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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거짓말 단상

거짓말에 대한 연구 결과는 다양하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남자는 하루 평균 6회, 여자는 3회 정도 거짓말을 한단다. 다른 연구에 의하면 남녀 하루 평균 200회씩 거짓말을 한다고 되어 있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한 시간에 13회, 5분에 한 번 꼴이다. 두 예의 공통점은 어쨌거나 인간은 거짓말을 자주 한다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거짓말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거짓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하얀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이란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얀 거짓말은 선의를 전제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적극적으로 배려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경우이다. 새빨간 거짓말은 타자를 해하기 위한 것이다. 타자를 흠집 내기 위한 명백한 저의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이 외에도 내 멋대로 두 개의 거짓말에 색깔을 입혀 보았다. 이름하여 초록 거짓말, 이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단순한 거짓말을 말한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거짓말을 말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을 때 `초상집에 간다`거나 `손님이 방문했다`고 둘러 대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런 거짓말은 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 심각할 게 없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는 것이니 딱히 나쁘다고 할 순 없다. 또 하나는 푸른 거짓말이다. 처세의 거짓말인데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약자가 강자에게, 을이 갑에게 해야만 하는 거짓말이다.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자괴감이 묻어나는, 씁쓸하고 슬픈 느낌의 상황이라서 푸른 거짓말로 이름 붙여 보았다.현상이 있는 곳에 말이 있고 그 말에는 필연으로 거짓이 뒤따른다. 누구나 진실만을 말하며 살 수는 없다. 페르소나라는 적당한 가면을 쓰는 것이 사회적 예의이듯, 적재적소의 색깔에 맞게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는 게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물론 타인을 해하기 위한 거짓말인 새빨간 거짓말만은 안 된다. 잠 잘 때도 일할 때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굴레. 기왕 해야 하는 거짓말이라면 타자를 배려하는 하얀 거짓말 횟수를 늘이는 수밖에!/김살로메(소설가)

2014-05-30

이해의 폭 넓히기

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은 타자의 약점까지 잘 보듬는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 중의 하나는 양면성을 지녔다는 거다. 이 양면성 때문에 사유가 생겨났고, 철학이 발전했다고 나는 믿는다. 아무리 담백하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현상 너머의 이면, 결과 이전의 동기, 겉 안의 속 등 여러 이중적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다. 양면성이란 갈림길에서 서성여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번민하고 갈등하는 것은 인간 심리의 최대 호사인 동시에 최대 장벽이다. 번민하는 가운데 사유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전자에 속하고, 갈등의 골이 깊어져 영혼이 피폐해지는 건 후자에 속한다. 어떤 모임에서 자기 자신이 완벽하다고 소개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무슨 일이든지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고, 남이 하는 것보다 자신이 하는 게 속이 편하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은연중에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를 건다. 완벽을 추구하니 믿을 만한 결과물을 내놓을 거라고. 하지만 기획한 일이 반환점을 돌 무렵이면 그 사람의 말이 흰소리임을 알게 된다. 자신이 말한 완벽함과는 먼 실행 능력을 지닌 그냥 보통 사람일 뿐이다.그의 태도에 실망한, 역시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은 나 같은 이는 이렇게 말한다. “뭐야. 완벽하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그렇지만 선천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많거나, 후천적으로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학습한 이라면 보통 사람의 저런 반응에 이렇게 변호한다. “그 사람 요즘 만성두통에 시달리잖아. 완벽하게 일하기엔 무리지.” 이 현명한 답을 낸 사람 앞에서 보통 사람들은 두 가지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가 완벽하다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완벽해지고 싶다는 제 열망을 나타낸 것이라는 것과,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변호하는 사람의 진중한 마음결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하는 사실.“인간은 그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가 말했다.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내가 이해하고 있는 인간 그 이상의 인간을 영접한다는 뜨끔한 깨우침./김살로메(소설가)

2014-05-29

화에 대하여

나를 화나게 하는 `누군가`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 화의 근원은 오직 나일 뿐이다. 우리는 대개 화가 나는 건 상대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는 잘못이 없고, 내게는 별 문제가 없는데 `너`때문에 화가 난다고 생각한다. 내 화의 원인은 `누군가`여야만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몰아가고 싶어 한다. 예를 들면 `중2병`에 단단히 걸린 자녀가 있다 치자. 말은 퉁명스럽고 행동은 거칠기만 한 아이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는커녕 눈 한 번 마주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가슴에는 얼음팩을 안고 등에는 화롯불을 짊어진, 냉기와 열기가 공존하는 사춘기의 아이를 보면서 처음에는 망연자실하다가 나중에는 화가 난다. 화의 대상도 처음에는 딸이었다가 나중에는 아이의 친구에게로 옮겨 간다. 아이가 자꾸 엇나가는 것은 아이 친구 탓이라고 결론짓는다. 싹싹하던 아이가 샛길로 빠지는 건 친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더 화가 난다.이런 추론 과정이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일련의 과정에서 화가 난 것은 어쩌면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합리화 때문이라는 사실. `나를 화나게 하는 누군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맘 깊은 곳에서는 인정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다.내가 화가 나는 건 말썽 피우는 아이도, 말썽의 도가니에 빠지게 한 아이 친구 탓도 아니다. 화나게 하는 상황에서 책임을 전가할 구실이 필요했을 뿐, 화가 난 건 오직 스스로 때문이다.우리는 뭔가 화나는 일이 생기면 일단 그 화의 원인을 나 아닌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일단 주변을 탓하고 타자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렇지만 화의 근원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애오라지 내 안에 있다.화는 인간이 지닌 보편적 감정 중의 하나이다. 화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 화의 원인을 밖으로 돌리느냐 스스로에게 귀결시키느냐는 화의 본질을 생각하면 그 답이 보인다. 타자의 자극으로 발현되는 화는 결국 나의 실존을 점검하는 좋은 잣대가 되어 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28

