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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독립의 방해꾼 모성

집 떠난 자식은 독립한 것일까? 학업, 취업, 결혼 등의 이유로 자녀들은 일정 기간이 되면 부모로부터 떨어져나간다. 누가 봐도 독립이라 봐줄 만하지만 실은 이것은 물리적이고 현상적인 독립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홀로서기와는 한참 멀다. 아침저녁으로 체감 온도가 급격히 낮아진다. 간절기 겉옷이 필요할 터인데도 자식에게선 소식이 없다. 외로이 옷장에 걸린 자식의 외투를 보며 맘이 짠해진 엄마는 전화를 건다. 수업 중인지 받지 않는다. `옷 가지러 안 와?`문자를 보낸다. 두어 시간 지나도 답이 없다. `두꺼운 옷 갖다 줄까?` 그제야 답이 온다. `걱정 마세요. 좀 춥지만 견딜만해요. 주말에 가지러 갈게요.` 여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몹쓸 모성은 이제 `좀 춥지만`이란 자식의 문자에 자동으로 과민 반응하게 된다. 여간 추워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닐 것이라며 외투 없는 자식의 저녁 시간을 자청해서 자책한다. 그 밤에 외투를 들고 쫓아갈 판이다.정서적, 객관적으로 평정심을 잃지 않는 아버지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주책을 떠`는 이런 모성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견딜 만하다니 주말까지 참으면 될 것이고 그도 아니게 급하면 한 벌 사 입겠지. 다 큰 녀석이 제 앞가림도 못할까봐 걱정이냐고 짐짓 무관심을 가장한 위악을 떤다.흔히 볼 수 있는 집안 풍경이다. 다정도 병인양이라고 엄마들의 자식 걱정은 끝이 없다. 가만 보면 자식은 심리적, 정서적으로 분리될 준비가 되어 있거나 무덤덤한데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부모, 그것도 엄마 쪽이다.엄마가 노심초사하는 것만큼 자식들은 다급하지 않으며 엄마가 애면글면하는 것만큼 자식들은 힘들지도 않다. 자식은 엄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빨리 크고 앞서 간다. 뒷북치는 건 엄마 쪽이고 독립 못하는 것도 자식이 아니라 엄마다. 자식의 정서적, 심리적 홀로서기를 막는 가장 큰 적은 엄마 스스로다. 자식에게서 한 발자국도 자유로울 수 없는 엄마, 그게 모성의 속성인 걸 어쩌란 말이냐./김살로메(소설가)

2013-10-23

모창의 품격

`히든 싱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다. 프로 가수와 아마추어 실력자들이 출연해 그 가수의 히트곡을 불러 원 가수를 가려내는 경연 프로그램이다. 부스 안에서 얼굴을 숨긴 채 똑 같은 조건으로 노래를 부른다. 한 사람이 한 곡을 다 부르는 게 아니라 한 소절씩 돌아가면서 부르기 때문에 목소리만으로는 원 가수가 누구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가수와 경합할 출연자들 모두 준비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노래에 소질이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원 가수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숨소리와 발성법까지 완전히 익혔다. 어렸을 때부터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연습하고 연습했다. 이런 프로그램이 생길 줄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그저 노래가 좋아서 열심히 한 우물을 팠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목소리로만 승부하고 얼굴을 끝내 내밀지 않는다면 원 가수보다 훈련된 아마추어 가수가 더 원 가수 목소리처럼 판정단에게는 들릴 수 있다. 일반출연자들의 충분한 연습량은 전성기 때의 목소리를 되찾기 힘든 가수의 절정기 목소리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가수에게 불리한 그런 조건을 감안해서 경합 중반 이후에는 갇혀 있던 부스에서 나와 가수와 출연자들은 얼굴을 공개한다.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익힌 뒤에는 원 가수의 목소리를 맞히는 게 한결 낫다. 그래도 연습과 훈련으로 무장한 아마추어 출연자들을 쉽게 앞서지는 못한다. 이제껏 아슬아슬하게 원 가수가 진짜 원곡의 목소리 주인공으로 살아남긴 했다.한데 어제 신승훈 편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내로라하는 목소리를 지닌 그이보다 더 신승훈답다고 판정단이 한 출연자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신선한 감동이었다. 가수는 출연자를 배려해 자신을 알리려는 그 어떤 무리수도 쓰지 않았고 출연자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했다. 한 우물을 파는 출연자의 집념도 대단하고 그 집념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프로 가수의 미소도 아름답게 보였다. 치열하게 준비한 자들, 그 모창의 품격은 숭고해 보이고 지켜보는 마음은 숙연해지는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22

