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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구기고 구긴다

왼발을 삐끗했다. 밤길, 움푹 팬 아스팔트 웅덩이를 미처 보지 못해 발을 헛디뎠다. 창피한 것도 잠시, 퍼뜩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둠 속 허방이야말로 신의 한수가 아닐까 하는. 밝을 때 길을 걷는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웅덩이나 돌부리가 보이더라도 건너뛰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걷는 건 조금 다르다. 잘 보이지 않아 허방에 빠지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확률이 낮보다 높다. 허방 자체는 밝으나 어두우나 그 자리 그대로 있다. 하지만 허방이 제 가치를 발하려면 인간이 그 속에 제대로 빠져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둠의 조건이 낫다. 헛디디지 않기 위해서는 눈조리개를 더 열고 무릎이나 발목 관절도 더 굽히는 게 좋다는 것을 깨치게 되기 때문이다. 삐딱한 시선과 뻣뻣한 관절로 밤길 걷다가는 허방 앞에서 제대로 고꾸라지고 만다.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밝은 면이 펼칠 때는 앞도 잘 보여 뻣뻣한 발걸음이라도 허방을 쉽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흐린 날에는 장막이 눈앞을 가려 웅덩이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럴수록 무릎관절을 꺾어 조심스런 행보를 해야 한다. 고영민 시인의 말처럼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에 이르고 싶다.미숙한 관용을 지닐수록 타인에게 엄격한 발소리를 낸다. 뻣뻣한 그 소릴랑은 제 속을 향할 때 제격이다. 허방 앞에서 고꾸라지는 건 무릎을 덜 굽혔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선 조심조심 부드러운 발걸음이라야 발밑 웅덩이를 제대로 보게 된다. 원칙보다 나은 건 상식이고, 상식보다 나은 건 이해이다. 원칙을 들먹이며 핏대를 올리기보다 이해할 수 있겠다며 손 맞잡는 일이 절실한 나날이다. 멋진 시가 적힌 뻣뻣한 책으로는 현실이란 똥구멍을 닦을 수 없다. 밑바닥 깊숙한 그곳을 닦기 위해선 그 종이 찢어 구기고 구겨야 한다. 마침내 부들부들해진 그것이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갈 수 있을 때 진짜 시의 날들을 맞는 거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16

소크라테스의 질문

누가 뭐래도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아고라 광장에서, 지중해 바닷가에서, 또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격렬한 토론을 할 때 애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말을 문자로 생중계했다. 그것이 플라톤의 `대화편`이다. 본격적으로 철학을 골방 깊숙한 사색의 장에서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이끈 주인공이 소크라테스이다. 왜 철학이 거리로 나왔을까. 소크라테스의 주장 요지는 이렇다.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 들판을 뛰어다니는 토끼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건 더 이상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말을 문자로 기록한다면 그것 역시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보았던 것이다. 질문과 대답이 자유롭지 못한 문자를 빌린 철학 방식은 소크라테스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플라톤이 스승의 말을 대화 형식으로 옮긴 건 스승을 따라 한 셈이다.소크라테스 철학을 흔히 대화법 또는 산파술이라 한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돕듯이 대화상대자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질문하는 형식이었다. 말하자면 답을 내놓는 자가 아니라 오직 질문하는 자였다. 가르치려는 자가 아니라 질문으로써 답을 숨기는 자였다.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대화 상대자가 제 모순에 빠져 우물쭈물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당혹감과 혼란에 빠진 상대방은 지친 나머지 소크라테스의 입만 바라본다. 결론을 듣기 위해서다. 하지만 답을 내놓을 리 없다. 찜찜한 미완의 숙제만 떠안은 채 뚜렷한 결론 없이 대화는 마감되고 만다.해결되지 않고 끝난 문제, 이것을 철학 용어로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다.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인데 소크라테스 대화법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되어준다. 통로 없는 그 지점은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 이유도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대화의 막장까지 내려가 봐도 속 시원한 출구가 보이는 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 지점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 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01-15

존 롤스의 케이크

사람마다 처한 정의의 개념은 다르다. 부자는 부자의 논리에 따라, 빈자는 빈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 모순을 없앤 정의의 원칙으로 존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했다. 이를 `무지의 베일(the vail of ignorance)`이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거지일지 백만장자일지, 장애자일지 건장한 사람일지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계급장도 떼고, 지갑도 없앤 채 발가벗은 상태라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하게 될 최악의 상태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공정한 룰을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도출된 합리적 생각은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지녀야 한다. 존 롤스는 이를 평등의 원칙과 차등 분배의 원칙으로 나누었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 자유에 대한 동동한 권리를 누린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균등한 기회 속에서라면 사회적·경제적인 차등 분배는 인정될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원칙이다. 단, 불평등의 전제조건으로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보장될 것`을 강조한다.쉬운 예로 케이크를 어떻게 나누는 게 좋을까? 존 롤스의 답은 이렇다. “칼을 잡고 케이크를 나눈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남은 조각을 가지는 것이 정의다.” 칼자루 쥔 자가 케이크를 많이 가져가는 세상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가진 자들이 최소 수혜자, 즉 약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한다는 전제하의 차등 분배를 인정하겠다는 존 롤스의 이론은 얼마나 매혹적인가.인간의 선택된 능력이나 조건이 우연의 산물이지 그 자체의 우월성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는 게 존 롤스의 생각이다. 필연이 아닌 시대나 상황이 만들어준 `칼자루 쥔 자`는 자신의 케이크를 약자에게 좀 더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것이 인간사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정의와 분배의 문제 때문에 누군가는 차디찬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찬바람 맞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게 현실이니./김살로메(소설가)