견해 차이

잘 알려졌다시피 카뮈와 사르트르는 말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문학적인 견해 차이보다는 정치적 입장이 더 큰 이유였다. 둘의 신뢰적 관계는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기인하는 일상의 폭력에 대한 두 철학자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사르트르는 구체화된 폭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체계적으로 관찰했다. 인간 해방과 사회 변화에 필요하다면 폭력의 기치도 높이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에 카뮈는 폭력으로 발생할 수 있는 파괴적이고 부패적인 결과까지를 인식하고자 했다. 더구나 그 같은 폭력이 자신의 고국인 알제리의 상황이라고 봤을 때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폭력을 거부함으로써 폭력에 용감하게 맞서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차이는 본토의 부르주아 출신인 사르트르와 식민지 알제리 노동자 집안 출신인 카뮈가 맞닥뜨려야 할 태생적 운명이기도 했다.카뮈는 타협을 싫어했다. 누군가 이의제기를 하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이 되었다. 딴 데로 시선을 돌리거나 추상적 분노의 감정을 느끼곤 했다. 부분적으로 화해의 기미가 있었다 해도 둘 사이에는 미지근한 관계 이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그 둘의 입장은 너무 달라져 있었다. 카뮈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르트르를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사르트르는 부르주아적 가치들을 점차 옹호하기 시작한 카뮈를 오해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어느새 사르트르에게 카뮈는 `완전히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카뮈보다 여덟 살 많았던 사르트르는 카뮈보다 20년을 더 살았다. 그들 논쟁의 가치 판단을 떠나 인간적 정리에서 카뮈 편을 들어주고 싶을 때는 있다. 더 오래 산 사람은 그만큼 말할 기회 또는 변명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먼저 간 카뮈를 연민에 겨워할 필요까지는 없다. 남은 사르트르는 카뮈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는 않았다. 카뮈에 대한 추도사에서 충분한 경의를 표하고자 한 사르트르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27

설명 없이, 과장 없이

정서적 글쓰기는 논리적인 글쓰기와 그 방법에서 약간은 다르다. 논리적 추론을 포기한 자리에 심리적 비약은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다. 공감을 구한다는 면에서는 둘의 쓰기 방법은 같은 목표점을 지향한다. 하지만 정서적 글쓰기, 특히 그것이 소설이라면 재미와 더불어 `내적 찌름`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서늘하거나 짜릿하거나 눈물겹거나 등등의 정서적 충격은 논리성과 관련 있는 게 아니라 심리적 기제와 관계있다. 따라서 문장을 생략하고, 비약하고, 건너뛰어도 독자에게 주는 소설의 내적 찌름은 약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강렬한 느낌으로 전해질 때가 있다. 시시콜콜 설명하고, 친절하게 근거를 대다보면 정작 말하고자 하는 감흥이 반감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집 `대성당`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표제작인 대성당에는 하찮고 성가시게 여겼던 아내의 친구인 맹인과의 진심어린 교감을 경험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맹인에게는 윙크나 고갯짓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걸 통찰하게 된 주인공 나는 `보지 못해 세상을 완전하게 믿을 수만은 없는` 맹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 매개체는 카테드랄 즉 대성당이다. 맹인의 손과 화자의 손이 딱 달라붙어 대성당의 위용을 그려낼 때, 그 이미지를 가장 진실 되게 전달하기 위해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아 본다. 맹인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화자는 생각한다.불필요한 설명 없이 과장된 선동 없이 작가는 이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얼핏 보면 하찮게 보이고 눈에 띄지 않는 여러 상황들을 예리하고 섬세한 작가적 시각으로 짚어내 근원적인 삶의 철학으로 격상시켜 놓는다. 충격적인 요법도 폭발적인 구성력도 전제하지 않지만 서사 하나하나에 화가의 붓질 같은 현장성도 살아있다. 진실한 사진 몇 컷 앞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두 친구가 있다 치자. 사진을 찍은 주인공은 당연히 레이먼드 카버이고, 그 앞에서 삶의 방향성을 얘기하는 두 사람은 레이먼드 카버 식 은유를 이해하는 독자에 비유할 수 있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26