경험의 타인

위대한 철학자의 큰 사유도 알고 보면 작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유는 디테일한 경험의 집적물이다. 남들 눈에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체험이 한 사람의 인생관을 형성한다. 한 사람의 디테일한 1퍼센트가 그 사람의 숨겨진 모든 것을 말할 수도 있게 된다.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철학자들이 존재나 의식 등 자기 안의 문제들에 몰두했다면 현대철학자 레비나스는 특별하게도 그 관심을 `타자`에게로 돌렸다.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사유에 언제든지 반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는 레비나스 식 타자의 철학에 언제나 공감한다. 그의 사유를 한마디로 풀어 쓴다면 `나와 같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다`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 내가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감이 곧 나의 주체성이라는 것을 강조한다.이러한 그의 생각은 어릴 적 체험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은 그는 이후 한 번도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개인적 전쟁 체험은 그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존재론은 타자를 자기 안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전체성의 철학이었다. 개별성과 고유성은 무시하고 타자를 집단 속에 묶으려 하는 그 방식에 염오증이 일었다. 이런 통찰의 아픈 뿌리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타자는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그것을 무시하고 내 영향권 아래 두고 맘대로 부리고자 할 때 국가주의, 전체주의 같은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생긴다. 타자가 곧 나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이런 위험한 사고의 틀 안이라면 전쟁도 필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전쟁 통에 가족을 잃은 레비나스의 경험이 동일자로 흡수되지 않는 절대적 타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선명한 계기가 되었다.내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며, 내 욕망도 타인의 욕망이며, 내 환희 또한 타인의 그것이다. 나 이외의 것을 인정하고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확장시키는 의무, 그것을 레비나스는 어릴 적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윤리학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21

점자(點字)

손가락으로 글자를 더듬는 그들의 품새에 자못 숙연해진다. 숨겨둔 보물을 어루만지듯 오래 못 만난 자식 얼굴을 보듬듯 손끝에 모은 촉감으로 한 자 한 자를 더듬고 있었다. 그들에게 글자는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손끝으로 느끼는 그 무엇이었다. 점자 읽는 모습을 처음 봤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문예교실에서였다. 내가 넘긴 교재는 점자책으로 바뀌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글자를 손끝으로 읽는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한 분에게 다가가 양해를 구하고 조심스레 점자에다 손을 대어 보았다. 오톨도톨한 것이 손끝에 잡히는가 싶더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그간 내게 글자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손끝으로 느낀다는 건 막연한 감각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처한 상황을 해결하고 내게 주어진 일상을 꾸리기에도 급급한 날들이었다. 나와 다른 방식의 삶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때론 그 방식이 얼마나 특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었다. 이참에 그들을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에 대한 열정과 내공이 놀라울 정도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불편함은 그들에게 가서 적극적 긍정의 에너지가 되었다.한결같이 봉사하는 이들의 모습에도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부터 조금 보이는 사람들까지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이부터 읽지 못하는 이들까지 장애의 정도가 다른 그들 곁에서 봉사자들은 청아한 목소리가 되어주고 다정다감한 손발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면서 순간의 깨침이 오기도 했다. 그들에게 뭔가를 줘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이 무엇이든 끄집어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마련해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갑갑하고 지난했던 그들에게 필요한 건 일방적인 누군가의 말씀이 아니라 그들 얘기를 펼칠 수 있는 넓은 마당이었다.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그들에게 마음밭 한 곁을 내어주고 싶다. 점자책을 해독하는 그들의 손끝에 내 마음도 만져질 수 있다면./김살로메(소설가)

2013-10-18

채찍과 당근

누구나 칭찬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들이 칭찬만을 바라는 건 아니다. 거짓 칭찬은 안 한 만 못하다. 예를 들면 상급반 글 모임이 있다 치자. 쌓아온 글쓰기 연륜만큼이나 그들은 글을 보는 안목 또한 높다. 어떤 글이 매혹적인 것이며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것인지도 잘 안다. 안다는 것과 쓰는 행위는 별개라는 것까지도 꿰 차고 있어,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잘 안다. 해서 제 글에 대한 자부심도 있겠지만 그 글에 대한 타자의 충고를 최대한 겸허히 받아들일 줄도 안다. 왜냐하면 진심어린 도반들의 한마디야말로 제 글을 살찌우는 원동력이 된다는 걸 축적된 여러 활동을 통해 깨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료나 스승이 제 글을 칭찬해주면 기분 좋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쓴 소리를 한다고 특별히 서운해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스스로의 약점을 본인이 잘 알고 있고, 그 약점을 넘어서려면 주변의 채찍이 꼭 필요하다는 걸 서로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걸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하지만 이 경우는 어느 일정 수준에 도달한 부류의 예이고 입문자의 경우인데다 마음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의 글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데 옆에서 충고랍시고 누가 한 마디 한다면 그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그럴 수 있다. 글에 대한 객관적 눈이 뜨이기 전이기 때문에 그 어떤 좋은 충고도 고깝게 들린다. 그 상황에서는 채찍의 방식 보다는 그가 원하는 당근의 방식을 취한 채 마음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단련된 고수는 벌점을 달게 받지만 순수한 입문자는 가산점을 원한다. 고수가 당근을 겸연쩍게 여기기는 쉽지만 입문자가 채찍을 감당하기는 버겁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은 고수보다는 하수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당근과 채찍은 달리해야 하고, 달콤한 채찍도 충분한 당근이란 뿌리가 있은 뒤의 일임을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17

