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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3초 만에 하는 일

사랑에 관한 표현을 할 때 흔히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고 말한다. 사랑을 한다, 고 말하면 왠지 싱거운 느낌이 들지만 사랑에 빠진다, 고 묘사하면 왠지 그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기분이다. 사랑은 하는 것도 맞고 빠지는 것도 맞겠지만, 왠지 사랑은 `빠져야` 제 맛인 것 같다. 이런 감정은 사람이 지닌 편견과도 무관하지 않다. 심리학자들의 오랜 연구 끝에 우리는 입맛에 맞는 각종 정보들을 많이 얻어왔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데는 첫 3초면 충분하다는 가설이다. 이 말이 옳은가 그른가는 별개로 치더라도 그런 생각에 우리가 영향을 받는 것만은 사실이다. 누구나 그 첫 3초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스무 살 시절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누군가와 협업해야할 일이 있었다. 소개 받은 그 친구는 도도하게 예쁜 인상이었다. 얼굴선은 부드러웠고 이목구비 또한 또렷했지만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3초는커녕 1초도 걸리지 않아 나는`그녀는 너무 도도해. 가까워지기 힘들 거야.` 라고 결론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본 그녀는 무척 상냥하고 속이 깊었다. 어릴 때 다친 한 쪽 눈을 머리칼로 가리다 보니 나머지 한 눈이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비쳤던 것이다. 3초의 잘못된 판단을 자책하며 당황했던 그 때를 잊을 수 없다.심리학자들이 말하는 3초의 판단이, 편견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온당한 상황이 되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순간의 판단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이미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첫눈에 반했다, 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은 진정한 사랑은 이것저것 재는 것 없이 곧장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여러 번 만난 뒤에는 사랑을 하는 것이지 사랑에 빠진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사랑 앞에서 속수무책일수밖에 없는 건 순간의 그 힘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다.3초의 판단이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만 새길 수 있다면 그 3초의 판단을 애써 무시하지 않아도 좋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13

적당하기

인간은 결속의 동물이다. 무리 만들기를 좋아하고 네 편 내 편 구별하기를 좋아한다. 나아가 유교권 국가일수록 단일종족이라는 환상이 깊을수록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로 경계 짓기를 즐기기도 한다. 그것이 지나치면 객관성을 잃게도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스포츠와 관련 있다. 예를 들면 김연아의 완벽한 점프에 일본인들이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면, 아사다 마오의 불완전 점프에 우리 중 누군가는 조목조목 반박하게 된다. 이 정도야 사실 관계 증명을 하는 것이니 넘어간다 치지만 대개 서로 인신공격성 발언에다 국가 간 모독성 발언으로 그 수위가 높아진다. 괴물 되는 건 순간이다. 괴물은 우리 맘속에 분명 존재한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그것은 오로지 행동함으로써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모습만큼 괴물의 형상에 가까운 것도 없다. 그것의 형식은 옹졸한 국수주의나 지나친 애국주의 나아가 위험한 호전주의로 나타난다. 내가 너보다 옳고, 우리가 너희보다 낫다는 그릇된 신념이 그렇게 만든다. 나는 그르지 않고, 우리 가족은 부도덕하지 않으며 우리 국민성은 나쁘지 않다. 나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상대라고 성급히 결론 내릴 때에 그만큼 쉽게 괴물이 되는 것이다. 욱일승천기 번득이며 온 거리를 뛰어다니고, 독도는 저들 땅이라고 지치지도 않고 우기는 일본의 극우자들 모습이 그 좋은 예이다.자애며 가족애며 조국애도 현상 자체를 보는 눈에 앞설 수는 없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은 인류 공영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느 특정 집단의 옳음과 우위를 한정하는 뜻으로 쓰일 수는 없다.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는데 능통한 인간이긴 하지만 불멸의 신념처럼 그것을 한쪽에선 주입하고 다른 한쪽에선 세뇌당해야만 하는 사회여서는 곤란하다. 사람은 사람이고,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패 짓는 것의 가치와 긍정 위안은 분명히 인정할 만하다. 적당한 무리 짓기야 인간사 권장할 일 아니던가. 다만 도가 지나치면 네 편 내 편 할 것 없이 금세 괴물이 되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12

폭설 단상

오랜 만의 폭설이다. 한낮이 가까웠음에도 사위가 온통 흰빛 적요의 난무이다. 창을 통해 보이는 가까운 대로엔 차들이 멈췄다 섰다를 반복한다. 이마저 고요한 풍경화 같다. 꼭 닫힌 창 너머로 움직임만 보일 뿐 소리 한 점 들리지 않는 이 모순적 평화가 낯설기만 하다. 차들의 느린 행렬, 갓길에 멈춰선 트럭, 이차선에서 비상등을 켠 채 옴짝달싹도 못하는 미니밴, 헛바퀴 굴러 갓길과 삼차선에 비스듬하게 꽂혀버린 버스 등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눈 오는 날의 실상은 낭만적 정서보다 현실적 불편함이 더 크구나. 폭설은 사람을, 풍경을 기어이 삼키고야 마는구나. 오디세우스는 10년간 끌어 온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부하들과 귀향선에 오른다. 온갖 시련들이 그들을 기다렸다. 그 중에 바다 요정 세이렌이 사는 섬을 지날 때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현혹되어 배가 좌초되거나 사람들이 물에 뛰어내리기 때문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았다. 노랫소리를 포기하지 못하겠기에 자신의 몸은 밧줄로 돛대에 묶어 줄 것을 부탁했다. 만일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겨워 스스로 풀어달라고 청한다면 더 단단히 묶으라고 명령했다. 그 결심 덕에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노래도 들으면서 무사히 그 섬을 지날 수 있었다.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오디세우스 군단이 현혹되듯이 일 년에 한 번 구경할까 말까 한 눈을 우리는 내심 낭만적 정서로 기다린다. 하지만 그 눈의 꼬임은 현실적 불편함이 되어 자칫하면 생명에 지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처럼 제 몸을 묶어 외적 결속을 꾀하면 좋으련만 밥벌이의 현실이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속을 위해 그저 길을 나서야 한다. 게다가 원치 않아도 암초를 만나거나 물에 뛰어내려야 하는 위험이 떡하니 기다리기도 한다.낭만적 정서만 기대한다면 내 몸을 묶어서라도 눈 구경을 할 수 있으련만 현실 속 눈 풍광은 그것과는 한참 멀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차들은 거북이 운행 중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11

