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테면 더 이상 잠들지 못한 새벽녘 신형철의 평론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감각은 야생동물이다. 길들이는 순간 죽는다.…. 감각은 세계를 염탐하고 자연의 암호를 번역하는 재현의 에이전트가 아니다. 감각의 본능은 배반이다. 감각은 이중 스파이다. …. 감각이 끝까지 달려 나갈 때 그것은 자신을 잊고 사유가 된다.” 감각이 뻗치면 끝내 자신을 잊은 `사유`가 된다니! 막연히 감각이 글을 쓰고, 감각이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돌멩이 같은 이성의 한 구석을 빌려 감각을 감각 그대로 두지 못하고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어리석음을 짓곤 했다. 내 이해의 바운더리에 들어오지 않는 그 어떤 감각적인 시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감각은 정돈될 필요가 없고, 사유에는 예고가 없다. 전달되지 않더라도 시요, 말이 되지 않더라도 시다. 이해와 느낌이 동시에 오는 것도 좋은 시지만, 이해를 놓아버린 그 자리에 감각만이 들어차도 좋은 시가 될 수 있다. 그걸 모른 채 어쭙잖은 해석의 끈으로 시를 묶으려니 시 읽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감각으로 합주되는 희귀한 언어들의 향연, 이것 역시 시의 일부임을 알겠다. 감각의 컬트를 보여주는 시들은 신형철의 말대로 매끄럽지 않고 명징하지 않으며 순수하지 않다. 시는 작문이 아니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이제 랭보나 보들레르의 날뛰는 언어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착각까지 하게 생겼다. 이 모든 게 새벽의 힘이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