고, 돈 때문에 동료를 구타해 숨지게 하고, 돈 때문에 남편과 애인을 살해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뉴스를 장식한다. 선량하고 신성한 노동의 가치는 무용한 것이 되어버렸고, 끝 모르는 악행은 나이와 성별도 묻지 않는다.돈은 그 어떤 경우에도 목적이 될 수는 없다.`더러운 손도 돈을 주면 칭찬 받는다. 미덕은 돈의 뒤를 따른다. 돈에 대한 사랑은 모든 악행의 어머니다.`반어법 혹은 정공법으로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을 경계한 동서양 선인들의 말을 되새긴다. 돈은 삶의 유익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목적이 될 수 없는 돈을 위해 타자의 삶을 무참히 해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악행의 범위는 도대체 어디까지일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8-06

배려와 생색

텔레비전에서 흥미 있는 여행기를 접했다. 익히 알려져 있는 `꽃보다 할배`시리즈의 여름 특집인데 이번 여행자는 사십 대의 젊은(?) 아티스트 세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십일 간의 페루 여행기라는데 막무가내로 떠나게 된 여행 콘셉트라 첫날부터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세 남자의 갑작스런 여행기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먼저 남자나 여자나 사람의 감정은 똑 같다는 사실. 일반적으로 여행지에서 남자들은 털털하고,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예민할 거라는 편견을 지니기 쉽다. 하지만 그건 여자니 남자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 나름이라는 것을 알겠다. 셋의 개성은 확연하다. 한 명은 상남자 성격에다 털털하고 영혼이 자유롭다. 다른 한 명은 배려심이 강하고 눈치가 빠른 만큼 상처 받기 쉬워 보인다. 나머지 한 명은 섬세하고 깔끔하지만 다소 자기중심적이고 예민해 보인다. 모두 실생활에서 있음직한 캐릭터들이다.상남자에다 털털한 캐릭터는 뭐든지 긍정적이고 잘 웃는데다 유머 감각까지 겸비하고 있다. 여행하는 동안 자신이나 타인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어 보인다. 누구나 이런 캐릭터를 지녔으면 좋겠지만 다양한 게 인간사의 가장 큰 매력 아니던가. 반면 화장실 문제나 잠자리 문제에 예민한 한 아티스트는 그 자체가 신경 쓰여 여행을 온전히 즐길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가장 힘든 사람은 본인 스스로다. 그것을 눈치 챈 막내 출연자가 최대한의 배려심을 발휘해 더 나은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 배려를 상대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사소한 갈등이 생겼을 때 그가 자책하는 장면에 공감이 갔다.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그가 말했다. “이 나이에도 배려를 하면서 생색을 버리지 못했구나.”낯선 여행지에서 여행자끼리 배려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그 생색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내가 배려하는 만큼 상대도 그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내심을 고백하는 그 출연자의 표정에 같이 울컥하게 되는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05

센스 있게 보기

제대로 보려면 얼마나 연습이 필요한지. 대상을 온전히 배려하려면 얼마나 센스 있는 눈이 있어야 하는지. 시각장애인 문예회원들과 야외 나들이를 갔다. 시각을 제외한 청각, 후각, 촉감 등이 상대적으로 발달된 덕에 그들의 자연 교감 친밀도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훨씬 높은 편이다. 스치는 바람 소리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구분해서 듣고, 빛의 세기와 공기 중에 떠도는 습기의 정도에 따라 같은 꽃도 그 향을 달리 느낄 수 있다. 물론 살랑거리는 나뭇결을 느끼는 손끝까지도 섬세하고 예민하다. 그들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오감으로 대상을 본다. 오전 활동이 끝난 뒤 점심을 먹고 식당을 나설 때였다. 모두 신발을 찾는다고 부산하다. 시각장애인 한 분마다 도우미 한 분이 짝을 이뤘기에 신발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니었다. 베테랑 도우미 분들에겐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생짜 초보인 나만 당황했다. 신발 벗는 것까지 도와드렸으면서도 어떤 색 운동화였는지,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실은 파트너의 신발을 내가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분이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했지, 정작 그분에게 뭐가 필요하고 무엇이 절실한지에 대한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경험이 부족하면 센스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마음만 그들 곁에 있었지, 감각은 아직 `잘 보이는 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말했다. 잘 보려면 마음으로 봐야 한다고. 그때의 마음이란 내 마음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일 것이다. 머리로만 봐서는 상대의 마음에 가닿을 수 없고 가슴으로 봐야 제대로 닿을 수 있다. `나뭇잎이 눈을 가리면 태산도 보이지 않고, 콩이 귀를 막으면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눈 가리고 귀 막는 나뭇잎 하나와 콩 한 알이라는 자기 한계. 그것이 모여 온 우주가 멍들 수도 있다. 의식하지 못한 새, 누적된 습관이 되어 버린 이 무신경한 마음의 눈과 귀를 저 내리는 장맛비에 깨끗이 헹궈내고 싶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04

