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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꽃시 한 권

언제 밥 한 번 먹자. 흔히 내뱉는 말이다.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답게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우리는 그런 말로 제 겸양의 미덕을 발휘한다. 뇌에서 걸러 낼 틈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그 말의 대부분은 흰소리가 되고 만다. 그 속뜻은 `너와 밥 먹을 마음은 진심이지만 지금 당장이나 혹은 내일은 곤란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밥 먹을 그 `언제`가 언제인지를 재야 사회학자가 `언제` 발표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겠나. 밥 한 번 먹자는 그 말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분명 들어있다. 하지만 자기 마음 편하고자 하는 일종의 보험성 멘트인 것도 사실이다. 듣는 이나 말하는 이나 금세 잊어도 좋을 체면치레용 말로 활용되는 것이다. 어지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상대가 애매하게 내뱉은 그 말에 책임지지 않는다고 불쾌해하거나 맘 상하지도 않는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그 `언제`의 약속일지라도 냉랭한 무관심보다는 한결 낫기 때문이다.`언제` 꽃에 관한 모음시 한 권을 주시겠다는 시인이 있었다. 시인의 그 말을 나는 흘려들었다. 언제 밥 한 번 먹자처럼 상투적 멘트로 이해했던 것이다. 우연히 시인을 만났을 때 한 권 남은 시집이라며 살뜰히 챙겨주시는 모습에 살짝 당황하고 많이 감동했다.시인으로선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다. 한정본으로 손수 제작한 맑고 투명한 꽃시집을 오래 쓰다듬는다. 글자 하나, 레이아웃 하나 전문 편집자처럼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다. 왜 꽃에 관한 시를 모으셨을까, 바쁜 가운데 언제 이토록 정갈하게 갈무리하셨을까, 이런 생각이 흐른 뒤 내 머리와 가슴은 처음으로 돌아간다.`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이름도 없이 피었다`지는 꽃 같은 삶, 얼마나 얕은 꾀와 무신경한 말들로 타인에게 내 겸양을 구걸했던가. 타인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실은 내 체면과 안위를 위해 얼마나 많은 보험성 멘트를 날렸던가. 공허한 그 말 대신 실천할 수 있는 말들의 꽃을 피우라고 이렇게 눈시울 적시는 `꽃시`는 내게 왔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7

버드나무껍질 반지

`주석달린 월든`(현대문학)을 산 건 행운이다. 별다른 해설 없는 숱한 `월든` 중의 한 권을 읽었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읽어야한다는 강박이 먼저 작용했던 그때는 그 깊이나 가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연과 벗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한때 경이로웠던 기록 정도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해결해야할 숙제처럼 대하느라 그 진가를 미처 몰라봤다. 소로처럼 외딴 호숫가에 오두막 짓고 자급자족할 맘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자연을 찬미하고 내면을 살찌우는 기록물이 아니라 텍스트 하나하나가 `문학적 성과`로 출렁인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하다. 촘촘한 일상을 풍부한 관찰력과 서정적인 감각으로 묘사하는데, 그 방식이 구체적이고 섬세해 목이 멘다.`집에 돌아오면 방문객이 들렀다 남긴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한 다발의 꽃이나 상록수로 엮은 화관, 혹은 노란 호두나무 잎이나 나뭇조각에 연필로 써놓은 이름이다. 좀처럼 숲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오는 길에 숲의 작은 조각들을 취해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반지를 만들어 내 탁자에 올려놓고 간 사람도 있었다.` (189쪽)청년 소로는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2년여의 자급생활을 하면서 기록물을 남겼다. 숲으로 가 온전히 제 뜻에 살며 삶의 본질에 충실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소중한 삶, 제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선택한 길이었다. 독자로서는 거창해 뵈는 그 소명의식보다 기록물이 주는 잔잔한 감동 덕에 소로가 위대해 보인다. 물질문명을 거부한 그는 유유자적의 `팔자 좋음`이 아니라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실천했다. 그런 그가 사람이 찾아온 흔적을 `굽은 잔가지`나 `짓눌린 잔디`, `한 움큼 뽑힌 풀`이나 `은은히 남은 시가 담배향`으로 짐작하는 서정적 붓대까지 갖추고 있으니 다시 보일 수밖에.삶과 사색을 실천하는 작가가 문학적 감수성까지 빛나기란 쉽지 않다. 구구절절 마음 끄는 문장을 건질 수만 있다면 그 누군들 오두막 지으러 제 마음의 숲으로 떠나지 않을 것인가.김살로메(소설가)

