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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는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앤톨리니 선생이 주인공 홀든 콜필드에게 성추행을 하는 장면,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콜필드의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 센트럴 파크 연못의 겨울 오리를 걱정하는 콜필드의 유머 깃든 순정이 깃든 장면 등이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학교 선생의 성추행 장면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묘사로 작동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하는 콜필드의 대사 장면은 그 장면 자체를 작가가 책 제목으로 뽑았을 만큼 순수에 대한 동경을 의미한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센트럴 파크의 겨울 오리를 걱정하는 콜필드의 마음이다. “센트럴 파크에 있는 연못을 지나가 본 적이 있으세요? 센트럴 파크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연못이요. 아주 작은 연못이 있어요. 오리들이 살고 있는 곳 말이에요. 오리들이 그곳에서 헤엄을 치고 있잖아요. 봄에 말이에요. 그럼 겨울이 되면 그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스쳐 지나는 인연에 지나지 않는 택시 기사 호이트 아저씨에게 콜필드가 한 말이다. 누구나 한번쯤 저런 엉뚱한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런 의문은 동심이 풍부한 어릴 때나 그것을 잃어버린 어른이 되었을 때나 별 차이 없이 생겨난다. 살다보면 아주 익숙한 풍경인데 그 풍경이 느닷없이 낯설게 보이고 그 `낯섬`에 급기야 한 점 재기발랄한 의문이 생길 때가 온다.아주 작은 연못에 오리들이 복작댄다. 봄의 기지개를 시작으로 조금씩 발길질하던 오리는 한여름의 풍성해진 자맥질을 지나 소요 없는 겨울을 맞이한다. 겨울을 맞이한 오리는 더 이상 연못에 머물 이유가 없다. 헤엄칠 물이 다 얼었기 때문이다. 그 많던 오리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제비처럼 따뜻한 남쪽나라로 간 것일까, 스님처럼 동안거에 든 걸까. 아주 작은 연못의 겨울 오리떼는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숨은 오리떼를 찾아 나목의 숲을 헤매는 담담한 풍경, 그것이 겨울이란 계절의 존재이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04

행복한 카뮈

사람과 사람 사이는 상호보완적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좋은 제자는 스승이 만들고, 훌륭한 스승은 제자가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알베르 카뮈는 좋은 제자였고, 그의 스승인 루이 제르맹과 장 그르니에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루이 제르맹은 알제리 빈민가의 한 소년을 노벨 문학상 작가로 거듭나게 한 첫 번째 스승이었다. 궁핍한 살림을 꾸렸던 카뮈의 어머니는 초등과정을 마친 카뮈를 상급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당시 알제리 하층민 소년들은 노동자가 되어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부 열망으로 가득 찬 카뮈를 제르맹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카뮈의 어머니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성심껏 지도해주었으며, 장학금을 받고 중학교에 갈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선생은 소년 카뮈에게 글 쓰는 재능과 남다른 통찰력이 있다는 걸 진작 알아봤던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탄 카뮈가 어머니 다음으로 제르맹 선생을 호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장 그르니에 또한 카뮈에겐 잊을 수 없는 스승이다. 카뮈는 선생을 신뢰했고 선생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신에게 기쁨이라고 편지를 썼다. 스승의 산문집 `섬`에도 그 유명한 서문을 썼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이를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로 시작하는 카뮈의 서문은 그의 명성 덕에 스승의 산문집 자체보다 더 유명한 것이 되어버렸다. 진작 카뮈는 그 서문이 적힌 책을 받아 보지도 못한 채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사고 소식에 가장 먼저 달려온 이가 스승 장 그르니에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살다 보면 도처에 스승이 가득하다. 나를 이끌고 채찍질하는 모든 이는 루이 제르맹이요, 내게 충고하고 쓴 약을 주는 모든 이 또한 장 그르니에다. 내 곁에서 크고 작은 자극을 주는 모든 스승들을 하나하나 불러내고 싶은 밤이다. 카뮈의 행복에 견줘도 좋을 만큼, 제 곁 스승을 확신하는 당신이라면 이 깊은 밤 맘껏 행복해도 괜찮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03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 위안이 있다 / (….) /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 아담 자가예프스키의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이란 시의 부분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에 꽂힌 후 폴란드 시인에 대해 더 검색하던 중 알게 된 시인이다. 쉼보르스카에 비해 덜 서정적이지만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진실에 가닿으려는 시인의 노고가 강풍에 흔들림 없는 나무둥치 같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자신의 희곡`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석쇠도 필요 없을 만큼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라고 일갈했다. 갇힌 공간에서 서로 욕망에 뒤엉키고 비애감에 젖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발설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촉수가 적나라하리만큼 발달한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가 그런 시선을 유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타인이 지옥인 이유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관심 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다. 어린 아기조차도 누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품는지, 누가 자신에게 적대적인지 본능적으로 구분할 줄 안다. 달리 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할까, 를 어릴 때부터 무의식중에 학습하는 것과 같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내 삶의 욕망과 비애가 타자와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는 그 절정의 순간에 타자를 지옥으로 인식하고 탄식하게 된다.하지만 진실로 우리가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말은 자가예프스키의 단언처럼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라는 것. 타인을 만나 지옥일 때보다 타인을 만나 천국일 때가 일상에서는 훨씬 더 많다. 깨끗한 하루의 시작점, 누군가의 맑은 이마를 보며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부정의 언사보다 긍정의 언사이기 쉽다.`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 타인은 아름다움일 때가 훨씬 많다. 자가예프스키의 이런 긍정의 독백에 시선이 가는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02

