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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린드버그의 충고

비행사이자 작가인 앤 머로 린드버그 여사가 말했다. “수집가는 눈가리개를 하고 다닌다. 수집하는 물건 외에는 아무것도 못 본다. 획득의 본능과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자세는 공존할 수 없다.” 이 말을 나는 친구가 보내온 `혼자 사는 즐거움`이란 책에서 만났다. 이 책을 지은 사라 밴 브레스낙은 한때 머그컵 수집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린드버그 여사의 저 말을 읽을 즈음 그녀는 머그컵 모으는 일이 시큰둥해지기 시작했다. 설렌 마음으로 처음 샀던 컵은 이미 연필꽂이로 방치되고 있었다. 그녀가 진실로 원했던 것은 머그컵 수집하는 일이 아니었다. 대자연이 선사하는 경이로움, 이를 테면 파도 위로 부서지는 햇빛과 나뭇결을 간질이는 바람, 맨발에 닿는 곱디고운 모래 등의 정서를 제대로 느껴보는 것이었다. 뭔가를 모으는 즐거움에 빠져 그녀는 정작 맛보아야 할 다른 것, 즉 감상하는 즐거움을 놓치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머그컵 개수를 늘이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린드버그의 충고에서 배웠다.진실로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친 브레스낙은 린드버그 여사를 만난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간 수집했던 머그컵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기로 맘먹었다. 컵 하나에 추억 깃든 메모를 곁들여 좋아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나누는 즐거움이 그러모을 때의 애틋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뭔가를 가지려는 본능과 아름다움을 느끼려는 자세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 수집가의 눈은 한 꺼풀 가려져 있다. 심한 경우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수집품의 진정한 가치가 보일 리 없다. 오직 수집하고픈 물건 자체에만 머물러 있기에 그의 안목은 그 속에 담긴 의미나 미의식까지를 접수할 틈이 없다. 이 책을 보내온 친구 역시 우리가 수집할 것은 수집품 자체가 아니라 함께 할 추억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머그컵을 나눈 브레스낙처럼, 책을 선물해준 친구처럼 나 역시 책 선물 릴레이를 펼칠 참이다. 수집의 본능을 넘어선 자리에 아름다움의 본질이 들어찰 것을 알기에. 린드버그의 충고는 내게 와서도 옳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12

당신이라는 바람

자고로 시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 공감 가는 시 한 편을 만날 때마다 저런 생각을 한다. 찬사와 시샘을 동시에 표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천생` 시인일 수밖에 없는, 독자들을 기분 좋게 홀리는 시를 읽다 보면 이 땅에 좋은 시인들이 많다는 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조금 센티멘털해지면 어떠랴, 조금 유치해지면 또 어떠리. 애상의 시간을 불러 모으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시 한 구절을 만날 수 있는 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특권이자 행운이다. 한 편의 시에서 우리는 시간이란 강물을 거슬러 오르기도 하고, 아련한 불빛을 만나기도 하며, 속울음을 삼키는 심장의 따끔거림을 만나기도 한다. 감상적인 시, 애잔한 시 등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잠 못 드는 밤이라면 이런 시에 누군들 홀리지 않을 것인가.“전부 당신 같아서 붐비는 빛 한 올도 허투루 받을 수 없습니다 / 천지사방 당신이니 암만 발버둥 쳐도 나는 당신한테 머뭅니다 / 그래요, 당신 만난 날부터 나는 속수무책입니다 (중략) / 헤픈 봄볕을 한줌도 자루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되지 않을 일임을 압니다. 그런데도 비워도 비워도 다시 당신이 들어차는 내 속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김해민 시인의 `안부` 일부이다. 붐비는 빛 한 올에 우주가 있고, 그 우주 속 천지사방은 당신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구에게나 한 가지씩의 당신은 존재한다. 발버둥 쳐도 머물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당신이 존재한다. 욕심이자 모순이며, 절망이자 바람인 당신. 번민으로 가득 찬 `간절한 바람`인 그 당신을 위하여 오늘도 잠 못 드는 이 얼마나 많은가. 무릇 평화, 그저 안정, 다만 웃음일 뿐인, 당신 없는 삶이란 얼마나 지루하고 무의미할 것인가.“내 마음 읽으시거든 보리누름에는 걸음해주세요 / 난출난출 보리잎 보며 어디쯤에 오시는 줄 알고 가만히 눈감겠습니다 / 보리보다 노랗게 내 속 익기 전에 부디 당신이 먼저 와 주세요 / 볕이 여간 흔전하지 않습니다 ” 보리누름에 읽기 좋은 이토록 흔전한 시 한 편의 위안이라니. ”김살로메(소설가)

