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더없이 공활했고 그 아래 떠도는 구름 빛마저 가을을 예고했다. 마당 넓은 집 테이블에는 결실을 증명하는 갖가지 먹거리들이 차려졌다. 배고픔을 가장한 사랑에 허기진 사람들, 바쁜 손놀림으로 투덕투덕 익어가는 삼겹살을 뒤집거나 아귀아귀 서로의 입을 벌려 갓 싼 쌈을 먹여주곤 했다. 쑥부쟁이무침에 지나는 바람 한 점 얹어, 웃음보에 싸먹는 이 순간이 천국이라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좋은 사람들끼리의 눈길은 헤플수록 무죄였다. 한 잔의 차로 부른 배를 달랠 즈음에야 마당 앞의 길고 팽팽하게 당겨진 빨랫줄이 눈에 들어왔다. 쪽물 들인 천을 말린다는 주인장의 심지 굳은 표정처럼 서있는 바지랑대, 툭툭 잘린 기억처럼 매달려 있는 빨래집게 위로 이른 별이 뜨고 있었다. 아쉬울 때 자리를 뜨기 좋은 시간이었다.
주인장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고는 하나 설거지거리만 잔뜩 남긴 채 헤어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안현미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 나는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 // 서둘러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 점심시간 // 내가 먹은 밥은 그곳에 있다 / 나는 그게 시라고 쓰고 싶다”
갓 차려낸 따뜻한 밥상은 판타지이자 동화이고, 물리고 난 밥상은 삶이자 시이다. 발랄한 평화로 그 판타지를 누리는 것은 손님의 책무요, 무연한 뒷정리로 그 판타지를 되새김질하는 것은 주인의 기쁨이렷다! 판타지의 향연을 낸 자리에 시의 알곡이 남았으니, 객으로서 설거지를 하지 못한 미안함은 주인을 위한 사려 깊은 배려였다고 자위해도 될라나. 이 가을 설거지 못하고 떠난 자의 맞춤한 변명은 시인이 대신해준다. - 우리가 먹은 밥의 모든 흔적은 시이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