평판에 대하여

절대 도덕을 실천하는데다 완벽한 염치를 가진 이가 있을까. 반대로 절대 모순을 보여주거나 완벽한 악행만 일삼는 이가 있을까. 누군가를 일컬어 옳은 삶만 산다고 규정할 수 없듯이 또 다른 사람더러 나쁜 삶만 산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곳에는 평판이란 게 따라 다닌다. 불완전하기만 한 존재들끼리 서로를 판단하는 우습고 유일한 동물이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평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소한 것에서 타자에 대한 평가는 이루어진다. 자신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내리기 어려워도 타자에 대한 평판은 무서우리만치 객관화하는 게 사람이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타인의 누적되는 양심 불량의 행동들을 보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은 좋아질 수가 없다. 한 번 잘못된 평판은 되돌리기 어렵다. 좋은 말은 십리를 가다 끊기지만 나쁜 말은 천리를 가고도 힘이 남는다. 찬란한 타인의 미덕에는 덤덤해질 수 있지만, 사소한 남의 실수는 악행으로 번지기를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보이다.한 예를 들자. 음식 값을 내지 않고 나간 한 사람에 대해 한 부류에게는 그가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말했고, 다른 부류에게는 원래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깜박 잊은 거라고 변명해줬다. 마지막 부류에게는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정보를 접한 참가자들은 그가 지불하지 않은 음식 값을 실제보다 높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사람에 대한 평가는 집단적 교류 속에서 이뤄지고 부정적 평가일수록 날개가 빨리 달린다. 평판은 맞장구에 그 운명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누군가를 안 좋게 얘기했을 때 그 얘기에 맞장구를 치는 순간 집단 전체는 그를 나쁘게 보게 된다. 반면 맞장구 대신 그 사람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를 한다면 처음 부정적인 말을 꺼낸 사람의 말은 어느 정도 힘을 잃고 만다. 하지만 타자에 대해 소극적인 부정의 평판에 가담하긴 쉬워도,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의 평판을 위해 팔 걷어 부치기는 얼마나 어렵던가?/김살로메(소설가)

2014-02-10

왼쪽 자리

영화를 볼 때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자리는 뒤쪽 중앙의 왼쪽 통로 쪽이다. 중앙의 중간 자리부터 예매되는 것에 비하면 내 취향은 약간 특이하긴 하다. 이번에 `겨울왕국`애니메이션을 볼 때는 예외였다. 동석한 딸내미의 주장에 의하면 애니메이션은 화려한 영상이 감상의 포인트이니 가운데자리가 낫겠다고 했다. 일리 있는 말이라 쉽게 동의했다. 중간 자리를 꺼리는 나름의 이유는 오직 개인적 경험에 연유한다. 우선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다. 깜깜한 곳, 전후좌우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면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건강 검진 때 MRI 기계 안에서 단 몇 초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던 경험과 유사한 느낌이랄까. 숨이 막히고 심장이 조여 온다. 뭉근하게 주리를 틀리듯 온몸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한다. 두 번째는 요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혹시 콜라 한 잔이라도 들이켜게 된다면 그날 컨디션에 따라 상영 중간에 화장실을 가게 될 수도 있다. 옆 사람의 의자사이를 지나가야 하니 민폐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화면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이유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 자리가 안정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자리는 앞사람들의 빽빽한 몸피와 들쑥날쑥한 머리 라인 때문에 화면이 잘 안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졸음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피곤한 날인데다 취향마저 내 것이 아닌 영화를 보게 될 경우 십중팔구 초반 십 분은 졸게 된다.뒤쪽 통로 쪽에 앉으면 갑갑하지도 않고, 고개도 눈치껏 돌릴 수도 있고, 화장실 가기도 쉽고, 졸더라도 덜 들킨다. 그러니 그 자리야말로 내겐 안성맞춤인 셈이다. 한데 오랜만에 앉은 가운데 자리는 좌불안석이 따로 없다. 전신이 갑갑해져오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앞사람 머리에 가려 자막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피곤했는지 설상가상으로 졸음마저 몰아쳐 그 좋은 화면을 두고 잠깐 졸기까지 했다. 딸내미가 창피하다며 내 허벅지를 꼬집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진작 왼쪽 뒤 통로 자리라고 확실하게 말할 걸. 편하게 이기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의 이 익숙함과 무서움이라니!/김살로메(소설가)