2014-06-11

키치도 예술이다

키치도 예술이다. 수요 있는 곳에 공급 있다. 모두가 고급 예술을 지향하는 건 아니다. 대다수의 대중은 무난한 자극, 풍성한 인간미, 따뜻한 정서에 기초한 쾌락을 원한다. 한때 이발소 그림이란 게 있었다. 어린 시절 `가리야개`라는 단발머리를 하기 위해 이발소에 가면 실제 그런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소녀의 기도나 밀레의 저녁종 같은 모사품이 걸려있을 때도 있었고, 북유럽 풍 침엽수가 호위하는 호수가 나오는 풍경화가 걸려 있을 때도 있었다. 이발소 유리벽 위에 그들이 걸려 있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유는 명백했다. 찾는 손님에게 쾌락과 위안을 주기 위함이었다. 마치 고속버스 운전수가 틀어놓은 뽕짝 음악에 누군가는 정서적 충만으로 여행이 즐거워지는 이치와 같다. 예술적 관점에서 보면 이발소 그림과 고속버스 내의 뽕짝음악은 `키치`이다. 키치는 보편적이고도 대중적인 감성에 호소한다. 과격과 과잉을 거부하며 침체와 허약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달콤하며, 영속적이고, 불변하며, 일상적이며, 수평적인 것을 영접하려는 속성이 키치이다. 무리한 것은 대중적일 수 없고 키치와도 멀어진다. 대중에서 멀어질수록 예술성과 가깝다. 예술성과 키치는 상극의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충하는 면이 있다.누구나 예술성을 추구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키치적 속성을 지녔다고 해서 그것을 폄하하거나 극복해야 한다고 목소리 낼 필요도 없다. 사람은 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성장한다. 대중성을 예술적 취향 쪽으로 끌어당길 수는 없다. 모든 건 물 흐르듯 해야 한다. 인간적 설득이나 인위적 노출에 의해서 예술성이 획득되는 건 아니다. 키치적 감흥이 주는 긍정성을 다 겪고 난 뒤에 어느 순간 몰려드는 정신적 자족감. 이런 순간을 어떤 이는 맛본다. 설사 그것을 놓쳤다고 잘못된 건 아니질 않나.이 모든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다. 키치적 정서가 예술이 못 된다고 설레발치거나 설득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반성한다. 모든 키치적 정서는 순정한 사람들이 거치는 기본 감성인 것을./김살로메(소설가)

2014-06-10

참 쉽죠?

십여 년도 훨씬 전, 밥 로스라는 아저씨가 인기 있은 적이 있었다. 한결 같은 멜빵바지와 풍성한 뽀글 퍼머를 한 화가는 토요일 저녁마다 EBS 화면에 나왔다. 그림을 그립시다, 라며 넉살좋은 웃음으로 시청자들을 매혹했다. 일인치 붓과 그림용 나이프를 든 밥 아저씨가 시청자를 향해 속삭인다. “자, 이 왼쪽 공간이 심심해보이죠? 벤다이크 브라운을 이용해 나무 한 그루를 그려 넣어볼까요? 티타늄 화이트를 살짝 덧발라 주세요. 나이프로 이렇게 몇 번 긁어 주시면 완성!” 팔레트를 든 그의 손길이 빈 캔버스에 닿으면 금세 한 폭의 풍경화가 탄생했다. 마술 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곤 했다. 붓질 몇 번 하고 나이프로 긁어주고 덧붙질로 갈무리했을 뿐인데, 희한하게도 앙상한 나무에 잎이 돋고 숨어 있던 호수가 살아나며 밋밋했던 오솔길이 깊어지곤 했다.이 모든 과정이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림을 완성한 뒤 밥 아저씨는 꼭 이런 멘트를 남겼다. “참 쉽죠?” 시청자를 약 올리는 듯한 묘한 이 말에 사람들은 중독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아 너도나도 붓을 들었다. 누구나 아저씨처럼 소매 걷어붙이고 팔레트를 들기만 하면 쉽게 그림이 그려지는 줄 알았다. 아저씨가 그토록 예찬해 마지않는 벤다이크 브라운과 티타늄 화이트 그리고 올리브 그린을 사용해 저마다 풍경화에 도전했다. 밥 아저씨처럼 될 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자조했다. 쉽기는 개뿔!전문가에게나 쉬운 일이지 초보자에게 쉬운 게 어디 있겠나. 보거나 말하거나 듣기에나 쉽지 뭐든지 손수 겪어 보면 쉬운 게 세상에 어디에 있나. 적어도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려면 그만한 시간과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걸. 너무 쉬워 보이는 밥 아저씨의 그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흉내 낼 때나 별 것 아니게 보이지, 실제 캔버스 앞에 앉는 순간 아득한 절망감에 몸서리치게 된다. 쉬워 보이는 한 가지 길엔 재능과 함께 언제나 땀이란 수고가 따라다닌다. 참 쉽죠? 이 말 뒤에는 부단히 노력했죠. 라는 답이 숨겨져 있음을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9