2014-01-14

이해와 소통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다. 인문학 열풍을 타고 여기저기 좋은 강좌들이 넘쳐난다. 더 이상 의식주 해결만이 목적이 아닌 세상을 살고 있다는 이 느꺼운 호사! 신나고 감사할 일이다. 내게 관심 있는 주제거나 입소문이 난 강사의 강의는 아무래도 눈여겨보게 된다. 바지런을 떨어 강연장을 찾을 때도, 메모했다가 텔레비전으로 시청할 때도 있다. 타이밍을 놓친 경우는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보게 된다. 내용에서 명약관화니 그 명성이 명불허전임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쩜 하나 같이 저리도 똑떨어지면서도 유쾌한 강의를 하는지. 사실 인문학 강좌라 해서 특별히 어려운 철학적 이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학문이나 학술을 위한 강의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한 목소리다 보니 그들은 될 수 있으면 쉽게 얘기한다. 왜냐하면 그 인문학이란 게 결국 `소통과 이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에 소통과 이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실생활에서 나온 예시들만으로도 훨씬 공감도를 높일 수 있다. 사람답게 소통하고 이해하는 데는 인간 자체에 대한 경험적 사유가 필요한 것이지 거창한 이론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그래서인지 요즘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대중 강연에서 성공적 데뷔를 하는 일반인(?)들이 많다. 그 중 유명세를 타는 분 중에 김창옥 강사가 있다. 변변한 스펙조차 없이 `언변과 사람에 대한 이해` 하나로 이 업계에 뛰어든 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그의 미니 특강을 인터넷에서 찾아본다. 어떤 격조 높은 인문학 강좌 못지않게 울림을 준다.앞에서 말했듯이 인문학은 결국 소통과 이해와 공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깊게 파고들어 학문이란 미로로 이끄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고, 현실과 접목시켜 숨통 트게 하는 역할은 김창옥 같은, 이제는 전문 강사가 된 이들의 몫이 되어도 좋다. 노래길 보다는 말길이 트여버린 그의 쉽고, 유머 깃든 말들의 향연 앞에서 너무 편안하게 `위로`라는 선물을 받아가는 게 어쩐지 미안해지는 하루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13

감정 동물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단언컨대` 내가 아는 한 이성적인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이성을 지녔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보기보다 허술하고 솔직하며 단순한 동물이다. 이성이란 갑옷으로 아무리 무장을 해도 부지불식간에 감정이란 빨간 내복이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짐승은 본능에 충실하고, 괴물은 본능을 관장한다. 그러면 그 중간인 인간은? 본능을 억제하는 순간적 능력이 뛰어난 동물일 뿐이다. 짐승은 아예 번민이 없고, 괴물은 타자로 하여금 번민을 유발할 때 인간은 그 번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본능 억제 능력이 영구적이 아니라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빙자할 뿐 결코 이성적인 동물은 못 된다. `감정`에 따라 자신의 이성을 정당화하는 조작적 능력이 뛰어난, 이성적인 체하는 피조물일 뿐이다.그 책임은 하느님도 면키 어렵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하느님조차도 온전한 이성으로 세상과 인간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당신 기준으로 인간을 비롯한 세상 피조물들의 생사를 관장했다. 이성보다 당신의 감정에 따라 그 잣대를 들이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기준이란 것도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결코 완벽히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당신 닮은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 하느님의 말씀은 솔직한 건지도 모르겠다.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흔히 `감정 섞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성이 항상 실천적 행동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성적 판단은 결국 감정을 덜 섞는 타협으로 행동화될 뿐 이성 그 자체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착각한다. 나는 감정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인 판단을 유지하고 있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부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다. 행불행을 관장하는 인간적인 단어, 그 이름 감정!/김살로메(소설가)