명량해전

개봉 영화 `명량` 관람을 계기로 명량해전에 대한 간단 공부를 한다. 관련 다큐멘터리나 기록물이 다양하다. 밤새 영상물을 찾아보고 기록물을 검색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전쟁사가 이처럼 호기심과 흥미와 감동과 짠함 등을 동시다발로 줄 수 있다는 것이 묘하긴 하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에게 남은 건 실의에 빠진 수군과 열세 척의 군함뿐이었다. 그에 비해 진군하는 왜군함은 무려 삼백여 척에 달했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무모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전쟁을 필사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죽으려는 자는 살 것이고, 살려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각오를 몸소 실천했다.명량해전이 승리할 수 있었던 실질적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는 배의 구조이다. 조선의 주함 판옥선은 왜의 주함 안택선에 비해 튼튼했다. 만드는 방법과 구조의 견고성이 안택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회전력도 우수해 울돌목의 빠른 유수에도 적응할 수 있었다. 무기의 활용 면에서도 조선해군이 유리했다. 일본군의 주력 무기는 조총이었다. 살상 무기로서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녔으나 해전에서는 조선의 함포가 나았다. 천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는 원거리 사격이 가능한데다 화력이 우수했다. 튼실한 배와 위협적인 무기는 이순신 해군 전투력의 바탕이 되었다.마지막으로 이순신의 전략전술과 리더십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명량 일대의 해류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했다. 좁은 물목에 왜함대를 몰아넣어 옴짝달싹못하게 만들었다. 수중 철쇄를 해협 양쪽에 걸어 몰려드는 왜함을 뒤집어지게 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런 기록들은 전쟁이 끝난 한참 뒤의 것들이라 믿음을 주진 못한다. 굳이 쇄사슬 전법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이순신의 지략은 여러 기록들이 충분히 검증해주고 있다. 이순신 없는 명량의 승리를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해협의 언덕에서 장군과 수군들의 승리를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응원하고 환호했던 당시 백성들의 마음이 기록으로나마 그들을 기리는 후대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01

아이, 상큼해!

몇 년 전 교육방송에서 본 한 장면. 예닐곱 살 되는 여자 아이가 엄마 심부름을 가는 중이다. 동심을 몰래 카메라 기법으로 추적하는 프로그램인데 아이의 순간적 언행이 내 눈을 매혹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들길을 혼자 걸어가던 아이는 연신 이맛머리를 쓸어 올리며 `아이, 상큼해!`를 연발한다. 그 말과 행동이 무척 귀여웠다. 그림처럼 파란 하늘엔 구름 몇 점 떠 있고, 들판엔 봄을 재촉하는 바람이 불어온다. 아이는 사랑하는 엄마가 자신을 믿고 과제를 준 것만으로도 설레는 기분이다. 거기다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와주니 금상첨화다. “아이, 상큼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장면을 보면서 아이가 귀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엄마의 양육 태도 또한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동심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다 순수한 것도 아니고, 어린아이의 말이라고 다 때 묻지 않은 것도 아니다. 동심의 말에도 계산이 들어 있을 수 있고, 동심의 혀에서 나오는 말도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 태생적인 기질에 따라 뱉는 말의 형식도 다를 수 있지만 대개 말이란 건 경험과 학습에 의해 좌우된다.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밝은 언어를 쓰는 엄마 곁에 그런 언어를 쓰는 아이가 있을 확률이 높다. 한 점 바람에도`아이, 상큼해!`를 연발할 수 있는 건 아이의 심성이 원래 고운 것도 있겠지만 엄마의 좋은 언어 습관을 보고 배운 덕이기도 하다. 천성적 기질이 곱게 태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언어 환경에 노출되는 것도 얼마나 축복 받을 일인지.활용하는 말 틀에 따라 품격이 달라진다. 맘은 그렇지 않은데 상대가 오해하거나 기분 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말을 잘못 부린 탓이다. 젊은이의 패기와 직설 화법은 어울리는 세트라 쉬 용인될 수 있다. 하지만 나이테가 늘수록 에둘러 말하되 심지는 적당히 물러져도 좋다. 덕(德)의 시작은 말이다. 말이 정돈되고 순하면 행동도 그리 된다. 순하지 않아야 할 한 순간의 폭발력을 위해서라도 평소 언어 습관은 `아이, 상큼해!`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아도 족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31

절실하게 묻기

김일광 작가의 특강을 들었다. 히트작인 `조선의 마지막 군마` 창작 과정을 중심으로 당신의 문학관 전반에 관한 얘기를 듣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선생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었다. 문학은 사상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인간은 그 표현의 주체이자 대표적인 객체이다. 그러한 인간에 대한 기본 이해 없이는 문학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선생은 이에 대해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라는 논어의 한 대목을 빌려 설명해 해주셨다.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하라`는 의미인데 논어의 자장 편에서 자하가 한 말이다. 원래는 인생 지침서의 한 대목으로 쓰이는 말이겠지만, 글 쓰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도 이보다 나은 건 없다 싶다.문학과 절실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절실함이 요청될수록 문학적 성취도도 높아진다. 절실하면 구해진다. 어디에서 무엇으로 구할 것인가? 저 짧은 문구 안에 답까지 있다. 근사(近思), 즉 가깝고도 구체적인 생각에서 얻어진다. 문학 행위는 대개 어렵고, 그 방법 또한 모호하다. 과연 그럴까? 문학이 모호하거나 어렵게 느껴지는 건 정말로 문학이 그러해서가 아니다. 내 맘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모든 답은 가까이 있다. 게다가 그 답이란 건 선명하고 담백하기까지 하다.`박학이독지(博學而篤志),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 인재기중의(仁在其中矣)`는 문학에서도 적용된다. `널리 배워서 뜻을 두텁게 하고, 간절히 물어 가까운 것부터 생각해 나간다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게 된다.`왜 쓰는가에 대한 최우선의 답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나 이해 쯤이 될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는 내면의 절실한 요청에 따라 내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쓰면 된다. 문학의 궁극적 목표를 자하(子夏)의 말에 빗대 설명해준 선생의 강의는 내 문학적 길을 재탐색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30