입술 헤르페스

또 입술이 부푼다. 전날부터 입술 주변이 간질간질하고 머리가 무지근해지더니 어깨와 팔뚝으로 통증이 몰려왔다. 따뜻한 곳에 등을 대 지지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쓰러지듯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입술에 기포가 생기고 발갛게 흉이 나기 시작한다. 구순포진이 도진 것이다. 몸이 앓거나 맘이 고달프면 자주 입 주변에 물집이 퍼지고 이내 헐곤 했다. 이 하찮고도 귀찮은 증상은 달갑지 않은 친구처럼 불쑥불쑥 찾아와 내 일상을 휘젓는다. 젊은 시절부터 쭉 그래왔다. 시험을 앞두고는 치통과 함께, 사랑을 앓으면서는 두통과 함께 슬며시 따라붙던 것이 이젠 만성증상이 되어 버렸다. `몸이 앓거나 맘이 고달프면`이라는 저 전제는 오랜 경험에 비춰볼 때 조금 수정해도 좋겠다. 내 경우 단순히 몸이 아픈 것만으로는 구순포진이 생기지 않는다. 반드시 맘까지 아파야 입술이 부풀어 오르게 된다. 맘에 사무침이 있거나 괴로움이 스미면 육체적 피곤으로 연결되고 몸은 그것을 감지해 나쁜 신호를 작동한다.“밀려오는 파도 말고 밀려나가는 파도가 힘이 세고 매듭 묶이는 일보다 매듭 풀리는 일이 더 유혹이라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 때로 휘청거리곤 하는 것이다. 그만 저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러다 그대와 함께 무너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잠복되어 있는 헤르페스 균을 도발하는 저 마음의 괴로움을 `몰락의 에티카`에서 뽑은 이 말과 연결해본다. 담아야 하는데 멀리 밀려가고, 묶어야 하는데 쉽게 풀려버리는 게 사람 사는 일의 과정이다. 놓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리지도 못하는 그 틈새에 마음의 병이 서린다. 그게 `보통 사람의 보편적 정서`이다.몸만 가벼이 아프면 한 사흘이면 족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아무리 가벼운 증상이라도 몇 주는 헤매야 한다. 몸 가벼이 아픈 것은 아프지 않은 것과 같지만 마음 아픈 것에는 가벼움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 누군가 부푼 입술로 나타나거든 저이는 몸이 피곤한 게 아니라 마음이 피로한 것이구나, 보아도 무방하다. 천형처럼 `나았다 도졌다`를 반복하는 입술 헤르페스./김살로메(소설가)

2014-12-01

배려도 지나치면

딸내미랑 집 근처 단골 미용실에 들렀다. 젊은 부부가 오순도순 꾸려 나가는데, 아내의 일손을 돕기 위해 남편은 직장에서 야간일만 전담할 정도로 성실하다. 내가 염색을 하는 동안 딸내미는 신문을 뒤적이며 기다렸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텔레비전에서 CNN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영어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염색약 냄새 때문에 골머리가 아픈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참을만했다. 원체 신뢰감을 주는 부부인데다, 오죽하면 손님 앞에서 저 방송을 틀었을까 싶었다. 남편분 직장에서 승진 시험을 앞두고 영어 듣기 공부를 하겠거니 하고 짐작했다. 손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방송은 딸내미가 파마를 마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못내 모른척했다. 오죽하면 저럴까,의 심정이 웬만하면 이해하자,는 감정보다 훨씬 절실할 것임을 알기에.드디어 미용실을 나서는 시간, 열심히 사는 부부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승진 시험으로 영어를 치르나 봐요? 공부하려면 힘들겠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여사장님 눈이 동그래졌다. “따님이 그 방송 틀어놓은 거 아니에요?” 맙소사! 미용실에서 영어 방송을 들어야할 만큼 절박한 일이 딸내미에게 없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그런 무례를 범할 만큼 대범한 아이도 못되었다. 부부가 동시에 말을 이었다. “우린 따님이 영어 공부하려고 틀어 놓은 줄 알았어요.” 한다.다시 필름을 돌려 보자면 이렇다. 테이블에 놓인 신문 밑에 리모컨이 있었고 그것이 딸내미 팔꿈치에 눌려 저도 모르게 CNN 방송으로 채널이 바뀐 모양이었다. 딸내미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미용실 부부는 딸내미가 영어 공부하려고 그랬나 보다 했던 것. 나는 나대로 미용실 남편분이 영어 공부를 하나 보다 하고 넘겨짚은 것이었다. 까딱하면 서로 오해할 뻔했다. 오늘의 결론? 배려도 지나치면 오해를 낳는다. 그러니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는 거다. 단, 그 순간도 배려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1-28