2014-01-10

풍경을 읊는 재미

문학적 눈썰미를 키우는데는 사진만큼 좋은 것도 없다. 전혀 낯선 분야지만 맘에 드는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파문이 일다 마침내 지층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을 일찍이 롤랑 바르트는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정의했다. `스투디움` 은 사진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일몰 사진을 보고 `햐, 기막힌 풍경이구나.` 단순히 이렇게 느꼈다면 이는 스투디움에 속한다. 반대로 사진의 구름 모습에서 어릴 적 술이 취해 살아있는 뱀 대가리를 조여잡고 휘두르던 옆집 아저씨를 떠올리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에 해당한다. 스투디움이 보편적 일반적인 정서라면 푼크툼은 특수성과 개별성의 요소를 지닌다. `나를 끊임없이 찔러대는 그 무엇`이 푼크툼의 정서이다. 롤랑바르트의 이 두 개념을 문학에서의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알레고리는 어떤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른 것으로 빗댄 것을 말한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구별하기 위한 교훈으로 기능한다. 이 알레고리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하다. 이는 롤랑바르트가 사진에 대해서 말한 스트디움의 정서에 가깝다. 반면 상징은 좀 더 다의적이고 개별적이다. 김춘수의 `꽃`은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독자 개별자에게 가닿아 폐부 깊숙한 `찌름`을 유발한 채 저마다의 꽃으로 재탄생된다. 롤랑 바르트 식 `푼크툼`이 되는 것이다.어느 시인이 말했다. 문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예술과 알레고리라는 양끝에서 예술 쪽에 가까운 게 문학이라고 했다. 문학을 이처럼 이분법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겠지만 맞춤한 예시이긴 하다. 내 식으로 덧붙이자면 예술 옆에 괄호 열고 `상징`이라고 쓰겠다. 교훈을 일삼는 오른쪽과 완전한 예술인 왼쪽 사이에서 왼쪽으로 치우치는 자리에 문학이 있다. 이 문학이란 매혹적인 노동 가치를 위해 오늘도 눈썰미를 키우는 중이다. 나만의 푼크툼과 상징체계가 온전히 나를 찔러주기를 바라면서./김살로메(소설가)

2014-01-09

찔레엔 가시

찔레덩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보편적 정서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얗게 핀 찔레꽃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반면에 오줌소태나 불면증으로 밤잠을 설치는 이라면 빨간 찔레 열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천식이나 치통으로 고생하는 어른들이라면 그 효험을 상기하며 일찌감치 찔레뿌리라고 맞받아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가정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것일 뿐이다. 찔레의 입장은 반영되지 않았다. 찔레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꽃과 열매 뿌리 모두 중요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가시`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느냐고 항의할지도 모른다. 성가시고 위협적이라서 부러 피했다고 변명하는 것이야말로 찔레의 화를 돋우는 일이다. 찔레 입장에선 가시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될 터이니. 질곡의 환경에서 제 한 몸 유지 보존케 하는 최소한의 보호막으로 가시는 필요했다.쌍둥이 소녀가 엄마랑 산책을 했다. 향기로운 찔레덩굴 앞에서 큰아이가 말했다. 여긴 이상한 곳이니 다른 곳으로 가자고. 왜 그러냐고 엄마가 물었다. 흰 꽃을 둘러싼 가시가 성가시다고 했다. 당황한 엄마가 대답을 놓치자 동생이 다가와 말했다. 여긴 참 좋은 곳이라고. 엄마가 다시 왜 그러냐고 묻자 동생이 답했다. 가시 사이에 흰 꽃이 피었지 않느냐고.긍정의 자세, 선한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이런 비유가 진부하거나 조금은 불편하게 보이는 건 왜일까? 뭐든 한쪽 시선으로만 보면 교훈이나 길들이기 식이 되어 버린다. 좋은 소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칼날은 칼등에 우선한다. 칼날이 위험하다고 칼등으로 스케이트를 탈 순 없다. 마찬가지로 멧돼지 앞의 찔레는 제 가시가 꽃보다 우선한다. 가시가 따갑다고 찔레꽃으로 멧돼지를 막을 순 없다. 찔레에겐 가시도 필요하고 꽃도 필요하다. 찔레덩굴에서 흰 꽃만 보는 건 제대로 본 게 아니다. 숨은 가시의 의미까지 보듬어야 제대로 보는 거다. 약자에게 가시는 위협용이 아니라 실존적 생존의 방식일 뿐이다. 왜 정치하는 사람들만 그걸 모를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1-08

나이 든다는 것

때론 피곤한 게 인간관계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불필요한 만남은 미루고, 웬만하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곳에는 끼려들지 않는다. 혼자인 자유는 얼마나 축복받을 만한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배달된 책을 순서 없이 읽다가, 베란다에 나가 풀죽은 로즈마리 화분에 물을 주는 것. 짜릿한 쾌감을 보장하는 이런 순간은 사람 사이에서 부딪히는 소소한 염증을 위무하고도 남는다. 접대용 멘트도 필요 없고, 정돈된 언행의 자기 검열에서도 자유롭다. 이보다 더한 기꺼움이 어디 있으랴. 누구에게나 현실은 힘겹고, 일상은 따분하고, 관계는 피로하다. 그건 내 안의 감옥 못지않게 타인의 감옥 또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관계없는 일상이 가당키나 한가? `타인이 곧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타인 없는 일상 또한 지옥인 것은 마찬가지다. 시게마츠 기요시의 `허수아비의 여름휴가`에 나오는 중년의 라이언 선생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라이언 선생 같은 사람에겐 결코 타인이 지옥이 될 수 없다. 아니, 타인이 이미 지옥인 것을 일찍이 알아채고 그것을 넘어선 경지를 보여주는 건지도 모른다.착한 사람에게 고통이 먼저 오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회한에 사무치는 게 삶이라며, 산전수전 다 겪은 라이언은 타인의 감옥 너머 있을 타인의 천국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타인과의 꽃밭 누리를 알기에 타인의 감옥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한다.중년 삶의 이러한 성숙함에 대해 시게마츠 기요시는 느긋하게 풀어헤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감정의 절제도 배울 때이고, 그저 그런 내용의 별자리 운세를 보며 광분하기도 하고, 타협과 굴종의 얼굴로 지리멸렬한 일상을 견디기도 하며, 명퇴의 상처로 소심한 뒷방 가장이 되어 자식에게조차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허수아비 신세의 중년이지만 인간에 대한 희망마저 잃은 건 아니다. 이 모든 게 타인의 감옥을 천국으로 승화한 중년의 미덕이다. 라이언 선생이 말한다. 타인 없는 세상이야말로 감옥이라고./김살로메(소설가)