정치가의 운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지금도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마쓰시다 전기`의 창업주인 그는 운이 좋아야 성공한다고 믿었다. 94세까지 산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인생 3대 행운에 대해 밝혔다. 첫째 조실부모했다는 것. 열 살 때 돌아가신 부모덕에 남들보다 15년이나 일찍 철이 들었다. 둘째, 몸이 약했다는 것. 몸 돌보는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장수할 수 있었다. 셋째, 초등 4년이 정규 학력의 전부였다는 것. 누구에게든 배움을 청해도 걸림이 없었기에 누구든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행운은 평범한 사람에겐 불운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큰 사람`은 불운을 행운의 기회로 바꿀 줄 안다. 6·4 지방 선거가 끝났다. 행운의 열쇠를 거머쥔 당선인들이 대거 정치무대로 등장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은 선거판에 어울리는 말 중의 하나이다. 다른 후보자들보다 특별히 인품이 훌륭해서, 특출한 정치 감각을 지녀서, 대민 의식이 보다 투철해서 당선인이 된 게 아니다. 운명과 우연이라는 행운이 그들 손을 들어줬을 뿐이다. 다른 후보자 그 누구도 운이 좋았다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연구에 의하면 성공 기업인 1천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계획적으로 노력해 성공을 거뒀다`고 주장한 사람은 2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75퍼센트는 `우연한 기회에 성공의 길로 들어섰다`고 응답했다. 또한 미국의 포브스 선정 대부호 천여 명을 대상으로 성공 요인을 분석한 결과 그들의 공통점은 4가지로 압축됐다. 승부욕과 경쟁심, 타이밍 그리고 행운이었다.당선자들도 이 네 가지 공통점의 세례를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운은 언제나 반반으로 온다. 행운인 것처럼 보이지만 금세 불운으로 뒤집히고, 불운으로 다가오지만 행운으로 바뀌기도 하는 게 사람 일이다. 주어진 운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쓸 것인가. 마쓰시다 고노스케의 행운론에 기대어 당선자들은 겸허한 자세라는 기본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6

몸이 곧 마음

몸은 곧 마음이다. 몸이 말을 들어야 맘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 아무리 심오한 영혼도 시작은 사소한 몸이다.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마음마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만다. 마음만 저곳을 바라보면 뭐하나. 몸 지쳐 여기 쓰러져 있는데 마음 드높이려면 몸 단련이 먼저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다.더우면 땀범벅이 되고, 추우면 콧물 범벅이 된다. 바람 불어 꽃가루 날리면 재채기는 멈출 줄 모르고, 바람 잦아들어 건조해지면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진다. 땀, 콧물, 재채기, 눈물 사종 범벅 세트는 그나마 참을 만하다. 조금만 경사 진 곳을 올라도 숨이 금세 차오는 것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렵다. 내 젊은 날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그토록 싫어했으면서 지금의 나 역시 거기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몸은 정직하다. 특히 몸의 외피는 그렇다. 평소 얼마나 관리를 했느냐에 따라 멋진 몸매와 그렇지 않은 몸매로 나눠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몸매와 건강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보기 좋은 몸이 꼭 건강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꾸준한 운동으로 몸을 다져온 사람도 하루아침에 건강을 잃는 경우도 있고, 운동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사람도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도 많다. 운동 유무에 관계없이 건강은 함부로 자신 할 수 없다.건강은 체질과도 관계가 있다. 조상이 어떤 유전 인자를 물려줬느냐에 따라 건강 체질과 허약 체질로 나뉜다.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허약한 체질로 헤매는 사람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단순히 운동을 하지 않아,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건강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인정한다. 그렇지만 건강 체질을 지닌 사람들이 하는 노력의 열 배를 더해도 근본적으로 그들의 좋은 유전 인자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럴수록 노력해야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언제나(운동하지 않을) 핑계는 많고, (운동해야 할) 절실함은 부족하다.몸이 곧 마음이다. 몸 부실한 자 마음 단단할 리 없다. 조상 탓도 소용없다. 내 마음을 위해 몸 반성부터 할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5

여우의 선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다양한 알레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알레고리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말하는 방식이다. 동화적 발상으로, 때로는 우화적 기법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삶의 지혜를 넌지시 제시하는 이 작품은 인생지침서 이자 생활철학서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빛나는 장면은 여우가 어린왕자를 만나 제 `비밀`을 가르쳐 주는 긴 대화 부분이다. 사과나무 아래 있던 여우는 어린왕자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넨다. 어린왕자도 쓸쓸하던 차에 같이 놀자고 화답한다. 그렇지만 여우는 `길들여지지 않았으므로`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이때부터 여우와 어린왕자는 선문답을 주고받는다. 길들인다는 게 무어냐고 어린왕자가 재차 묻자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여우가 답한다.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곧 길들여짐이란 걸 알게 된 어린왕자는 크게 깨우친다. 자신의 별에 두고 온 장미 한 송이가 지구에 피어난 수천 송이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어린왕자와 여우는 그렇게 서로를 길들인다. 여우에게도 이제 밀밭은 단순한 밀밭이 아니다. 그동안 밀밭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어린왕자와 관계를 맺은 이상 밀밭은 `금빛 도는 어린왕자의 머리칼`로 치환된다. 이별이 가까워졌을 때 여우는 선물로 비밀 하나를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세상을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덧붙여 어린왕자가 장미꽃에 바친 시간 때문에 그 꽃이 그렇게 중요하게 된 거라고 일러준다.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들려준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길들임은 관계를 맺는 것이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시간을 바친다는 것이다. 시간을 바친다는 것은 끝내 책임을 진다는 것인데 이 모든 과정에는 비밀이 있다. 바로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 중요한 것일수록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그 엄청난 사실은 독자의 마음속에서 또 하나의 비밀로 자리 잡는다. 그렇게 생텍쥐페리의 알레고리 향연은 지속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4