우리라는 결속

`작은 패거리`에 속하려면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그건 그룹이 은연중에 내세우는 수칙 가운데 하나로, 그 해에 베르뒤랭 부인으로부터 후원을 받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부인 말처럼 `그토록 바그너를 멋지게 연주할 수는 없다!` 거나, 플랑테나 루빈슈타인`저리 가라 싶게` 연주한다는 평가에 따라야만 했고, 또 코타르 박사가 내린 진단이 포탱 박사를 능가한다는 점을 수긍해야만 했다. - 마르셀 프루스트의 `스완의 사랑` 도입부에 나오는 말이다. 프루스트가 활동했던 20세기 초까지 귀족 문화가 건재했던 프랑스 상류 사회에서는 살롱 모임이 유행했다. 위에 나오는 베르뒤랭 같은 유한마담이 주로 파티의 주관자였는데, 장소도 제공하고, 물주도 되면서, 참석자까지 선별했다. 시쳇말로 `오야붕 마음대로` 마담 역할을 수행했다. 교양 있는 모임도 많았지만 패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그룹에서는 은근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곤 했던 곳이 살롱의 마담 자리였다.놓인 숟가락만 차지하면 되는 손님 입장에서는 베르뒤랭이 주도하는 패거리 분위기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부인의 드넓은 드레스 폭 한 자락을 잡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맘 깊이 안도하게 된다. 사람이 모이면 으레 편을 만들게 되는데, 권력이든 돈이든 그 무엇이든 가진 자 위주로 재편된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이 결속감을 가지려면 거기에 걸맞은 적이 있어야 한다. 합치고 뭉치는 이면에는 `우리가 남이가`란 정서가 따라 붙기 때문이다. 결속을 위해서라면 없는 적도 만들어 내야 한다. 적이 없으면 뭉칠 이유가 없다. `끼리끼리` 정서가 유지되는 최고의 비결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남`이 되기 두려운 우리는 오늘도 베르뒤랭 부인이 주최한 테이블에 앉아 그저 그런 피아니스트를 향해 휘파람 곁들인 환호를 보내고, 별 하자 없는 포탱 박사의 진단서에 이러쿵저러쿵 의문을 단다. `건전한 남`보다 `음험한 우리`가 주는 결속의 쾌감을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양심을 팔아 산 그 쾌락이 돌아서면 고대 환멸로 남을 것을 알면서도./김살로메(소설가)

2014-05-23

말의 외연

공자의 언행 및 주변 문객과의 대화를 수록한 책이 `공자가어`이다. 거기의 한 장면. 초나라 공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활을 잃어버렸다. 신하들이 급히 나서 활을 찾으려 했다. 왕은 도리어 느긋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만둬라. 어차피 초나라 사람이 주울 것 아니냐. 훗날 이 일화를 들은 공자의 반응은 이랬다. 왕이 한 말에서 `초나라`를 뺐으면 좋았을 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사람이 주울 것이다, 라고 했다면 더 훌륭했을 걸.잃어버린 활을 대하는 초나라 공왕은 그 자세만으로도 칭송받을 만하다. 평소 공왕이 지녔던 백성에 대한 기본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좋은 임금은 언제나 자신을 넘어선다.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만 - 국가의 안위를 위해, 백성의 사기진작을 위해 그래서도 안 되지만 - 자신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백성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줄 안다. 왕 없는 백성은 있을 수 있지만, 백성 없는 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화살에 대한 공왕의 일화는 작은 깨달음을 준다.하지만 이 가르침의 크기도 공자의 덧붙임 말에 비하면 약소하다. 자신이 다스리는 초나라 사람들에게만 호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자의 그릇은 초나라 사람을 넘어선 `사람` 자체를 다 포괄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 있는 기록 하나. 공자의 말에 이은 노자의 주석은 이러했다. 공자의 말에서 `사람`을 빼는 게 더 좋겠다고. 잃으면 줍는다. 노자는 나라와 사람을 뛰어 넘어 천지우주를 보듬은 것이다.말은 곧 사람이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는 도구이다. 한 마디 말로도 그 사람이 드러난다. 나아가 실천적 행동으로 그 말이 증명하는 사람이라면 온전히 신뢰를 얻는다. 큰 사람은 넓게 말하고 크게 아우른다. 아무리 정의를 외쳐도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면 잘 말한다고 할 수 없다. 내 것을 위해, 내 앞의 이익을 위해 큰 소리를 내는 것보다 전체를 위해, 모두의 화합을 위해 낮은 목소리로 조근거리는 것이 훨씬 나은 말의 사용법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22