2014-01-07

수많은 밥

내 행동과 말은 내가 한 것이되 내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자의 것일 뿐이다. 나는 궁궐을 지었지만 상대는 초가를 보고, 발 없는 말일수록 천리를 내달린다. 무지개란 진실은 하나로 뜨지만 그걸 전하는 자나 해석하는 자는 각자 다르게 말한다. 내 의도와 상대방의 해석은 같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의도는 하나이다. 꽃을 꽃이라고 말할 땐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모든 상황을 그처럼 명명백백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은 삶은 수많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빗대 말하는 그것의 최종 목표도 결국은 진실 그 하나이다. 하나인 진실을 두고 말하는 이나 받아들이는 자 각자 `다르게` 말한다. 그러다 보니 그 둘 사이엔 완벽한 심상의 합일점을 찾기가 어렵다. 말하는 자는 돌려 말하고 이해하려는 자는 의중이 담긴 그 수수께끼를 제 식으로 해석한다.봉준호 감독의 걸작 `살인의 추억` 마지막 신에서 송강호가 내뱉는 한 마디는 `밥은 먹고 다니냐?`이다. 명대사 중의 명대사로 뽑히는 이 말을 두고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한 수로 그 의미를 해석했다. 형사 역할인 송강호가 유력한 용의자 역할이었던 박해일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껴 한 말이란 게 당시 관객의 대체적 정서였다. 지난 가을 영화 개봉 십 주년 행사 때 송강호가 그 대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내놓았다. 자신의 의도는 터널 속에 있을지도 모를 진짜 범인에게 `이런 짓 하고도 밥이 넘어 가느냐`라는 의미로 한 애드리브 였다고 했다.`내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돼도 받아들이는 관객들이 느끼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라는 덧붙임 말이 눈길을 끈다. 내가 한 언행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공감하는 순간이다. 내가 한 말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은 순전히 상대에게 달렸다. 내 언행의 전부를 상대가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욕심이다. 나는 말하고 상대는 해석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것이 정답이다. 세상엔 수많은 밥이 있고, 그 밥을 먹는 방식은 입맛마다 다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06

아직 멀었다

별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이어진다. 어제 뜬 태양이 오늘 그 자리에 다시 솟고,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그대로 겨울 나목에 스친다. 마음가짐이야 조금 달라졌겠지만 새해라고 별달리 거창한 계획을 세우진 않았으니 갑자기 일상이 변할 리 없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변한 것 없는 새 하루가 지나간다. 그저 누군가 신년 메시지를 희망차게 전할 때 다른 누군가는 절망의 장탄식을 호소하는 것,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점진과 급속이란 완급의 페달을 조절하며 우리 삶은 그렇게 나아간다. 가끔씩 잔잔한 파문 같은 뉴스에 생각이 많아지기도 하는 것,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의 단신 기사 하나.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생도를 퇴학시킨 육군사관학교의 처분은 위법하다는 항소심 내용이 눈길을 끈다. 도덕적 한계를 위반했다는 이유 등으로 임관을 앞두고 퇴학 처분을 받은 피고가 일반병으로 입영하라는 통지를 받자 소를 제기했다. 위법 판결이 내려졌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한데 학교 측 반응이 가관이다. 품위유지 의무 위반을 한 피고의 퇴학처분은 정당하다며 상고할 계획이란다.기사만 보자면 학생은 퇴학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다. 성폭행을 한 것도, 교내에서 풍기문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다. 주말 외박 때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이 퇴학당할 일인가? 국가인권위원회는 금주·금연·금혼 등 이른바 `3금 제도`위반자에게 내린 육사의 퇴교 조치를 인권침해로 규정해 개선 요구를 했다. 중요한 건 이것을 학교 측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성인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규제하는 웃지 못 할 사회를 살아가는데,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직은 많다. 질서유지라는 명분하에 개인의 기본 인권까지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 이런 상황이 온당한 것일까. 재판부의 말처럼 `국가가 내밀한 성생활 영역을 간섭하고 제재하는 건 개인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도덕적 한계`는 양심이나 신념의 문제이지, 통제와 억압이란 규율의 잣대가 관장할 일이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03

