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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명은 우연의 산물

`총,균,쇠`는 1998년에 첫 출간되었다. 책이 나온 지 십오 년이 넘었는데도 스테디셀러를 넘어 여전히 베스트셀러 자리까지 지키고 있다. 700여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 이토록 관심을 끄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화를 곁들인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사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인류에 대한 진정성 깃든 충고 덕분이 아닐까. 너무 두꺼워 발췌독을 하는데도 흐름을 이해하기엔 무리가 없다. 한마디로 기존의 인종주의적 시각에 반하는, 문명 발전에 관한 새로운 보고서이다. 저자에 의하면 유라시아가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비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우연에 의해서다.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환경적 차이에 따라 인류 발전의 속도가 달라졌을 뿐이다. 지리적 여건이 좋고, 기후가 유리한 쪽에 곡물과 가축이 집중되었다. 그 우연 덕에 유라시아 사람들은 패권을 쥘 수 있었다. 결코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열등한 종족이라서 그들에게 당한 건 아니다. 특정 인종에게 유리한 유전자란 없다. 지리적 환경적 특성에 따라 인간 발달 정도가 달라졌을 뿐이다.총과 균과 쇠는 유럽인이 원주민들을 정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리적 혜택을 받아 가축과 곡식을 선점할 수 있었던 유럽인은 총이라는 살상무기로 원주민을 빠른 시간 안에 접수해버렸다. 또한 내성이 없는 원주민들에게 천연두라는 균을 옮겨 그들을 거의 초토화시켰다. 쇠로 만든 무기나 갑옷이 유럽인들에게는 있었지만 원주민들에게 무기로서의 철기 문화는 요원한 것이기만 했다.총, 균, 쇠로 무장하면 언젠가는 문명세계는 붕괴하게 될 것이다. 바느질과 농사로 대변되는 일만 삼천 년 전 정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문명사회보다 전통 사회에서 배울 게 많다는 것도 강조한다. 자연 자원을 남용하는 것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환경이란 우연이 우월을 낳았을 뿐 인간 자체에 우월이 있을 순 없다. 인류가 지나온 긴 시간 속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가 보인다. 단순해지고 겸허해지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을 게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14

문학 번역서 단상

잘 번역된 문학서는 창작품 못지않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다고 그 번역이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른 문화, 다른 환경에서 생산된 문학작품이 우리 정서나 문투에 꼭 맞게 옮겨지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들 문법으로는 허용되는 말이 우리말에 와서는 막히는 부분이 있고, 그들 풍습과 일상이 우리와 미묘하게 달라 텍스트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안나 카레니나`, `롤리타`, `위대한 개츠비` 등은 번역자에 따라 책의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 담백한 문체에 경제적인 문투를 담은 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은 산문체에다 설명적인 문투로 되어 있다. 또 어떤 책은 의역이 심해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번역서마다 개성이 있고 독자로서 호불호를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 번역서가 엉터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문 번역가 그 누구도 크고 작은 오류는 범한다. 문화와 언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인정한다면 같은 작품을 두고 번역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나무랄 일은 아니다.`이방인` 번역을 두고 논쟁이 한창이다. 새로운 번역서를 낸 출판사의 선전문구가 도발적이어서 수상쩍다.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나. 기존의 김화영 작품이 엉터리라는 논리에는 전혀 수긍할 수 없다. 부분적인 문장, 상황의 의미 해석, 특히 등장인물의 캐릭터 등이 잘못되었다고 새 번역자는 격앙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가 지적하는 오류는 그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된다. 이건 누구 번역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기존 번역이 낫고, 어떤 상황에서는 새로운 번역자의 의미 해석에 타당성이 있는 정도이다. 싸잡아 기존 번역이 공격당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새로운 번역서를 만나는 건 독자로서 유쾌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해당될 실수를 엉터리라고 매도하는데 동참하면서까지 새 작품을 응원하고 싶지는 않다. 번역서의 호불호를 견주는 건 독자의 몫이다. 출판사가 설레발 칠 일은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11

프루스트, 홍차, 마들렌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따른데다 내용은 방대하고 문체 또한 산만하다. 고만고만한 등장인물이 수시로 드나드는데다 문장은 접속사와 반점의 향연일 정도로 부담스럽다. 고전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정복하려 하지만 십여 권이 넘는 이 대하소설을 아직도 1, 2부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다 읽은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아마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 나오는, 마들렌느 과자를 홍차에 적셔 먹는 장면에서 독자로서의 호기심을 충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마들렌느가 어떤 과자일까, 하는 소설 외적인 호기심이 생긴 적이 있었다. 마침 만화로 된 책도 나왔기에 얼른 샀었다. 완간 소식이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마들렌느 과자를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작은 기쁨이었다. 평범한 조개 모양 과자 하나로도 우리는 잊고 지냈던 기억을 복원할 수 있다. 홍차에 찍은 마들렌느 과자, 그 향과 촉감에 주인공 마르셀은 불현듯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일요일 아침, 이모가 권하던 그 마들렌느 맛이 겹치면서 마르셀은 완전무결하게 제 어린 시절을 글로 복원하게 된다. 마들렌느라는 소박한 촉매제 하나가 위대한 소설을 탄생시킨 셈이다.“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는 작가의 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홍차 적신 마들렌느의 맛과 냄새와 촉감은 마르셀을 감미로운 행복감으로 몰아넣는다. 고립감을 느낄 정도의 극도의 희열감을 맛보게 해준다.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은 과자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홍차에 적신 과자가 뭔가를 일깨”웠다고 프루스트는 말한다. 이런 섬세한 감각의 영혼이라니.저마다의 감각에 겨운 봄꽃은 저리도 앞 다퉈 피고 지는데, 내 온몸과 마음에 숨어 있는 오감은 여전히 무디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10