갑질도 배운다

`갑질`도 배운다.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약자에게만`그 권력을 행사하는 게 갑질의 특징이다. 저녁모임 자리가 있던 식당에서였다. 두 여종업원이 한 조가 되어 서빙을 했다. 한 명은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아르바이트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외국인 출신 베테랑이었다. 그런데 선배격인 외국인 종업원은 아르바이트생을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했다.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며 매서운 눈초리와 어눌한 목소리로 훈계를 했다. 숯불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다며 `저리 비켜. 뒤로 나와!` 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모두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뭐라 마땅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갑질도 배우는구나.` 라는 단상이었다. 이국에서 온 그녀가 처음 일을 배울 때 혹 누군가로부터 저런 `갈굼`을 당하지 않았을까.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배운 며느리는 못된 시어머니가 될 공산이 크다. `반면교사` 하기보다 `모방하기` 전법을 따르는 건 얼마나 익히기 쉬운 학습법인가. 자신이 당한 설움을 고대로 어리바리하고 순진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달콤한 복수인가. `더 약자인 동료`를 괴롭혀 내 아픔을 위로받기엔 얼마나 적절한 보상인가.`어눌한 일솜씨`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저래도 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옆 친구가 거들었다. “괜찮아, 일주일만 지나면 저 관계도 역전될 거야.” 그때 얼음덩이 하나가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그 일주일 뒤 자신의 운명을 그 이방인은 진작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통 기한 촉박한 권력의 맛을 가장 실감나게 소진하기 위해 그미는 저토록 발악에 가까운 갑질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 순진한 천사도 언젠가는 초강력 여전사임을 마다하지 않는 자신을 능가하게 되리라는 원초적 두려움 같은 것, 그것이 그녀를 거친 언행으로 내몬 것은 아닌지. 애초에 불공정한 게임에 들어선 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는 갑질을 배우는 것 밖에 없었으리라는 이 당혹감./김살로메(소설가)

2014-11-27

야외 포트럭 파티

사과 다섯 개, 감 세 개, 배 두 개, 바나나 한 송이, 파인애플 한 개, 드레스코드는 선글라스와 머플러. 친구 둘과 내게 주어진 미션이었다. 공원에서 번개팅을 하자고 해놓고, 이렇게 두루뭉술하고 애매모호한 준비물을 가져오라고 하면 어쩌자는 거지. 이대로는 점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았다. 다른 친구들도 뭔가를 준비해오겠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할 것 같았다. 해서 우리는 파티를 기획한 친구가 내준 미션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파인애플을 빼는 대신 어묵탕을 준비했고, 무거운 바나나도 배를 채울 수 있는 빵으로 대체했다. 실용적인 걸로 미션 품목을 바꾼 것에 대해 내심 뿌듯해할 정도였다. 파티 장소인 공원에 도착하고, 각자 준비한 먹거리를 내놓았을 때야 미션 수행에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공원 테이블을 세팅해 서양식 파티 상을 차릴 참이었던 기획자 친구의 센스를 우리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그리하여 같은 차를 탄 우리 셋만 미션에 실패했다. 파인애플 빠지고 바나나 없는 비주얼로도 근사한 야외 테이블을 차릴 수 있었다. 카나페 안주가 곁들인 와인, 케이크에 김밥, 과일과 빵까지 만족할만한 런치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야생 들꽃으로 장식한 꽃병이 차림새 한 가운데 놓이자 모두 탄성을 질렀다.선글라스와 머플러로 한껏 멋 낸 `아지매`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파티를 즐기는 그 시간만큼은 각 왕국에서 모여든 왕녀가 되어도 좋았다. 여담이지만 미션에 없었던, 모 여사가 끓여간 어묵탕이야말로 그날의 인기아이템이었다. 쌀쌀한 야외에서는 뜨끈한 국물이 통할 수밖에. 눈치 없는 자의적 해석이 반전의 즐거움을 낳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게 깜짝 야외 포트럭potluck 파티를 생각해낸 친구 덕분이었다.연말이 다가오고 각종 모임 자리도 늘어난다. 기왕 즐겨야한다면 이런 센스 있는 자리라면 어떨까. 그런 뜻에서 친구들과 나를 위해 포트럭 파티의 깜짝 기획자가 되어보고도 싶다. 장소는 어디로 할까. 드레스 코드는 뭐로 하지. 이런 상상만으로도 입 꼬리가 올라간다. 벌써 파티의 반은 성공한 거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26