새해엔 안녕하기를

`안녕`패러디 열풍이 식질 않는다. 지난 연말 시작된`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내용의 공감 유무를 떠나 답답한 현실을 토로한 그 패기와 용기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사실 대자보란 소셜 네트워크가 구축되지 않았던 7,80년대에 그 정점을 찍고 사라져 가던 표현 방식이었다. 컴퓨터의 발달로 각종 세련된 문명 소통의 이기들이 속속 등장하자 대자보 형식은 대화의 장이라는 고유의 빛을 잃어갔다. 그렇게 잊혀 가던 대자보가 어느 날 아날로그적 감성과 진중함으로 무장한 채 대중들의 폭발적 공감대를 불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대자보의 시발점이 되었던 고려대학교 담벼락은 아예 대자보길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새해가 된 지금도 수많은`안녕`시리즈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단순 대자보로 그치지 않았다. 온라인으로 넘어온 대자보 열풍은 급기야 페이스북에 안녕하십니까, 라는 코너를 만들게 했다. 정책의 불합리, 공권력의 부당성, 노동자의 권익 등 묵직한 주제뿐만 아니라 살림살이의 힘겨움, 취업의 어려움, 연애사의 고달픔 등 개별자의 고민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 내용은 다양하기만 하다. 이성과 감성에 적절히 기댄 대자보가 전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는 마음 어루만지기 프로젝트가 된 셈이다.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지난 한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대체적 정서가`안녕들 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대내외적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수십 년 째 이어오는 일본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망언,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북한 정권의 위협적인 언사 등 외적인 스트레스 받는 것도 모자라 내적으로는 정부와 국민 간의 매끄럽지 못한 소통 때문에 곳곳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난무했다. 대자보가 나오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다.새해엔 제발 안녕들 하시냐는 자조 섞인 인사말이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실현되기 힘든 꿈이 될지라도 명랑 사회가 가까웠으면 하는 바람이 단순한 새해 인사가 아니기를 바라본다. /김살로메(소설가)

2014-01-02

한 해를 보내며

사람은 생각하고 그 생각을 말(글)로 내뱉는다. 왜 인간 곁에는 생각과 말이 있는 것일까? 근원적인 이런 질문에 골똘하다보면 어느 정도 답이 보인다. 번민 혹은 번뇌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고민거리가 생각과 말을 풍부하게 하는 일등 공신이다. 좋은 일이나 단순한 사실에는 그리 큰 사유가 필요치 않다. 그 자체를 즐기거나 인정하면 된다. 반면 나쁜 일이나 복잡한 사실 앞에서는 사유라는 필연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일례로 `생각 좀 하고 살아라.`라는 말은 심각한 상황에나 어울리지 단순명쾌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번민 있는 곳에 생각 돋고, 생각 끝에 말은 사용된다. 프랑스 작가 볼테르는 이것을 좀 더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사람은 오직 자신의 불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생각을,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 위해 말을 사용한다.`고. 올 한 해도 무사히 건넜다. 수많은 생각과 말들이 내 곁을 지나갔다.들머리에서 보듯 모든 생각과 말은 영혼을 잠식한다. 가벼워지고 담백해지려면 그 둘은 놓을수록 좋았다. 해서 올해의 내 개인적 화두는 `생각과 말에서 자유로워지기`였다.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건 수행자들에게나 가능한 것이고, 될 수 있으면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생각과 말의 감옥을 뛰어넘는 무심함에 노닐고 싶었다.그리하여 `마음 놓아버리기`라는 실질적 목표를 두고 무심히 강을 건넜다. `편히 나누고 누리자`라는 실천 요강도 마련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늘 맘에 새겼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이 세 가지 상을 염두에 두지 않는 보시를 실천하려 애썼다. 마음에 주인이 없으니 걸림이 없고 머무름 또한 없는 그 경지! 하지만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그 단계를 맛 볼 것인가.일 년이 지난 지금, 내 마음의 주인은 여전히 나이다. 집착 없이 베풀고 소박하게 누리자, 는 내 모토는 실패한 프로젝트인 셈이다. 그래도 아주 실패한 건 아니다. 목표를 향해 갈고 닦는 것 자체가 중요하니 반은 성공했다고 위로해주고 싶다. 고마웠다, 2013년!/김살로메(소설가)

2013-12-31

자기합리화

자기합리화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숭이도 자기합리화를 한단다. 심리학자가 여러 색의 초콜릿알로 원숭이에게 실험을 했다. 예컨대 조건이 같은 빨강, 파랑, 녹색 중 임의로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빨강과 파랑 중 빨강을 골랐다면, 남은 파랑과 녹색 중에서도 녹색을 고르게 될 확률이 높단다. 파랑에 대한 거부감은 처음에 빨강을 골랐던 자신의 행동이 옳았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인 셈이다. 신념과 행동이 충돌했을 때 후자인 행동의 결과물로 우리는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분리수거를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춥고 귀찮아서 종량제 봉투에 그냥 넣어 버린다 치자. 이때 원칙과 내 행동 사이에서 갈등한다. 인지부조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우리는 자기합리화를 한다. 물기 있는 음식물이 아니라 사과껍질이나 썩은 당근 조각이니 괜찮을 거야, 옆집 아줌마는 나보다 더하던 걸, 등의 핑계를 갖다 댄다. 이미 한 제 행동을 바꿀 수 없으니 생각 자체를 바꿔서 두 상황을 일치시키려 하는 것이다.원숭이의 경우도 실은 파랑색 초콜릿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지만 일단 한 번 거절했기 때문에 그 행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파랑색 초콜릿의 선택을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합리화를 한다. 하지만 자기기만으로 말해도 좋을 그것에 반성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인지부조화 현상을 연구한 레온 페스팅거가 말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인간은 합리를 추구하지만 합리에 온전히 가닿을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중용이 될 수 없는 그 합리는 어느 한쪽에게는 여전히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야스쿠니 참배를 비롯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연이은 도발적 행보는 주변국에게는 당연한 불합리로 보인다. 한데도 그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지극한 합리로 보이나 보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합리화하는 존재일 뿐인 스스로를 그토록 합리적이라고 믿는 것인지./김살로메(소설가)

