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영의정·국무총리

서동훈(칼럼니스트)
등록일 2015-04-29 02:01 게재일 2015-04-29 19면
스크랩버튼
조선시대 영의정은 170명인데, 그 중 최장수 영의정은 황희. 그는 태종이 3남을 후계자로 세울 뜻을 품고 있을때 “장남 양녕대군을 올리셔야 합니다” 주장하다가 유배됐다. 세종은 정적(政敵)인 그를 불러들여 무려 18년이나 영상의 자리를 지키게 했다.

당시에는 `영의정의 권한`이 볼품 없었다. 좌의정은 이조, 예조, 병조판서를 겸했고, 우의정은 호조, 형조, 공조판서를 겸임했으나, 영의정은 서열만 높을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눈썹`과 같아서 자리는 제일 높은데 하는 역할이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황희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영의정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앞으로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함께 국사를 협의해서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라” 왕명에 의해 영의정의 역할이 만들어졌다. 모든 국사는 3공(公)이 관장하는 의정부에 일단 올라간 후 거기서 가부를 결정한 후 왕에 보고했고, 왕명은 의정부를 통해 6조에 하달됐다. 다만 세종은 이조의 인사권과 병조의 병권에 관한 사항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보토록했다. 권한의 절묘한 안배였다.

영의정 중에서 백성들이 가장 좋아했던 분이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사신 떠날때 장안의 백성들이 길거리가 터지도록 몰려나와 “편히 다녀오소서” 환송을 했는데, 이 장면을 본 사람이 상왕 태종이었다. 심온 영의정은 `인기가 너무 높은 죄`로 상왕에 의해 역모죄를 쓰고 숙청됐다. 그래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불행한 영의정`이란 말을 들었다.

조선조 초대 영의정은 경상도 성주 출신의 성산배씨 배극렴이었다. 위화도 회군을 주도하며 태조의 신망을 한몸에 받은 개국공신1등이었다. 그의 묘소는 충북 증평군 증편읍 송산리에 있고, 충북도 기념물 98호로 지정돼 있다. 이 전통을 이어 충청도 국무총리 한번 내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그곳 출신 여러 인물들이 청문회에서 낙마하거나, 간신히 국회를 통과하고도 중도 하차한다. 아무래도 살풀이 씻김굿이라도 한번 벌여야 할 모양이다.

/서동훈(칼럼니스트)

팔면경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