차이를 기뻐하기

삶의 철학이 담백하면 자기 긍정 지수도 높다. 대개 천성이 밝고 명랑한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앞뒤 재는 것이 없고, 이것저것 따지려하지도 않는다. 부정적인 면보다는 타자의 긍정적인 면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약점을 훑는 일보다 좋은 점을 먼저 발견해낸다. 언제나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한다. 비도적인 것이 아니고, 악행과 거리를 두기만 한다면 그 어떤 것과도 친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깨어 있는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 곁에 있으면 인간사 갈등도 피할 수 있을 것 같고, 괜한 흰소리 같은 자기검열도 필요치 않게 될 것만 같다. 긍정지수가 높은 이들은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는 선천적 센스가 장착된 사람들이다. 새치름한 자만심도 분주한 이기심도 없는 그들 곁에 있으면 착하게 사는 게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일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건전한(?) 방식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하여 누군가 제 삶의 리듬에 끼어들거나, 섣부른 충고라도 하게 되면 그것을 잔소리로 받아들인다. 치명적인 실수나 기본적인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사안인데도,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며 자기 식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면 가족이라 할지라도 부담을 느낀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있어도 가치관이란 게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가치관은 평생을 통해 시나브로 내 안으로 스며든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그 어떤 방해꾼이 나타나더라도 자신이 가진 장점인 천성의 착함을 급격하게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악행을 일삼는 이가 제 기질을 하루아침에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삶의 철학이 담백한 이들은 타자가 아닌 자신에 솔직하다. 상대방을 존중하며 꼬아서 행동하지도 않는다. 실수는 하되 그것을 인정하고 바로 고치려고 노력한다. 말하기 전에 먼저 듣기를 즐기고, 약속한 것은 핑계 없이 지키려한다. 그런 사람들은 타자와의 차이를 받아들인다. 진심으로 그 차이를 기뻐하는 자들이다. 그들처럼 될 수 없다면 그들 반만이라도 따라잡자, 스스로에게 다짐해본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21

시간의 상대성

하루하루가 바삐 돌아간다. 벌써 올해의 절반이 지나가려 한다. 이렇게 쓰는 내 마음이야말로 시간의 노예라는 증거다. 시간을 느긋하게 대하고 있었다면 `올해의 절반이 지나려면 멀었네. 이 정도면 괜찮아. 뭔가 해야 할 시간이 아직은 충분한데.` 이런 맘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게 본심이다 보니 저런 긍정의 태도가 나올 리 없다. 대개의 사람들이 시간에 내몰리며 살아간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도 확고한 목표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시간에 휘둘려 허둥대는 것만은 분명한 이 아이러니.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제대로 부릴 줄 아는, 확신 서린 자기 관리법이 대견하게 보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시간을 부릴 줄 안다고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시간 관리를 철저하게 할수록 가장 확실한 시간의 노예가 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한 시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강박이 시간을 시간 그대로 놔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그 아까운 시간에 뭔가를 프로그램화하고 스스로 만족도를 얻어야 한다는 압박을 자초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시간을 제대로 부린다 해도 그것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될 뿐이다. 거기엔 즐기는 시간이 없고, 해결해야 할 시간만 남는다. 잘하는 자 즐기는 자만 못한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시간 없다고 말하는 건 진짜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기화해서 즐길 제대로 된 시간`을 찾지 못한 자기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미녀에게 구애할 때는 한 시간이 일초처럼 느껴지고 뜨거운 철판에 앉아 있을 때는 일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상대성이다”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시간의 상대성은 시간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데서 출발한다. 시간 없다고 징징 대기에 앞서 시간을 자유롭게 풀었다 조였다 하는 마음 여유부터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당장 달라지기는 힘들겠지만./김살로메(소설가)

2014-05-20

인권 수난 시대

문명은 발달하고 문화는 확장 되어간다. 지구촌 한마당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니 편 내 편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게 현대 사회이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세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늘 변화가 요구된다. 거기에 맞춰 지적·물적 토대 역시 날로 풍성해진다.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허울 좋은 꽃일 뿐이다. 풍요의 노래가 넘쳐날수록 환희의 축포가 터질수록 그 이면에 인권 유린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인권 유린은 자연 재해 앞에서 인재 앞에서 사고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일어난다. 불가항력의 산사태로 생겨난 주검들, 뒤집어져가는 여객선 안에서 고통으로 끝내 생을 마감한 영혼들, 납치와 폭력 앞에 고스란히 숨죽일 수밖에 없는 어린 여학생들. 어쩜 그리 인권이란 보호의 보자기는 약자와 여성들만을 잘도 알고 피해 가는지.실시간으로 중계해주는 지구촌 뉴스를 대하다 보면 우리 인류의 미래가 밝기만을 바라는 건 지나친 희망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수단에서는 개종 및 배교를 했다는 이유로 임신 중인 여성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삼일 간의 개종 시간을 부여했는데도 이슬람교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교수형에 처해 마땅하다는 논리다. 기독교 남성과 결혼한 여동생이 배교했다며 오빠가 당국에 고발하고 처벌을 원했다. 이슬람 율법 샤리아에 따르면 아버지가 무슬림이면 자식인 딸도 같은 종교여야 한다. 나이지리아의 무장 단체 보코 하람의 여학생 단체 납치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우울한 얘기들만 들려오니 망연자실해질 뿐이다. 삼백여 명에 이르는 어린 여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열망과 힘이 없었다는 두 가지 이유만으로 죄 없이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있다.인권 침해는 약자들이 그 표적의 대상이 된다. 가진 자들보다는 없는 자들에게, 당당한 자들보다는 소심한 이들에게,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에게 수난의 화살이 꽂힌다. 가진 것 없고 힘없다고 인권 또한 없는 건 아닌데 왜 이런 일이 되풀이 되는지 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19