2014-02-07

실패를 위하여

성공과 실패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할까? 일견 명백해 보이는 답 앞에서 가끔은 이런 질문도 하고 싶다. 성공담이 넘치는 사회이다. 한 인물이 등장한다. 어떤 업종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다. 예술계든, 산업계든, 학계든, 연예계든 현실적인 성공을 눈앞에 둔 사람이어야 한다. 대중들이 그에게 열광하기 시작한다. 매의 눈을 가진 출판 업계가 가만있을 리 없다. 속된 말로 `물건 되겠다` 싶으니 재빨리 움직인다. 기획, 집필, 편집해서 한 권의 책을 낸다. 이름값에 비례해서 책은 순식간에 동이 난다.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쏟아진다. 저자는 하루아침에 성공담의 주인공이 되어 바삐 불려 다닌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어느덧 신화의 경지에 이른다. 또 다음 책을 기획하고 집필해야 한다. 대중의 관심을 지속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효 기간 5년 미만인 그 성공기는 또 다른 기획품에 의해 제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운명을 맞고 만다. 대중은 누군가의 성공담을 소비하는 데서 만족하지 그 성공담 자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공만을 바라는 이런 현상이 바람직한 사회상일까. 성공담 못지않게 중요한 건 실패담이다. 누구나 성공만을 얘기한다면 나머지 대다수의 성공하지 못한 삶은 잘못된 것일까. 남의 성공을 보면서 희망의 자긍심 못지않게 열패감도 생기는 게 사람이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자식 자랑하는 옆집 아줌마는 한 사람이고, 들어주는 아줌마는 아홉 명이다. 옆집 아줌마의 나 홀로 큰 목소리 때문에 나머지 아홉의 풀죽은 목소리가 `소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성공이다, 스펙이다, 신화다 등등으로 흉흉한 현실이 안타까울 때도 있다. 충분히 소시민적 행복을 누리는 이들 앞에 너무 많은 `성공담 기획 상품들`이 쏟아지는 건 아닌지. 99퍼센트의 실패담이 깃털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성공담이라면 무슨 소용일까. 실패 없는 성공이 어디 있나. 성공만 권하는 사회에 괜히 종주먹 한 번 날리고픈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06

어리석은 게 아냐

세상에서 가장 맘대로 되지 않는 감정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사랑이라 말할 테다. 사랑은 어리석음이요, 유치함이요, 수치요, 절망이요, 나락이다. 사랑을 일컬어 현명함이요, 세련됨이요, 자긍이요, 희망이요, 천국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겉보기 사랑을 하거나 사랑이란 말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셰익스피어도 말했다. `사랑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사랑에 빠질 숱한 후대인들을 위한 그의 경고는 옳았다. 지구촌 어디에나 사랑 때문에 눈물로 지새는 인간적인 사람들이 넘쳐 나기에. 사랑에 눈시울 붉어진 개그우먼이 토크쇼에 나와 자신의 짝사랑 경험을 고백한다. 공감하되 웃음이 나온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누가 도와줄 수 없고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웃음보다 자기연민에 겨운 날이 더 많은 건 그 `대상`은 내 감정과는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과 별개인 그 대상과 사랑에 빠지게 되니 얼마나 어리석을 것인가.사랑 자체는 환희의 꽃일지 모르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고행의 절벽과도 같다. 그래서 오늘도 사랑 때문에 힘겨운 누군가는 핸드폰 문자를 수십 번 확인하고, 울리지 않는 현관 벨 소리에 귀를 곧추 세운다. 무분별하지 않은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자는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 흩어지는 분수거나 날아가는 포탄처럼 속수무책의 감정이어야 사랑이지, 고요한 찻잔 속의 물이거나 반듯한 나무 한 그루의 이미지라면 온전한 사랑일 수 없다. 감출 수 없는, 이 아름다운 어리석음의 향연이라니!사랑에 빠지는 건 쉬워도 그것을 벗어나기란 어렵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누군들 어리석고 힘들지 않을 것인가. 일단 사랑에 빠지면 곁 사람들의 조언과 충고 따윈 소용없다. 자신이 투자한 에너지와 눈물이란 원석이 `시간의 흐름`이란 보석으로 가공 된 뒤에야 그 허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 보석은 고맙게도 평생 삶의 지침서 같은 반려의 반지가 되어준다. 그러니 까짓 것, 어리석은 그 사랑에 한 번쯤 된통 당한다 한들 진실로 어리석다 할 것인가./김살로메(소설가)