그 모든 스무 살

“앞으로 겪을 모든 일들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겪었다는 사실을, 그 모든 사람을 스무 살 무렵에 다 만났으며 그 모든 길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걸었습니다. 그 모든 기쁨을, 그 모든 슬픔을, 그 모든 환희를, 그 모든 외로움을, 스무 살 무렵에.”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 나오는 공감 가는 문장이다. 스무 살을 온몸과 맘으로 건너온 청춘이라면 작가의 저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일상은 지리멸렬하기만 했다. 공부는 어려운데다 현실성이 없었고, 진전 없는 청춘사업은 허깨비가 되어 눈앞을 어지럽혔다. 고뇌와 번민의 길은 온통 내게로만 몰려오는 것 같았고, 경제적 궁핍은 스무 살 특유의 빳빳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저 길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몰입하다가도 이 길밖에 없을 것 같아 타협하는 현실의 나날이었다. 실은 몰입도 타협도 모두 내 영역 밖의 일이었다.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쏠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스무 살 시절에 배운 웃자란 운명론이었다. 모든 게 불분명하고 모든 게 부주의했으며 모든 게 부조리하다는 것 또한 그 시절이 깨우쳐준 시니컬한 인생론이었다.그렇게 스무 살 시절이 지나자 모든 게 분명해졌다. 새로운 인연도, 새로운 학문도, 새로운 미래도, 여하튼 새로운 것이라면 그 무엇도 새롭지 않다는 사실. 스무 살 겪어야 했던 삶은 경이로울 정도로 역동적이었지만 그 가운데 대책 없이 아팠고, 주책없이 깊어지려고만 했다. 하필이면 스무 살 즈음에 겪은 그 모든 것들이 화인처럼 맘속에 새겨져 있기에 스물에 모든 삶을 살았다고 우리는 믿게 된다.그렇지만 삶은 스물 이후로도 한참 계속되었고, 여전히 그 삶은 진행 중이다. 스물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되풀이 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에 느꼈던 그대로의 삶이 지속되는 건 아니다. 더 깊어지고, 더 관대해졌으며, 더 충만해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것은 증명된다. 인생 스무 살은 계속되지만 결코 그때의 스무 살과 같을 수는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3

건강에 대하여

오랜만의 휴일, 남편이 기획한 트레킹에 따라나섰다. 왕복 15킬로미터, 피톤치드 가득한 숲길 걷기란다. 기관지가 좋지 않고, 기초체력마저 약하지만 산행이 아니라 숲길 걷기라니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힐링 코스이니 힘들면 쉬엄쉬엄 가면 되겠지 하고 편하게 맘먹었다. 그런 생각이 대책 없이 낭만적이었음이 금세 증명되었다. 안내를 맡은 분은 고희는 넘어 보였는데 급한 성격에 걸음새 또한 날렵하다. 스무 명이 넘는 조원들의 선봉에는 장정들이 포진해 있다. 뒤따르는 여성들 걸음새도 비교적 안정적이다. 몇 걸음 따라 떼는데 이건 내 페이스가 아니다 싶다. 한마디로 속보 경쟁이다. 힐링 체험이 아니라 누가 튼튼한 다리와 호흡기를 지녔는지 자랑하는 대회인 것 같다. 너무 빠른 행보라며 볼멘소리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정작 나 말고는 모두 잘도 따라 붙는다. 출발해서 재 두 개를 넘고 나니 이미 일행과 나는 한참 멀어져 있다.숨은 곧 멎을 듯하고 기침은 계속 나오고 머릿속은 샛노랗다. 처음부터 이러면 무리니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안내자가 말한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창피했지만 한편 울컥했다.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다. 다행히 남편이 나서서 적극 변호를 한다. 오르막에서만 이렇지 평지에서는 따라갈 수 있으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저렇게 말하는 남편 속은 얼마나 쓰릴까. 뒤처진 마누라를 묵묵히 당기고 밀고 하느라 고생한 남편 보기에도 부끄러웠다.하늘 한 번 쳐다볼 겨를이 없는 트레킹이 더 이상 즐거울 리 없다. 오직 한 방향이라도 성공해야겠다는 간절한 바람만 있을 뿐이다. 밥 차가 보이는 반환점에 이르자 그나마 해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버렸다. 겨우 8킬로미터를 걷는 선에서 체력의 한계와 타협해야만 했다. 패잔병처럼 차에 실려 하산하는 신세가 됐다. 몸이 곧 정신이고 정신은 곧 그 사람이다. 몸과 정신은 함께 건강해야 한다. 어느 한 쪽의 건강만으로 인생이란 트레킹을 완주할 수 없다. 덜 다진 몸으로 정신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건 과욕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 하루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2