2013-12-16

안과 밖

모든 사람에게 맞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가족끼리도 서로 맞추기 어렵지 않은가. 누군가의 독서 메모장에서 이런 글을 봤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하인에게는 보통사람이다.` 서양 속담인데 몽테뉴의 수상록이 원 출전이다. `후회에 대하여` 부분에서 `가족에게 존경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일갈했다. 프랑스 어로 말한 몽테뉴의 그 말이 영어 식으로 바뀌어 위의 속담으로 정착한 모양이다. 명쾌한 이 한 마디 말로도 고전은 공감의 온상지요, 서늘함의 확인처라는 걸 알겠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패턴을 따른다. 바깥에서는 제 주어진 역할을 무리 없이 감당한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서면 조금 달라진다. 그건 긴장감의 차이일 것이다. 평판이 두려워, 체면이 깎일까봐, 좋은 인상을 얻기 위해 등등, 사람들은 집밖을 나서면 최소한의 페르소나(가면의 인격)를 연기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돌아간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와서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있다면 너무 완벽해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나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의 나는 야무지지 못하고 일을 잘 벌인다. 허탕도 잘 치고 허튼짓도 많이 한다. 주책 부리고 실수하는 것은 내 담당이요, 주워 담고 뒤처리하는 것은 언제나 나 아닌 가족이다. 예를 들면 게르마늄 찜기는 당연히 직화 방식으로 불을 쏘이면 안 된다. 엉뚱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어느 날, 먹다 남은 갈비찜이 든 그 도자기 재질 찜기를 가스레인지 불 위에 곧바로 올리고 말았다. 채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용기는 퍽, 하고 파열음을 냈다. 도자기 파편과 내용물로 범벅이 된 주방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화를 낼 힘마저 놓아버렸다.이럴 때 눈썰미 강한 몽테뉴의 사색을 빌리면 된다. `아내와 하인이 보기에도 눈에 띄는 허점 없이 사는 자는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사람들에게 추앙 받은 인물은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인격의 가면을 집안까지 끌어들여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경구인지. 제 안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3

넬슨 만델라

지난 10일 넬슨 만델라의 추모식이있었다. 비 내리는 요하네스버그 월드컵경기장엔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일관한 한 생애 앞에 드리는 찬사와 존경의 물결이었다.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캐머런 총리,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로하니 이란 대통령 등 내로라하는 각국 정상들도 참석했다. 한 인권지도자의 추모식 앞에서는 니 편 내 편의 경계가 필요치 않았다. 적대와 연대를 아우르는 평화의 기치, 그것은 넬슨 만델라가 추구한 궁극의 목표였다. 인권 전도사였던 그의 죽음 앞에 겨우 화합과 우의의 그림을 연출할 수 있다니 삶이란 얼마나 아이러니 한 것인지. 만델라의 삶은 투쟁의 역사였다. 우연히 한 친구가 백인에게 모욕당하는 걸 보고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영향을 받아 변호사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격리정책) 반대운동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했다.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수감되기를 몇 차례, 종신형을 선고 받아 삼십 년 가까운 투옥 생활을 했다. 옥중에서 받은 각종 인권상을 계기로 그의 명성은 알려졌고, 어느새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1990년 석방된 그는 인권지도자로 돌아왔다. 시련은 계속되었다. 흑인 극단주의자들에게는 온건하다는 비난을 들었고, 종족 간의 복잡한 갈등에도 진저리를 쳐야했다. 그 상황에서도 백인 정부와 협상의 끈을 놓지 않아야했다. 민주 선거를 관철시켰고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1994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종결은 물론, 350여 년에 걸친 인종 분규의 핵심적 리더가 되었다.추모식장에서 만델라의 오랜 비서를 지낸 이가 말했단다.“적대적 관계였던 사람들이 서로 손을 붙잡는 모습을 만델라도 보고 싶었을 것”이라고. 그의 전언은 곧 세계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서로 손 잡는 것,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만델라를 떠나보내면서 깨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2

사람이 우선이다

하반기 독서 관련 프로그램이 끝나간다. 독서 방법이니 논술의 개념이니 하며 회원들과 열 올려가며 공부하지만 실은 그런 것이 우리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프로그램 막바지에 이르면 `사람에 대한 이해와 희망`만으로도 충만해진다. 어느새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자리엔 사람의 훈기로 가득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다사로운 분위기를 아무도 말하는 이는 없지만 서로 감지하게 된다. 추위에도 빠지지 않고 아기 손잡고 오는 것도 모자라 따뜻한 차를 준비하는 분, 남들보다 먼저 와 원탁 대형 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분,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챙기며 관심을 가져 주는 분, 유머와 생활의 지혜로 주부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주는 분 등등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분들을 우리는 만났다.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서로를 공감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번 프로그램의 세부 목표 중의 하나는`짧은 글로 힐링하기`였다. 각자 추천한 그림동화 한 편씩을 매주 돌아가면서 읽었다. 한정된 시간, 서로의 마음을 보듬기엔 그림동화보다 나은 것도 없었다. 누군가 동화를 낭독하면 여기저기서 공감의 감탄사나 탄식의 한숨이 섞여 나오곤 했다.`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를 낭독하면서 부모가 된다는 것, 올바른 자녀관을 갖는다는 것 등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 말썽을 부려도 내 아이, 기쁨을 선사해도 내 아이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있는 한 너는 늘 나의 귀여운 아기`로 자식은 엄마에게 존재하고, 그런 자식에게 한결 같이 자장가를 불러주는 상징적 존재로 엄마 또한 존재한다. 세월이 흘러, 늙은 엄마 앞에서 어른이 된 아들이 불러주는 자장가 앞에 서면 끝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사람이 희망이며 사랑이 곧 삶의 의미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람 사이에 흐르는 훈훈한 공기를 공유하는 것 그것이 사람 모이는 궁극의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1