문체미학의 경제성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는 말은 글쓰기에서도 통한다. 아무리 감동과 재미를 주는 글이라 해도 기본 형식에서 멀어져 있으면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다. 나는 문체미학의 경제성을 옹호하는 쪽이다. 중언부언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 문장은 거칠지는 않지만 건조한 편이다. 소설을 쓸 때는 그나마 덜한데, 생활 칼럼을 쓸 때는 마음부터 건조해진다. 그걸 피해보려고 시집을 자주 들여다본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실전에서는 예의 건조한 문체로 돌아가고 만다. 담백하고 건조한 문장을 선호하는 취향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없다. 다만 성마른 문장을 구사하는데도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나면 기분 좋은 당혹스러움이 밀려온다. 어느 순간부터 화려한 문투와 과장된 어법에 대한 거부 반응이 일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많이 젊었을 때는 비유법도 많이 썼고, 소위 오그라드는 표현들도 즐겼다. 어느 시점까지는 미문이나 꾸밈이 과한 글에 혹하기 쉽다. 서정성을 담보한 그런 글은 영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그조차 거추장스러워 마구 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자연스레 더 담백하고 더 건조한 쪽으로 문장을 내몰고 조인다. 문맥에 살을 붙이거나 색조 화장을 하는 걸 놔두질 않는다. 글쓰기 책들의 요지는 한결 같다. `문장의 나뭇가지를 흔들어라. 그리하여 나목 상태로 탈탈 털리거든 그것만 제대로 묘사해라. 아직까지는 이런 글쓰기 형식을 고수하는 이들의 방식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에 보면 문장 수련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스승은 한참 정신을 못 차리게 야단치시더니, 이렇게 고쳐주셨다.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처음에 22글자였던 것이 11글자로 줄었다. 딱 절반만 남았다.” 줄이면 풍경이 보인다. 말을 아껴라. 설명하려 들지 마라. 보여주기만 해라. 스승을 잘 만난 정민 선생은 이런 깨달음을 빨리 얻었다. 문체미학의 경제성 안에 온 우주적 글쓰기가 다 담겼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25

도서정가제 유감

당분간 내가 책 사는 주기는 느려질 것이다. 도서정가제 때문이다. 사두면 좋겠다 싶은 것은 정가제 시행 전 대폭 세일하는 기간에 마련해두었다. 하지만 느려진, 책 사는 주기를 평소대로 회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귀차니즘`과 친구인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것보다 집안에 편히 앉아 클릭 몇 번으로 책을 사는 쪽을 선호한다. 당분간 옛날만큼의 할인폭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 때문에 인터넷에서 책 사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책을 사는 게 여전히 `편리하고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 시행의 가장 큰 명분은 `동네 책방 살리기`이다. 그간 대형 인터넷 서점들은 높은 할인율과 무료 배송이라는 매력적인 마케팅으로 그나마 열악한 대한민국 독서 시장을 휩쓸다시피 했다. 동네 서점들은 소리 소문 없이 문을 닫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계란과 바위의 싸움에서 당국이 계란 편을 들어주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계란이 타조알 된다고 바위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15퍼센트 이내로 도서 할인율을 제한한다지만, 편법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대형 인터넷 서점들은 간접할인이라는, 자신들이 쓸 수 있는 모든 패들을 동원할 것이다. 카드·통신사와의 제휴, 마일리지 지급율 인상 및 다양한 적립금 이벤트, 매혹적인 경품 잔치, 여전한 무료 배송 등을 내세워 기존의 고객을 유지·확보하게 될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간 만큼의 책값 이익은 영세 출판사나 동네 서점까지 가닿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네 책방 살리기라는 명분은 무색해지고 만다.도서정가제 시행의 `속 깊은 뜻`을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책이라는 문화적 특수 공산품의 할인율을 당국이 설레발치며 규제한다는 게 어쩐지 맞지 않다는 생각뿐이다. 규제해서 약자나 소비자가 덕을 볼 수 있으면 좋은 시스템이지만, 규제해서 강자가 덕을 보거나 모두가 부담을 느끼는 시스템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직은 지켜볼 단계지만 도서정가제가 본래의 취지에 가닿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24

취향대로 읽기

퍼즐 맞추기식 소설은 집중도를 요한다. 아귀 착착 맞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작가는 독자에게 그 어떤 친절도 베풀지 않는다. 칼자루는 작가가 쥐고 있으니 작가가 승자가 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독자가 패자가 되는 건 아니다. 작가의 투망질에 걸려들수록 제대로 읽은 게 되니까 서로 이기는 게임이 된다. 이러한 퍼즐 맞추기식 소설의 강점은 제대로만 읽는다면 분명한 보상이 따른다는 거다. `충격`과 `여운`이 그것이다. 진부하고 평범한 저 두 낱말이야말로 작가에 대한 최대 찬사가 아니던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다시 읽는다. 볼 때마다 새롭게 눈길 가는 곳이 나온다. 오늘은 주요인물인 사라 부분을 퍼즐 맞추기 해본다. 딸 베로니카의 남자친구 자격으로 놀러온 토미에게 그녀는 추파를 던졌을까. 허둥대면서 요리를 하는 가운데 노른자 하나를 터뜨리면서도 토니를 관찰하는 장면, 서랍장에 몸을 기대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마라고 뜬금없이 하는 말, 달궈진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에 던져 넣고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피어오르자 파괴적인 웃음을 터뜨리는 것, 둘만의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토니를 향해 미소 짓는 일, 손을 높이 흔드는 게 아니라 허리께에서 수평이 되게 들어 작별 인사를 함으로써 토니로 하여금 그녀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눴으면 하는 아쉬움을 유발하게 하는 것, 이 모든 사라의 언행은 토니로 하여금 “어머니 멋지시다.”라는 말을 베로니카에게 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작가는 답을 주지 않고 디테일한 정황들을 소설적 장치로 활용한다. 묘사와 대사로 이루어진 이런 것들은 등장인물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단서가 되고, 주제로 나아가는 밑돌이 된다. 처음엔 섬세한 부분들이 잘 안 보인다. 하지만 눈과 마음이 자연스레 글에 동화되다 보면 작가의 의중에 어느 정도는 가닿게 된다. 문제는 이 바쁜 세상에 누가 소설 읽기에다 제 온전한 인내심을 쏟아 붓는단 말인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을 수고를 기꺼이 감당할 이에게 흥미진진한 이 소설을 권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21