운세의 심리학

신문이나 잡지 한 귀퉁이를 보면 `오늘의 운세`라는 것이 있다. 한 수 더 떠 요즘은 전화 한 통에 사주나 운세를 봐준다는 광고가 실릴 정도이다. 사주나 운세 등에 관한 기사나 광고 등이 예삿일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거기에 의존한다는 말도 된다. 우리 전통 문화의 토양이 사주나 운세 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도 이런 현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운세나 혈액형으로 보는 성격 유형 등에 나오는 서술 내용은 사실 변별력이 거의 없다. 대개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이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 한다.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특징을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여기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학생들에게 각각의 성격 테스트를 한 뒤, 결과와는 상관없이 똑같은 내용의 결과지를 나누어준다. 그것을 모르는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테스트 결과가 자신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대답한다. 사람에게 있는 보편적 특성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각종 점술은 바넘 효과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불안한 심리 상태의 내방자는 이미 상담자가 들려주는 얘기를 믿을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상태에서 막연하고 일반적인 특성이나 확률적으로 높은 사항을 묘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특징이 있다는 사실은 인식할 겨를이 없고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만다. 더구나 그런 보편적 얘기들이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좋은 것들이라면 그것을 정당화하는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운세 서비스나 점술 등에 의지하는 게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합리적 대안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한 현대인들은 자신을 맡기고 조력을 구할 만한 데가 없다. 따라서 유명 철학관이니 족집게 점집이니를 찾아다니는 우리들 불안의 행보도 바넘 효과의 진실을 인식하는 정도 선이라면 굳이 말릴 이유가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16

기억이라는 고통

“아침에 내가 사나운 바람을 피해 실험실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내 옆에 한 친구가 등장한다. 내가 휴식을 취하는 순간마다 나타나던 친구다.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자의식과잉이란 파도에 휩쓸리면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다. 던적스럽게 달라붙는 오염된 해초 같은 일상의 찌꺼기, 시도 때도 없이 증식하는 감염된 치어 같은 잡념들. 스스로를 괴롭히는 그 물결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쓸 수 있다. 자의식의 바다에서 눈물콧물 범벅인 채 가쁜 숨을 내쉬기만 하면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흔들리되 평정심을 유지할 것, 힘들어도 유머를 잃지 않을 것, 연민을 품되 객관적 시선을 확보할 것. -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이 세 가지로 정의해보았다.아우슈비츠에 수용된 레비는 운이 좋았다. 화학 전공자였기에 죽음의 가스실 대신 실험실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다른 유대인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살아남기에 유리한 조건을 지녔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기록했다. 악몽 같은 수용소의 기억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고,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끝내 살아남았고 그 끔찍한 기억의 조각들을 기록 문학으로 남겼다.홀로코스트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그는 무조건 분노하거나 적개심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저 갇힌 자들의 운명에 대해 동지적 연민으로 관찰하고 묘사했다. 인간 심연 깊숙한 본질에 대해 사색하고 통찰했다. 극한 상황에서 얼음 칼 같은 문장을 조각한 프리모 레비의 문장을 보면서 절망한다. 서늘한 칼날이 심장을 파고드는 순간 피톨이 뛰쳐나와 수만 송이 장미꽃으로 피어오르는 이 느낌. 차디찬 칼날로 벼린 기억의 고통을 수만 송이 장미꽃으로 피워내는 레비의 힘, 자의식을 제대로 제어한 그의 문장으로 내 오월의 허기를 채우는 중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15

흘려보내기

살다 보면 많은 일을 겪는다. 서로 다른 개성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회라는 터전을 가꿔 나간다. 추구하는 게 천차만별이니 사는 방식도 제 각각이다. 그렇다고 삶의 원칙이 변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개성의 끓는 온도가 다르고, 가치관의 방향이 갈리는 지점이 있다 해도 놓치지 않아야 할 삶의 기본 태도는 있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그것이다. 사정이 절박한 사내가 부동산 계약 건 약속을 잡았다. 그나마 마지막 남은 밭뙈기를 처분해야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계신 노모의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다. 생업까지 마다하고 먼 길을 돌아 약속 장소에 갔다. 그런데 전국을 돌며 취미 삼아 땅을 접수한다는 매수자가 나타나질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을 경우, 보편적 정서를 가진 이라면 어떻게 하는가? 미리 연락을 해 양해를 구하는 게 도리이다. 약속은 지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잘못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약속 때문에 상대가 놓치게 될 기회비용을 빼앗는 무례는 범하지 않아야 한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연락조차 하지 않은 것은 절박한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소위 `갑질`을 하며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사람에게는 그 사안이 별 것 아닌 게 될지 모르지만 당하는 사내로서는 심적·물적 손실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거칠 게 없는 이로선 그것이 단순한 사안으로 보이는지 모르지만 약자인 사내로서는 그 상황이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들다.누구에게는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이 다른 누구에게는 심각하게 와 닿는 것들이 얼마이던가. 그 복잡미묘한 감정을 우리는 상처라고 부른다. 상대적 약자들이 거치는 필연의 징검다리 상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오늘도 여린 영혼들은 힐링의 말씀을 찾아 길을 나선다. 웬만한 것은 흐르는 강물에 흘려 보내버려라. 섣불렀던 어제의 바람도, 잠시 기대했던 오늘의 희망도 애초에 내 것이 아닌 것이라면 과감히 저 강물에 흘려보내자. 서운함을 떨치지 못하는 건 흐르는 강물을 붙잡아 썩게 하는 것과 같으니./김살로메(소설가)