신춘문예 단상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다. 한때 그것은 문학청년의 로망이었다. 출판 매체가 다양하지 않고, 신인 등용문이 넓지 않았던 시절의 얘기다. 요즘은 굳이 신춘문예를 통하지 않아도 작가가 되는 길은 널렸다. 성실한 열정으로 매진하는 사람이라면 출판사가 먼저 알고 작가가 되도록 도와준다. 신춘문예라는 등단 제도가 꼭 필요한 시대는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면 쓰는데 관심이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춘문예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한 분야에 몇 백 명이 응모하는데 달랑 한 명만 뽑는 신춘문예 제도는 어찌 보면 잔인한 게임과 같다. 게다가 완전무결하게 공정한 것도 아니다. 최종심에 안착한 작품들이 모두 좋아도 한 편만 뽑아야 되니 심사자의 성향과 주관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운 있는 자가 당선이란 왕관을 쓰게 된다. 출판 매체들이 내거는 신인상 쪽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신춘문예에 응모하지만 출판사 쪽보다 나은 작가를 발굴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도 신춘문예에 사람들이 몰린다. 왜일까?신춘문예 제도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새해 첫날, 제 이름 자가 박힌 작품이 버젓이 지면에 실릴 수 있는 영광을 얻는다. (그것도 메이저급 신문이라면!) 일회성일지라도 쓴 글에 대한 보상 치곤 쏠쏠하다. 두 번째로 문단에서 신예작가로 인정해준다지 않는가. 새해 첫날부터 새로운 작가 탄생을 신문사에서 홍보해주니 생각할수록 꿈만 같다. 마지막으로 두둑한 상금이다. 짧은 소설 한 편에 몇 백만 원부터 천만 원에 이르기까지 고액의 고료를 준다니 이보다 달콤한 유혹이 어디 있겠나.하지만 이게 함정이다. 잔치는 끝났다. 대개 머잖아 잊힌 이름이 되고 만다. 신춘문예 당선 자체는 작가의 길과 무관하다. 작품 없는 작가에게 신춘문예란 타이틀이 무슨 소용인가. 단발성 등단 절차가 아니라 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우선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십이월이다. 그 진지함의 제일 순서는`부지런히 쓰기`라는 건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0

목소리의 진실

흔히 착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목소리와 상대가 받아들이는 내 목소리의 느낌이 같은 것일 거라고. 하지만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 공기 중에 퍼지는 내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몸주체가 각각 나와 상대로 다르니 목소리도 달리 들릴 수밖에 없다. 비염 목소리를 달고 사는 나는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 주로 오해를 산다. 부러 목소리 톤을 높이지 않는다면 십중팔구는 `어디 아프냐, 감기 걸렸냐, 자다 일어났냐`고 상대는 조심스레 확인한다. 아프기는커녕 혼자 빈둥거리며 잘 노닐고 있을 때 주로 상대는 그런 느낌을 받는다. 혼자 있다 보면 말에 노출될 기회가 없고 그러다 보니 목소리 톤은 낮아지고 분위기도 가라앉게 된다. 여기다 오래 앓아온 비염 때문에 발성 기관마저 왜곡되니 처량한 아픈 목소리로 들리나 보다. 감기 걸렸냐고 상대방이 되물을 때마다 `멀쩡한데 비염 목소리 때문에 그래요.`라고 변명하려니 스스로 한심해질 때도 있다.그럴 때마다 사람 고유 목소리의 진실은 어디일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었구나! 김중혁의 에세이 `모든 게 노래`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진짜 목소리는 내가 내는 목소리와 상대방이 듣는 목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진짜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어쩌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39쪽)`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생각한 내 목소리는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공기라는 중재 과정과 상대 청각이란 거름망을 거쳐 상대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와 상대방 모두 진실을 말하고 듣지만 그건 온전한 진실이 아니다. 진실한 목소리는 상대에게 전달되기 전, 공기 중을 통과하는 그 찰나에만 존재한다. 그 짧은 순간을 찾아 헤매는 과정, 그것이 삶이란 생각이 들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9

굴 껍데기처럼 말없이

평북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과 남쪽의 소도시 통영은 다소 생뚱맞은 조합이다. 하지만 백석의 연애사가 통영과 관련 있기에 사람들은 백석과 통영을 함께 떠올린다.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 덕에 우리는 통영에서의 백석 행장을 상상으로나마 그려 볼 수 있다.통영 `천희`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처녀`를 천희라고도 불렀나 보다. 동료 기자의 소개로 백석은 통영 출신 이화여고 학생 `란(蘭)`(박경련)을 만난다. 시인이 24살 때였다. 란의 부모에게 청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란과 결혼한 사람은 바로 백석과 란을 연결해준 그 친구였다. 시인은 큰 상처를 얻었지만 그 덕에 우리는 바람결 같은 그의 통영 관련 연시를 낭송할 수 있게 되었다.시인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이란 시에서 란에 대한 애틋함과 자신을 배신한 친구에 대한 서운함을 언급한다.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는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나지막한 집에서 지아비와 어린 것 옆에 끼고 대굿국으로 저녁을 먹는다고 노래한다. 통영에 와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단 한사람을 생각하면서 시인은 외로이 대구탕을 먹었을지도 모른다.`통영`이란 제목의 시 두 편을 연결하면 백석의 `란`에 대한 그리움의 모자이크가 완성된다.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리는 날,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 도시에서 미역오리 같이 마르고 굴 껍데기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한 처녀를 객줏집 마루방에서 만난다. 처녀는 `명정골 정당샘` 근처에 산다고 들었다. 물 긷는 여인네들 가운데 혹시 `란`을 만날까 백석은 충렬사 돌계단에 앉아 바닷사공이 된 심정으로 길 건너 정당샘을 내려다본다. 그렇게 만나지 못한 사랑은 시가 되었다. 백석의 로맨스를 알고 통영에 가는 이라면 명정골 정당샘과 충렬사 계단을 무시로 지나치지 못한다. 먼 타향 사람 백석마저 붙잡아 놓는 힘 이것이 통영, 아니 사랑이 위대한 이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6