거짓말 단상

거짓말에 대한 연구 결과는 다양하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남자는 하루 평균 6회, 여자는 3회 정도 거짓말을 한단다. 다른 연구에 의하면 남녀 하루 평균 200회씩 거짓말을 한다고 되어 있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한 시간에 13회, 5분에 한 번 꼴이다. 두 예의 공통점은 어쨌거나 인간은 거짓말을 자주 한다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거짓말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거짓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하얀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이란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얀 거짓말은 선의를 전제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적극적으로 배려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경우이다. 새빨간 거짓말은 타자를 해하기 위한 것이다. 타자를 흠집 내기 위한 명백한 저의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이 외에도 내 멋대로 두 개의 거짓말에 색깔을 입혀 보았다. 이름하여 초록 거짓말, 이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단순한 거짓말을 말한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거짓말을 말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을 때 `초상집에 간다`거나 `손님이 방문했다`고 둘러 대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런 거짓말은 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 심각할 게 없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는 것이니 딱히 나쁘다고 할 순 없다. 또 하나는 푸른 거짓말이다. 처세의 거짓말인데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약자가 강자에게, 을이 갑에게 해야만 하는 거짓말이다.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자괴감이 묻어나는, 씁쓸하고 슬픈 느낌의 상황이라서 푸른 거짓말로 이름 붙여 보았다.현상이 있는 곳에 말이 있고 그 말에는 필연으로 거짓이 뒤따른다. 누구나 진실만을 말하며 살 수는 없다. 페르소나라는 적당한 가면을 쓰는 것이 사회적 예의이듯, 적재적소의 색깔에 맞게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는 게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물론 타인을 해하기 위한 거짓말인 새빨간 거짓말만은 안 된다. 잠 잘 때도 일할 때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굴레. 기왕 해야 하는 거짓말이라면 타자를 배려하는 하얀 거짓말 횟수를 늘이는 수밖에!/김살로메(소설가)

2014-05-30

이해의 폭 넓히기

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은 타자의 약점까지 잘 보듬는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 중의 하나는 양면성을 지녔다는 거다. 이 양면성 때문에 사유가 생겨났고, 철학이 발전했다고 나는 믿는다. 아무리 담백하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현상 너머의 이면, 결과 이전의 동기, 겉 안의 속 등 여러 이중적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다. 양면성이란 갈림길에서 서성여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번민하고 갈등하는 것은 인간 심리의 최대 호사인 동시에 최대 장벽이다. 번민하는 가운데 사유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전자에 속하고, 갈등의 골이 깊어져 영혼이 피폐해지는 건 후자에 속한다. 어떤 모임에서 자기 자신이 완벽하다고 소개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무슨 일이든지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고, 남이 하는 것보다 자신이 하는 게 속이 편하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은연중에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를 건다. 완벽을 추구하니 믿을 만한 결과물을 내놓을 거라고. 하지만 기획한 일이 반환점을 돌 무렵이면 그 사람의 말이 흰소리임을 알게 된다. 자신이 말한 완벽함과는 먼 실행 능력을 지닌 그냥 보통 사람일 뿐이다.그의 태도에 실망한, 역시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은 나 같은 이는 이렇게 말한다. “뭐야. 완벽하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그렇지만 선천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많거나, 후천적으로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학습한 이라면 보통 사람의 저런 반응에 이렇게 변호한다. “그 사람 요즘 만성두통에 시달리잖아. 완벽하게 일하기엔 무리지.” 이 현명한 답을 낸 사람 앞에서 보통 사람들은 두 가지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가 완벽하다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완벽해지고 싶다는 제 열망을 나타낸 것이라는 것과,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변호하는 사람의 진중한 마음결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하는 사실.“인간은 그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가 말했다.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내가 이해하고 있는 인간 그 이상의 인간을 영접한다는 뜨끔한 깨우침./김살로메(소설가)

2014-05-29

화에 대하여

나를 화나게 하는 `누군가`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 화의 근원은 오직 나일 뿐이다. 우리는 대개 화가 나는 건 상대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는 잘못이 없고, 내게는 별 문제가 없는데 `너`때문에 화가 난다고 생각한다. 내 화의 원인은 `누군가`여야만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몰아가고 싶어 한다. 예를 들면 `중2병`에 단단히 걸린 자녀가 있다 치자. 말은 퉁명스럽고 행동은 거칠기만 한 아이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는커녕 눈 한 번 마주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가슴에는 얼음팩을 안고 등에는 화롯불을 짊어진, 냉기와 열기가 공존하는 사춘기의 아이를 보면서 처음에는 망연자실하다가 나중에는 화가 난다. 화의 대상도 처음에는 딸이었다가 나중에는 아이의 친구에게로 옮겨 간다. 아이가 자꾸 엇나가는 것은 아이 친구 탓이라고 결론짓는다. 싹싹하던 아이가 샛길로 빠지는 건 친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더 화가 난다.이런 추론 과정이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일련의 과정에서 화가 난 것은 어쩌면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합리화 때문이라는 사실. `나를 화나게 하는 누군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맘 깊은 곳에서는 인정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다.내가 화가 나는 건 말썽 피우는 아이도, 말썽의 도가니에 빠지게 한 아이 친구 탓도 아니다. 화나게 하는 상황에서 책임을 전가할 구실이 필요했을 뿐, 화가 난 건 오직 스스로 때문이다.우리는 뭔가 화나는 일이 생기면 일단 그 화의 원인을 나 아닌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일단 주변을 탓하고 타자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렇지만 화의 근원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애오라지 내 안에 있다.화는 인간이 지닌 보편적 감정 중의 하나이다. 화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 화의 원인을 밖으로 돌리느냐 스스로에게 귀결시키느냐는 화의 본질을 생각하면 그 답이 보인다. 타자의 자극으로 발현되는 화는 결국 나의 실존을 점검하는 좋은 잣대가 되어 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28

