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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병엔 얼음 같은 맘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10-01 02:01 게재일 2014-10-0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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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오신다, 맞춤하게 내린다. 주차된 차 위로 물기 서린 누런 잎들이 떨어진다. 무성했던 벚나무 가로수도 연못 속 푸르렀던 연잎도, 저 먼 우주의 한 줌 먼지가 되기 위해 성급히 내려앉고 있다. 이 비 그치면 더 비워 넓어지려는, 그러나 어딘지 쓸쓸해져가는 물상들의 춤사위가 넘쳐나리라. 청명하고 공활한 하늘이 그 고립된 자유를 드높이고 위무해주리라. 그때 문득 잊고 지낸 이름 하나 불러내 저 높고 환한 허공에다 새겨 넣어도 좋으리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라고 대시인조차 허락한 계절이질 않은가.

당나라 시인 왕창령(王昌齡)이 지방관으로 은거하고 있을 때 친구 신점(辛漸)이 찾아와 하룻밤 머물렀다. 낙양으로 떠나는 신점을 부용루에서 송별하며 왕창령이 시를 읊었다. 이름하여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 `찬 비 강 따라 밤새 오나라로 들고, 그대 보내는 새벽 초나라 산들이 외롭구나. 낙양 벗들 내 소식 묻거들랑, 한 조각 얼음 같은 맘 옥항아리에 있다 전해주게.`

마지막 일곱 마디 `일편빙심재옥호`(一片氷心在玉壺)가 독자의 애를 끊는다. 가을 정서와 딱 맞아 떨어지는 시구다. 일편단심이 열정과 뜨거움의 절개라면 일편빙심은 냉정과 차가움의 의지이다. 피처럼 들끓는 마음도 좋지만 얼음처럼 투명하게 가라앉는 마음도 그 진정성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얼음 같은 마음만 해도 깨끗한데, 그것을 투명한 옥항아리에 담았으니 얼마나 더 하자 없을 것인가.

강직한 마음 때문에 중앙의 부름을 받지 못한 채, 한직에 밀려나 은거했던 왕창령. 마음만은 거리낄 것 없었던 시인이 부른 깨끗하고 당당한 노래. 세상을 향한 불변의 지조와 영원한 우정을 묘사해 줄 말로 `얼음 같은 맘을 옥항아리에 담는` 것보다 나은 게 있을까. 투명함 속의 투명함, 이중의 자기 확신을 선포하는 시인의 절창 앞에 결점 많은 일상을 엮어가는 스스로가 부끄럽기만 하다. 가슴을 파고드는 옛 시 한 편 앞에서, 투명하게 깊어가는 가을이 서러우면서도 반갑기도 한 것이었다.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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