불러주는 데 있더나?

곽경택 감독의 `친구2`는 단순 조폭 영화로 읽히지 않는다. 삶에 관한 여러 은유적 메시시를 담고 있다. 전작이 주는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네티즌들의 평가는 접어두련다. 조오련이랑 바다거북이랑 수영 시합하면 누가 이길까. 삶이란 이런 비루한 질문의 연속이고, 그런 질문들에 괜찮은 답이 있을 리 없다는 걸 말해주는 영화이다. 폼 나게 살고 싶지만 결코 폼 나지 않는 삶의 비애를 조폭 군단의 형식을 빌려와 들려준다. `어른 남자가 내 편 들어준 게 그때가 처음입니더.` 동수의 아들 성훈(김우빈)이 준석(유오성)에게 고백할 때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독한 격랑의 생채기만 쌓아온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내 편을 얻었다는 안도감만으로도 천국을 만난 기분이 된다. 사람은 많아도 내 편은 드물다는 것을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후회할 선택만 하고 사는 게, 그게 건달이라고 준석은 읊조린다. 어찌 건달만 그렇겠는가? 삶 자체가 후회라는 선택의 연속이다. 후회 없는 삶이란 후회하지 않기로 한 그 마음에서 오는 것이지, 삶 자체에 후회가 없을 수는 없다. 그때 그 시간에 열심히 할 걸, 그 때 그 말을 하지 말 걸 등등 후회로 점철된 시간이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건달이 쪽팔리면 되겠나,고 준석은 말한다. 건달만 그러할까. 누구나 쪽팔리면 얼굴 들기 힘들다. 건달에게는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솔직한 멋이라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럴 용기조차 없기 때문에 더욱 쪽팔림을 감수해야 한다. 저 대사를 뒤집으면 보통 사람들은 쪽팔림을 쉽게 팔면서 산다는 말과 같다.모든 걸 잃은 뒤, 어디로 가겠냐는 부하의 말에 준석은 씁쓸하기 짝이 없는 한 마디를 던진다. `나를 불러주는 데가 있더나?` 늙으면 아픈 재미로 산다는 페이소스 강한 준석의 말에 빗대자면, 변방으로 밀리면 외로운 재미로 산다. 그게 삶이다. 한때는 치열하게, 더러는 울컥하며, 끝내 외롭게 스러져 가는 것, 삶의 허무를 영화는 조폭이란 그림을 빌려와 극적으로 보여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5

영화보다 현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는 건 현실을 그리지만 현실에서 어느 정도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와 현실이 같다면 굳이 영화로 그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숱하게 제작되는 로맨틱 코미디는 현실보다 과장된 에피소드를 반영하고, 그것도 모자라 웬만하면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현실처럼 밋밋한 이야기의 나열에다 지리멸렬한 결말이라면 누가 영화관을 찾겠는가. 현실이지만 현실 같지 않은 그 무엇에 기대고 싶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관을 찾는다. 오랜만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다시 봤다. 이 영화는 위에서 말한 현실이 아닌 현실을 기대하는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리얼리티 최적화`가 그 목표인 것처럼 과장된 장면과 억지결말을 유도하지 않는다. 노회한 감독은 관객이 영화 속 인물과 호흡하고, 영화 속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철저히 계산된 앵글을 들이댄다.액자 영화를 표방하는 이 영화에서 우연히 새신랑 역을 맡게 된 호세인은 특정 장면에서 자꾸만 NG를 낸다. 마을 지진으로 죽은 사람의 수를 대본에 써져 있는 것보다 훨씬 줄여서 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화 속 장면이라지만 죽은 사람 숫자까지 속여서 현실을 왜곡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찍는다는 표면적 설정은 신부 역을 맡은 테헤레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호세인의 마음을 전하는 데 맞춤하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절절하고, 더 애틋하고, 더 사무치고,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과장 없이 담아낸다.현실을 벗어나 위로를 얻고 싶을 때 영화를 보러 간다. 하지만 반대로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음을 확인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기도 한다. 구불구불 올리브 나무 사이로 멀어져 가는, 화답 없는 테헤레의 여정을 뒤쫓는 호세인의 다급한 발걸음은 곧 현실 속 관객의 것으로 바뀐다. 빽빽한 올리브나무 사이에 길이 있고, 저마다의 절절한 희비극을 안은 사람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길을 간다. 아련하고 애틋한 그 사연은 왜곡 없이도 가뿐히 영화의 명장면이 되어주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4

