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과는 무관하게 맨 뒷장부터 펼쳐졌는데 으라차차, 시집 발간에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이 가나다순으로 적혀 있다. 갑자기 속상해진다. 백여 명이 넘는 저 귀한 명단에 끼고 싶은데 내 자리가 없다. 추측건대 시인의 퇴직 기념행사 때 오신 분들의 정성으로 이 시집이 출간된 게 아닌가 싶다. 날짜를 알고도 축하 자리에 가지 못한 점이 못내 민구하다. 맘이 반이다. 아무리 시간이 맞지 않았다 해도 찾아뵐 방법을 연구하면 달리 없지도 않았을 터이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반가운 맘에 시집을 급히 펼쳤으면서도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이틀에 걸쳐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맘 자락마다 콕콕 박히지 않는 시가 없다. 시인은 인생의 숙제인 밥값을 생각하고, 참선하는 자연의 모든 것을 노래하며, 비움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쓸쓸히 몸부림 짓는 섬들을 불러 모으고, 금강경 쓰는 아내에게서 풍경소리를 듣는다. 시인의 내면 풍경이 이토록 기꺼운 시어들로 꽉 차 있을 줄 예감하지 못했다.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말들은 고요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호흡은 지축을 흔드는 지진 같고, 몸에서 떨어져 나간 살점 같다. 겸손한 시인의 밥 한 술 속에 들어 있는 `흔들고 찔러대는` 그 울림 앞에서 내 주눅만 가득하다. 한정본이라 시중에서 살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능소화 1`전문을 옮겨와 아쉬움을 달래본다.
“불안하다, 늘 / 이제 막 꽃 지는 능소화 /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 옛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피는 향기 / 아직도 그 영예가 그립다 / 어디에도 나는 없다 / 한때 내 눈의 그림자에 가려 / 어두워졌던 모든 풍경들이, 비로소 / 제 빛깔을 찾는 늦여름 / 쓸쓸하구나, 그대 없는 세상은”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