2014-02-05

거품은 제때 걷어내야

뭇국을 끓인다. 간편해 보이지만 제 맛을 내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우선 양지 부위 고기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다. 무는 반개 정도 어슷썰기 한다. 반듯한 깍둑썰기보다 자연스러워 보이는데다 맛도 잘 스며들기 때문이다. 찬물에서 건진 양지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끓는 물에 넣는다. 한소끔 끓으면 거기에다 무를 넣고 이십여분 중불로 끓인다. 중간에 소금 간을 한다. 기왕이면 천일염이 좋다. 마지막에 다진 파와 다진 마늘을 넣고 오분 정도 더 끓인다. 먹기 직전 식성에 따라 청양 고추를 넣기도 한다. 쓴 글대로만 하면 제법 시원한 뭇국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몇 번의 뭇국을 끓이면서 실패한 경험이 이 단상을 쓰게 했다. 일견 완벽해 보이는 저 레시피에 실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뭇국의 맛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제때 거품을 걷어내는 일이다. 담백한 맛을 내기 위해 충분히 고기 핏물도 뺐고, 주재료도 일부러 기름에 볶지 않았다. 그래도 아차하면 텁텁한 맛이 난다. 바로 거품 때문이다. 불순물이 모여 몽글몽글 거품으로 끓어오르는데 귀찮다거나 깜박한 나머지 제때 걷어내지 않으면 실패한 뭇국이 되고 만다. 때깔도 지저분하고 맛 또한 텁텁하다. 제 맛을 내기 위해선 지키고 선 채, 넘치기 전에 불을 조절하고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타이밍을 놓쳐 국물이 넘치면 가스레인지와 냄비 뚜껑이 지저분해지고, 거품 또한 걷어내지 못하면 국물맛이 엉망이 되고 만다.끓어오르는 화는 넘치기 전에 내 안에서 먼저 걸러야 하고, 해야 할 숙제와 미뤄둔 청소는 그때그때 하는 게 몸과 맘에 가볍다. 결심한 그때가 최적의 타이밍이다. 때를 놓치는 것만큼 찜찜한 것도 없다. 이미 식은 국 앞에서 그 맛을 원망해봤자 소용없다. 국물 맛을 잘못 낸 건 거품 제대로 걷지 않은 내 잘못이지 식재료 탓이 아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제때 거품을 걷어내지 못하고 빈둥거리다 허둥대는 자화상 하나 식은 뭇국 속에 얼비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04

울화병

명절 끝 카페엔 여자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오늘의 주제는 단연코 울화병이다. 한의학 용어에 `화병`(火病)이라는 게 있다. 울화병이라고도 하는데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온몸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며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병이다. 뚜렷한 실체가 없어 과학적으로 풀이할 수는 없지만 분명 앓는 이들이 있으니 생긴 병명이렷다. 지극히 한국적 정서의 소산물인 이 병은 명절과도 관련이 있는데 여성들이 잘 걸리는 특징이 있다. 명절의 좋은 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니 넘어가자. 지친 영혼들은 명절만큼 지긋지긋한 연례행사도 없다며 커피 잔을 마주한 채 저마다 손사래를 친다. 명절을 치르면서 성인남녀 누구나 육체적·감정적 노동에 시달린다. 하지만 늙으나 젊으나 며느리 입장인 여성들이 느끼는 피로감이 더한 것은 우리 명절문화가 시댁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여성들은 그 집안의 노동에만 적극적으로 동원될 뿐 정작 그 문화의 중심에는 가닿지 못한다. 기득권 시댁 문화에서 변방일수밖에 없는 여성들은 당당한 의견은커녕`아니오`라는 최소한의 방어의 말조차 제대로 허락되지 않는다. 부당한 처사를 목도해도 안으로 삭이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강요받았다. 만약 부당함에 대해 거절이나 항의라도 한다면 `본데없는` 출신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감정을 삭이고 삭인 착한 여성들은 울화병이란 달갑지 않은 병을 선물로 얻었다.화병은 단연코 약자들의 병이다. 그러니 약자의 화는 언제나 온당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홀대 받으면 수치를 느끼고, 억압당하면 분노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반면, 착한 행위에 대한 보답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잘못한 언행에 대한 감시는 얼음보다 차가운 것 또한 사람의 마음이다. 약자의 서글픈 굴욕은 강자의 이기적 욕심 앞에서 언제나 피해자다. 아니오, 라고 말하지 못해 울화병 난 여자들, 뒤늦은 방언 터지듯 말꽃 피우러 물안개 피어나는 카페 창가에 모여든다. 말로써 말을 치유하는 명절 끝 카페 풍광,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03

제대로 본다는 것

사진 한 장이 화제다. 배우 이정재의 어떤 사진을 거꾸로 놓고 보면 진행자인 신동엽의 얼굴로 보인단다. 호기심에 사진을 검색해봤다. 정말 그랬다. 착시 현상일 뿐인데도 신기하게 보이는 건 심리학 책 속의 장면이 아니라 친근하게 느껴지는 연예인이 그 예시가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제대로 본다고 하지만 실은 잘못 볼 때가 있다. 같이 바다 구경을 가도 누군가는 갯바위 사이의 불가사리를 보고 누군가는 수평선에 걸린 고깃배를 본다. 살아있는 불가사리의 색깔이 환상적인 보랏빛이었다는 걸 고깃배를 주목한 사람은 모르고, 고깃배를 밀어내던 노을빛 구름의 잔상이 얼마나 황홀했는지는 불가사리를 주시한 사람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한다. 누구나 보이는 대로 보며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걸 합해도 `제대로 보는 것`에는 한참 못 미친다.양면을 본다는 것, 즉 제대로 본다는 건 삼자의 입장일 때나 가능하다. 당사자는 절대로 양면을 다 볼 수 없다. 당사자가 다 본다는 건 아무 것도 보지 않은 것과 같다. 인간에게 변명이 필요하고, 억울한 감정이 생기는 이유이다. 만약 당사자가 다 볼 수만 있다면 변명할 필요도 억울할 일도 없다. 변명과 억울한 감정은 내 입장의 진심을 말해주는 것이긴 하지만 사안의 실체적 진실과는 무관하다. 이정재의 얼굴을 신동엽 얼굴로 인식하는 건 내 눈이 판단한 진심이지만 그렇다고 그 얼굴의 실체가 신동엽이 되는 건 아니다.사람의 머릿속은 제 나름으로 바쁘고 눈썰미는 저마다의 방향이 있어 모든 걸 다 보지는 못한다. 내 눈의 들보보다 다른 이의 티끌이 먼저 보이고, 내 떡보다 상대 떡이 커 보이는 이유이다. 누구나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자기식대로 판단한다. 그게 잘못은 아니다. 다만 그 `자기 식`이 언제나 옳은 게 아니라는 자각은 새길수록 좋다.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겸허한 두려움을 상비약처럼 지니고 다니고 싶다. 숱하게 노출되는 판단의 실수 앞에서 그 약 한 알 삼킨 뒤, 한 호흡을 쉬어 갈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29