2014-05-14

흔들리지 않는 지침서

주대환의 신간 `좌파 논어`는 술술 읽힌다. 논어를 해체해 저자의 입맛에 맞게 재편했다. 498장 모두를 해석한 게 아니라 149장만을 골라서 해석했다. 저자의 그간 행보에 어울리게 전통적 해석과는 사뭇 다른 진보적 시각의 해석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기록에 남아있는 공자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난 시각을 견지하는 건 아니다. 조금은 알고 있는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과 학자로서의 자세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고 있어 금세 읽힌다.저자가 안내하는 것처럼 공자는 당대 사람들에게 존경과 추앙만 받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절대적 인품을 보유해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배신도 당하고 비난도 받았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처를 받기도 했다. 험한 꼴을 자초하기도 하고 멸시도 당했다. 정치판에 기웃대다 비웃음을 사기도 했고 관계 맺기에 서툴러 헛발질도 일삼았다. 한마디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보를 한 이가 공자이다.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살이의 본질이 바뀐 건 아니다. 따라서 공자의 일상적 삶의 생각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공자가 위대한 것은 훌륭한 인품을 지녀서가 아니라 그가 지향하는 가치관이 시대를 떠나 보편타당한 깊이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을 꾸리는 건 성현들이나 나나 같은데, 그들은 자기 성찰적 사유를 남기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시간만 축낸다. 우리가 성현들을 존경하는 건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소리`를 제대로 내기 때문이다. 공자 또한 그런 좋은 예이다.가장 보수적인 `논어`를 가장 진보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작가의 독창적 시도가 맘에 든다. 논어가 일반 독자에게 학문적 깊이를 강요하는 수단이 될 이유는 없다. 작가의 말대로 논어는 연대의 언어이다. 공자는 당을 만들었다. 인과 예가 그 강령이고 진성당원으로는 군자가 있다. 서로 의지하고 격려해야 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끼리 지켜야 할 인예(仁禮)의 지침서가 논어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13

사랑 없이는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70년대 말 유행했던 `모모`라는 노래의 시작 부분이다. 패기만만한 대학생이 부른데다 반복되는 멜로디와 철학적인 가사, 거기다 제목부터 이국적인 느낌이라 당시 젊은이들에게 꽤나 인기 있었던 노래다. 정확한 의미를 모르면서도 이 노래를 곧잘 흥얼거렸던 그때의 기억이 난다. 이 노랫말의 하이라이트는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란 부분이다. `모모`는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동명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프랑스 작가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두 소설 다 모모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서로 다른 캐릭터이다. 전자의 모모는 여자아이 이름이며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면, 후자에서의 모모는 남자 아이 이름이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당시 유행하던 이 노래는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따온 것일까, 에밀 아자르의 모모를 말하는 것일까. 노래가 유행하던 당시는 막연히 책 제목과 같은 모모에서 빌려왔거니 여겼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고, 책도 읽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가사에 `시계바늘`과 `사랑`이란 낱말이 같이 등장하다 보니 모모의 정체가 헛갈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주제 가사에 해당하는 부분을 보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모모라는 걸 알 수 있다. 소설 초반,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느냐고 모모가 묻는다. 할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고개를 숙인다.소설 후반부에 가면 모모가 다시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사람이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느냐고. 그러면서 모모 스스로 대답한다.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참 기쁨으로 할아버지 얼굴은 환해진다. 사랑을 부정했던 할아버지에게 모모가 사랑을 일깨워준 것. 남은 생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모는 결코 철부지가 아니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5-12

엘제의 선택

그림 형제 민담집 중에 `영리한 엘제`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리한 딸 엘제를 결혼시키려 하는 남자에게 한스라는 청년이 나타난다. 엘제의 영리함을 전제로 청혼하자 아내까지 거든다. `저 애는 골목에 바람이 부는 것을 볼 수 있고, 파리가 기침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맥주 심부름을 하러 지하실에 간 엘제는 머리 위 벽에 걸린 곡괭이를 보고 슬피 운다. 한스와 결혼 뒤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가 맥주 심부름을 왔다가 곡괭이가 떨어져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이들이 `어쩜 이다지도 영리한 엘제일까!`하고 동조한다. 한스와 결혼한 뒤에도 엘제 식 영리함은 발휘된다. 죽이 식을까 염려 되어 일하는 것보다 죽을 먼저 먹고, 곡식 거두는 것보다는 배가 부르니 잠을 먼저 자버린다. 결코 영리하지 않은 엘제에 실망한 한스는 방울 달린 새잡이 그물을 잠자는 엘제 주변에 친다. 잠에서 깬 엘제는 어리둥절해진다. `난 나일까, 아닐까?`를 고민하며 방울 소리 울린 채 집으로 달려간다.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스에게 집안에 엘제가 있냐고 물어본다. 한스는 태연히 그렇다고 답한다. “그럼 난 내가 아니구나.” 놀란 엘제는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방울소리만 듣고도 사람들은 문을 닫아건다. 결국 엘제는 마을 밖으로 뛰쳐나간다.이 이야기의 첫 문장은 `옛날 어떤 남자에게 영리한 엘제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다. 엘제가 주인공인데 `어떤 남자`인 아버지가 이야기의 주체이다. 한마디로 남성적 시각으로 엘제를 바라본다. 엘제는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욕망과 거기에 동조한 엄마, 또 다른 아버지인 한스의 눈으로 본 엘제가 있을 뿐이다.엘제는 영리했을까? 동화나 민담의 일반적 결말을 따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가면을 벗어 던지고, 외롭지만 당당한 자신만의 길을 선택했다고 믿고 싶다. 남성적 욕망의 올가미에 걸려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의 발상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김살로메(소설가)