비판의 방식

`비판이 견디기 힘든 이유는 그 비판 속에 비판자의 비난이 교묘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판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은 그 비판이 나의 행위가 아니라 행위하는 나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만일 그 비판이라는 것이 비난을 내포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과 염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공지영 소설의 `높고 푸른 사다리` 중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사람은 이성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실은 감정에 지배당할 때가 많다. 한 치 흐트러짐 없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막상 뚜껑을 열게 되면 한없이 흔들리기만 한다. 인간 존재의 바탕엔 용기와 관용뿐만 아니라 나약함과 비겁함이란 속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강직함과 너그러움을 동시에 지닌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곤 대개 우리는 나약함과 비겁함의 생활 패턴에 쉽게 길들여진다. 금세 후회하면서도 의지력은 약해지고 만다.이처럼 약점 많은 게 인간이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레 타인을 비판하거나 타인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공교롭게도 인간에게는 양심이나 염치라는 게 있다. 그러다 보니 비판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건강하고 온전한 의견일지라도 드러내놓고 상대를 향해 목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대개의 비난의 목소리가 에둘러서 오고 바람결에 감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타자에 대한 애정에 진정성이 있으려면 그 비판은 직접적일수록 좋고, 비판 자체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 백 마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뭐하나. 한 마디 에둘러서 오는 비난의 목소리에 그 사랑이 의심 받는데. 아무리 건전한 비판이라도 몇 번의 고개를 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처음의 알맹이는 온데간데없고 어이없는 인신공격이란 허울만 남게 된다.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자부하면 그 대상에 대한 비판은 삼가는 게 최선이다. 해야만 할 때는 에두르지 말고 정공법을 쓰는 게 좋다. 직접 말할 수 없는 모든 비판 속에는 그 사람에 대한 비난이라는 심술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09

백일장

봄소식과 더불어 곳곳에서 개최되는 백일장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우리 지역에서도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쇳물백일장이 지난 주말에 열렸다. 겨우내 갇힌 공간에서만 글을 써오던 일반 및 학생들에게 기분 좋은 나들이가 되었을 것이다. 글쓰기 대회를 왜 백일장이라고 부를까. 백일장(白日場)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1.국가나 단체에서, 글짓기를 장려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글짓기 대회. 2.조선 시대에, 각 지방에서 유생들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글짓기 시험을 실시하던 일. 글짓기 대회라는 것만은 확실한데 그것이 왜 백일장으로 불리는지는 사전 뜻으로는 불충분하다.뜻이 맞는 사람들이 주로 달밤에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시재를 견주어 보기도 하는 망월장(望月場)과 대조적인 의미로 대낮에 시재를 겨룬다 하여 백일장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불분명한 유래지만 일리는 있다. 오늘날의 백일장도 대부분 해가 뜬 이후에 시작해서 적어도 해지기 전에는 마감을 하지 않던가. 대낮에 경연을 펼침으로써 부담감도 줄이고 공정성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일(白日)이라 함은 `구름이 조금도 끼지 않은 맑은 날의 해`를 일컫는다. 그만큼 공정성과 투명성을 전제로 경연을 펼쳤다는 뜻일 게다.백일장은 벼슬길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아마추어끼리의 순수한 경연이었다. 과거 시험에 낙방한 사람과 과거 지망생의 명예욕을 위로하는 역할을 했기에 주로 지방에서 성행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백일장도 과거시험 못지않게 부정이 횡횡했다. 일자무식꾼이 베껴 쓰는가 하면, 대신 참가하거나 시험지를 바꾸는 예도 빈번했다. 참가자뿐만 아니라 문란하기는 심사자도 마찬가지였다. 수령의 자제와 기녀까지도 합세하여 엉터리 등수를 매기기도 하였다. 백일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오늘날에는 백일장의 본래 취지를 살려 국가나 여러 단체에서 글짓기 대회를 연다. 환한 대낮에 열리는 만큼 참가자나 심사자 모두 밝고 산뜻한 마음으로 서로의 글맛을 느끼는 봄날이 되었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08

2014 포항시 원북(One Book)