소설에 가닿기를

`디어 라이프`는 2013년도 노벨 문학상을 탄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이다. 평생 단편만을 고집해온 작가에게 노벨 문학상이 주어진 건 이례적이다. 작가들은 언젠가는 장편을 써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독자 또한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스토리 전개가 확실해야 하고, 주제가 거창해야하며, 보편타당한 감동이 전제되어야만 꼭 소설인 건 아니다. 장편이 추구하는 그런 부분만 독자로서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디어 라이프`는 괜찮은 소설로 읽힌다. 소설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고 짚어내는 과정의 소산물이다. 앨리스 먼로의 이 담담한 전언들은 꼰대들의 가르침에 길들여진 영혼에게는 그다지 울림을 주지 못한다. 내면이 어딘지 불온하고, 라일락꽃의 썩은 향도 삶의 큰 부분이란 걸 갈파한 이에겐 썩 어울리는 책이다. 소설에서 `좋은 생각`같은 잡지를 기대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앨리스 먼로의 힘은 `여성적 시각이 주는 섬세한 공감`에의 호소에 있다. 십여 편의 작품 대개가 내 이야기 같고, 내 마음을 대변해준다.때론 사랑은 불온한 정직함이다. 부조리한 그 기로에서 갈등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의 한쪽 길만 아는 거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그 사랑의 맛은 어쩌면 태생부터 불온한 속성을 지닌 건지도 모른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오더라도 한 번쯤은 격렬히 부딪쳐 신열을 앓게 하는 그 무엇. 그 순간만은 세상의 그 어떤 시선과 잣대에서도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사랑과 별개로 결핍 또한 나의 주인이다. 누군가 상실의 고통으로 힘겨워 한다면 그 계단에 퍼질러 앉아 서로의 결핍을 위무할 수도 있는 거다. 사랑은 피자조각처럼 딱딱 나눠지는 게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차차 스며드는 것. 그렇게 상처와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삶이 작가의 미시적 시선에 포착된다. 과장이나 미화 없는 그 섬세한 물결을 따라가다 보면 내 삶이 얼마나 관습의 장벽과 마주하고 있는가도 알게 된다. 몸과 마음에 드리운 그것을 한 겹만 벗길 준비가 된 독자에겐 맞춤한 책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28

착각과 오해

작은 것이 큰 것 된다. 모든 문제는 그렇게 시작된다. 당신의 사소한 눈빛 하나, 떨리는 손끝 하나에도 당신의 마음이 들어 있다. 그 마음이 품은 `감정의 결`을 제대로 읽는다는 건 쉽지 않다. 내가 읽는 당신의 마음이 실존하는 당신의 마음과 같을 수 없다. 이 두 마음의 간극을 선인들은 `착각`또는 `오해`라는 말로 이름 지었다. 우선, 착각이란 말은 여간 귀여운 데가 있는 게 아니다. 상대에 대해 눈치 볼 것 없이 주체의 감정에 보다 충실한 단어이다. 그 대상이 주로 자기 자신인데다 긍정적 평가를 내릴 때 활용되는 이점도 있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이 잘생겼다는 착각 속에 산다` 라거나 `그녀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착각한다`라는 말 등이 좋은 예이다. 당사자의 감정에 충실할 뿐, 상대의 감정과는 그리 상관없는 게 착각 현상이다. 해서 우리는`자뻑`하는 당신에게 여유 띤 웃음을 보여줄 수 있다.오해는 좀 다르다. 똑 같이 뭔가를 잘못 지각했을 때 쓰이는 말이지만 그 느낌은`착각`일 때와는 다르다. 오해는 주체자의 감정뿐만 아니라 상대의 감정까지를 포괄한다.`내가 오해했다면 미안해`, `우리는 서로의 오해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등의 예문에서 보듯 오해에는 반드시 그 당사자들이 등장한다. 착각이 자유일 수 있는 건 대상의 눈치를 볼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해에는 자유가 없다. 누군가를 오해하는 순간, 또는 누군가의 오해를 받는 순간 그보다 더한 마음의 지옥은 없다.아침 텔레비전에 연륜 깊은 연예인이 나왔다. 자신은 멋있고, 날씬하고, 섹시하게 늙어가는 중이란다. 보는 이에 따라 주책이고, 뚱뚱하고,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반기를 들 수도 있겠다.하지만 그 모습이 당당하고 귀엽게 보이는 건 그 착각이 내 감정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잘못된 이해라도 착각과 달리 오해가 치명적인 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너와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착각에는 자유가 허용되지만 오해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27