심기

`마음으로 느끼는 기분`을 심기(心氣)라고 한다. 상대의 심기를 너무 헤아려도 진상이요, 그 심기를 자극하거나 도발하면 밉상이다.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제 입지를 높이려 욕망하는 자는 은근히 권력자의 심기를 자극하고 도발한다. 백성 입장에서는 둘 다 똑같아 뵌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지난 달 박 대통령이 영국 방문을 했을 때 런던의 모 극장에서 한국영화제 특별시사회가 있었단다. 애초의 영화제 개막작은 `설국열차` 또는 `관상`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그 자리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숨바꼭질`로 바뀌었다나. `설국열차`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빗댄 계급 투쟁 이야기라서 안 되고, `관상`은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 찬탈을 한 등장인물이 나와서 안 된다는 식이다. 인사차 들러 예고편 2분을 보고 떠나는 VIP를 위한 배려치고는 너무 심한 자기검열이다.실제 대부분의 권력자는 나무라지 않고 핀잔하지도 않는다. 심기 불편할까봐 주변인들이 알아서 기는 게 문제다. 재외 국민에게 용기와 힘을 보태는, 의례적 행사 참석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런 `지나친 헤아림`이 도리어 불편했을 수도 있다.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해서 화가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물론 반대로 죄 없는 가진 자에게 도발을 감행해 심기를 자극하는 주변인도 많다.세상일은 제 맘대로 되지 않는다. 남 뜻대로 될 때가 훨씬 많다. 객관적으로 나보다 남이 옳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단, 가진 자나 권력자들이 그들 맘대로 할 의사가 전혀 없음에도 주변인들이 앞서서, 그들 말이 다 옳으니 그들 심기만을 살피겠다고 한다면 못 가진 자, 안 가진 자의 심기는 누가 보살피나? 언제나 타인은 옳을 수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가진 자가 옳다는 뜻은 아니다. 심기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모두에게 있다. 도발해서도 눈치 봐서도 안 되는 오묘한 심리가 인간의 `심기` 안에 들어 있다는 걸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3

과잉교정인간

`과잉교정(overcorrection)`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강제로 책임지게 하기 위해 특정 행동을 지나칠 정도로 반복하게 해 문제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심리학 용어인데 문제 행동이 수정될 때까지 강제로 반복시키는 방법이란다. 잘못된 행동이 지나치게 일어날 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이 말은 행동 주체나 교정 조력자 양측 다 `지나친` 부분이 있을 때 쓰이는 것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음식을 흘릴 경우 단순히 흘린 음식을 치우는 것을 넘어 바닥 전체를 닦게 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졌을 때 그것을 제대로 놓을 때까지 반복해서 제 자리에 정돈하게끔 하는 것도 과잉교정에 해당된다. 이것의 단점은 지나친 반복으로 반항심이나 적대감 등을 키울 수 있고, 강압적 훈련으로 인한 윤리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흔히 `오버한다`는 말이 있는데 과잉교정 용어 자체의 뉘앙스에서 보듯이 뭐든 지나쳐서 좋을 건 없다.과잉교정이란 말에서 파생되어, 네티즌 사이에서 회자되는 용어가 `과잉교정인간` 이다. 잘못된 언어사용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지닌 사람을 일컬을 때 쓰이는데 표준어, 맞춤법, 띄어쓰기 등 지나치게 문법에 얽매이거나 이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한다. 잘못된 언어를 쓰는 게 좋을 리는 없지만 `과잉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콕콕 집어 교정하려는 태도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음을 꼬집는 것이리라.말의 규범을 지키는 것은 말을 다루는 사람들의 기본자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조차 말의 노예가 되어 시시콜콜 그 잘못을 지적하려 든다면 피곤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영역이 언어 분야이다. 생활이 바뀌는 것만큼 언어는 빠르고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언어의 사회성을 인정하는 융통성과 언어 규범을 지키려는 원칙,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것 자체가 `오버`인 게 우리 언어 활용의 현 주소인지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2

강박은 예술을 낳고

프로이트가 진단에 의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여러 강박증을 지녔다. 해부도에 능한 다 빈치였건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그릴 때, 남자 몸은 세밀하게 표현하지만 여자 몸은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그렸다. 다 빈치가 무엇인가에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분석했다. 다 빈치는 또한 어머니의 장례식 비용을 강박적이리만큼 세부적 회계 방식으로 기록했다. 얼핏 어머니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냉혈한 같아 보이지만, 괴로움을 표출하는 다 빈치의 다른 방식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조차 이성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서자로 태어난 다 빈치는 계모에게 입양되는데 생모와 함께 했던 기간 동안 모자 관계는 무척 돈독했다. 지나치게 어머니에게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 빈치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다른 여자와의 교제에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고 프로이트는 추측한다.`모나리자`의 미소가 불가해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잡을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며 모나리자 속에서 어머니의 미소를 발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모나리자가 미완의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소유욕이 강한 어머니 밑에 자란 아들은 강박증을 가지기 쉽다. 그녀의 모든 것인 아들이 완벽하기를 어머니는 바란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아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빈치의 경우 그런 완벽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림을 왜곡하거나 미완으로 남긴 셈이다.프로이트의 눈에 비친 그는 성숙한 성인이 아니었다. 그의 의식은 모성과 분리되지 않은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강박적 집착이 다 빈치의 예술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감성과는 멀어 보이는 치밀한 계산과 과학의 방식으로, 말할 수 없는 내면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강박의 소산물일 수도 있다는 게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 누구나 크고 작은 강박 증세를 품고 있다. 예술가는 그것으로 꽃을 피우고, 범인들은 그것이 꽃이 되는지조차 모른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29