올해도 어김없이 원북 선정 위원회가 열렸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에 포항시 원북 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지역 문화 활동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어 가고 있다. 포항시는 2006년부터 `한 권의 책, 하나의 포항(One Book, One Pohang)`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 걸고 범시민 독서 운동을 펼쳐왔다. 시립도서관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한 권의 책을 그 해의 원북으로 선정하고 이를 선포한다. 각종 독서 활동 및 다양한 독서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의 독서 문화 함양에 기여하자는 것이 원북 행사의 취지이다. 2006년 고 박완서 작가의 `읽어버린 여행 가방`을 시작으로 `마당을 나온 암탉`, `귀신고래`, `엄마를 부탁해`, `덕혜옹주`, `아프니까 청춘이다`, `종이책 읽기를 권함`에 이어 지난해에는 `시 읽기 좋은 날`이 원북으로 선정되었다. 해마다 선정된 한 권의 책은 시민들의 독서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올해도 각계각층의 시민들은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추천 목록에 올렸다. 인문학 열풍을 실감하듯 여전히 인문학 관련 서적들이 인기를 끄는 가운데 소설 분야 책들도 그에 못지않은 지지와 관심을 얻었다.다(多)추천을 받은 동시에 범시민적 독서 운동 취지에 맞는 도서 몇 권이 최종 후보에 남았다. 그 어떤 것이 선정되어도 무방한 터라 한 권을 골라야 한다는 게 난감하기만 했다.난상토론 끝에 선정된 도서는 박범신 작가의 소설 `소금`이다. 아버지 부재의 현실을 통렬히 자각하고 그 시선을 독자에게 돌려 공감을 유도하는 작가의 진중한 시선이 선정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간 모성의 핍진한 희생에만 독자적 애정을 가졌던 이들이라면 이제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곡진한 삶 또한 재조명 받아 마땅한 것임을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느끼게도 되지 않을까.올해의 원북으로 선정된 `소금`이 부디 널리 퍼져 한 사람의 내면을 알맞게 절이고 나아가 시민 의식을 성숙시키는 그야말로 소금 같은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본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07

예술과 예술적 삶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정의에서 빠지지 않는 기본 요소는 `아름다움`이다. 한마디로 미적 탐색이 없는 예술의 본질은 무의미하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각에 꼬리를 물다 얻은,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에 대한 내 정의는 `진실로 아름다움이 없는 것이거나 혹은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개별자의 인식`이다. 집착이나 열망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일어나 밥 먹고 일하고 웃다가 허기지면 또 먹고 일하고 울다 잠자리에 드는 것, 이런 단순한 패턴을 일러 예술이라 하지는 않는다. 예술이 되려면 일상성이 개인의 고유한 내면 정서와 충돌해야 한다. 그 양상은 평범한 삶에 대한 염증, 도덕적 일탈, 평정을 넘어선 의식의 과잉 등의 행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예술은 도덕이나 선함과는 무관하다. 심미안에 눈 뜨면 추함과 아름다움엔 경계가 없고 행과 불행의 사슬도 실은 그 엮임에 경계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추함과 불행까지도 포괄하는 게 예술이다.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예술의 본질과 인간의 고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미주의에 대한 예찬과 동시에 윤리적 알레고리를 품고 있는 이 소설은 예술과 예술적 삶은 별개라는 것을 보여준다. 쾌락주의와 감각을 앞세워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삶의 위선을 질타한다. 그렇다고 주인공 도리언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하는 삶이 결코 최선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삶을 경계 없는 예술로 인식하고 개인적 감각만을 추구하던 도리언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제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가 젊음을 유지하고 그 대신 초상화가 늙어간다 해서 제 영혼의 충족까지를 보장 받는 건 아니다.도리언의 파멸 과정을 통해 와일드가 말하고자 한 것은 예술과 도덕은 무관하다는 것. 그럼에도 예술과 예술적 삶은 별개의 영역이란 것. 예술과 예술적 삶이 맞장 뜨는 그 자리엔 공허와 허무만이 가득하다는 것. 그렇지만 예술의 본질인 아름다움은 인간과 함께 영원하리라는 것. 예술과는 별개로 우리 삶 또한 나름 지속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04-04

생각을 잇지 않기

배르벨 바르데츠키는 상처 받은 영혼에 대한 위무의 대가로 불릴만하다. 현장에서 수집한 여러 예화로 인간이 대면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상처를 위로해주면서 명쾌한 답까지 제시해준다. 우리 일상은 상처의 연속이다. 물리적으로야 환희와 무탈함의 시간이 상처의 그것보다 길다. 하지만 그 속성 상 아무리 짧은 상처도 심리적으로는 뭉근한 지속성을 띈다. 종일토록 얻은 영광의 환희도 다음날이면 사라지기 쉽지만, 단 몇 초 간 입은 마음의 상처는 일 년이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 생각하고 고뇌하는 영혼에게 따라오는 필수불가결한 부산물이 상처이다. 상처에 부당한 상처와 온당한 상처가 있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예상치 못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바르데츠키 여사의 치유법을 잠시 빌려 오자. 젊은 여자가 수영장에 갔다. 옆에 있던 아줌마가 제 친구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수영장 입장권을 사지 않고 뒷문으로 몰래 들어온 사람이 있다고. 여자에게 곁눈질을 하는 걸로 봐서 여자 들으라고 한 소리다. 여자는 마음이 상한다. 맹세코 그런 적이 없으므로 아줌마에게 삿대질을 하며 따질까, 아니면 수영을 그만 두고 집에 와버릴까 고민한다.그러나 여자는 거기에서 멈춘다. 더 이상 아무 생각을 이어가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진정되고 화가 수그러든다. 다시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맞은편에서 헤엄쳐오는 아줌마에게 인사까지 건넬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와 친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있다. 여자는 마음 상한 원인을 아줌마의 잘못으로 돌려주기로 한다. 함부로 남을 의심한 건 여자가 아니라 아줌마였으니.바르데츠키 여사의 저서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에는 위무 받기 좋은 예시들이 나온다. 근거 없는 상처는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딱히 화를 내거나 속을 끓일 이유가 없다. 내 것 아니어야 할 상처에서 쉽게 벗어나는 길은 `생각을 잇지 않는 것`이다. 생각을 늘이는 건 근거 없는 상처를 대하는 가장 나쁜 방식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03