대상에 집중하기

SNS가 내 전부를 보여주는 건 아니다. 삶에는 전면과 이면이 있다.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과시하고픈 것과 수치스러운 것, 보여주고 싶은 부분과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다. 소셜 네트워크에 올라오는 건 전자이다. 그래야만 한다. 만약 누군가 커피숍 가서 탐나는 찻잔을 훔쳐왔다거나, 아버지한테 반항하다 가죽허리띠로 죽도록 맞았다거나, 매일 밤 지치지도 않고 사랑을 나눈다거나 하는 내용만 줄곧 올린다면 내용을 보는 누구나 불편할 것이다. 그런 건 일기로 쓰거나 심하면 심리상담소를 찾을 일이지 공개할 일은 아니다. 보여줘도 되는 것(보여 주고 싶은 것)만 우리는 SNS에 공개한다. 따라서 좋기만 한 그 정보가 그 사람의 전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특히 나와 비교하는 것은 금물이다. 체코의 레트나 언덕의 아침 햇살과 블타바 강 노을을 배경으로 미소 짓고, 네보지젝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던 SNS 속 당신도 알고 보면 나열할 수 없는 숱한 아픔과 좌절과 번민을 안은, 나와 다르지 않은 소시민일 뿐이다. SNS의 이런 속성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상대와 나를 비교하기 시작한다.`대조효과`라는 말이 있다. 같은 대상을 두고 확실하게 비교되는 두 상황이 제시되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말한다. 예를 들면 같은 원피스를 옆집에서는 오백원에, 앞집에서는 삼백원에 판다면 망설임 없이 우리는 후자를 택한다. 그 원피스가 삼백원의 가치가 있나 없나 하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이백원 벌었구나, 하고 뿌듯해한다.SNS를 통해서도 이런 심리를 볼 수 있다. 해외여행이다, 비싼 공연이다 등 수시로 올라오는 친구 소식을 보자니 내가 초라해 보인다. 본질은 초라한 게 아닌데 그렇게 비교되는 심리가 여기선 중요하다. 하지만 대조효과는 상대적이며 착각일 뿐인 현상이다. 비교하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면 된다. 위를 보고 겉을 따질 게 아니라, 옆과 아래도 보고 속까지 살필 일이다. 있는 그대로 대상을 보는 집중력과 심지 굳은 마음이 필요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24

도덕적으로 보이고 싶을 뿐

학교 때 가정 시간, 가구의 조건에 대해 공부할 때였다. 침대의 길이는 180센티미터라며 그것을 교과서 아랫부분에 적어 넣으라고 선생님께서 말했다. 혹시라도 대입시험에 나올까봐 보충교재에 나오는 그런 내용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던 시절이었다. 몇몇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키 180센티미터 넘는 사람도 많은데, 왜 그런 쓸 데 없는 내용까지 적어야 하나. 시험에 이런 터무니없는 것이 나올 리도 없는데. 뭐 이런 불만들이었을 게다. 물론 `침대 길이는 180센티미터`라는 선생님의 지시사항을 적지 않고 군소리로 반기를 든 학생들은 손바닥을 맞았다. 다음 수학 시간, 선생님은 일명`빡빡이`라 불리는 숙제를 검사했다. 연습장 앞뒤로 빡빡하게 몇 장씩 수학 문제를 풀어오는 것이었다. 역시 몇몇 학생들은 일찌감치 숙제를 포기하고 손바닥 맞는 길을 택했다. 나머지 숙제를 해온 학생들도 제 스스로 문제를 풀어온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은 습관처럼 참고서 풀이 내용을 앞뒤로 빡빡하게 베꼈을 뿐이었다.이제 도덕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군사부일체에 대해 열변을 토하신다. 좀 부당하고 불합리하더라도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일이야말로 도덕적 인간이며, 나아가 애국 시민이라는 논리였다. 앞선 두 시간에 손바닥을 맞지 않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뿌듯한 심정이 된다. 가정선생님과 수학선생님이 불합리하고 부당한 건 인정하지만 그분들의 지시사항을 따르는 건 학생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뭐 이런 취지의 뿌듯함이다. 그들은 순간적이나마 손바닥을 맞은 친구들에 비해 훨씬 도덕적이라는 느낌마저 받는다.하지만 그날 오전 집단상담 시간에 그들의 개인적 가치를 물었을 때 그들은 스스로 손바닥 맞은 친구들에 비해 그다지 도덕적이라고 자부한 건 아니었다. 불합리한 상황을 따르게 되었을 때 그것에 적당한 응원이 실릴 경우 우리는 스스로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포장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비도덕과 도덕의 경계에서 흔들리는`인간적인`존재일 뿐이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23

통제라는 시선

가끔 텔레비전 국제 뉴스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지역에 주민들 소요 사태가 생긴다. 건물 곳곳에 방화가 일어나고 거리엔 부서진 집기들로 가득하다. 거리로 몰려나온 수많은 인파 사이에 꼭 남의 물건을 약탈해가는 군상들이 있다. 무단이나 불법으로 취한 그 물건들을 카메라 앞에 들이대며 마치 개선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평화와 안전이 보장된 나날들에서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질서와 규범이라는 합의 체제 안에서 세상은 별 탈 없이 굴러간다. 하지만 그 합의 체제에 조그만 균열이 생기면 그 틈새를 비집고 인간의 비양심적 근성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만다. 위의 장면은 인간의 온전한 양심이 얼마나 유지, 발휘하기 어려운가를 말하는 좋은 예시가 되어준다.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인간 스스로 `통제`를 부르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 인간의 행동 양식이 양심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재해 앞에서, 또는 질서 유지가 전제된 공공 서비스에 혼란이 오면 인간 세상에는 약탈과 폭력이 급증한다.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몇몇 집단들은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혈안이 되고 안달을 한다.들킬 염려가 적거나 처벌 받을 확률이 낮을수록 일탈 행위에 가담하는 횟수나 강도가 높아진다. 멀쩡한 배기통을 새것으로 갈아야 한다고 정비사는 거짓말을 하고, 실수로 거스름돈을 덜 줬다는 걸 알고도 가게 주인은 그냥 넘기며, 거리에 휴지를 버리고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강력한 통제가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게 그 어떤 동물보다 통제나 강제된 규율을 싫어하는 게 인간이란 피조물인데 막상 통제가 없거나 그것이 느슨한 경우에 양심 불량을 자청한다는 것이다. 양심만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인간 스스로 인정하기에 통제라는 사회적 규율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다시 양심 불량이 되는 인간 심리의 오묘함./김살로메(소설가)