시간 여행

시간 여행에 관한 영화는 많다.`백투더퓨처`, `시월애`, `프리퀀시`, `나비효과`, `시간을 달리는 소녀`등 잘 알려진 것 말고도 수많은 작품이 있을 것이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영화의 계절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가을 정서와 어울리는 영화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추천하고 싶다. 소녀 취향적이고, 감성에 호소하는 이런 부류의 영화를 체질적으로 무미건조하고 담백한 것을 선호하는 내가 좋아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해던가, 가족 여행 중 차 안에서 딸아이의 권유로 접하게 된 영화였다. 별 기대 없이 봤는데 어느 순간 장면 하나하나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건 뭐지?`하는 야릇하고 오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신선함의 기운이었다. 감성적인 코드의 이야기도 다큐멘터리 식으로 이해하는 부류인 내가 온전히 가슴으로 영화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나이 들면 유치해지고 느슨해진다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20년의 시간차를 두고 샹륜과 샤오위는 첫사랑을 앓는다. 그들을 연결해주는 매개물은 피아노이다. 샹륜은 피아노 소리를 따라가 샤오위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때 샤오위가 연주한 곡이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는 셈이다. 그 비밀은 샤오위가 샹륜보다 이십 년 전의 사람이라는 것. 피아노를 통해 서로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지만, 샤오위로서는 자신이 처음 본 사람과만 만날 수 있다. 샤오위가 볼 수 있는 첫 대상이 늘 샹륜이라는 것이 보장되지 않기에 그들의 사랑은 오해와 안타까움의 연속이다.잘 알려진 `피아노 배틀` 장면은 연주의 예술성을 떠나 영화 자체에 몰입하게 하는 큰 동력이 되어준다. 쇼팽의 연습곡과 왈츠 등의 연주가 애틋한 시간차 만남의 매개물로 활용되는데, 격정적으로 빨라지는 연주 장면은 내재된 첫사랑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 같아 관객도 덩달아 호흡이 가빠진다. 가을 깊어질수록 순정한 가슴이 요청하는 격정의 한 순간에 초대받고 싶어진다. 그때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소년소녀처럼 시간 여행을 떠날 수만 있다면!/김살로메(소설가)

2013-10-16

관계는 상호적이다

인간관계의 호불호는 상대적이며 비논리적이다. 타인에게 괜찮은 사람이 내게 와선 비호감이 되는가 하면, 나와는 둘도 없는 사이지만 타인에겐 비호감이 되기도 한다. 인간관계는 객관적이지도 않고 정답도 없다. 이것을 인정하면 관계의 피로감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한데도 인정의 욕구가 있는 인간은 모든 관계에서 환희만을 맛보기를 바란다. 해서 어색한 관계를 만나면 그것이 자신의 잘못인양 자책하고 번민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잘못도 상대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 거니 가만 내버려 두면 된다. 첫인상에서 상대에 대한 호불호는 찰나에 결정된다. 시간을 십 분이나 한 시간 연장시킨다고 그 찰나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 순간의 판단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 감정을 유지하느냐 폐기하느냐는 상호보완적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로 근접성, 유사성, 친숙성, 상호성 등을 언급한다.물리적 거리가 가까우면 더 친해질 가능성이 높고, 취미나 관심사가 비슷해도 다가서기 쉽다. 원래 성격이 상냥하고 친밀한 사람이면 호감도가 높아 누구와도 쉽게 사귈 수 있다. 그래도 마지막 상호성이 사람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합당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대개의 관계는 교감 즉 서로 주고받음으로 형성되는데 그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몸짓, 발짓, 눈빛으로 상대에게 전달된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상대가 더 잘 안다. 내가 느끼는 만큼 상대도 느낀다.한 번 형성된 나쁜 인상은 다른 좋은 단서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내게 거슬린 언행을 하면 내 눈과 마음은 객관성에서 멀어진다. 내 프레임 안에서 상대는 부정의 영역에 머물고 상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번 잘못 엮인 감정은 재고의 여지마저 꺾어놓기도 한다. 그 노력이 부질없어 보이면 가만 두면 된다. 때론 인위적인 의지보다 자연스런 불편함이 훨씬 인간적일 때가 있다. 모든 이를 친구 삼겠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노력도 없을 테니./김살로메(소설가)

2013-10-15

글렌데일과 소녀상

LA 인근에 글렌데일 시가 있다. 지난 7월, 일본군 위안부의 비극적 사실을 되새기기 위해 그 도시의 시립 공원 한 편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모 한인단체 주도하에 시의회의 승인도 얻었다. 한데 이제와 데이브 위버 글렌데일 시장이 딴 소리를 한단다. 한 보수 우익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말벌집을 건드렸다, 소녀상을 세우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위버 시장은 소녀상 안을 의결할 당시에도 시의원 5명 중 유일한 반대자였다. 시립 공원 계획이 미완성인데다 무엇보다 글렌데일 시가 국제적인 논쟁에 휩싸이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반대했다고 했다. 인간적 감성으로 접근하면 괘씸하지만 한 도시의 수장으로서는 충분히 그런 고충을 가질 만도 하다. 하지만 소녀상이 세워진 지 두 달 이상이 된 지금에 와서 긁어 부스럼 식 인터뷰를 한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글렌데일에 위안부 소녀상이 건립된 건 아픈 역사를 공감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역사의식 때문이었다. 인구 20만의 글렌데일시는 삼분의 일 이상이 아르메니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역사도 우리만큼 핍박과 설움으로 가득하다. 1천년 이상을 페르시아, 동로마제국, 아랍, 몽골, 오스만 투르크 등의 지배를 받았다. 살아남기 위해 세계 각지로 흩어졌지만 끈질긴 민족성은 버리지 않았다. 일차 세계 대전 때 독립을 요구했다가 투르크 제국에 의해 강제 이주도 당한데다 인종 청소라는 대학살도 피해갈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미국으로 유입된 사람들 중 많은 이가 이 글렌데일 시에 모여 살고 있다.이 도시의 핵심 구성원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소녀상을 세우는 데 적극성을 보인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아픈 역사에 대한 연대와 공감은 소녀상 건립 이상의 것도 가능케 할 수 있다. 소녀상에 대한 일본 우파들의 트집도 볼썽사납고, 그들에게 휘둘리는 시장의 대응방식도 세련되지 못했다. 피해자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 가해자의 양심, 그것이 진정한 역사의 역지사지가 아니던가./김살로메(소설가)

