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있는 늑대 한두 마리가 약한 천 마리의 토끼 무리를 조종한다. 그게 세상이다. 실체는 없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는 억압 조직체 `콤바인`. 그 행동대장인 늑대가 이끄는 고만고만한 토끼 조직원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불합리와 불의가 횡횡하고, 정직과 정의가 실종된 세계가 펼쳐져도 `토끼`로서 늑대에게 할 수 있는 무난한 처세는 순종일 뿐이다. 적극적 저항을 하지 않는 이유? 힘도 없고, 귀찮기도 하고, 절실하지도 않고, 이대로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누군가가 나타나 저 무소불위의 늑대를 응징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호기롭게 나타난 토끼는 애석하게도 희생양의 수순을 밟기 마련이다. 절대 질서에 반항하다 결국은 뇌전두엽을 절제 당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맥머피처럼.
대개의 우리는 불의를 보면 꾹 참는다. 승산 없는 명백한 싸움에서 보통의 토끼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서 저항하다 끝내 파국을 맞는 그들은 진 게임을 한 것일까? 불합리나 불의에 항거한 그들이 남긴 꿀 덕에 우리는 이나마 달게 산다. 인류 전체로 보아 그 희생이 헛되지 않았으니 이긴 게임이 아닐까.
여전히 크든 작든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용감한 토끼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보고 `나댄다`며 주제넘은 훈수를 둘 수는 없다. 체면 깎아가며 나댄 그들이 피운 꽃술에, 입술 디밀어 꿀물 빨아먹는 것은 비겁한 우리가 아니었던가. 깡충깡충 지금도 분주히 뛰어다닐 그들 토끼에게 필요한 것은 훈수가 아니라 응원이다. 나대다 죽은 맥머피 덕에 별생각 없던 브롬든이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