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그림의 원조 격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밀라노의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정물화 `채소 기르는 사람`은 똑바로 놓은 상태에서는 사람 얼굴이, 거꾸로 놓고 보면 바구니에 과일과 채소가 담긴 풍경으로 보인다. 원래 그림은 검은색 그릇에 각종 채소와 과일이 담겨진 평범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림을 거꾸로 놓고 보면 검은색 그릇은 모자로 보이고 각 채소와 과일은 사람 얼굴 하나하나를 가리키게 된다.
우리의 시각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런 단정적인 얘기보다는 적어도 두 개의 믿음 이상을 허용하는 열린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정서적 반응의 정도에 따라, 시각적 범위에 따라, 또는 심리적 기제에 따라 우리 눈에 비치는 대상은 달라 보일 수 있다. 그곳에 무엇이 있고, 그 무엇의 내용과 배경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 대상을 무엇으로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개인의 내면 심리에서도, 사회 무리 안에서도 이런 갈등은 적용된다.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이라도 밥벌이의 절실함 앞에서는 제 신념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아무리 자신이 보아온 그 무엇의 형상과 이미지가 선명하다 해도 상대가 경험한 그것의 형상과 이미지가 다르다면 제 눈만이 제대로 보았다고 고집을 피울 수도 없다. 한 대상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두 가지 이상이다. 그림의 왼쪽이나 배경이나 `거꾸로`를 봤다고 해서 그 그림을 잘못 봤다고 할 수도 없다. 원초적 모순을 내장하고 있는 개별자의 눈, 그것 때문에 갈등하고 그것 덕에 웃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저마다의 눈에 비친 세상만을 볼 수밖에 없는 화가이자 감상자로서의 인간의 한계라니!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