2013-12-30

실천하지 않는 욕망은

누구나 욕망한다, 그 무엇을. 하지만 아무나 그것을 위해 실천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개인 견해를 밝히자면 실천을 방해하는 두 요인은 단연코 `의지박약`과 `의기소침`이다. 심지어 그 둘을 극복할 자신이 없으니 그것에다 겨울 담요 같은 포근한 자기합리화까지도 부여한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닐 거야. 다른 사람들도 이 겨울 지날 때까지는 그냥 빈둥거릴 거야. 당연히 그런 생각은 오산이다. 세상은 넓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신나게 달린다. 의지박약이나 의기소침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신뢰하고 제 미래를 확신한다. 머뭇거리며 시도하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보다, 재지 않고 저질렀을 때의 성취감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자기긍정과 자기 확신, 그 대척점에 있는 의지박약과 의기소침. 이 모든 것은 습관의 산물이다. 동기부여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전자의 신념을 행동으로 축적한다. 자연스레 성과도 높고 만족감도 높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불투명한 동기부여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자일수록 후자에 얽매여 시간만 낭비한다. 내게 재능이 있을까. 난 왜 이 정도밖에 안되지. 이런 쓸 데 없는 고민으로 스스로를 옭아맨다. 자신을 너무 잘 아는 게 무기가 되어 스스로를 찌른다.자고로 장기판이나 바둑판에서는 구경꾼이 판을 더 잘 읽는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들은 구경꾼을 의식하지 않는다. 판을 아무리 잘 읽는다 해도 구경꾼은 구경꾼일 뿐이니까. 하지만 자기연민에 갇힌 사람들은 스스로 구경꾼이 되어 버린다. 주관적 당사자이자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 그 둘을 감당하자니 힘겨울 수밖에 없다. 주관적 뚝심으로 제 욕망을 밀고 나가기보다 객관적 공정성을 스스로에게 먼저 묻게 된다. 욕망이 답보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욕망하는 자는 겸손하기 보다는 뻔뻔할 지어다. 스피노자의 통렬한 한 마디 -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그걸 하기 싫다고 되뇌는 것과 같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욕망하기 때문에 번민하는 이 아이러니한 삶!/김살로메(소설가)

2013-12-27

비인정(非人情)의 풀베개

우리 일상의 큰 축은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달리 말하면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에서 벗어날수록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인은 갈등 속에 그 둘을 업고 지고 가는 사람들이고, 예술가는 그 두 짐을 과감하게 놓아버리려고 시도하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완전하게 일상성에서 벗어나기도 힘들다. 예술과 일상은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일상과 불화하는 예술인의 내면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작가군 중의 한 명이 나스메 소세키이다. 예술가 소설에 속하는 `풀베개`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을 보자.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세파에 영향 받는 인간 갈등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설득시켜주는 작가가 있을까. 먹고 살기 위해 사람 관계를 유지하는 소시민은 이지만을 따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주변과 삐거덕거리게 된다. 반대로 타인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이타심을 발휘하면 제 기가 다 빠져버린다. 둘 다 힘겹다. 이제 그만 악다구니와 눈치만 있는 돌베개 벤 것 같은 인간사를 벗어나, 시와 그림이 있는 풀베개 베도 좋을 신선의 세계로 도망가고 싶은 것이다.그것을 소세키는 인정(人情)에서 떠나 비인정(非人情)의 세계, 즉 자연으로 떠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감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행을 감행한다. 화공이 되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비인정의 세계에서 `나`의 세계관이 완전히 객관화될 수 있을까. 인간이기에 새로운 연민이 생기고, 새로운 갈등이 피어날 수밖에 없다. 다만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그 과정이 예술혼이 된다는 걸 알겠다. 소시민은 일상과 사투하고 예술가는 비인정의 세계를 갈망한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26