견해 차이

잘 알려졌다시피 카뮈와 사르트르는 말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문학적인 견해 차이보다는 정치적 입장이 더 큰 이유였다. 둘의 신뢰적 관계는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기인하는 일상의 폭력에 대한 두 철학자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사르트르는 구체화된 폭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체계적으로 관찰했다. 인간 해방과 사회 변화에 필요하다면 폭력의 기치도 높이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에 카뮈는 폭력으로 발생할 수 있는 파괴적이고 부패적인 결과까지를 인식하고자 했다. 더구나 그 같은 폭력이 자신의 고국인 알제리의 상황이라고 봤을 때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폭력을 거부함으로써 폭력에 용감하게 맞서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차이는 본토의 부르주아 출신인 사르트르와 식민지 알제리 노동자 집안 출신인 카뮈가 맞닥뜨려야 할 태생적 운명이기도 했다.카뮈는 타협을 싫어했다. 누군가 이의제기를 하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이 되었다. 딴 데로 시선을 돌리거나 추상적 분노의 감정을 느끼곤 했다. 부분적으로 화해의 기미가 있었다 해도 둘 사이에는 미지근한 관계 이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그 둘의 입장은 너무 달라져 있었다. 카뮈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르트르를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사르트르는 부르주아적 가치들을 점차 옹호하기 시작한 카뮈를 오해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어느새 사르트르에게 카뮈는 `완전히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카뮈보다 여덟 살 많았던 사르트르는 카뮈보다 20년을 더 살았다. 그들 논쟁의 가치 판단을 떠나 인간적 정리에서 카뮈 편을 들어주고 싶을 때는 있다. 더 오래 산 사람은 그만큼 말할 기회 또는 변명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먼저 간 카뮈를 연민에 겨워할 필요까지는 없다. 남은 사르트르는 카뮈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는 않았다. 카뮈에 대한 추도사에서 충분한 경의를 표하고자 한 사르트르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27

설명 없이, 과장 없이

정서적 글쓰기는 논리적인 글쓰기와 그 방법에서 약간은 다르다. 논리적 추론을 포기한 자리에 심리적 비약은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다. 공감을 구한다는 면에서는 둘의 쓰기 방법은 같은 목표점을 지향한다. 하지만 정서적 글쓰기, 특히 그것이 소설이라면 재미와 더불어 `내적 찌름`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서늘하거나 짜릿하거나 눈물겹거나 등등의 정서적 충격은 논리성과 관련 있는 게 아니라 심리적 기제와 관계있다. 따라서 문장을 생략하고, 비약하고, 건너뛰어도 독자에게 주는 소설의 내적 찌름은 약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강렬한 느낌으로 전해질 때가 있다. 시시콜콜 설명하고, 친절하게 근거를 대다보면 정작 말하고자 하는 감흥이 반감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집 `대성당`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표제작인 대성당에는 하찮고 성가시게 여겼던 아내의 친구인 맹인과의 진심어린 교감을 경험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맹인에게는 윙크나 고갯짓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걸 통찰하게 된 주인공 나는 `보지 못해 세상을 완전하게 믿을 수만은 없는` 맹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 매개체는 카테드랄 즉 대성당이다. 맹인의 손과 화자의 손이 딱 달라붙어 대성당의 위용을 그려낼 때, 그 이미지를 가장 진실 되게 전달하기 위해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아 본다. 맹인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화자는 생각한다.불필요한 설명 없이 과장된 선동 없이 작가는 이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얼핏 보면 하찮게 보이고 눈에 띄지 않는 여러 상황들을 예리하고 섬세한 작가적 시각으로 짚어내 근원적인 삶의 철학으로 격상시켜 놓는다. 충격적인 요법도 폭발적인 구성력도 전제하지 않지만 서사 하나하나에 화가의 붓질 같은 현장성도 살아있다. 진실한 사진 몇 컷 앞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두 친구가 있다 치자. 사진을 찍은 주인공은 당연히 레이먼드 카버이고, 그 앞에서 삶의 방향성을 얘기하는 두 사람은 레이먼드 카버 식 은유를 이해하는 독자에 비유할 수 있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26

우리라는 결속

`작은 패거리`에 속하려면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그건 그룹이 은연중에 내세우는 수칙 가운데 하나로, 그 해에 베르뒤랭 부인으로부터 후원을 받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부인 말처럼 `그토록 바그너를 멋지게 연주할 수는 없다!` 거나, 플랑테나 루빈슈타인`저리 가라 싶게` 연주한다는 평가에 따라야만 했고, 또 코타르 박사가 내린 진단이 포탱 박사를 능가한다는 점을 수긍해야만 했다. - 마르셀 프루스트의 `스완의 사랑` 도입부에 나오는 말이다. 프루스트가 활동했던 20세기 초까지 귀족 문화가 건재했던 프랑스 상류 사회에서는 살롱 모임이 유행했다. 위에 나오는 베르뒤랭 같은 유한마담이 주로 파티의 주관자였는데, 장소도 제공하고, 물주도 되면서, 참석자까지 선별했다. 시쳇말로 `오야붕 마음대로` 마담 역할을 수행했다. 교양 있는 모임도 많았지만 패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그룹에서는 은근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곤 했던 곳이 살롱의 마담 자리였다.놓인 숟가락만 차지하면 되는 손님 입장에서는 베르뒤랭이 주도하는 패거리 분위기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부인의 드넓은 드레스 폭 한 자락을 잡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맘 깊이 안도하게 된다. 사람이 모이면 으레 편을 만들게 되는데, 권력이든 돈이든 그 무엇이든 가진 자 위주로 재편된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이 결속감을 가지려면 거기에 걸맞은 적이 있어야 한다. 합치고 뭉치는 이면에는 `우리가 남이가`란 정서가 따라 붙기 때문이다. 결속을 위해서라면 없는 적도 만들어 내야 한다. 적이 없으면 뭉칠 이유가 없다. `끼리끼리` 정서가 유지되는 최고의 비결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남`이 되기 두려운 우리는 오늘도 베르뒤랭 부인이 주최한 테이블에 앉아 그저 그런 피아니스트를 향해 휘파람 곁들인 환호를 보내고, 별 하자 없는 포탱 박사의 진단서에 이러쿵저러쿵 의문을 단다. `건전한 남`보다 `음험한 우리`가 주는 결속의 쾌감을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양심을 팔아 산 그 쾌락이 돌아서면 고대 환멸로 남을 것을 알면서도./김살로메(소설가)

