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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03-26 02:01 게재일 2014-03-2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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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라면을 먹을 때 옆집 꼬마는 낙서를 한다. 옆집 꼬마가 낙서를 할 때 건넛집 아저씨는 조깅을 한다. 건넛집 아저씨가 조깅을 할 때 산 너머 할머니는 상추씨를 뿌린다. 산 너머 할머니가 상추씨를 뿌릴 때 이웃 나라 아주머니는 빵을 굽는다. 이웃나라 아주머니가 빵을 구울 때 더 먼 나라의 어린 소년은 쓰러져 있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바람이 분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유아용 그림인데다 쉬운 글씨마저 거의 없다고 어린이용 그림책은 아니다. 그런 책일수록 어른에게 맞춤한 경우가 많다. 가슴이 먹먹하고, 명치끝이 아려 도리어 어린 아이는 읽지 말았으면 하는 그림책 중의 하나가 하세가와 요시후미의 `내가 라면을 먹을 때`이다.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다. 내가 라면 국물을 마시며 예능 프로그램 앞에서 희희낙락할 때 먼 이웃나라 허기진 어린이는 한길에 쓰러져 있다. 웃음소리에 취하는 그 순간에는 아픈 이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멀리 이웃나라까지 갈 것도 없다. 내가 떠들고 마시는 동안 누군가는 약을 못 사, 방값을 못 내, 라면 한 봉지를 못 구해 생을 마감한다. 혼자가 아니라 온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꿈을 먹고 살기에도 모자랄 어린이들에게 가슴 아픈 현실을 알리는 건 불편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영원히 몰라야 하는 현실도 없다. 부조리한 세계를 먼저 경험한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조심스레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모두 나와 같지 않다는 사실, 평범한 행복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점진적으로 말해줄 필요가 있다. 충분히 교감이 된 후라면 이 책은 아이들에게 아주 좋은 이웃 이해의 마당이 되어 준다.

`그 맞은편 나라의 산 너머 나라 남자아이는 쓰러져 있다. 바람이 분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화룡점정의 이 짧은 몇 마디가 여운을 남긴다. 그림 속 쓰러진 검은 나무 같은 아이를 가만 들여다본다. 세상은 기쁨과 슬픔이, 행과 불행이 함께 하는 자리인 것을. 바람이 분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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