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내용을 뚝 잘라버리고 가져오는 바람에 저자의 의도가 완전하게 전달되는 건 아니다. 요컨대, 부질없는 형식에 집착해서 남는 게 무언인가. 형식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기본이 된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자기 엄숙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이런 요지의 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문화가 엄숙해야 한다`라는 말은 `철학이(내면이) 엄숙해야 한다`라는 말로 돌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는 어떨까? 자유분방하기 이를 데 없는 가난한 시인은 영진 설비 외상값 4만원을 갖다 주라는 아내의 심부름을 두 번이나 어긴다. 한 번은 빗길을 피해 들어간 슈퍼에서 `병맥주`를 마셔버렸고, 또 한 번은 꽃집 앞을 지나다가 `자스민 한 그루`를 사버렸다. 영진설비 아저씨의 `거친 몇 마디`가 아내에게 쏟아질 때 `아이의 고운 눈썹`이나 쳐다보게 되는 것, 이러한 한 때도 있을 수 있는 게 삶이다. 그렇다고 그 시인이 대책 없는 영혼을 지닌 건 아니다. 그들의 내면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엄숙주의로 자기 검열을 강화한다. 고결한 시인들이 갖는 특성이기도 하다.
형식에서 자유롭고 내면은 고결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살 만하다. 하지만 현실은 정치와 집단은 형식을 강요하고, 저마다의 삶의 척도는 무분별하게 가지치기를 한다. 정치가 융통성을 발휘하고, 개별자가 자기 염결을 발휘하는 세상이라야 온당할 텐데 우리에게 그것은 거꾸로 된 것만 같다. 규제하고 억압하고 지시하는 현실 앞에서 개인은 착해질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박철 시인은 그런 상황을 비틀기 위해 `내겐 아주 멀고 먼 /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