진실로 사랑

불안하면 확인하게 되고, 미덥지 못할수록 보채게 된다. 고구마를 구우면서 하마나 익었을까 젓가락으로 찔러대는 건 행여 그것이 탈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영화 보러 가자는 약속을 몇 번이나 다짐 받는 건 상대에 대한 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관심 가면 불안해지고, 마음 주면 보채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스스로 보채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한없이 평온하고 미더운 상태, 그건 에로스적 사랑의 본질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거짓 감정이다. 에로스의 속성에는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 과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구속함으로써 내 불안을 자초한다. 지루하면서도 다이내믹한 감정 소모가 이어진다. 한 마디로 진실로 사랑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랑 그것이 에로스적 사랑의 특질이다. 그 사랑의 불꽃은 종국엔 재만 남긴다. 그 재는 안타까이 오래 가는 성질의 것도 못된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허용된 감정 안의 유한성의 사랑 그것이 에로스적 사랑이다.하지만 진짜 사랑은 시공간에서 자유롭다. 오직 사랑이란 본질 자체에만 기댄다. 따라서 그 사랑은 무심하다. 모든 사랑을 초월하는 사랑 그 꼭대기에 무심함이 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기에 불안도 집착도 없다. 범접 불가한 그 사랑의 대상 1호는 내게 `엄마`이다. 애증이란 검증을 거칠 필요조차 없는 사람, 집착과 연민에서 자유로운 완전무결한 대상. 그러기에 이토록 무심하고도 뻔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덜 사랑할수록 영원히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진짜 사랑하면 그 말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그 사랑을 확인하고 집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하면 한없이 무심해질 수 있다. 그 사랑이 곧 내 마음인지 스스로도 잊을 만큼 항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변명 같지도 않은, 늙은 엄마에 대한 이 직무 유기 사유서를 엄마는 이해할 것이다. 근데 무심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면 이런 반성문조차 필요 없는 거 아닌가./김살로메(소설가)

2014-11-20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관계망에서 언어만큼 자신의 위치를 잘 말해주는 것도 없다. 맘만 먹으면 우리는 십 분 이내에 관찰 대상자의 현재 계급 지도(地圖)상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대상자들끼리 쓰는 언어 속에 모든 계급적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을 목표로 삼는 게 민주주의라지만 현실적 시스템은 그것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문자 생활이 발전되고 세련될수록, 인류는 계급의식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고착해나갔다. 인간 운명의 공통적 질서는 미개하고 야성적인 사고를 개조하는 일이었다. 문자가 그것을 가능케 하리라는 믿음이 일차원적인 사유보다 더 높은 의식적인 사고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의식을 낳았고, 자연스레 계급의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착하다`라는 말을 예로 들자. 그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쓰는 말은 되지만, 아이가 어른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티나가 `우리 시어머니 참 착해요.`라고 목젖 꺾인 하이톤 콧소리로 말할 때 우리는 별 뜻 없이 크게 웃어젖힐 수 있다. 그 웃음은 착하다, 는 말의 사회적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이방인에 대한 아량을 담고 있다. 그것은 착하다, 는 말의 계급적 한계를 무의식중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해준다.반면에 선하다는 말은 어른, 아이 구별하지 않고 쓸 수 있지만 대개 전자에 더 많이 쓰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낱말의 영어 뜻은 같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그 둘의 쓰임새는 사전적 풀이부터 묘하게 다르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를 때 착한 것이 되고, 거기에 도덕적 판단 기준이 더해지면 선한 것이 된다. 단순히 어른(권력)의 질서나 요구를 잘 따르면 착한 것이 되고, 거기다 도덕적 판단이란 막을 거르면 선한 것이 된다. 따라서 계급 언어의 산물인 착한 것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아도 좋다. 요구하면 따르고 부탁하면 들어주는 일방적 착함 대신, 부당하면 거부하고 곤란하면 거절하는 판단의 선함도 나쁘지 않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9