2013-10-14

날갯짓

누구에게나 날개는 있다. 하지만 그 날개의 쓰임새는 천양지차이다. 약한 날개를 가졌으나 그 깃털을 보듬어가며 약진의 발판으로 삼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왕의 강한 날개로 태어났으면서도 그 기운을 뒷전으로 몰아내 퇴보의 빌미로 삼는 이도 있다. 서글픈 건 날갯짓을 일관성 있게 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라는 거다. 신은 인간을 핑계거리 많은 피조물로 만들었다. 해 봐도 안 되고, 하기 싫어서도 안 하고, 할 여건이 안 되어서 못하고 등등 갖은 이유로 우리들이 시도하지 않은 날갯짓에 대해 변명할 기회를 부여해주었다. 제대로 날갯짓을 해 본 적이 없다. 다이어트와 운동을 겸한다는 결심도 작심삼일이요, 매일 정해진 분량의 원고를 쓰겠다는 구호도 허방이기 일쑤고, 독촉 받는 원고를 마감 시간에 맞추는 것조차 힘겨운 일상이다. 주변인들이 뚝심 있게 제 날개를 펼치는 것을 보면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만날 그 정신만은 벤치마킹한다. 하지만 여러 핑계 때문에 실천이 될 리 없다. 그 핑계의 전부는 알고 보면 게으름이다.뉴질랜드 은화를 보면 키위새가 나온다. 부리가 길고 후각이 발달한 그 새는 날지 못한다. 아주 오래전 먹을 것이 풍부했던 뉴질랜드 땅의 키위새에게는 천적이 없었다. 굳이 날아다니지 않아도 먹을 것 천지였다. 자연히 날개는 퇴화했다. 하지만 인간이 그 땅을 접수하면서 키위새에겐 재앙이 따랐다. 인간과 함께 들어간 고양이, 들쥐의 먹이가 되고, 인간의 손쉬운 사냥감이 되는 바람에 한때 그 개체수가 멸종 위기 수준으로 줄었다. 키위새에게 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그리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천적 만들지 않는 삶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평화로움이야말로 제 영혼을 갉아 먹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묵묵히, 또는 소란스럽게 제 삶의 에너지를 분출하며 사는 모든 이들을 제 삶의 긍정적 천적으로 모실 일이다. 그들이 이끄는 일상의 방식에 내 영혼의 밥술을 얹어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고 싶다. 퇴화하는 날개 끝에 얻은 안주는 무서운 습관이기 십상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11

다시 한글날

연말에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면 기념품으로 탁상용 달력을 준다. 지난해도 그랬다. 한데 책과 더불어 꺼낸 달력 사이로`빨간색 9`자가 쓰인,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네모 스티커가 툭 떨어진다. 올해 다시 법정공휴일이 된 한글날에 붙일 공휴일 표시 종이이다. 새 달력을 인쇄한 뒤에 한글날이 공휴일로 재지정 되는 바람에, 추가로 빨간 글씨가 필요했던 것이다. 검은 글씨로 된 기존의 한글날 날짜 위에 빨간색 스티커를 붙이는데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1970년 공휴일이 된 이래 영광을 누리던 한글날은 1991년부터 국군의 날과 함께 법정공휴일에서 사라졌다. 너무 잦은 공휴일로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랬다는데 하필 한글날이 그 희생양이 될 게 뭐람, 하는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있었다. 젊은 날, 한글 전용 운동에 관심이 많았을 만큼 그 누구보다 한글에 대한 애정이 강했기 때문이다.한글에 대한 내 관심은 특별히 그것이 세계 제일의 과학적이고 창의적인 문자라거나 유네스코 세계 지정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거나 하는 이유와는 상관이 없다. 모든 언어와 문자는 소중하다. 한글만이라는 이유로, 한글이 우수하기 때문에 한글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언어와 문자의 존재 이유는 누가 봐도 분명한데 그 활용은 모국어를 제외하면 대개 사람들에게는 어렵기만 하다. 그나마 제 의지대로 부릴 수 있는 언어가 모국어인데, 제 생각과 행동을 맘껏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만하다.다시 법정공휴일이 된 한글날 아침, 경쟁하듯 각종 포털 사이트 이름이 예쁜 서체의 한글 이름으로 바뀌었다. 기분 좋은 울컥함이 밀려온다. 비록 하루만의 기쁨일지라도 잊히는 것보단 낫다. 한글날은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한글날 자체로 우뚝한 날이었으면 좋겠다. 저마다 지닌 얼을 맞춤하니 표현할 수 있는 젖줄 같은 글을 지니고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 받을 일인가. 그 젖줄은 당연하거나 무시해도 좋은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위대한 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10