슬픔에 꽃불을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녁이 온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밤이 오고 겨울이 오고 봄이 온다. 너는 웃고 나도 웃고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숲에 이른 문장을 보리라. 몇 개의 문장을 더 쓰고 어둠이 오면.` 이준규 시인의`문장`(`네모`, 문학과 지성사) 전문이다. 이 짧은 산문시를 발견하는 순간 온몸으로 화르르 벚꽃이 피었다. 빠르게 퍼지는 술기운처럼 전신이 달아올랐다. 멀리 누워있던 그림자마저 제 심장에 펌프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문장을 벼리는 시인의 순간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문장으로 저녁을 기다리고 문장으로 밤을 지새우며 문장으로 겨울을 나고 문장으로 봄을 맞고 문장으로 웃음 강을 건너 문장으로 숲에 이르는 시인의 시간. 다시 저녁은 오고 그 순환되는 문장 속으로 내딛는 시인의 영혼.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옷깃에 묻은 얼룩 같은 허물을 탕감할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눈물로 국숫발을 삼키던 당신의 설움을 이해할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계단 앞 주춤하던 당신의 무릎 관절이 내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한 생애에 드리운 눈썹 밑의 슬픔을 읽어낼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내 무딘 눈동자가 놓친 당신 손끝의 피로를 만질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울분 서린 당신 연둣빛 스카프에 내 연민의 방점을 보탤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너무 빨리 피고 지는 저 봄꽃이 야속타는 당신의 혼잣말을 되뇔 수 있을까. 감춰둔 오금 밑 당신 슬픔과 내 슬픔이 같음을 눈 맞출 수 있을까. 저렇게 숲은 멀리 있는데.시인의 말처럼 삶은 들여다볼수록 슬픔만 남는다. 삶을 슬픔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몇 개의 문장을 쓰는 순간 저녁은 온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웃음 같은 봄을 맞으면 남는 건 문장이 아니라 몇몇의 슬픔이다. 몇 개의 문장을 지워야 섣불리 지나친 먼지 낀 시간들을 살릴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워야 기꺼이 껴안지 못한 슬픔의 영역에 꽃불을 놓을 수 있을까. 여전히 숲은 멀기만 한데./김살로메(소설가)

2014-04-02

말의 허용 정도

“군주가 아첨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사실대로 말해도 그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들의 존경심을 잃고 만다.” 마키아벨리도 군주, 아니 인간의 심리에 대해 어지간히 파악한 자였다. 현명한 리더는 제 약점을 맘껏 말해도 좋다고 주변인들을 안심 시킨다. 누군가 리더 자신의 허물에 대해 말한다면 요즘말로 쿨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 나아가 프로젝트 실패에 대한 리더로서의 책임을 물어 누군가 객관적이고 냉철한 논평을 한다 해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것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리더의 현명함은 여기까지다. 모든 약점과 온갖 실패에 대한 충언까지 감당할 수 있는 군주는 없다는 뜻이다. 세상 대부분의 CEO들이 왜 저마다의 근엄함으로 제 권위를 지키려 하는가를 보면 답이 나온다.따라서 마키아벨리의 저 명언은 이렇게 풀어 쓸 수 있다. 현명한 군주는 열린 마음이 준비 되어 있다. 그렇다고 제 명예심을 해칠 정도로 사람들의 솔직한 언행을 바라는 건 아니다. 존경 받고 있다는 자존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한다. 어디 군주만 그럴까. 세상 누구나 자의식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의견 또는 평가나 비난을 받아들인다. 상대가 발 들일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자신의 잣대만을 고집하는 이도 있으니 이 정도의 열린 마음만 있어도 모두 현명하다 할 수 있다.그렇다면 언행의 한계치는 누가 정하나. 현명한 사람 곁에 현명한 친구가 모인다는 전제하에 그것은 발언하는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 그들은 상대의 맘을 손상시키지 않는, 다시 말하면 서로의 자존에 폐가 되지 않는 정도의 진솔함이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고 있다. 타자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제 자존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아첨과 진솔함의 경계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말을 현명하게 부릴 줄 안다. 넘친다거나 모자란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군주가 그것을 알아채도록, 제 현명함의 한계치를 잘 활용할 줄 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01

속수(束脩)