2014-05-23

말의 외연

공자의 언행 및 주변 문객과의 대화를 수록한 책이 `공자가어`이다. 거기의 한 장면. 초나라 공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활을 잃어버렸다. 신하들이 급히 나서 활을 찾으려 했다. 왕은 도리어 느긋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만둬라. 어차피 초나라 사람이 주울 것 아니냐. 훗날 이 일화를 들은 공자의 반응은 이랬다. 왕이 한 말에서 `초나라`를 뺐으면 좋았을 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사람이 주울 것이다, 라고 했다면 더 훌륭했을 걸.잃어버린 활을 대하는 초나라 공왕은 그 자세만으로도 칭송받을 만하다. 평소 공왕이 지녔던 백성에 대한 기본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좋은 임금은 언제나 자신을 넘어선다.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만 - 국가의 안위를 위해, 백성의 사기진작을 위해 그래서도 안 되지만 - 자신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백성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줄 안다. 왕 없는 백성은 있을 수 있지만, 백성 없는 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화살에 대한 공왕의 일화는 작은 깨달음을 준다.하지만 이 가르침의 크기도 공자의 덧붙임 말에 비하면 약소하다. 자신이 다스리는 초나라 사람들에게만 호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자의 그릇은 초나라 사람을 넘어선 `사람` 자체를 다 포괄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 있는 기록 하나. 공자의 말에 이은 노자의 주석은 이러했다. 공자의 말에서 `사람`을 빼는 게 더 좋겠다고. 잃으면 줍는다. 노자는 나라와 사람을 뛰어 넘어 천지우주를 보듬은 것이다.말은 곧 사람이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는 도구이다. 한 마디 말로도 그 사람이 드러난다. 나아가 실천적 행동으로 그 말이 증명하는 사람이라면 온전히 신뢰를 얻는다. 큰 사람은 넓게 말하고 크게 아우른다. 아무리 정의를 외쳐도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면 잘 말한다고 할 수 없다. 내 것을 위해, 내 앞의 이익을 위해 큰 소리를 내는 것보다 전체를 위해, 모두의 화합을 위해 낮은 목소리로 조근거리는 것이 훨씬 나은 말의 사용법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22

차이를 기뻐하기

삶의 철학이 담백하면 자기 긍정 지수도 높다. 대개 천성이 밝고 명랑한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앞뒤 재는 것이 없고, 이것저것 따지려하지도 않는다. 부정적인 면보다는 타자의 긍정적인 면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약점을 훑는 일보다 좋은 점을 먼저 발견해낸다. 언제나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한다. 비도적인 것이 아니고, 악행과 거리를 두기만 한다면 그 어떤 것과도 친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깨어 있는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 곁에 있으면 인간사 갈등도 피할 수 있을 것 같고, 괜한 흰소리 같은 자기검열도 필요치 않게 될 것만 같다. 긍정지수가 높은 이들은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는 선천적 센스가 장착된 사람들이다. 새치름한 자만심도 분주한 이기심도 없는 그들 곁에 있으면 착하게 사는 게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일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건전한(?) 방식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하여 누군가 제 삶의 리듬에 끼어들거나, 섣부른 충고라도 하게 되면 그것을 잔소리로 받아들인다. 치명적인 실수나 기본적인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사안인데도,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며 자기 식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면 가족이라 할지라도 부담을 느낀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있어도 가치관이란 게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가치관은 평생을 통해 시나브로 내 안으로 스며든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그 어떤 방해꾼이 나타나더라도 자신이 가진 장점인 천성의 착함을 급격하게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악행을 일삼는 이가 제 기질을 하루아침에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삶의 철학이 담백한 이들은 타자가 아닌 자신에 솔직하다. 상대방을 존중하며 꼬아서 행동하지도 않는다. 실수는 하되 그것을 인정하고 바로 고치려고 노력한다. 말하기 전에 먼저 듣기를 즐기고, 약속한 것은 핑계 없이 지키려한다. 그런 사람들은 타자와의 차이를 받아들인다. 진심으로 그 차이를 기뻐하는 자들이다. 그들처럼 될 수 없다면 그들 반만이라도 따라잡자, 스스로에게 다짐해본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21