2014-05-09

너무 쉬운 효도법

엄마가 아는 최고의 회는 붕장어회이다. 젊은 날 부산 이모네서 먹은 첫 회가 소위 `아나고`였고 추억과 함께 버무려진 그 맛을 오래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다른 회를 먹어보지 않은 엄마만의 기준에 아나고야말로 으뜸 회 맛이 되는 셈이다. 뼈를 발라내 부드러워진 붕장어를 탈수기에 돌려 초고추장에 버무려 야채에 싸서 먹으면 천하일미가 따로 없단다. 회 종류도 잘 모르고, 각각의 회 맛도 구분할 줄 모르는 나는 엄마의 그 서민적 미감을 그저 `익숙한 것에 대한 찬양` 정도로 치부하곤 한다. 다만 한 대상의 본질이 어떠한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엄마의 아나고회`를 통해서 깨칠 뿐이다. 한 주체가 애정을 가지는 것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당사자에겐 충분한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이다.연휴를 맞이하여 엄마한테 들렀다. 효도하는데 창의성을 발휘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어쩜 해마다 그리 똑 같은 매뉴얼의 효도법만 떠오르는지. 출발 전, 시장에 왔다며 뭘 드시고 싶으냐는 내 전화에 엄마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나고 회 한 접시면 된다고 했다. 이웃들과 나눠 드실 요량이다. 생선회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데 그것만 찾느냐고 핀잔을 해보지만 엄마의 맛과 추억은 요지부동이다.친구분들이랑 마루에서 윷놀이를 하다말고 엄마는 우리를 맞았다. 앉은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얼른 시댁에 가서 효도하란다. 당신은 건강하고 이웃과 재미나게 지내니 거동이 당신보다는 불편한 시어머니를 챙기란다. 건강하다고 저렇게 큰소리치는 엄마도 실은 성당에 갈 때 지팡이는 필수고, 서너 번은 쉬어야 도착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이 나이에 큰 병 없고, 자식 우애 있고, 정 낼 이웃이 있으니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용돈으로 드린 몇 푼의 절반을 한사코 아이들에게 돌려주신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대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드신다. 울컥해지는 걸 참으며 나는 아나고 회 다 식겠다,고 창밖에다 대고 냅다 소리나 지른다. 깊은 손사래가 있는 모성 앞에서 흔한 아나고 회 같은 효도법이라니!/김살로메(소설가)

2014-05-08

풍경의 우호성

우리는 보는 대로 느끼고 경험한 대로 생각한다. 따라서 누군가 무엇을 보고 느끼고 기록한 것이 다 진실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진실이 아니라고 그 느낌의 진정성까지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특히 모든 이국적 시선은 진실과는 별개로 신선한 시각이 될 수는 있다. 펄 벅 여사는 우리나라를 무한 애정의 시각으로 바라본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작가의 장편 `살아있는 갈대`는 그 좋은 예이다. 구한말에서 해방될 때까지 한국의 근대사를 살아간 4대를 그리고 있는데 당시 우리 정서를 이해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1960년대 초 취재 차 우리나라를 방문한 작가의 에피소드 한 자락이 자못 흥미롭다.여사는 지프를 타고 경주 안강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황혼녘 지게에 볏단을 가득 진 농부가 보이는데, 볏가리를 잔뜩 실은 소달구지를 끌고 묵묵히 들길을 가더란다. 미국인 눈으로 봤을 땐 지게를 지기는커녕 소달구지에 올라타 채찍을 휘둘러야 상식적인 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농부는 소와 짐을 나눈 채 나란히 들길을 가고 있으니 여사 눈에는 무척 신기하게 보였다.여사는 그 한 장면을 두고 `고상한 국민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격찬까지 한다. 실은 그 목가적 풍경이 `고상한 국민적 정서`와 그리 큰 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드넓은 땅에다 도로 사정이 좋은 그들 입장에서는 마차에다 곡식과 사람이 동시에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달릴 수 있다. 하지만 말 달구지도 아니고 소달구지인데다 도로 사정도 좋지 않은 우리 입장에서는 볏짐을 하나라도 더 옮기기 위해서 농부도 지게를 질 수밖에 없다. 거창하게 자연이나 동물과 공생하겠다는 취지에서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맞는 행동 패턴을 취했을 뿐이다. 그것이 작가의 눈에 신선하게 비춰졌을 뿐이다.`마차(carriage)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소달구지(oxcart) 풍경`을 보고 낭만적 우호성으로 읽어 내리는 것. 문학이나 예술이 과장된 희망이나 과도한 서정을 조장해서는 안 되겠지만 가끔은 이런 무조건적 따스한 눈길이 싫지는 않다. 모두 지쳐 있는 요즘이라면 더더욱./김살로메(소설가)