스승을 처음 뵈올 때 존경의 뜻을 표하는 예를 `속수례((束脩禮)`라 한단다. “저희가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뵙기를 청합니다.” “내 학식이 부족하여 그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저어하네.” 학생은 스승에게 낮은 자세로 열심히 배울 것을 다짐하고, 스승은 제자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깨우침을 전할 것을 결심한다. 몇몇 초등학교에서 인성 교육 및 전통 문화 계승 차원에서 이런 속수례 의식을 경험케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봄꽃 소식만큼이나 반갑다. `속수`는 스승을 만나러 갈 때 인사 차 들고 가는 소박한 입학금 정도가 된다. 옛날 스승들에게 제도화된 수업료가 있었을 리 없다. 사마천의 `사기`의 `공자세가`에 의하면 공자는 제자를 가리지 않았다. 제자가 거의 삼천 명에 달했는데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는 않았다. 배우려고 하는 누구에게나 속수를 받는 것으로서 대신했다. 속수는 말린 고기 열 개를 묶은 것을 말한다. 가르침을 청하는 최소한의 예의로 육포 한 묶음을 삼은 셈이다.유교 문화를 계승한 우리 선조들도 당연히 배우고 가르칠 때 속수례를 행했다. 속수의 예를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여겼다. 성균관에 입학하는 왕세자도 속수례를 엄격히 지켰다고 선조 때의 기록에 나와 있다. 실제 육포의 형식을 취하고 아니고를 떠나 서로의 예를 행하는 자체에는 진정성이 짙게 배어 있었을 것이다.현대는 스승과 제자가 오롯이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가기는 어려운 시대이다. 안회를 비롯한 여러 제자처럼 스승만 바라보며 한 길을 갈 여건도 못 된다. 다사로워야 할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입시다, 스펙이다, 자격증이다 등등의 현실 앞에서 딱딱한 교육자와 학습자의 관계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스승을 찬미하고 존경하는 일조차 쑥스럽고 어색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살면서 존경심이 드는 스승을 얼마나 많이 만나게 되던가. 나이와 연륜에 상관없이 도처에서 스승을 만난다. 따뜻한 밥 한 그릇, 향긋한 차 한 잔의 현대판 속수로 내 맘을 전하고픈 스승들이 생각나는 봄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31

매력적이거나 지루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깔끔하게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온밤을 지새워도 어떤 상황이나 경험에 꼭 맞는 말을 얻는데 실패하곤 한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 같은 사람은 다르다. 촌철살인의 대가답게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로 가득 찬 어록을 숱하게 남겼다. 가령 이런 한마디는 어떤가. “사람을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 짓는 것은 불합리하다. 사람은 매력적이거나, 지루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예를 들면 어떤 모임은 기다려진다. 자연스레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또 어떤 모임은 기다려지기는커녕 참석해도 별 재미가 없다. 소위 분위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누가 만드나? 사람이 만든다. 그때의 사람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서의 구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 식으로 매력적인 사람, 지루한 사람으로 말할 수 있겠다.매력적인 사람 곁에 있으면 웃음이 끊이질 않고 엔도르핀이 솟는다. 반면 지루한 사람 곁에 있으면 불편하고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어진다. 이 말을 솔직하게 하면 이렇게 된다. 내가 타인에게 매혹적인 사람이 되면 모임 분위기가 좋게 느껴지고, 내가 지루한 사람으로 비치면 모임 분위기는 엉망으로 다가온다. 다행히 이런 감정은 상대적이다. 내게 매혹적인 사람도 다른 이에게는 지루할 수 있으며, 내게 지루한 사람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혹적으로 보이기도 한다.정서적 궁합이라는 게 있다. 궁합이 맞으면 재미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시큰둥해진다. 곰곰 생각하면 궁합이란 것도 결국 내 맘에 달렸다. 타자의 눈을 내가 관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자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쩌면 가장 정직한 내 본연의 모습일 수도 있다. 누구든지 웃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람 앞에서 매력을 느낀다. 무표정하고, 배려심이 없는데다, 미련하기까지 하면 지루함을 느낀다. 두 범주로만 한정했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인간 유형엔 온 우주가 들어 있는 셈이다. 매혹적이긴 어려워도 지루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노력 없이 어려운 게 얻어질 때가 있던가. 오늘도 매진할 뿐./김살로메(소설가)

2014-03-28

파리의 날개처럼

`대동소이(大同小異)`란 말이 나오는 기사를 읽다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거의 같다, 라는 뜻으로 쓰이는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뭘까? 작게 보면 다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같다는 뜻일까, 아니면 크게 보면 같을 수도 있지만 작게 보면 다르다는 뜻일까. 원래 같다는 것을 말하려 했을까. 혹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숨은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것이었다. 출처를 찾아보니`장자(莊子)`의`천하편(天下篇)`이다. 친구인 혜시(惠施)의 논리를 장자가 전하는 형식이다. `크게 보면 같다가도 작게 보면 다르니 이것을 소동이(小同異)라 하고, 만물은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이것을 대동이(大同異)라 한다.`고 되어 있다. `만물을 넓고 차별 없이 사랑하면 천지도 하나가 된다.`라는 말로 귀결된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혜시는 자기가 천하를 달관한 자라고 자부하여, 이로써 여러 사람을 가르쳤다.`라며 장자가 의견을 단 부분이었다. 그 뉘앙스에는 어쩐지 친구인 혜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스며있다. 그렇다고 우정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 둘의 관계가 친구이자 논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혜시의 무덤 앞을 지나던 장자가 시종에게 말했다. `초나라 사람이 자기 코끝에 흰 흙을 파리 날개처럼 얇게 바르고 석수장이에게 그것을 깎아내게 했다.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도끼를 휘둘러도 믿고 꼼짝 않고 있었으니 흙은 다 깎이고 코도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은 임금도 자기에게 그 솜씨를 보여 달라고 했다. 석수장이는 그 사람이 죽어 이제는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나도 석수장이처럼 혜시가 죽은 뒤로는 함께 할 이가 없구나.`학문적으로는 티격태격했지만 우정에서는 지기(知己)였기에 장자는 혜시더러 `자기가 천하를 달관한 자라고 자부하여`라며 냉소적 의견을 덧붙일 수도 있었으리라. 토 달아도 좋으니, 내 코에 앉은 파리 날개처럼 얇은 흙을 깎아 줄, 믿을 만한 도끼 자루를 휘두를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 받을 일일런가./김살로메(소설가)