시간의 상대성

하루하루가 바삐 돌아간다. 벌써 올해의 절반이 지나가려 한다. 이렇게 쓰는 내 마음이야말로 시간의 노예라는 증거다. 시간을 느긋하게 대하고 있었다면 `올해의 절반이 지나려면 멀었네. 이 정도면 괜찮아. 뭔가 해야 할 시간이 아직은 충분한데.` 이런 맘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게 본심이다 보니 저런 긍정의 태도가 나올 리 없다. 대개의 사람들이 시간에 내몰리며 살아간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도 확고한 목표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시간에 휘둘려 허둥대는 것만은 분명한 이 아이러니.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제대로 부릴 줄 아는, 확신 서린 자기 관리법이 대견하게 보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시간을 부릴 줄 안다고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시간 관리를 철저하게 할수록 가장 확실한 시간의 노예가 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한 시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강박이 시간을 시간 그대로 놔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그 아까운 시간에 뭔가를 프로그램화하고 스스로 만족도를 얻어야 한다는 압박을 자초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시간을 제대로 부린다 해도 그것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될 뿐이다. 거기엔 즐기는 시간이 없고, 해결해야 할 시간만 남는다. 잘하는 자 즐기는 자만 못한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시간 없다고 말하는 건 진짜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기화해서 즐길 제대로 된 시간`을 찾지 못한 자기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미녀에게 구애할 때는 한 시간이 일초처럼 느껴지고 뜨거운 철판에 앉아 있을 때는 일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상대성이다”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시간의 상대성은 시간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데서 출발한다. 시간 없다고 징징 대기에 앞서 시간을 자유롭게 풀었다 조였다 하는 마음 여유부터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당장 달라지기는 힘들겠지만./김살로메(소설가)

2014-05-20

인권 수난 시대

문명은 발달하고 문화는 확장 되어간다. 지구촌 한마당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니 편 내 편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게 현대 사회이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세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늘 변화가 요구된다. 거기에 맞춰 지적·물적 토대 역시 날로 풍성해진다.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허울 좋은 꽃일 뿐이다. 풍요의 노래가 넘쳐날수록 환희의 축포가 터질수록 그 이면에 인권 유린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인권 유린은 자연 재해 앞에서 인재 앞에서 사고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일어난다. 불가항력의 산사태로 생겨난 주검들, 뒤집어져가는 여객선 안에서 고통으로 끝내 생을 마감한 영혼들, 납치와 폭력 앞에 고스란히 숨죽일 수밖에 없는 어린 여학생들. 어쩜 그리 인권이란 보호의 보자기는 약자와 여성들만을 잘도 알고 피해 가는지.실시간으로 중계해주는 지구촌 뉴스를 대하다 보면 우리 인류의 미래가 밝기만을 바라는 건 지나친 희망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수단에서는 개종 및 배교를 했다는 이유로 임신 중인 여성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삼일 간의 개종 시간을 부여했는데도 이슬람교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교수형에 처해 마땅하다는 논리다. 기독교 남성과 결혼한 여동생이 배교했다며 오빠가 당국에 고발하고 처벌을 원했다. 이슬람 율법 샤리아에 따르면 아버지가 무슬림이면 자식인 딸도 같은 종교여야 한다. 나이지리아의 무장 단체 보코 하람의 여학생 단체 납치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우울한 얘기들만 들려오니 망연자실해질 뿐이다. 삼백여 명에 이르는 어린 여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열망과 힘이 없었다는 두 가지 이유만으로 죄 없이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있다.인권 침해는 약자들이 그 표적의 대상이 된다. 가진 자들보다는 없는 자들에게, 당당한 자들보다는 소심한 이들에게,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에게 수난의 화살이 꽂힌다. 가진 것 없고 힘없다고 인권 또한 없는 건 아닌데 왜 이런 일이 되풀이 되는지 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19

운세의 심리학

신문이나 잡지 한 귀퉁이를 보면 `오늘의 운세`라는 것이 있다. 한 수 더 떠 요즘은 전화 한 통에 사주나 운세를 봐준다는 광고가 실릴 정도이다. 사주나 운세 등에 관한 기사나 광고 등이 예삿일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거기에 의존한다는 말도 된다. 우리 전통 문화의 토양이 사주나 운세 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도 이런 현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운세나 혈액형으로 보는 성격 유형 등에 나오는 서술 내용은 사실 변별력이 거의 없다. 대개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이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 한다.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특징을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여기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학생들에게 각각의 성격 테스트를 한 뒤, 결과와는 상관없이 똑같은 내용의 결과지를 나누어준다. 그것을 모르는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테스트 결과가 자신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대답한다. 사람에게 있는 보편적 특성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각종 점술은 바넘 효과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불안한 심리 상태의 내방자는 이미 상담자가 들려주는 얘기를 믿을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상태에서 막연하고 일반적인 특성이나 확률적으로 높은 사항을 묘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특징이 있다는 사실은 인식할 겨를이 없고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만다. 더구나 그런 보편적 얘기들이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좋은 것들이라면 그것을 정당화하는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운세 서비스나 점술 등에 의지하는 게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합리적 대안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한 현대인들은 자신을 맡기고 조력을 구할 만한 데가 없다. 따라서 유명 철학관이니 족집게 점집이니를 찾아다니는 우리들 불안의 행보도 바넘 효과의 진실을 인식하는 정도 선이라면 굳이 말릴 이유가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