이해는 순간에

어린 시절 시골에서 대처로 나왔을 때 많은 것이 달랐다. 그중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중의 하나가 `으`와 `어`발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그런 현상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무척 당황했다. 새로운 친구들은 이층을 `이청`으로, 음악을 `엄악`으로 발음했다. 멀쩡한 이름인 이은진도 `이언진`이라고 바꿔 불렀다. 심지어 `언진(은진)이가? 언진이가?` 하면서 내가 듣기에 똑 같아 뵈는 발음으로 `으, 어`의 표기법을 구별하는 질문까지 하는 것이었다. 기이하기만 했다.철들고 난 뒤 단지 그것이 언어습관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모든 사투리가 그렇듯 윗세대가 그렇게 전수하니 아랫세대도 자연스레 받아들인 것뿐이었다. 처음 겪은 내게만 그것이 이상한 것이지 원래 그렇게 적응해온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젯거리조차 되지 않았다.오랜만에 전국구 친구들을 만났다. 수다 중 `thanks to`라는 말이 나왔다. 내가 `생스투`라고 발음하자 친구들이 마구 웃었다.`땡스투`지 `생스투`가 뭐냐는 것이었다. 어릴 적 도회지 친구들이 `으`와 `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내 심정이 그들 심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영어 발음으로 할 것도 아닌데 나로선 생스투나 땡스투나 그게 그거 같아 보였다.궁금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온 나는 thanks to를 우리말로 (영어발음이 아닌!) 어떻게 표기하는지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땡스투`나 `생스투`나 그게 그거였다. 그렇다면 단순히 땡스투냐 생스투냐의 발음 차이가 아니라 경상도식 발성법의 미묘한 뉘앙스 때문에 그들이 웃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단상 하나가 퍼뜩 스쳤다. 어릴 적 내게 이상하게만 와 닿았던 발음 건이 그들에겐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게 나로선 이상했듯이, 그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내 발음이 내겐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역시 이상할 수도 있다는 사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상이 나보다 옳은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3-12-24

예쁜 것과 추한 것은 하나

연말이다. 오라는 데도 많고 갈 곳도 많다. 그 모든 자리가 내게 맞춤할 리 없다. 가고 싶은 곳도 있고, 가야만 하는 곳도 있다.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실은 가고 싶은 곳과 가야만 하는 곳의 근본적 차이는 없다. 내 마음 한 끝에 달렸다. 굳이 구별하자면 내 마음이 그 둘의 상태를 분리해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석가의 유명 제자 중에 아난다가 있었다. 아난이라고도 하는데 `환희, 기쁨`이라는 뜻을 지녔다. 외모가 빼어나고 설법이 깊은 그를 여자들이 좋아했다. 백정의 딸인 프라크리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아난이 탁발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천인들의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프라크리티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자, 자신은 천한 신분이기 때문에 물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아난은 부처의 가르침은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 데 있다고 말했다. 아난의 출중한 외모와 자비심에 반한 그녀는 매일 탁발 나오는 아난을 기다렸다. 영문을 모른 아난이 왜 날마다 자신을 기다리느냐고 프라크리티에게 물었다. 스님 눈이 무척 예뻐서 그렇다고 그녀가 답했다. 아난은 주저 없이 자신의 눈알을 손가락으로 파서 그녀에게 주었다.우리가 선하고 아름답다고 본 것의 실체는 알고 보면 그냥 그 자체일 뿐이다. 아니 시신경과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난 아난의 파헤쳐진 눈처럼 무섭고 징그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우리가 추하고 더럽다고 멀리하는 똥의 실체 역시 똥 자체일 뿐이다. 어쩜 거름으로 거듭나 푸성귀 맛을 북돋아 주는 역할이 똥의 실체일 수도 있다. 사물과 대상은 불변의 성격으로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거기에 적당한 상표를 붙이는 건 `내 마음`이다. 있고 없고, 예쁘고 추하고의 경계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아난다의 눈 이야기가 잘 말해준다.무엇이든 맘먹기에 달렸다. 하나인 실체를 두고 어떤 맘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게 우리가 보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맘먹기의 장이 `환희와 기쁨`으로 거듭나라고 연말연시 모임은 해마다 되풀이 되나 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23

관찰자의 하루

모처럼 한가하다. 그렇다고 책이 손에 잡히거나 글이 써지는 것도 아니다.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이 아깝다. 카페에서라면 집중이 될까 싶어 책 두 권과 노트북까지 챙긴다. 웬 걸, 집만 못하다.`동양 고전의 바다`에도 빠질 수 없고,`사랑의 단상`도 더 이상 눈에 잡히지 않는다. 읽을 수 없다면 쓰기라도 하자. 쓰다 만 소설 카테고리를 찾아 노트북을 편다. 한 단락도 채우기 전,`꼰대의 위선`어쩌고 하는 어절 앞에서 커서만 깜박인다. 댐에 갇힌 물처럼 몸과 맘에 갇힌 문장은 출렁일 뿐 흘러내리지는 못한다. 번잡한 머릿속을 뚫고 옆자리의 수다만이 잘도 들어온다. 이렇게 된 바, 타인의 말에나 귀를 열어놓기로 한다. 혹시 뭐 하나 건질 수도 있으니. 역시, 엿듣기보다 나은 소설도 없다. 방관자나 관찰자의 자리란 얼마나 부담 없고 매혹적인 곳인지.친구 두 명을 상대로 부동산업을 한다는 여자가 인간관계론을 설파한다. 듣자니`직설법의 무죄`에 관한 것이다. 누군가 -아마 사업상 불필요한- 사무실로 찾아와서 커피 한 잔 하자고 하는 바람에 성가셔 죽는 줄 알았단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도 눈치 없는 상대는 기어이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가더란다. 저녁엔 신생 사무실을 낸 동료가 술을 사겠다며 전화를 걸어왔단다. 딱히 만나고 싶지 않아 고맙지만 안 챙겨줘도 된다고, 시작한 사업에나 더 신경 쓰라고 대답했다나. 어렵게 전화를 건 호의를 무시하는 거 아니라며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리더란다.자신이 뭘 잘못했냐고 여자는 열변 섞인 동의를 구한다. 에둘러 말하는 게 다 좋은 건 아니다. 하지만 커피가 싫다느니, 사업이나 잘 챙겨라느니 이런 식의 다소 무례한 어법을 연출할 필요는 없을 텐데. 상대의 호의가 귀찮다고 일방적으로 상대를 무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덕에 우리는 괴물이 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각설하고, 이것이 소설의 한 장면이 될 수 있을까. 이런 부질없는 생각으로 커피만 홀짝인 한나절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20