본성을 거스르는 노력

좋은 소식은 실바람처럼 잔잔하게 오지만, 나쁜 소식은 강풍처럼 휘몰아쳐 온다. 몇 백 명이 동시에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낮지만 몇 백 명이 동시에 수장될 확률은 높다.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솟아나는 기적은 일어나기 힘들지만,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현상은 심심찮게 목도한다. 나쁜 소식 뒤에는 꼭 인재(人災)라는 말이 따라 붙고, 이는 자연스레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로 연결된다. 인간은 어질고 의롭게 태어났을까. 성선설의 근간을 이루는 인의(仁義)가, 말하기 좋은 당위의 사유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제 인간 깊숙한 곳에는 욕망이나 본능 같은 실체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나치기 때문이다. 인의는 타고난 자연적인 본성이 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다. 그런 착실한 성정이 선천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면 왜 인간은 욕망에 허덕이고 본능에 몸부림 칠 것인가.배고프면 밥 찾고, 추우면 껴입고 싶고, 힘들면 눕고 싶고, 예쁘면 갖고 싶은 게 인간의 욕구이다. 자연스런 이런 현상은 인의라는 고상한 명분 앞에서 결코 주눅 들거나 꺾이지 않는다. 성악설이 성선설에 비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효도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은 선천적 범주가 아니라 인위 즉 교육이나 훈련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맹자의 성선설은 이성적 이상의 사유에 속하는 것이고, 순자의 성악설은 현상적 현실의 결과를 말해준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면 큰 고민 없이 성선설보다는 성악설 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래야 어제오늘 벌어지는 여러 `나쁜 뉴스`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게 된다.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제게 이로운 것을 좋아하고 쾌락을 주는 것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 본성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성악설의 요지이다. 그 인위의 힘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 세상은 나쁜 소식들로 넘쳐난다. 본성이 선하다는 허상의 믿음 대신 본성을 개조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이 훨씬 현명하다. 스스로를 연마하는 현실적 자세의 중요함이랄까./김살로메(소설가)

2014-11-18

행복의 기준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돈이 행복의 기준이라고 보는 이도 있고, 사람과의 교감에 제 행복의 근간을 두는 이도 있다. 많이 아파본 사람은 건강만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기준을 넘어서 진정한 행복이란 `혼자만의 시간`에 만족할 수 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외로워 외로워서 못살겠어요, 라는 오래된 유행가 가사가 있다. 사람 곁에서 위안과 행복을 느끼고 싶은 그 처연한 상황이 애처롭기만 하다. 외로운 게 사람이긴 하지만 외로워서 못 살 정도이면 몸과 마음이 아픈 상태이다. 아픔은 행복의 주적 중의 하나이고, 그 아픔이 혼자이고 싶지 않은 갈망 때문에 생긴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다 갖춘 사람이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다면 그것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모든 문제는 사람이 만든다. `어찌하면 좋을까요?`라고 어떤 문제 앞에서 우리가 탄식할 때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방법을 묻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답은 내 안에 이미 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고 확신을 주는 사람 곁에서도, 내 안의 답이 셋이면 셋이라고 생각하는 게 사람이다.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에두르는 화법으로 정답을 내놓지 않는 식의 명답을 내놓는 현인 앞에서도, 내 안의 답이 넷이면 넷이라고 결심을 굳히는 게 사람이다. 긍정적 측면에서 이 정도 되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뭔가에 자신의 에너지를 오롯이 쏟아 붓기 때문이다.사람 곁에서 위안과 화평을 얻는 게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온전한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진실로 행복하려면 사람 없는 그 순간에도 스스로 만족스러워야 한다는 것. 혼자 있는 시간이 확보되었을 때,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충족감을 경험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심 행복한 사람이다. 생산적인 뭔가에 제 기를 오롯이 쏟으려면 사람과 멀어져 있어야 유리하다. 혼자 있을 때 평안한 만족감을 느끼거나 지극한 자존감을 맛본다면 당신의 행복지수는 아직 믿을만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7

오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간밤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못 잔 게 아니라 잠 잘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렸다. 희붐한 아침이 왔을 때야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만큼 몰입도는 최상이었다. 평생 불면의 밤과는 친구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잠과 친숙한 체질이지만, 더러 몰입의 밤과도 친구할 만큼 한 곳에 집중하면 시간이 어찌 가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시쳇말로 나는 `그분이 오시면` 무작정 쓰게 되고, `필이 꽂히면` 빨려들듯 읽게 되는 부류이다. 몸을 위해선 결코 좋은 생활 패턴이 아니다.세상엔 잘 쓰는 작가들과 좋은 책들이 널렸다. 평생 읽고 쓰는 데만 온전히 시간을 바쳐도 그(것)들을 내면화하는 데는 시간이 모자란다. 한데 좋은 사람들 만나 수다 떠는 걸 즐기는데다, 짜인 일들까지 갈무리하면서 읽고 쓰는 나 같은 이는 늘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다. 게을러서 생긴 강박관념은 몸의 피로를 몰고 오고, 그것은 자연히 마음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나름 열심히 하는 건 분명한데 늘 허망한 이 느낌.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핍진감의 원인은 고백하건대 단 하나다. 뭔가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대로 하지 않는 진실이 그것이다. 충만감에 가닿지 못하는 모든 열정은 몸의 피로와 마음의 불안을 낳는다는 것을 알겠다.“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넘어설 수 있고,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더욱 꼼꼼하게 채워간다. 미래란 현재의 동력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미래란 현재에서 이어지는 시간이지만, 반드시 현재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걸 안다.”`메이드 인 공장`에서 작가 김중혁이 한 말이다. 현재를 꼼꼼하게 채워가는 것 같은 데도 스스로 충족에 이르지 못하는 심리 상태는 작가의 말처럼 미래에 대한 비관 때문에 생긴 감정이 아닐는지.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소용에 닿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그것 때문에 몸과 마음의 피로가 누적된다는 것. 그 피로를 이기는 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4