`시네마 천국` 재개봉

`시네마 천국`이 재개봉되었다. 1988년산 영화라니 25년 만이다. 우리 지역에도 개봉관이 잡혀서 좋아했는데 상영 일정이 후할 리가 없다. 관객이 있어야 스크린이 오르지 않겠나. 이틀이나 상영 기간이 남았건만 조조로 일일 일회만 상영하다 보니, 내 일정과 맞지 않아 못보게 되었다. 명화 중의 명화라지만 케이블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심심하면 방영되었기 때문에 몇 번씩 본 사람들이 많아 관심을 덜 받게 된 것도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영화관을 찾아 명화에 대한 예우를 다하고, 감동 또한 배로 받고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아쉽다. 영화관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나 역시 `시네마 천국`은 몇 번 본 영화이다. 영국 탄광촌의 발레 소년 이야기인 `빌리 엘리어트`와 더불어 중고생을 위한 논술용 영화로 자주 활용한 덕분이다. 늙은 영화기사 알프레도와 어린 영화광 토토의 우정, 곁다리로 토토의 첫사랑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영화는 아프지만 따스하고, 가난하지만 사랑스럽다. 삶의 희로애락이 영화라는 거름망을 거치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영화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되, 삶보다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알프레도는 이 사실을 어린 친구 토토에게 깨쳐준다. 영화보다 인생이 훨씬 힘들다고. 첫사랑의 쓰라림도 없이, 경제적 곤궁도 없이 무료한 평화만 계속되는 게 삶이라면 영화 속에서 우리는 위안이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다. 첫사랑에 괴로워하는 토토에게 몸이 무거우면 발자국도 깊은 법이고, 사랑에 빠지면 괴로운 이유는 막다른 골목과 마주치기 때문이라고 일러준다. 화재로 시력을 잃게 되었을 때는 시력을 잃었지만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게 된다고 긍정한다.영화는 현실이 아니며, 현실은 그보다 훨씬 혹독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알프레도 덕분에 토토 내면은 윤택해질 수 있었다. 알프레도의 인생철학을 영화관에서 제대로 맛보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재개봉 덕에 `시네마천국`을 되짚어볼 수 있게 됐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08

여자가

어릴 때부터 `여자가`라는 말을 자주 듣고 산 세대이다. `여자가 문지방에 걸터앉으면 복 날아간다`, `어리바리한 남편도 남자다. 그러니 여자인 아내가 함부로 나서지 마라`, `정월 초하루부터 여자가 남의 집에 방문하거나 전화 걸어서는 안 된다`, `서방 갓 끈도 풀기 전에 여자가 고름 먼저 푼다` 등등 숱하게 그 `여자가`란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집안이건 밖이건 흔히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무의식적인 이런 학습 효과(?) 때문에, 어렸을 때 내 여성관은 다분히 노예근성이 포함 되어 있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친구집에 다녀 온 큰오빠가 그 친구 아내를 극찬했다. 라디오 진행자라는 그 아내는 얼굴도 고운데 맘씨는 더 곱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아무리 바빠도 남편 발 씻는 물을 꼭 안방까지 대령한다는 것이었다. 하룻밤 묵은 오빠 자신도 따뜻한 물대야 시중을 받았다면서 `여자가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어린 나는 커서 물대야 바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하늘같은 큰오빠가 저토록 옹호하는 것이니 그것이 진리라고 믿었다.요즘 세대는 `여자가`라는, 훈육을 빙자한 그 말을 듣고 자라지는 않는다. 자의식이 강해진 여자애들 스스로 그 말의 부당함에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세뇌된 우리 기성세대는 `여자가`라는 그 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모 부장판사가 법정에서`남편과 변호사가 있는데, 여자가 왜 이리 말이 많으냐`는 식의 발언을 했단다. 여성은 종속적이어야 한다는 그 시각이 불편하고 불쾌하다.중년인 그 판사도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라는 말을 자주 접했음에 틀림없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고, 한 번 길들여진 의식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약자인 여성에 대한 비하의식을 간직한 사람이 약자 전반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갖추고 있을 지 의문스럽다. 법의 존재 이유는 공정함에 있지만, 그 공정함의 혜택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언제나 약자 쪽이라는 것을 그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07

고독사(孤獨死)

지난 2일은 `노인의 날`이었다. 훈훈한 소식으로 노년층을 위무해도 시원찮을 판에 60대 노인이 백골로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먼저 날아든다. 보도에 의하면 사망한 지 5년이나 된 노인의 집안은 어두컴컴한데다 거미줄이 얽혀있었고, 주위 환경은 너저분했단다. 겹쳐 입은 아홉 겹의 옷도 맹추위와 사회의 무관심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시킨 죽음이었다. 발견할 당시 67세였다니 사망 당시는 62세였다. 노년층 부류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나홀로 죽음`에 방치된 걸 보니 더 가슴 아프다. 갑작스런 건강 악화와 외로움이 죽음의 큰 원인이었을 텐데 노인 치고는 젊은 층이라 주변의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복지 차원에서도 65세 이상 노인들은 당국의 관리를 받을 수 있지만 60대 초반은 그 관리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노인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그 연배의 사람들이 건강을 잃고, 돌봐주는 가족이 없을 경우 이번처럼 안타까운 일은 생길 수밖에 없다.노인들의 고독사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기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판 밖의 일이 아니다. 노령화 시대는 빠르게 다가오고, 나홀로 노인 가구 수는 늘어만 간다. 통계청 조사를 보면 올해 홀몸 노인은 125만 명이나 되고, 2025년에는 224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2035년이 되면 전체 노인인구는 천 475만 명, 이 가운데 독거노인은 23%인 343만 명이 될 전망이란다. 외로움과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도 그만큼 많아지는 구조이다.일상생활이 어려운 취약 계층이나 거동조차 못하는 위기 계층의 독거노인들부터 우선 관리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정 방문, 돌보미 서비스, 도시락 배달 및 상담 등 독거노인을 위한 당국과 사회의 서비스 제도가 활성화 되어 있긴 하다. 하지만 노인 사각 지대와 고독사 위험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여전히 미흡하다. 개인 차원의 관심과 더불어 이 문제부터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04