2014-01-22

춥지 않아도 떨리는 것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디어 라이프`의 한 단편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말이다. 가령 아래와 같은 이야기라면 앨리스 먼로의 그 선언에 충분히 공감하게 될 것이다. 결핵 요양원의 교사 일자리를 찾아 나선 나는 토론토에서 시골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기차역에서 열한 살의 메리라는 수다쟁이 여자애를 만나고 그 아이가 요양원에서 일을 돕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육적 의미 부여보다는 하루하루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그곳이 지리멸렬하지만 숨통 틀 곳은 있다. 평판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흉곽 수술을 전담하는 외과의사와 데이트를 하고 결혼까지 약속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결혼 의사를 번복한다. 발목에 쇠사슬을 감은 심정으로 나는 그곳을 떠나는 기차를 타게 된다.기차 안에서 우연히 메리 일행을 만난 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고마울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그에게 달려가기 위해 기차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은, 수치심을 막는 계기가 되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여러 해 동안 나는 언젠가 그와 마주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토론토 북적대는 길에서 그와 재회한다. 별일 없는 것처럼 덤덤히 얘기하지만 그곳 아문센을 떠나올 때와 똑 같은 감정을 느낀다. 격한 울음도 없고, 내 어깨를 잡는 손도 없지만 멍한 상태의 나를 기차가 태우고 떠나올 때와 같은 감정을.사랑의 감정이 시간이 흘렀다고 없어지진 않는다. `팽팽하고 신경을 건드리는 기쁨`, `춥지 않아도 몸의 떨림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그 한때의 사랑! 하지만 운명처럼 헤어짐 앞에서 어느 한쪽은 `이 날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 될 거라고 발뺌을 하게 되리라. 그렇다고 그 사랑이 잊힐리가. 어느 날 문득 그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기차안의 심정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건 없다. 변하는 건 현실이지 사랑했던 그 감정이 어떻게 변할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1-21

함께 가기

뒤꿈치가 갈라졌다. 부옇게 각질도 일었다. 겨울이면 찾아오는 불청 현상이다. 물기 부족한 뒤꿈치는 잎맥처럼 잔금이 서리고 부스스한 가루마저 날린다. 심한 곳은 골이 푹 파였다. 뒤꿈치가 거칠어지고 지저분해진 데는 짧은 시간만이 필요했다. 연화용 화장품만 제때 발라주면 되는데 귀찮다고 방치했던 것이다. 겨울에 대중탕에 가면 둥근 돌이 비치되어 있었다.(원래 있었는지 개인이 준비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중년의 엄마들은 물에 불린 뒤꿈치의 각질을 면도칼로 도려낸 뒤 그 돌에다 대고 문질렀다. 그라인더 역할을 하는 돌 위에서 뒤꿈치를 갈고(?) 나면 일주일은 개운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각질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번 목욕탕에 갔을 때는 전보다 더한 강도로 뒤꿈치를 문질러야만 했다. 그렇게 악순환이 이어졌다.젊었을 때는 그런 풍경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건강한 청춘의 뒤꿈치에는 각질이 생기지도, 골이 패지도 않았다. 해서 생업에 전력투구하는 엄마들의 고단한 땀이 모여 당신들 발을 거칠게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노동하지 않고 가만있어도 뒤꿈치가 망가지는 나이가 되고 보니 이건 열심히 산 흔적이 아니라 단순한 노화 현상 중의 하나라는 걸 알겠다.게을러서 방치했던 뒤꿈치에다 보습제를 바른다. 하룻밤 새 온 발바닥이 부들부들해졌다. 연화제 화장품은 각질을 없애는 원리가 아니라 그것을 부드럽게 진정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알겠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점점 생기를 잃는다. 푸석해지고 거칠어진 삶의 흔적이 내 것이 아닌 건 아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없애려 하는 것보다 달래서 함께 가는 게 더 합리적이다. 도려내고 문지른다고 근본적으로 내 삶의 각질이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나 회한, 나아가 까칠함이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찾아오는 그것을 도려내고 깎아낼수록 더 두툼한 삶의 이물질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된다. 삶의 각질은 잘라내고 갈아내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부드럽게 숨죽여 함께 가야할 동반자라는 것을 말랑말랑해진 뒤꿈치가 말해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20