선명한 슬픔

늦가을 바람이 맵차다. 벚나무 가로수에 바람이 닿으면 선명한 붉은 잎가지들이 온몸을 흔든다. 눈을 찌를 듯, 얼굴을 삼킬 듯 격렬해지는 저 갈망의 향연. 벚나무 단풍이 저리도 고왔던가. 가로수 색깔이 선명하지 않았다면 제 아무리 바람의 부추김이 셌다하더라도 지나는 이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진 못했으리라. 색깔의 변화에 민감하게 되면 나이 들어간다는 증거라는데 정녕 그런 모양이다. 옛날에 무심코 지나쳤던 이 길이 옛날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계절의 변화가 눈에 띄게 분명하게 보이고, 한 계절 안에서도 그 계절이 깊어가는 과정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건 분명 슬픔의 조짐이다. 그 깊은 조짐을 선인들은 `성숙해진다`라고 표현했다. 물 잘 든 벚나무 가로수 풍광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반은 떨어져 누렇게 길 위에서 스러져가거나 벌써 저 먼 우주 속 먼지로 멀어져 가고, 아직 남은 나머지 반은 달뜬 몸으로 세상을 향해 화려한 무언의 발화를 시도한다. 먼저 먼지가 되고, 더러 바래져가고, 남아 무르익어가는 그 잎들의 고향인 나무를 보며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한 살이를 생각한다. 나목으로 눈비 맞다가, 물올라 잎 나고, 그 잎들 무성히 하늘도 가렸다가, 다시 저토록 화려한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다. 담대하게 허물벗기 위해 온몸으로 불태우는 저 울음의 절정길. 그단순한 것을 보고 우리는 탄성을 지른다.나무든 사람이든 생명에 유한성이 있다는 것은 같다. 하지만 겨울을 맞는 몇몇의 나무들이 한껏 제 잎들의 향연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다음 봄날을 예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가 새 계절을 맞는 순환고리에는 새봄이란 물리적 환원이 보장되지 않는다. 기왕의 몸은 그저 늙어가고, 다만 망가져갈 뿐이다. 몸이 삭으면 자연히 맘에 사무치는 게 늘어간다. 그러니 잎 붉어지는 단순한 저 자연현상도 단순하게만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나이 들수록 성숙해진다는 말은 사람들이 지어낸 자기위안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건 선명하게 슬퍼지는 것의 시작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3

최소한의 양심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는 어렵지만 부자가 오만하지 않기는 쉽다.`공자가 한 말이다. 신체 건강한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일까. 돈 없어 비굴하고 비참하고 불안하고 불편할 때일 것이다. 반면에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의 오만은 허영심에서 오는 자기 과시욕에 지나지 않으니 힘든 것과는 그리 상관이 없다. `허영`은 `비참`보다는 덜 심각한 감정이다. 따라서 부자가 오만에서 벗어나는 건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보다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이 가졌으면서 더 오만하고, 덜 가졌는데도 전혀 원망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왜 세상엔 이토록 착한 사람들이 많은지. 왜 한 편에선 저토록 양심 없는 사람들이 있는지. 가진 자들이 저들끼리 속이고 속으면 `그들만의 판`이려니 하면 그만이다. 한데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눈과 마음을 속이고 치졸하게 구는 걸 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작게는 너와 나의 인간관계에서 크게는 경제활동을 아우르는 기업의식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도 다양하다.가진 자들이 제 것 귀한 줄 아는 것 백만 배 이상으로 덜 가진 자들의 제 것은 소중하다. 덜 가진 자들은 원래 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작은 것 하나도 귀할 수밖에 없다. 덜 가진 자들이 순진하고 바보 같아서 가진 자들의 더티 플레이를 방관하는 건 아니다.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거다. 약자이기 때문에.법이 허용하는 안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사업주가 있다 치자. 어인 일인지 그는 사회사업과 기부에 관심이 많다. 그런 그가 자신이 헌신하는 종교 단체의 사회사업에 기부금을 냈다 치자. 그는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정말로 선한 사람이라면 사업주로서 먼저 자신의 직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쳐주었을 것이다. 저보다 훨씬 못한 이들을 짓밟아 얻은 돈으로 행한 선행은 칭송 받아 마땅한 걸까.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고 어른들이 말했다. 적어도 덜 가진 자들 앞에서 양심 찔리는 행동은 하지 말자. 종일토록 이런 화두에 매달렸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2