2014-03-27

바람이 분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옆집 꼬마는 낙서를 한다. 옆집 꼬마가 낙서를 할 때 건넛집 아저씨는 조깅을 한다. 건넛집 아저씨가 조깅을 할 때 산 너머 할머니는 상추씨를 뿌린다. 산 너머 할머니가 상추씨를 뿌릴 때 이웃 나라 아주머니는 빵을 굽는다. 이웃나라 아주머니가 빵을 구울 때 더 먼 나라의 어린 소년은 쓰러져 있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바람이 분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유아용 그림인데다 쉬운 글씨마저 거의 없다고 어린이용 그림책은 아니다. 그런 책일수록 어른에게 맞춤한 경우가 많다. 가슴이 먹먹하고, 명치끝이 아려 도리어 어린 아이는 읽지 말았으면 하는 그림책 중의 하나가 하세가와 요시후미의 `내가 라면을 먹을 때`이다.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다. 내가 라면 국물을 마시며 예능 프로그램 앞에서 희희낙락할 때 먼 이웃나라 허기진 어린이는 한길에 쓰러져 있다. 웃음소리에 취하는 그 순간에는 아픈 이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멀리 이웃나라까지 갈 것도 없다. 내가 떠들고 마시는 동안 누군가는 약을 못 사, 방값을 못 내, 라면 한 봉지를 못 구해 생을 마감한다. 혼자가 아니라 온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꿈을 먹고 살기에도 모자랄 어린이들에게 가슴 아픈 현실을 알리는 건 불편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영원히 몰라야 하는 현실도 없다. 부조리한 세계를 먼저 경험한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조심스레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모두 나와 같지 않다는 사실, 평범한 행복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점진적으로 말해줄 필요가 있다. 충분히 교감이 된 후라면 이 책은 아이들에게 아주 좋은 이웃 이해의 마당이 되어 준다.`그 맞은편 나라의 산 너머 나라 남자아이는 쓰러져 있다. 바람이 분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화룡점정의 이 짧은 몇 마디가 여운을 남긴다. 그림 속 쓰러진 검은 나무 같은 아이를 가만 들여다본다. 세상은 기쁨과 슬픔이, 행과 불행이 함께 하는 자리인 것을. 바람이 분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26

자유롭고 엄숙하게

황현산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읽다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형식은 자유로워야하지만 그것으로 추구하는 내용은 엄숙해야 한다. 말을 바꾸자면 정치는 자유로워야 하고 문화는 엄숙해야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것이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아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누군가 그것도 유명한 저자가 말해줄 때의 희열이랄까, 그런 기분을 느꼈다. 앞 내용을 뚝 잘라버리고 가져오는 바람에 저자의 의도가 완전하게 전달되는 건 아니다. 요컨대, 부질없는 형식에 집착해서 남는 게 무언인가. 형식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기본이 된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자기 엄숙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이런 요지의 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문화가 엄숙해야 한다`라는 말은 `철학이(내면이) 엄숙해야 한다`라는 말로 돌려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런 예는 어떨까? 자유분방하기 이를 데 없는 가난한 시인은 영진 설비 외상값 4만원을 갖다 주라는 아내의 심부름을 두 번이나 어긴다. 한 번은 빗길을 피해 들어간 슈퍼에서 `병맥주`를 마셔버렸고, 또 한 번은 꽃집 앞을 지나다가 `자스민 한 그루`를 사버렸다. 영진설비 아저씨의 `거친 몇 마디`가 아내에게 쏟아질 때 `아이의 고운 눈썹`이나 쳐다보게 되는 것, 이러한 한 때도 있을 수 있는 게 삶이다. 그렇다고 그 시인이 대책 없는 영혼을 지닌 건 아니다. 그들의 내면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엄숙주의로 자기 검열을 강화한다. 고결한 시인들이 갖는 특성이기도 하다.형식에서 자유롭고 내면은 고결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살 만하다. 하지만 현실은 정치와 집단은 형식을 강요하고, 저마다의 삶의 척도는 무분별하게 가지치기를 한다. 정치가 융통성을 발휘하고, 개별자가 자기 염결을 발휘하는 세상이라야 온당할 텐데 우리에게 그것은 거꾸로 된 것만 같다. 규제하고 억압하고 지시하는 현실 앞에서 개인은 착해질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박철 시인은 그런 상황을 비틀기 위해 `내겐 아주 멀고 먼 /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25