슈퍼 안팎의 관계

인간관계에 이상적인 궁합은? 충고하기 보다는 들어주는 관계일 때가 가장 이상적이다. 거기다 맞장구까지 쳐주면 더 바랄 게 없다. 옳은 말은 아낄수록 좋다. 하지만 어쩌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서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더할 나위없다. 이때도 원칙은 될 수 있으면 바른 말은 아껴야 한다는 것. 정답은 이미 너나 나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옳은 말을 하는 친구가 아니라 내 말을 들어주는 친구가 필요하다. 모든 이로부터 옳은 말을 들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한 스트레스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빈틈없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충고의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나아가 제 말에 심드렁한 리액션으로 화답하는 친구와도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다. 어딘지 맹탕이고, 알고 보면 허당인 범부들에게 자중자애하거나 완벽한 사람은 부담스럽기만 하다.흔히 이런 경험을 한다. 어떤 사람과 만나면 나는 슈퍼에 갇힌 피의자이고, 상대는 투명 창을 사이에 둔 슈퍼 주인 같다는 느낌. 이것은 상대적인 감정이라 내가 피의자 역할일 때도, 상대가 피의자 역할 일 때도 있다. 물론 감정이입이 더 잘 되는 쪽은 아무래도 갇힌 자 입장일 때다. 왜냐면 슈퍼 주인 입장일 때는 사방 천지가 열려 있으니 거리낄 게 없다. 하지만 갇힌 자 입장 일 때는 온통 벽에 가로막혀 있으니 답답하고 갑갑할 수밖에 없다.슈퍼 주인은 경찰을 부를 기회만 엿본다. 슈퍼 안 물건에 손댈 의향이 전혀 없던 피의자는 무슨 잘못을 한지도 모른 채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출구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갇힌 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슈퍼 안 물건에 눈을 돌린다. 진열된 과자나 음료수를 먹기 시작해 슈퍼 안의 모든 물건을 해치우기에 이른다. 그때 슈퍼 주인이 경찰에 신고해봤자 때는 늦다. 쌀 다 퍼먹은 독안의 쥐가 주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슈퍼 안팎의 관계일 때는 맹렬히 맞설 자신이 없으면 서서히 정리하는 게 맞다. 얼굴 맞대고 힘들어 하느니 덜 보고 자유로운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맞는 사람 만나기에도 생은 너무 짧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17

구기고 구긴다

왼발을 삐끗했다. 밤길, 움푹 팬 아스팔트 웅덩이를 미처 보지 못해 발을 헛디뎠다. 창피한 것도 잠시, 퍼뜩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둠 속 허방이야말로 신의 한수가 아닐까 하는. 밝을 때 길을 걷는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웅덩이나 돌부리가 보이더라도 건너뛰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걷는 건 조금 다르다. 잘 보이지 않아 허방에 빠지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확률이 낮보다 높다. 허방 자체는 밝으나 어두우나 그 자리 그대로 있다. 하지만 허방이 제 가치를 발하려면 인간이 그 속에 제대로 빠져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둠의 조건이 낫다. 헛디디지 않기 위해서는 눈조리개를 더 열고 무릎이나 발목 관절도 더 굽히는 게 좋다는 것을 깨치게 되기 때문이다. 삐딱한 시선과 뻣뻣한 관절로 밤길 걷다가는 허방 앞에서 제대로 고꾸라지고 만다.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밝은 면이 펼칠 때는 앞도 잘 보여 뻣뻣한 발걸음이라도 허방을 쉽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흐린 날에는 장막이 눈앞을 가려 웅덩이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럴수록 무릎관절을 꺾어 조심스런 행보를 해야 한다. 고영민 시인의 말처럼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에 이르고 싶다.미숙한 관용을 지닐수록 타인에게 엄격한 발소리를 낸다. 뻣뻣한 그 소릴랑은 제 속을 향할 때 제격이다. 허방 앞에서 고꾸라지는 건 무릎을 덜 굽혔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선 조심조심 부드러운 발걸음이라야 발밑 웅덩이를 제대로 보게 된다. 원칙보다 나은 건 상식이고, 상식보다 나은 건 이해이다. 원칙을 들먹이며 핏대를 올리기보다 이해할 수 있겠다며 손 맞잡는 일이 절실한 나날이다. 멋진 시가 적힌 뻣뻣한 책으로는 현실이란 똥구멍을 닦을 수 없다. 밑바닥 깊숙한 그곳을 닦기 위해선 그 종이 찢어 구기고 구겨야 한다. 마침내 부들부들해진 그것이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갈 수 있을 때 진짜 시의 날들을 맞는 거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16

소크라테스의 질문

누가 뭐래도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아고라 광장에서, 지중해 바닷가에서, 또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격렬한 토론을 할 때 애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말을 문자로 생중계했다. 그것이 플라톤의 `대화편`이다. 본격적으로 철학을 골방 깊숙한 사색의 장에서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이끈 주인공이 소크라테스이다. 왜 철학이 거리로 나왔을까. 소크라테스의 주장 요지는 이렇다.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 들판을 뛰어다니는 토끼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건 더 이상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말을 문자로 기록한다면 그것 역시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보았던 것이다. 질문과 대답이 자유롭지 못한 문자를 빌린 철학 방식은 소크라테스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플라톤이 스승의 말을 대화 형식으로 옮긴 건 스승을 따라 한 셈이다.소크라테스 철학을 흔히 대화법 또는 산파술이라 한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돕듯이 대화상대자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질문하는 형식이었다. 말하자면 답을 내놓는 자가 아니라 오직 질문하는 자였다. 가르치려는 자가 아니라 질문으로써 답을 숨기는 자였다.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대화 상대자가 제 모순에 빠져 우물쭈물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당혹감과 혼란에 빠진 상대방은 지친 나머지 소크라테스의 입만 바라본다. 결론을 듣기 위해서다. 하지만 답을 내놓을 리 없다. 찜찜한 미완의 숙제만 떠안은 채 뚜렷한 결론 없이 대화는 마감되고 만다.해결되지 않고 끝난 문제, 이것을 철학 용어로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다.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인데 소크라테스 대화법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되어준다. 통로 없는 그 지점은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 이유도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대화의 막장까지 내려가 봐도 속 시원한 출구가 보이는 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 지점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 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