2014-05-07

빨간 셔츠와 갈색 바지

망망대해, 외항선이 파도를 헤치며 나아간다. 해적선 한 척이 나타나 그 배를 포위한다. 선원들이 허둥댈 때 선장이 일등 항해사에게 명령을 내린다. 위엄을 잃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라고 말한다. 빨간 셔츠를 입은 선장은 선원들과 힘을 합쳐 배에 오르려는 해적들에 맞선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선원들이 생기긴 했지만 무사히 해적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며칠 뒤 망루에 있던 파수꾼이 이번엔 두 척의 해적선이 나타났다고 외친다. 공포에 질린 선원들은 몸을 웅크려 숨을 곳만 찾았다. 선장이 예의 위엄을 갖춘 채 소리쳤다. “내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 저번에 비해 사상자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날 밤 갑판에 나온 선장과 선원들은 별을 바라보며 승리를 자축했다. 존경에 찬 낯빛으로 누군가 선장에게 물었다. “왜 빨간 셔츠를 입으시는 겁니까?” 선장만이 지을 수 있는 위엄한 표정으로 그가 답했다. “빨간색 셔츠를 입으면 부상으로 피를 흘려도 들키지 않는다. 그러면 너희도 두려움 없이 싸움을 할 수 있지 않느냐.” 선원들은 선장에 대한 자신들의 신뢰가 헛되지 않은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다음날 새벽 이번엔 해적선이 떼거지로 몰려왔다. 모두 열 척이었다. 선원들은 당황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겐 `빨간 셔츠`의 용감한 선장이 있지 않은가. 침착하게 선장의 지시만 기다렸다. 드디어 선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갈색 바지를 가지고 오라!”비교적 평화 또는 약간의 위험 상태에서는 누구나 본심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진실로 다급할 때 그 본심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약하고 비겁하며 위선에 가득 찬 경우라면 저부터 살기 위해 갈색 바지를 찾을 것이고, 원래 강하고 정의로우며 참된 길을 도모하는 경우라면 끝까지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고 명할 것이다. 갈색 바지를 숨기고 있으면서 빨간 셔츠를 잘도 말하는 곳, 뼈아픈 참사 이면을 들여다보면 곳곳이 이런 현상들로 얽혀 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인 걸 어쩌란 말이냐./김살로메(소설가)

2014-05-02

언어의 파시즘

온 국민을 탈진 상태로 몰아넣는 날들이 지나고 있다. 야속하고 야속하다. 배가 가라앉기 직전까지 절망적인 예감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아이들이었다. 생기발랄한 목소리가 담긴 아이들 동영상이 마지막 편지처럼 매스컴에 소개된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구조 헬기 소리가 들리자, 아이들은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서로를 격려했다. 선생님의 안부를 걱정하고, 애써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 무서운 시간을 견디려했다. 그것이 지상으로 보내는 마지막 소식이 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파도 파도 의문만 남고, 봐도 봐도 가슴만 아프다.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도 진정되질 않는다. 어디서 이 모든 잘못이 시작된 걸까. 우리 안에 깃든 저마다의 파시즘이 이런 총체적 난국을 자초했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이것저것 생략하고 권위주의적이고도 전체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총집합체를 파시즘이라 쳐두자. 달리 말하면 개별자의 개성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모든 체제는 파시즘에 해당한다. 나아가 상하 구별, 관료 시스템, 예절 강요, 상명 하달 등의 의식은 모두 파시즘의 곁가지들이다. 이것들이 크나큰 위급 상황에서 제 구실을 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위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제나 안전 불감증에다 복지부동이고, 책임 떠넘기기와 뒷북일 뿐이다. 파시즘의 전형적 행태가 지속되어 왔고, 이것은 또 다른 징후의 예고로 작동할 뿐이다.파시즘은 언어로 구체화된다. 언어는 체제를 유지하고 규범적 인간을 만드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는 도구 중의 하나이다. 체제에 순응하게 하고, 실수를 조롱하게 하며, 경직된 분위기로서 질서를 유지하게 유도한다. 모든 길들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한다. 그것을 잘 아는 책임자나 리더일수록 언어의 책임감을 느껴야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리더가 무책임으로 수수방관할 때 파시즘에 길들여진 개별자는 유연한 사고를 방해 받는다. 언어가 무의식을 지배할 만큼 파시즘적 언사들에 민중은 그만큼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권력 앞에 개인이 깨어 있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김살로메(소설가)

2014-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