식구 모두의 배려

어쩌다 엄마께 전화하면 엄마는 올케언니 칭찬부터 한다. 언니가 얼마나 집안 대소사를 살뜰히 챙기며, 얼마나 자주 안부 전화를 걸어오며, 얼마나 형제들 간에 우애를 다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가를 조곤조곤 들려주신다. 엄마는 좋으시겠어요, 요즘 그런 며느리가 어디 있어요, 라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언니의 노고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올케언니에게 전화를 건다. 좋은 며느리가 되려하지 말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은 억지로 하지 말라고. 그런 내 충언(?)이 먹힐 리 없다. 사십년을 그렇게 살아온 언니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올케언니의 삶은 누가 보상해주나 하는 생각에 이르면 미안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엄마로서는 복 받은 노년을 보내는 거지만 그렇다고 올케언니의 정성에 박수만 칠 수도 없다. 가부장적 사고에서 비롯된 여성적 삶의 원칙들이 무조건 옳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여성의 개성은 권력이나 집단의 하위 개념일 때가 많았다. 더구나 이런 여성상은 여성 스스로 강화하는 면이 없지 않았는데, 그들은 스스로 도리와 헌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왔다.전통적 권위는 남성 또는 아버지 차지였고, 헌신은 여성 혹은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연히 효 이데올로기의 최전방 행동대원은 여자들 차지였다. 젊디젊은 스타가 `결혼 상대는 우리 부모에게 잘 할 수 있는 여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하기 때문`이라고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면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근성이 여전히 여성에게만 강요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여성을 한 집안의 효(孝) 대리인쯤으로 생각하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참아내지 않을 만큼 여성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긴 했다. 그렇다고 남녀평등이 보편화되었다거나 여성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고 교묘하게 선전하는 집단들에는 여전히 동의할 마음이 없다. 가족 집단에 대한 희생이나 배려는 여성만의 몫이 아니라, 식구 모두의 것이 되어야 온당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1

마왕과 신해철

슈베르트 가곡 `마왕`을 여러 버전으로 보며 듣는다. 애니메이션이 따르는 몇몇 성악가 버전부터 흑백 화면으로 된 피터 디스카우를 지나, 바리톤 최현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석을 접한다. 평소 좋아하던 가곡이긴 하지만 새삼 이 짧은 가곡 하나에 온몸과 마음을 빼앗긴다. 괴테의 시에 열여덟의 소년이었던 슈베르트가 곡을 붙였다. 셋잇단음표로 휘몰아치는 피아노 전주에 맞춰 노래가 이어지는데 성악가는 내레이터, 아버지, 아이, 마왕 등의 목소리를 차례로 연주한다. 폭풍우 휘몰아치는 밤 아픈 아들을 감싸 안고 집을 향해 말을 달리는 아버지. 꽃과 놀이와 소녀들이 있다며 아이에게 죽음의 세계로 유혹하는 마왕. 두려움에 떨며 마왕의 속삭임을 아버지에게 전하는 아들. 그것은 엷게 퍼진 안개 무리이며, 마른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림이며, 오래된 버드나무의 음울한 흔들림일 뿐이라며 아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 하지만 안마당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 품에서 아들은 죽어있었다.`마왕`을 들으며 신해철을 생각했다. 아니 그 때문에 다시 슈베르트의 마왕을 클릭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마왕` 별호는 그와 무척 잘 어울린다. 강렬한 울림의 그 이미지는 노래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했고, 정당한 이유 없이 개별자를 구속하는 것들에 반기를 들었다. 부패한 정치권이 도덕에 파격적인 유행가 가수들보다 더한 유해매체라고 일갈했으며, 부와 명성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세상을 바꿀 힘은 없어도 세상의 일부인 자신을 바꿀 힘은 있지 않겠느냐는 멋진 말도 남겼다.음악인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아티스트였지만, 논객일 때의 그도 더할 나위 없는 멋진 사나이였다.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음악적 열정과 사회적 패기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마왕. 그 영역 안으로 유혹할 어린 양들이 이리도 많은데 정작 그 자신이 먼저 먼 길을 떠나버렸다. 안개 무리이며,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이며, 버드나무의 흔들림인 모든 것들의 진실을 노래하고 품었던 그를 애도하는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0

검은 다이아몬드 문체

“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나는 작중 인물들의 내부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말할 때도 나는 일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계속 유지할 뿐이다.”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저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소설을 쓸 때 결코 인물 내부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은 옳다. 반면에 등장인물과 함께 슬픔에 빠지고 두려움에 떤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말처럼 보인다. 철저하게 외부적 시선을 유지하는 사람은 슬픔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떨게 될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감정적 시선에서 떨어져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슬픔이나 두려움을 다스리고 잠재워야 할 것인가.하지만 그녀의 대표작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나면 첫머리에 인용한 저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의 문장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하다. 묘한 것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한 그 문장들이 독자에게 건너가면 바늘 끝 같고, 손톱 같은 `콕콕 찌름`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벌목장에서 베이는 나무처럼 무뚝뚝한 문장들이 툭툭 넘어졌을 뿐인데, 그것을 목도한 독자는 손댈 수 없을 만큼 아린 통증을 품어야 한다.건조한 문투 덕분에 오히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매혹을 앓게 하는 그녀. 너무 아프면 아프다고 말 못하고, 너무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 잇지 못하는 원리와 같다고나 할까. 과장이나 과잉 없는 서술로 사건 많은 쌍둥이의 일생을 전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 감정선을 드러내는 그 어떤 묘사 없이, 짧고 단호한 직설로 뱉어내는 발화법. 그 속에서 처절한 절망의 노래를 느끼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어느 비평가가 그녀의 문체를 `검은 다이아몬드`에 비유했다는 말이 어쩜 이리 와닿는지. 처절하고 냉엄하고 허위적인 삶의 조각들을 불러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그녀의 방식에 뒤늦은 찬미가를 보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