기초연금 논란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의 기초연금 관련 공약은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한 마디로 65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기초연금으로 20만원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각종 선거 공약이 너무 쉽게 공약(空約)이 되어버리는 현실이기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박 대통령의 약속만은 믿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하게 된 청와대에서 공약 수정을 선언했다. 씁쓸하지만 역시나 하는 맘이 되어 국민들은 참는다. 수정안을 두고 합의를 보지 못한 청와대와 보건복지부 간의 갈등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역시 국민들은 이해하려고 애쓴다.문제는 공약 수정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 성명과는 별도로, 그 수정안 자체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연금 전문가들에 의하면 그 안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불합리하단다. 우선,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길수록 기초연금은 반으로 깎이는 구조이다. 두 연금을 합한 총수령액이 늘어나기 때문에 딱히 손해는 아니라고 해명을 하지만, 총액이 늘어나는 건 내가 낸 국민연금 덕분이지 세금으로 분배되는 기초연금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두 번째, 미래 노인이 현재 노인보다 불리한 수령 구조에 있다는 점이다. 물가 상승이나 국민소득을 고려한 국민연금 지급 방식 덕에 두 연금을 합한 절대 수령액은 늘어나겠지만, 기초 연금의 가치는 현재가 미래보다 훨씬 낫다. 기초연금 수령액이 현재 노인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는 미래 수급자에게 국민연금에서 얻을 유예된 이익을 기대하라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국민연금 장기 가입자와 미래 세대에게 불리한 이러한 구조는 역차별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한 예로 국민연금을 오래 가입할수록 기초 연금이 깎이니, 다른 노후 대책을 마련한 뒤 기초연금을 최대 금액으로 받고자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될 것임을 전제하는 국민들의 너그러운 정서도 이런 논란에 한몫했으니 누구를 탓하랴. 선거 제도가 있는 한 이런 논란은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02

아웃도어·인도어

유행이 나를 압도한다. 몸을 방치했더니 장난 아니게 살집이 잡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파트 내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천성이 게으른지라 예견되는 결과가 그리 밝지만은 않지만, 어쨌든 다시 시작한 운동에 맞춰 복장을 갖추려고 검색을 해본다. 몸이 곧 제 가치를 말하는 세상인지라 몸에 관한 건 뭐든지 상품으로 연결된다. 스포츠 브랜드마다 전략적으로 고가의 운동복을 자랑한다. 거기까진 좋은데 이건 또 무슨 소린지. 패션 관심이 이제 아웃도어에서 인도어로 확산 중이란다. 바쁜 현대인들이 등산이나 야외 레저에서 눈을 돌려 실내 운동인 헬스나 요가 등에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단다. 자연히 스포츠 패션도 실내복 쪽으로 기울어지니 그쪽이 대세라나.등산복 제품이 광고를 휩쓴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제 실내운동복 타령이라니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등산이든 헬스든 운동은 운동일 뿐이고, 운동복의 제일 기능은 땀 흡수와 통풍일 터인데 여기에 실내외 구분이 왜 필요한가 싶다. 이제 우리도 살 만해졌고 소비자들의 다양한 요구에 업계도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겠지만, 어쩐지 고리타분한 옛어른(?) 마인드가 되어 너무 앞서가는 업계의 트렌드 사냥에 시비를 걸고 싶어진다.십여 년 전만 해도 산에 오를 땐 청바지에 면 티셔츠, 거기다 빨간 등산용 재킷을 걸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땀 걱정 없이, 통풍에 대한 부담 없이 잘만 산을 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등산할 때, 조깅할 때, 골프할 때 입는 옷이 달라졌고, 운동화도 트레킹화, 등산화, 조깅화, 워킹화, 스니커즈 등으로 구분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단벌 나일론 줄무늬 운동복에 밑창 허술한 운동화 하나만으로도 족히 운동했던 그 시절이 옳다는 게 아니다. 다만 너무 일회적 상업성에 기대 소비자를 이용하고 시험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인다. 단순한 기능성 운동복 개념도 이해하기 전인데, 이젠 아웃도어 인도어까지 구별해가며 소비하라고 부추기니 어느 장단에 손발을 맞출꼬. 소극적 저항으로 클릭을 유보하는 중에 이 글을 써본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01