냉혹한 스페이드도 필요해

성악설과 성선설 중 어느 쪽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어떤 상황을 겪을 때마다 이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데 결론은 언제나 `둘 다 맞다` 쪽이다. 우리의 태생이 선하냐, 악하냐 하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태어난 이상 인간은 사회화 과정을 겪는데 어떤 나침반을 곁에 두고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의지가 결정한다. 성선설이다, 성악설이다 하는 애초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다만 태생적 기질이 강한 사람은 특수한 환경을 만나 독특한 캐릭터를 형성하기도 한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표작인 대실 해밋의`몰타의 매`에서 주인공인 탐정 샘 스페이드가 그렇다. 그는 유쾌한듯 냉혹하며, 친절한듯 능글맞다. 사랑에 호소해 자신의 살인을 위로받고자 하는 의뢰인 브리지드 오쇼네시를 단박에 거절한다. 물론 몰타의 매를 차지하기 위한 브리지드의 악행이 용서 받거나 이해받을 만한 수위는 아니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브리지드에게 이처럼 냉정하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당신을 경찰에 넘길 생각이에요.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20년 뒤에는 나올 거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사랑스러운 여자예요. 나는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 만약 당신이 교수형을 당한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스페이드는 브리지드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이기적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여자 때문에 얼간이가 되지는 않겠다고 결심한다. 황금 보석으로 치장되었다는 전설 속 몰타의 매, 알고 보면 가짜에 지나지 않는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여자는 살인하고, 등장인물 대부분은 배신을 일삼는다. 탐욕은 그들의 붙박이 친구이기까지 하다. 웃으면 늑대 같은 인상으로 변하는 금발의 사탄 샘 스페이드. 하드보일드 문학의 원조격인 소설의 묘사 장면을 읽으면서 인간은 성악설의 영향에서 자유롭다고는 말 못할 것 같다. 그것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인간적이진 않지만 소위 말하는 쿨한 이미지의 탐정 몇 명쯤은 문학사를 빛낼 캐릭터로 남아 있어도 괜찮지 않은가./김살로메(소설가)

2014-07-29

낯빛부터 긍정하기

낯빛은 인격이다. 낯빛이 긍정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눈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신호를 온 얼굴에 심는다. 바라만 봐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유난히 낯빛이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상대와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다. 상대를 거부하겠다는 신호부터 온 얼굴 표정으로 보낸다. 우울한 낯빛에는 연민이라도 생기지만, 뭔가 불만 가득한 사람의 낯빛은 경계심만 불러일으킨다. 얼굴빛은 자기 긍정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인생 계발서를 무조건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그 책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누구보다 신뢰한다. 그들 메시지의 공통점은 `긍정하는 힘`이다. 물론 긍정하는 게 무조건 옳은 건 아니다. 자기 긍정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환경적, 물리적 제약이 분명히 현실 속에는 존재한다. 긍정하는 자세만을 주입하는 계발서들에 대해 희망 고문을 한다느니 무모한 낙관주의를 심어줬다느니 하면서 비판하는 입장도 이해가 된다. 예를 들면 기아에 시달리는 지구촌 사람이 아무리 긍정의 상상을 한다한들 배고픔이 해소되는 게 아니고, 북한 주민 누군가가 아무리 자유에 대한 갈망을 긍정한다 해도 그것이 쉽게 눈앞에 펼쳐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개별자가 감당할 수 있는 긍정의 한계 안에서 긍정하되, 얼굴빛에 그것을 담는 연습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긍정의 자세와 자기 확신을 가지도 우리가 원하는 걸 모두 얻지는 못한다. 언제나 이룬 것보다 이뤄야 할 것들이 많은 게 우리 삶이다. 긍정하면서 좇아도 웃을 수 있을까 말까한데 굳이 부정하고 비관하는 얼굴빛을 연출할 필요가 없다. 모든 건 맘먹기에 달렸다. 물론 맘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실행에 옮기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적, 외적 에너지가 요구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긍정의 힘이다. 가만 보면 `힘들어, 귀찮아, 될까` 이런 말을 자주 해왔다. 맘과 몸이 덜 따라와 줘도 낯빛부터 긍정하는 훈련을 해야겠다. 얼굴이 긍정적인 사람들은 안 될 일도 되게 하는 힘이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