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기에 물건을 싸서 꾸린 뭉치`가 보따리이다. 사실 보따리의 이미지는 볼썽사납거나 추레한 느낌만 있는 게 아니다. 전통과 품위가 있는 자리에 보따리는 필수였다. 함을 들고 날 때도 선물을 주고받을 때도 보따리를 꾸린 채였지, 맨살 그대로의 물건을 드러내는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최대의 정성 깃든 포장`이 보따리인 셈이다. 보자기가 품위 있는 짐 꾸리기에만 머물지 않고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그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 온 겨레의 포장법인 보따리가 우아함과 추레함을 아우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산 사는 할머니 한 분이 보따리 두 개를 들고 서성이는 걸 경찰이 발견하고 딸과 만나게 해드렸다는 소식이 뜬다. 슬리퍼 차림에 두 개의 보따리를 품은, 그야말로 추레한 행색의 할머니. 할머니는 딸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저 밥보따리가 식을세라 꼭 품은 채 딸이 병원에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보따리에는 미역국과 나물반찬, 흰밥이 들어 있었다. 식은 미역국 보따리를 풀어헤치며`어여 무라`는 할머니의 사랑 앞에 병실의 누군들 함께 울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정신이 허물어져가도 가슴만은 살아 자식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그 마음, 통증이 되어 가슴팍을 콕콕 찧는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보따리는 결코 추레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가슴이 부르는 마음을 언제든지 보따리에 담아 건넬 수 있는 사람, 그 위대한 이름 부모. 노심초사 속보따리 겉보따리 바리바리 싸는 늙어가는 엄마에 비해 내가 당신에게 쌀 수 있는 보따리는 얼마나 미욱하고 보잘것 없는지.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