작가 최인호

최인호 작가가 별세했다. 지병인 침샘암으로 고생하셨다는데, 아직 세상을 뜨기엔 이른 연세라 안타깝기만 하다. 주요 뉴스로 떠오르고, 장례식이 치러지고, 정부에서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정작 젊은 층 사이에는 최인호 작가가 누구지, 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작가 최인호는 누가 뭐래도 7080세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예를 들면 1983년 한 해, 베스트셀러 목록에`고래사냥`과`깊고 푸른 밤`이 동시에 올랐고, 두 작품은 당시 일인자였던 배창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야말로 전국의 젊은 감수성이 최인호 신드롬으로 수렴되던 한 시절이었다.`별들의 고향`으로 대표되는 그의 초기 작품들은 도시문학 또는 대중소설을 표방했다. 절망하는 젊음의 책임을 사회에 묻지 않고 개별자 스스로에게 전가하고,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로 여성을 도구화해버린 점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최인호표 브랜드가 될 만큼 당대 사회의 감수성을 잘 그린 작가였다. 후기로 갈수록 작가는 통속적 소비문학 대신 문학의 진정성으로 승부를 건다. 장편`상도(商道)`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때 3백여만 부가 팔릴 만큼 주인공`임상옥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라고 깨쳐주었고, 작은 이익보다는 의와 도를 따르는 것이 더 큰 이윤이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독자들은 무한 신뢰를 보냈던 것이다.문학의 위상은 옛만 못하고 문학계의 큰별은 자꾸만 사라져간다. 애잔한 마음일랑 작가의 작품을 들춰보는 걸로 대신해야겠다. 샘터사에 장장 36 년간이나 연재했던 연작소설`가족`이 오늘 같은 날 제격이겠다. 작가가 연재를 시작했던 서른의 나이에 네 살이었던, 이제는 또 다른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딸 다혜와의 추억은 어찌하고 그리 일찍 가신 걸까. 경쾌하고 청량하던 청년 작가는 곁에 없고, 그의 소설로 위로받던 중년의 독자만 우두커니 남아 애달픈 제 청춘을 소급할 따름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30

바틀비의 화초

화초에 물을 준다. 같은 아침 햇살을 받건만, 산세베리아나 고무나무 등은 무작정 생기발랄하기만 한데, 앤슈리엄이나 옥잠화는 사시사철 풀이 죽어 있다. 새치름하니 생기 잃은 화초들은 그렇다고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신경이 쓰여 물 더 주고, 자리 바꿔 가며 통풍에 신경 써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도리어 `활기 찾을 의향 없음`이란 표시로 제 잎맥을 늘어뜨린 채 애간장을 녹인다. 삶이란 뭉근한 연민과 은근한 저항의 관계망일 때가 있다. 허먼 멜빌은`필경사 바틀비`를 통해 이러한 피로한 연민과 수동적 저항의 알레고리에 대해 짚어냈다. 수동적 저항만큼 열성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지만 그 저항에는 악의가 없고, 저항을 감당하는 자 역시 상대를 이해하려 애쓴다고.온건하게만 보였던, 자신이 고용한 필경사가 사흘째부터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말로 글씨 쓰기를 거부한다. 고용주인 변호사의 잘못을 따지는 적극적 반항이 아니라, 이유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소극적 저항을 고집한다.`하고 싶지 않아요`가 아닌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는 말은 소시민 이하의 삶을 사는 필경사 을이 변호사 갑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 의사 표현인지도 모른다. 변호사가 당황하게 되는 건 갑의 입장이 아니라 보편적 정서 상 필경사를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해고 통보에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는 바틀비를 피해 변호사가 사무실을 떠나는 지경에 이르고, 바틀비는 결국 구치소에서 식음을 전폐하다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변호사의 입을 통해 작가 멜빌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까. 필경사는 가엾은 사람일 뿐 나쁜 사람이 아니며 악의 또한 없다고. 그는 쓸모 있는 사람이고 변호사 역시 훌륭하지만 서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는 각자의 영역이 있고, 어떤 경우라도 남의 영혼에 완벽하게 가닿지는 못한다. 한쪽은 연민하다 지치고, 다른 한쪽은 제 아픔을 소극적으로 어필하다 쓰러진다. 나와 화초도 그렇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7

히스꽃

캐시, 히스꽃이 만발한 저 성에서 우리 사랑을 영원히 지켜나가야지, 죽으면 안 돼! 히스클리프, 저 들판 무수히 핀 히스꽃을 한아름 안겨 줘. -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히스꽃 이미지로 넘실대는 작품이다. 작가들은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적재적소에 소도구를 장치한다. 그 소품들이 없다면 소설은 밍밍한 이야기에 그치고 만다. `폭풍의 언덕`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쓰인 소품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히스꽃이다. 야생마 같은 캐서린과 야생초 이미지의 히스클리프를 대변해주는 꽃이기 때문이다. 음울한 구름, 매서운 바람에 이어 폭우가 쏟아지면 반쯤 미친 히스클리프와 제 멋에 겨운 캐서린은 온통 히스꽃 천지인 들판을 맨발로 쏘다녔다. 히스꽃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갖지 않았던 사춘기 시절, 내 머릿속의 히스꽃은 김유정 소설의 동백꽃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었다.까맣게 잊고 있던 히스꽃을 검색해 본 적이 있다. 절대고독이자 광적인 카리스마를 상징하는 히스클리프란 이름도 실은 히스꽃과 관련이 깊다. `절벽에 핀 히스꽃`이란 뜻에 어울리려면 뭔가 강렬한 포스를 풍길 거라고 생각했다. 눈으로 확인해 본 히스꽃은 실망스럽게도 폭풍의 언덕이 아니라 여염집 울타리와 더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황폐한 언덕 풍광과 궁합이 맞는 꽃이란 걸 인정하게 된다. 음울한 구름과 거센 바람을 견디려면 화려하기보다는 키 낮고 소박하지만 강인한 꽃이 제격일 터였다.히스꽃은 에밀리 브론테가 죽는 순간에도 함께 했다. 서른의 그녀가 죽어갈 때, 언니 샬롯 브론테는 구릉에서 꺾어 온 보랏빛 히스꽃을 그녀에게 건넸다. 히스꽃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뿐만 아니라 브론테에게도 어울리는 꽃이었던 셈이다. 한 번이라도 요크셔 지방의 하워스 무어를 여행하고 싶다. 바람 부는 황량한 언덕에 서면, 드넓게 펼쳐진 들판이 보이고 거기엔 온통 연보랏빛 히스꽃이 만발하겠지. 무리 진 히스꽃 덤불을 배경으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여전히 맨발인 채로 저들만의 격정을 발산하고 있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6

