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잘 든 벚나무 가로수 풍광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반은 떨어져 누렇게 길 위에서 스러져가거나 벌써 저 먼 우주 속 먼지로 멀어져 가고, 아직 남은 나머지 반은 달뜬 몸으로 세상을 향해 화려한 무언의 발화를 시도한다. 먼저 먼지가 되고, 더러 바래져가고, 남아 무르익어가는 그 잎들의 고향인 나무를 보며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한 살이를 생각한다. 나목으로 눈비 맞다가, 물올라 잎 나고, 그 잎들 무성히 하늘도 가렸다가, 다시 저토록 화려한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다. 담대하게 허물벗기 위해 온몸으로 불태우는 저 울음의 절정길. 그단순한 것을 보고 우리는 탄성을 지른다.
나무든 사람이든 생명에 유한성이 있다는 것은 같다. 하지만 겨울을 맞는 몇몇의 나무들이 한껏 제 잎들의 향연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다음 봄날을 예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가 새 계절을 맞는 순환고리에는 새봄이란 물리적 환원이 보장되지 않는다. 기왕의 몸은 그저 늙어가고, 다만 망가져갈 뿐이다. 몸이 삭으면 자연히 맘에 사무치는 게 늘어간다. 그러니 잎 붉어지는 단순한 저 자연현상도 단순하게만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나이 들수록 성숙해진다는 말은 사람들이 지어낸 자기위안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건 선명하게 슬퍼지는 것의 시작점이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