늙어도 청춘

`꽃보다 할배`는 여타 예능 프로그램이 주는 재미 그 이상의 것을 시청자에게 안겨 준다. 먹먹한 감동을 주는 것도 모자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유도한다. 제작진이 처음부터 거기까지 의도하진 않았으리라. 출연자들의 연륜과 개성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언행이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리 나쁘지 않은 정서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노구를 이끌고 배낭여행에 도전하는 자체도 대단한 일인데, 개별자 하나하나가 드러내는 캐릭터가 그토록 흥미로울 수가 없다. 어딜 가나 있음직한 투정 부리고 불끈하는 이, 무한 호기심에다 보기 좋은 웃음으로 제 낙관을 몸소 보여주는 이, 로맨티스트에다 티 나지 않게 타인을 배려하는 이, 나이를 잊은 듯 끓어오르는 책임감과 에너지로 직진 본능을 실천하는 이. 모두가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고유한 캐릭터들이다. 각자 다른 개성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어울리는 그들을 보면서 시청자 자신도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자가 훈련을 하게 된다.타자를 제 입맛에 맞도록 고칠 수는 없다. 제 스스로도 변하기 어려운데 제 기준에 타인이 맞춰주기를 바라는 건 평생 해결하지 못하는 숙제가 되고 만다. 모든 타자는 자신이 마련한 기준의 행동 패턴을 따른다. 내가 마련한 그 기준과 다르다고 타자가 틀린 건 아니다. 다만 다를 뿐이다. 그들은 이미 이러한 기본 생활 철학을 다 알고 여행길에 오른 것 같았다.특히 이순재 어른은 고대로 본받고 싶을 정도로 매번 명쾌한 어록을 생산한다.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서 대우 받으려 하고 어른 행세하면 늙어 버리는 거고, 난 아직도 한다 하면 되는 거예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쭉 가면 되는 거예요. 우리 나이쯤 되면 언제 어떻게 될 수 있다는 건 잊어버리고 주어진 대로 당장 할 일을 하는 거지요. 끝을 생각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거지요.`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이 먹어도 의식이 주저앉지 않도록, 나이 먹더라도 대접 받지 않도록 늘 연습하는 것, 이것이 젊게 사는 비법이렷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24

가족의 의미

가족은 상처이자 위안이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에겐 오늘이 상처의 시간이었다면 내일은 위안 모드가 되곤 한다. 혼인과 핏줄로 맺어진 가족은 그 어떤 조직보다 허물없고 가깝다. 계산이 필요 없는 편안한 관계이다 보니 느슨하다 못해 함부로 대하기도 한다. 부부 끼리는 간섭을 하게 되고, 부모 자식 간에는 잔소리와 반항이 교차한다. 타인을 대할 때의 조심성과 긴장이 사라지니 상처는 필연적이다. 가족 간의 상처는 물론 타인과의 그것에 비하면 오래 가지는 않는다. 가족이 주는 위안이 상처보다 더 큰 보상을 주기 때문이다. 대개 아무리 친한 타자라도 가족만큼 큰 위안을 주지는 못한다. 한마디로 가족은 한 구성원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리 나쁘지 않은 요물이다. 상처와 위안의 근원인 가족은 보듬어 함께 갈 동지이다. 따라서 가족은 사랑의 대상은 될지언정 존경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연민이자 나를 비추는 거울인 가족을 존경한다고 말하면 어쩐지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 덜 편한 사이라서 아직 그만큼의 거리감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니.한 노부인이 인도 여행을 하고 싶어 했다. 여행사에서는 노구를 이끌고 인도까지 가는 건 무리라고 말렸다. 그래도 고집을 피워 여행길에 올랐다. 아스람에서 위대한 스승을 알현하려니 줄이 너무 길었다. 사흘이나 걸리는 그 시간을 부인은 기다리겠다고 했다. 드디어 성스러운 문 앞에 도달했다. 스승과는 세 마디 이상을 나눌 수는 없다고 했다. 노부인도 그러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스승 앞에 엎드리는 동안 노부인은 가장 성스러운 자에게 팔짱을 낀 채 말했다.“여보, 그만 집에 가자.”가족과 존경과는 생래적으로 궁합이 맞지 않다. 밖에서 카리스마 넘치고 근엄한 사람도 집안에 들어오면 인간적인 가족 구성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몽테뉴도 말하지 않았던가. 하인과 가족에게 존경 받는 주인은 거의 없다고. 가족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와 연민과 사랑의 대상이어야 온당하다. 가족에게 존경을 바라는 건 어리석거나 우둔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21