SNS 단상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가 급속도로 확대되던 초창기, 팔로어 수가 자랑이던 때가 있었다. 넷 상에서 누가누가 더 넓은 인맥을 가졌는가를 내기하는 마당 같았다. 연예인이나 스포츠인 등 유명인들일수록 팔로어 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SNS 본래의 목적인 소통보다 허세와 자기만족에 더 치중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자연히 혀로 인한 크고 작은 사고도 늘어났다. 축구 선수, 아이돌 가수 등이 차례로 구설수에 올랐다. 만 천하에 공개되는 글이란 점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걸 무시한 결과였다.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했지, 한 마디 말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고, 그것이 사회적 공분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이런 시행착오 때문인지 요즘의 SNS는 공개적인 것 못지않게 폐쇄적인 것도 활성화되고 있다. 관계망에만 치중하는 그물 치기식 확장보다는 구설수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모임방 식 폐쇄형도 인기가 많다. 소위 그들만의 밴드를 만들어 조촐하나마 진솔한 소통의 장으로 삼는 것이다. 소통 갈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피상적인 인맥 대신 소규모지만 내실을 선택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열린 공간과 폐쇄적 공간의 장단점은 있다. 전자에서는 모든 것에 솔직할 수가 없다. 솔직해서도 안 된다. 사적인 감정은 일기장으로 갈 것이지 공개된 SNS에 올라올 일이 못 된다. 원활한 관계망을 위해 사회 규범이 있는 것이니, 적당한 페르소나로 그 규범과 타협할 수 있어야 한다. 배려와 신중을 팔아 깊이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후자에서는 소위 우리끼리 모였으니 비교적 솔직해도 좋다. 일기장에 버금가는 말들의 폭포수로 스트레스도 날리고 진솔한 마음의 창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우리 삶 자체가 공개와 비공개의 연속이이고, SNS는 그 삶의 축소판이다. 자신을 드러낸다는 게 두려우면서도 제 맘을 알리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운명적 속성이다. 이 팍팍한 세상, 약점 많은 SNS이지만 잘만 활용하면 그것은 작은 위안이 되어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5

고졸미(古拙美)

우리 고전문화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던 딸아이가 묻는다. `고졸미`가 뭐야? 방송을 보지 않고 있던 나는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되묻는다. 시청하지 않은 핑계도 있지만 실은 나도 처음 듣는 말이니 그 되물음은 나도 모른다는 뜻과 같다. 어감만으로는 뭔가 고결하거나 고상함이 넘치는 단계를 표현하는 말 같다. 그세 딸내미는 스마트폰으로 사전 찾기를 한다.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란다. 완전히 내 생각을 벗어났다.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일까. 그쪽 방면에선 널리 쓰이는 `고졸미`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 들어봤다. (어쩜 상식의 문제인데 나만 몰랐을 수도 있다!)고졸미라는 한자를 보는 순간, 헛갈리기만 했다. 오래되었다는 뜻의 `고`(古)는 그렇다 치고, `졸`(拙)의 한자를 보는 순간, 왜 이게 `소박하다`는 뜻이 되어야 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졸렬하다, 옹졸하다, 고 말할 때 쓰는 졸(拙)자만 떠오를 뿐, 다른 뜻으로 쓰이는 한자어 예는 한 단어도 연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사전 찾기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졸(拙)이란 말은 `옹졸하다, 졸렬하다` 라는 뜻 말고도 `둔하다, 어리석다, 질박하다, 수수하다, 서툴다, 불우하다, 곤궁하다`등의 뜻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그제야 서투루지만 빠른 것을 뜻하는 `졸속`이란 낱말도 떠올랐다.의문이 해소되고 나니 `고졸미`라는 말을 몰랐다는 부끄러움보다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어렵고 잘 쓰이지 않는 고졸미, 라는 말보다 비록 같은 한자어일지라도 흔히 쓰이는 `소박미`라고 표현해도 무리는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신라의 얼굴무늬수막새나 조선의 달항아리, 나아가 김정희의 세한도를 설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말 중의 하나가 `고졸미`라는 것을 깨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겠다. 남들 다 아는 말을 뒤늦게 익혔으니, 개인적으로 애정이 가는 단어는 아니지만 `고졸미`의 현장 학습을 위해 이른 가을 여행이라도 떠나야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