인번거노

조정육 선생의 `행복한 그림읽기`라는 블로그가 있다. 담백하면서도 분명한 논지의 글이 올라와 내 취향에 맞춤하다. 여러 카테고리 중에 그림으로 읽는 공자, 라는 코너가 있다. 공자의 활동 상황이 그려진 고전 그림을 제시하고 관련 고사 성어를 곁들여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시리즈물이다. 내 짧은 소견으로 다른 학자들이 시도하지 않는 영역을 개척하는 것 같아 신기하면서도 호기심이 인다. 관련 그림을 찾아내는 수고도 대단한데다 그것으로 독자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다니 고맙기 그지없다. 그 중 오늘 읽은 `인번거노`부분은 무척 인상적이다. 공자가 정치할 때 장사치는 저울을 속이지 않았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이가 없을 정도로 지도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공자 덕에 강해지는 노나라에 위기를 느낀 이웃 제나라가 계책을 꾸민다. 미인계를 써 노나라 군주가 미혹에 빠지면 공자가 충언을 할 테고, 충언을 멀리하게 된 군주에게 환멸을 느낀 공자가 결국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는 시나리오다.제나라가 원하는 대로 노나라 군주는 환락에 빠졌고, 자로가 스승인 공자더러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때 공자는 `주군이 하늘에 제사 지낸 뒤 고기를 나누어주지 않으면 떠나겠다.(인번거노)`라고 답한다. 고기를 받지 못한 공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떠난다. `그깐 제사 지낸 고기 못 받아 삐쳐서 떠나는 놈`으로 떠날 구실을 만든 것이다.그건 공자의 진심이 아니었다. 공자가 달리 공자이겠는가. 어차피 떠날 몸, 구차하게 군주가 싫어서 떠난다고 핑계대지 않고, 스스로 모든 짐을 졌다. 남은 군주를 위한 배려로 위악을 떤 셈이다. 너무나 공자다운 생각이다. 충언이 통할 때까지 계속 설득하면 좋겠지만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멈추고 떠나는 수밖에 없다. 떠나는 와중에도 주군을 위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선한 자를 위한 방패막이가 아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한 자기희생이 아니던가. 공자가 아니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김살로메(소설가)

2013-11-28

굴원과 어부

전국시대의 굴원은 초인의 노래인 초사(楚辭) 문학에 능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어부와 굴원이 나눈 대화체 이야기를 되새길 때마다 굴원보다는 어부의 말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아무래도 어부가 현실적인 인물이라서 그럴 것이다. 굴원만큼 강직한 사람은 문헌 속에서나 흔하지, 일반적으로는 작품 속 어부처럼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청렴결백한 굴원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굴원의 죄라면 완전무결함이 가장 큰 죄였다. 잘못하지 않음이 죄가 되는 건 잘못 많은 정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제 그의 할 일은 수척해진 몸으로 강호에서 시나 읊는 것이었다.어부가 물었다. 큰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냐고. 굴원이 답한다. 혼탁하고 취한 세상에 홀로 깨끗한 채 깨어 있다가 쫓겨나게 되었다고. 어부가 충고한다. 사물에 얽매이지 말고 세상 따라 변할 줄 알아야 한다고. 모두 탁한 물이면 진흙탕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하고, 모두 취했으면 싸구려 술을 마시면 되지 고매한 처신으로 추방을 자처할 일이 무엇이냐고. 굴원이 응한다. 머리를 감았다면 관을 털어 쓰고, 목욕을 했다면 반드시 옷을 털어 입어야 한다고.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는 건 가당치 않다고. 그럴 바엔 강물에 뛰어들어 고기밥이 되겠다고.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순 없다고. 지친 어부가 웃으며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간다. 다음과 같이 노래하면서.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으면 되고, 그 물 흐리면 발 씻으면 되는 것을!”타협을 강조하는 어부의 삶과 대조적으로 굴원의 강직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삶이란 강물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흘러주는 게 아니다. 어쩌면 어부가 부른 창랑가처럼 한 세상 둥글게 살아가는 게 범부(凡夫)의 일상이라는 것을 비틀어 보여주기 위해 굴원은 제 강직한 삶을 빗대어 이런 이야기를 남겼는지도 모른다. 범부 부처되기가 위대한 건 그렇게 된 분이 오직 부처 한 분이기 때문이리라./김살로메(소설가)