삶의 본질은 부조리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 아닌 것들의 뜻대로 되는 게 더 많다. 내 의지대로 될 수만 있다면 살맛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위험한 발상도 없다. 천하가 제 것인 줄 알고 휘두르던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를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저 높은 곳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일상사 잘잘한 것에서도 내 뜻보다 상황에 휘둘리는 사안들이 얼마나 많던가. `노나라의 술이 묽으면 한단이 포위된다.`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초나라 선왕이 제후들과 회의를 가졌다. 이때 이웃한 노나라와 조나라는 술을 바치는 게 관례였다. 노나라 술은 매우 묽었고, 조나라 술은 무척 진했다. 조나라가 좋은 술을 가져오면서도 자신에게는 선물꾸러미 하나 주지 않자 초나라의 담당 관리는 앙심을 품었다. 노나라의 묽은 술을 조나라의 것이라고 바꿔서 선왕에게 바쳤다. 노여움이 폭발한 선왕은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을 공격했다.노나라로서는 당황스럽고, 조나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조나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초나라 선왕을 향해 외쳤다. 쑥대밭이 된 조나라 백성의 자존심은 누가 보상해주냐고. 초나라 술 관리는 웅변에 능한 사람이었다. 양심 상 상처 받은 한단 사람들을 물고 넘어질 수는 없었다. 방향을 바꿔 애초에 묽은 술을 제조한 노나라 잘못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구경꾼 놀이가 없어질까 심심하던 초나라 사람들은 술 관리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때 현자가 나타났다.`세상일은 노나라나 조나라 뜻대로 되는 게 아니노라. 막강대국 초나라 뜻대로 되는 것도 물론 아니지. 세상일은 되는 대로 되는 것이노라.`이 고사를 현대 철학용어로 빗대면`부조리`쯤이 될 것이다. 길 가다 보면 돌부리에 채여 넘어질 수도 있고, 날아오는 돌멩이에 맞을 수도 있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상황에 의해 `들었다 놨다` 요동질을 당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희망의 향연은 내 의지지만 상황의 심술은 신의 장난이다. 신이 즐기는 부조리라는 개그콘서트 덕에 인간은 그나마 겸손해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9

같은 꽃을 보고서도

그녀는 예뻤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의 미모를 칭송했다. 그 소리를 안 들으면 허전하고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 어느 날 낯선 옷가게에 들렀다. 웬일인지 주인은 그녀더러 예쁘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늘 들어오던 말을 못 듣게 되자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그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뭐가 잘못 됐지? 오늘 내 화장이 이상했나? 간만에 쓴 털모자가 안 어울리는 걸까?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자신이 왜 옷가게에 들어갔는지조차 잊은 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희한하고 한심한 경험이라며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이해가 간다. 예쁜 사람들은 자신이 예쁜 줄을 안다. 해서 익숙해진 예쁘단 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못 듣게 되면 자신에게 뭔가 잘못이 있나 싶어 그때부터 뒤죽박죽 엉망인 심사가 된다. 어찌 모든 이로부터 예쁘단 소리를 듣고 살겠는가. 말수가 적거나, 무심하거나, 혹은 미의 기준이 남다른 옷가게 주인을 만나기도 하는 게 우리 삶이다. 입에 발린 말을 못하는, 잘못 없는 그들 앞에 저 혼자 흔들린 심리상태를 보상하라고 할 수는 없다.`예쁜 사람, 멋있는 사람` 등 인정에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번민한다. 요즘 인기 있는 법륜 스님에게 조언을 구하는 이도 대개 이런 문제들로 고민한다. 인정받지 못해 내면과 갈등하는 소시민에게 스님은 이런 요지로 답한다. “내 존재를 제대로 알면 칭찬에 우쭐댈 일도 없고 비난에 신경 쓸 일도 없다. 칭찬이나 비난이 상대의 감정표현일 뿐이라는 걸 알면 내가 그 말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같은 꽃을 보고서도 어떤 사람은 예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말이 없는 꽃 보고도 서로 다른 표현을 하는데 각자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 하는 말에 내가 흔들릴 이유가 없다.”이런 명답을 새기다보면 예쁘단 말 듣지 않아도, 넌 왜 그 모양이냐고 눈총 받아도 의연해질 수 있다. 내 심지 곧고 굳은 게 상대 감정보다 우선이다. 칭찬이나 비난에 일희일비하는 것만큼 내면을 갉아먹는 것도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