무지를 자각하기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는 역사 이래 인간의 영원한 숙제였다. 지금 하는 고민을 그 옛날에도 했고, 그 옛날의 고뇌가 지금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인간의 철학적 사유는 시간과는 무관한 영원 테제이다. 사람이라면 옳은 삶에 대해 나름 끊임없이 고뇌한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게 문제였다. 그는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신탁까지 받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결코 지혜 자체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자각한 건 오직 자신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하나였다. 다른 이들보다 그가 지혜롭다는 신탁의 의미를 그는 이렇게 해석했다. 자신이 뛰어난 게 아니라,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있다는 것에서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은 면에서 지혜로운 것이라고.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쉬우면서도 어렵다. 소크라테스의 전언대로라면`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음.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조차 내 무지에서 온 것임.` 이런 자세야말로 지혜로운 방법이다. 쉬워 보이지만 그 실천은 얼마나 어려운가. 삶의 진정한 가치는 시험을 통해서 완성된다. 상처를 주고받아봐야 상처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고, 많이 아파본 자라야 아픔의 실체를 제대로 증언할 수 있다. 그렇게 축적된 다양한 경험치는 각자의 철학적 바탕이 된다.무지의 자각이 깨우는 종소리에 당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소리가 꼭 크게 울리는 것도 아니다. 하룻밤 새 붉은 꽃잎을 터뜨리는 명자나무의 숨소리일 때도 있고, 내 큰 목소리 앞을 끊는 누군가의 잔잔한 충고의 미소일 때도 있다. 다 갖춰 완벽한 것들은 그저 피어나고 나지막이 속삭일 뿐이다. 호들갑스럽지 않아도 그 향기, 그 목소리에 주변은 귀 기울인다. 현상적 욕망이 아니라 오직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던 소크라테스의 성찰 앞에서 당황스럽기만 한 봄날이다. 빈 수레 끈다고 곳간에 쌀가마 쌓이지 않는다. 매 순간 무지를 자각하는 마음 심지만은 놓지 말아야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20

천성대로

급히 먹는 밥에 체한다. 내가 그 짝이다. 뭐든지 서두른다. 신중하게 이것저것 알아보거나 차분하게 요모조모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게으르면 느긋하기라도 할 것이지, 게으른데다 급하기만 하니 일상생활에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뒷일을 생각지 않은 채 일단 저질러놓고 수습을 못해 허둥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최대의 약점이다. 누군가 친구의 메일 주소를 물어왔다. 그 누군가도 친구를 잘 아는 터라 별 생각 없이 친구의 메일 주소를 가르쳐줬다. 하지만 친구에게 그 누군가가 불편한 메시지를 보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당연히 일차적 책임은 메일 주소를 가르쳐준 내게 있다. 한 번만 돌려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누군가는 친구의 전화번호를 아니까 직접 메일 주소를 물어 볼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의심하는 여유만 가졌어도 타인의 메일 주소를 함부로 가르쳐주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알게 되었으리라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그런 변명은 그야말로 자기 위안용에 지나지 않는다.위의 예처럼 급하다 보니 실수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느긋한 사람들이 부러운 것도 아니다. 이게 더 스스로를 화나게 한다. 느긋하거나 여유 있는 모습을 보면 본받고 싶은 게 아니라 답답하다는 생각이 먼저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아마 급한 성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급한 성격의 특징은 약속을 잘 지키는데다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한다. 게다가 추진력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장점도 급해서 낭패를 부르는 경우 앞에서는 자랑거리조차 못 된다. 역지사지하면 느긋하거나 차분한 사람들은 급한 사람들이 얼마나 성가시게 보일 것인가.물론 급하거나 느긋하거나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각자 장단점이 있다. 다만 내 가진 약점이 도드라진 순간에는 그 성정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다. 급한 그 특징조차 제 정체성의 한 일면이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성정이라면 달래가며 인정하는 수밖에./김살로메(소설가)

2014-03-19

획일성과 다양성

그 많던 어린 천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예술계나 수학계 등 특수 분야에서 우리나라만큼 그 재기를 일찍 드러내는 아이들도 없다. 전문가들이 놀랄 정도로 우리에겐 미국이나 유럽 아이들에 비해 한 분야에 재능을 떨치는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 재능이 언제까지나 보장되지 않는다는 게 우리 현실이기도 하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언젠가 한 칼럼에서 첼리스트 양성원이 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이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던 동양적인 가치 기준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뿌리 깊은 유교 문화는 조직 문화를 낳고, 조직은 위계질서를 중요시하고 그 질서는 개인의 튀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겸손과 절제가 미덕으로 칭송 받는다. 자신도 모르게 이런 문화적 습성은 재능 있는 아이들의 DNA 속으로도 침투된다. 치열한 자기 확신을 가지는 것에 앞서 획일화된 사고가 먼저 머릿속에 주입된다. 될 성 부른 떡잎에 햇빛 보다 그늘이 먼저 와서 가려버린다. 어느 순간 그늘이 햇빛인 줄 알고 받아들이게 된다.좋은 예로 중학교만 들어가도 교칙이란 것에 지배를 받는다. 교칙을 위반하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나아가 사회나 국가에도 방해가 된다고 배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 교칙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은 온갖`하지마라`투성이로 가득하다. 그 내용은 실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수준이 아니라 통제해야 하는 입장에서 저 편하고자 획일화를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와 군사 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윗선에서 편리하기만 한 그런 관습과 규범이 규칙이나 도덕이 되었을 뿐인데, 길들여지다 보니 반박하는 것조차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된다.획일화를 따르는 건 모범적인 것이요, 다양화를 시도하는 건 죄악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하는 조직 문화야말로 개별자의 자긍심을 숨죽게 한다. 그 많던 어린 천재들이 획일성의 그늘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제 개성과 재능을 포기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