2013-11-27

겸허해지기

다시 수전 손택이다. 1961년 어느 봄날의 일기에서 그녀는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을 하루에 스무 번씩 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시린 무릎에 전율이 일 정도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다. 온통 나라가 시끄럽기만 하다. 한쪽에서는 NLL 포기 발언에 대해 물고 늘어지고 다른 쪽에서는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거품을 문다. 민생과는 별 관계가 없는 사안을 두고 지겹도록 몇 달째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들어 보면 모두 옳다. 일을 벌이는 쪽에서는 그들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고, 꼬투리 잡는 쪽에서는 그 입장이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단다.정치가 시끄럽고 관계가 뒤틀리는 건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그를 수 있고, 너도 옳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왠지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니, 그게 두려워 괜히 목소리를 높이고 과격한 삿대질을 곁들이는 것이다.이런 인간의 치졸한 속성을 파악했기에 젊은 수전 손택은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하루에 스무 번씩이나 가슴에 새겼으리라.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긍정의 효과를 발휘하는 썩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세뇌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귀히 여기는 사람이 타인도 귀하게 대접한다고 수많은 심리학 서적들이 가르쳐왔다. 하지만 그건 서로가 서로를 귀히 여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한 일이고, 정치 현실에서는 적용되기 어렵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 획득`이다 보니 서로 배려하는 미덕 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흠 잡는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나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신념이 너무 확고하면 아집이 생기고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최소의 겸허 모드를 곁에 두었기에 손택은 그토록 진솔한 자기성찰에 가닿을 수 있었으리라. 진정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들일수록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걸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26

시크와 시니컬

의외로 대중들이 잘못 알고 쓰는 외래어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시크`(chic)라는 말이다. 나 역시 그 단어를 내 식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뭔가 도도하고 무심해 타인의 의사에 휘둘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더러 `시크하다`고 표현해왔다. 우연히 인터넷 게시물을 보다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당황했다. 당장 사전을 검색해 봤다. 시크하다 - `세련되고 멋있다`라고 되어있다. 도도하다, 차갑다, 등 소위 `쿨하다`는 의미는 그 어디에도 없다. 잘못 알고 쓴 경우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시크란 말은 패션용어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다. 독일어로 세련되고 맵시 나는 경우를 일컬을 때 쉬크(schick)라고 한단다. 프랑스어(chic)를 거쳐 영어로 보편화 되었고 우리나라에선 시크란 신외래어로 쓰이는 모양새다.화려한 원색이 아니라 흰색과 검정색 톤의, 차분하면서도 도회적 감각을 추구하는 패션을 두고 시크하다는 표현을 썼다. 세련되고 멋있다, 라는 패션 용어와 도도하고 차갑다는 성격 이미지는 묘하게 어울린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성격을 규정할 때도 시크하다는 표현을 하게 된 모양이다.시크란 말이 무심하고 도도하다는 의미로 쓰인 건, 비슷한 단어인 `시니컬`(cynical)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냉소적인 데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말이 시크와 비슷한 발음인데다 어쩌면 시크의 어원이 시니컬이라고 착각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어딘지 모르게 냉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더러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 사람 시크해”라고 말해왔다. 한데 그 원뜻이 그 사람은 세련되고 멋있어, 라는 것이었다니 위로가 된다. 냉소적이면서 이기적인 도회풍 사람들이 멋있고 세련된 패션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으니 아주 잘못된 표현이라고도 할 수 없다. 시크한 패션을 추구하는 사람이 순박한 성격을 지녔다면 어딘지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약간은 시니컬한 사람이 적당히 시크한 패션을 보여준다면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그러니 시크한 자 시니컬해도 용서하련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25

언어는 사람을 규정한다

뜨는 드라마 중에 `응답하라 1994`가 있다. 시대상에 맞지 않는 일일드라마나 재벌과 신데렐라 이야기를 다루는 미니시리즈와 확연히 다른 현실적인 내용이라서 꼭 챙겨본다. 거기서도 우리식의 위계질서 의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씁쓸하면서도 공감을 하게 된다. 같은 나이인줄 알았던 대학 동기가 두 살이나 어리다는 걸 알게 되자 등장인물은 다짜고짜 누나 행세를 한다. `나이도 어린 게 누나 앞에서 까불고 있다`는 사회가 가르쳐준 고정관념을 내세워 우위를 점하고자한다. 상대남의 멱살을 잡고 수직 관계를 인정하라고 윽박지른다. 언어는 형식을 낳고,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소통 부재를 경험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모순된 언어 형식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말의 형식은 세밀한 등급까지도 규정한다. `하겠습니다, 할게요, 할게, 해줄게` 등이 뜻하는 바와 같이 말꼬리 형식에 따라 타자와 나의 계급은 분명하게 규정된다.대학입학 후에도 자기소개를 할 때 몇 학번인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밝힌다. 새내기인지 재학생인지 단순히 궁금해서가 아니라 상대와 내가 어떤 계급 구조를 형성할 것인지를 규정하는 탐색자료로서 그 학번놀이가 필요한 것이다. 따르고 거둔다는 명목으로 선후배의 선을 가르지만 실은 위계질서에 자연스레 편입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 사회에서부터 굳어진 이런 불문율은 사회에 나와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고착화된다. 행여나 이런 질서에 저항이라도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너 몇 년 생이야? 민증 까 봐.`, `새파란 것이, 니 애비랑 내가 친구다.` 등등의 익숙한 언어폭력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숫자놀음으로 예시되는 이런 위계 체제가 진솔한 소통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이지만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구축되어온 세계관이 불편할지언정 질서유지에는 더할 나위 없었기 때문이다. 소통 불편보다는 질서 유지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이러한 언어형식의 노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22

수잔 손택의 젊은 날

거의 매일 일기를 쓴 적이 있었다. 너무 어려 격정이 삶의 전부를 차지하던 시절이었다. 칼날로 스스로를 베거나, 세상을 향한 분노나 원망이 주된 내용이었다. 청춘이 괴로워 그저 기록함으로써 심리적 해방을 맛보던 시절이었다. 돌아서 들쳐보는 일기장은 회한과 수치심으로 가득 찼다. 누가 볼까 부끄럽고, 스스로도 다시 펼치고 싶지 않았던 그 일기장은 모두 불쏘시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수전 손택의 젊은 시절을 일기로 읽는다. 일군의 사람들이 일기를 쓰고 태울 때 누군가는 내밀한 일기장을 남겨 잊고 지냈던 과거나 사유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줄 필요가 있다. 손택의 `다시 태어나다`는 총 3권으로 기획된 그녀의 일기 중 첫 번째 책인데, 사춘기 시절부터 청춘 부분을 다루고 있다.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사랑, 결혼 생활의 갈등과 환멸, 사물과 대상에 대한 거침없는 눈썰미 등의 보고서로 읽힌다.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는 그녀의 공적인 책들과 비교해 격정과 수치와 회한의 옷섶을 풀어놓은 그녀의 일기를 보면서 사람살이는 참으로 비슷하구나, 하는 위안을 받는다.동성애자였던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두 여자에게서 느낀 자신만의 수치심과 모욕과 고통과 자괴를 지나치리만큼 진솔하고 가혹하게 고백한다. 개인적 정념을 넘어 그녀가 보통 사람과 달랐던 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자기 확신과 끊임없는 열정이었다. 육체적 욕망을 넘어 그녀에게는 지적 갈망이라는 거대 우물이 있었다. 스스로 판 그 우물에 문학과 음악과 영화와 비평이라는 샘물이 흐르도록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 모든 열망은 오로지 작가로 거듭나겠다는 꿈 하나로 연결되었다.손택 자신의 청춘 보고서는 사적인 일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번지고 무너지는 자아를 다잡아 어떻게 창의적으로 확대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좋은 예가 되어준다. 누가 뭐래도 욕망은 다양하고 자아는 개별적이다. 육체적 욕망과 지적 욕구를 스스럼없이 발산해 나간 그녀의 젊은 내면이 그녀가 남긴 인문학적 저술의 예술혼이었음을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21

미용실 풍경

맵찬 바람이 몰려왔다. 늦저녁 마지막 손님이 되어 미용실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푸석이고 뻗치는 머리칼에도 겨울 채비가 필요했다.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퍼머를 하겠다며 급하게 외투부터 벗었다. 스트레스가 쌓여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머리칼이라도 손질해야겠다고 했다. 마감 직전에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고객을 보며 주인은 난색을 표했다. 단골이라 할지라도 주인 입장에서는 불청객일 터였다. 진종일 바투 선 채 남의 정수리를 거두는 일은 멀쩡한 심장을 진창에 빠뜨렸다 건져 올리는 것만큼 힘들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 여자가 먼저 말했다. 오늘 하루 허방에 발 디뎠다고. 맥박 뛰고 팔 저린 하루였단다. 관절 뻣뻣해진 손가락은 구부려지지 않았고 화덕처럼 달아오른 가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일 있는 곳에 말이 붙고, 이름 붙는 집에 흠집 먼저 보인다며 초점 잃은 눈으로 거울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일 만들지 않고 덕 쌓지 않는 것이 처신의 수칙이라며 머리칼을 마구 헝크는 것이었다. 급할 것 없던 나는 여자에게 먼저 자리를 내어주었다. 뛰는 심장에 가위질을 할 수 없다면 젖은 머리칼이라도 찢어 발겨야만 숨통 틀 것 같다던 여자는 금세 의자 안에서 편안해졌다. `뚫어뻥` 같은 주인의 가위질이 이리저리 막힌 여자의 물길을 싹둑싹둑 뚫고 있었다.산다는 건 던적스러운 사다리 건너기와 같았다. 칸과 칸 사이 그 좁은 곳에 허방이 있었다. 그곳에 발 내딛는 횟수가 잦거나 그 헛발질의 강도가 셀 때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표현했다. 한 잔 술로도, 한 바퀴 달음질로도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남은 화를 삭이러 여자들은 미용실로 향한다.싹둑싹둑 설움의 휘파람처럼 검은 별 뭉치가 바닥으로 흩어진다. 굳었던 손가락도, 조여오던 심장도 제 자리를 찾아가는지 여자는 와불처럼 고요하다. 자르고 둥글어진 머리칼만큼 낯빛은 깊어진다. 예고 없이 스트레스 절정에 닿는 날이면 몇몇의 여자들은 미용실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자르고 휘감으면서 내려앉는 평화./김살로메(소설가)

2013-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