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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다시 한글날

연말에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면 기념품으로 탁상용 달력을 준다. 지난해도 그랬다. 한데 책과 더불어 꺼낸 달력 사이로`빨간색 9`자가 쓰인,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네모 스티커가 툭 떨어진다. 올해 다시 법정공휴일이 된 한글날에 붙일 공휴일 표시 종이이다. 새 달력을 인쇄한 뒤에 한글날이 공휴일로 재지정 되는 바람에, 추가로 빨간 글씨가 필요했던 것이다. 검은 글씨로 된 기존의 한글날 날짜 위에 빨간색 스티커를 붙이는데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1970년 공휴일이 된 이래 영광을 누리던 한글날은 1991년부터 국군의 날과 함께 법정공휴일에서 사라졌다. 너무 잦은 공휴일로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랬다는데 하필 한글날이 그 희생양이 될 게 뭐람, 하는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있었다. 젊은 날, 한글 전용 운동에 관심이 많았을 만큼 그 누구보다 한글에 대한 애정이 강했기 때문이다.한글에 대한 내 관심은 특별히 그것이 세계 제일의 과학적이고 창의적인 문자라거나 유네스코 세계 지정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거나 하는 이유와는 상관이 없다. 모든 언어와 문자는 소중하다. 한글만이라는 이유로, 한글이 우수하기 때문에 한글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언어와 문자의 존재 이유는 누가 봐도 분명한데 그 활용은 모국어를 제외하면 대개 사람들에게는 어렵기만 하다. 그나마 제 의지대로 부릴 수 있는 언어가 모국어인데, 제 생각과 행동을 맘껏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만하다.다시 법정공휴일이 된 한글날 아침, 경쟁하듯 각종 포털 사이트 이름이 예쁜 서체의 한글 이름으로 바뀌었다. 기분 좋은 울컥함이 밀려온다. 비록 하루만의 기쁨일지라도 잊히는 것보단 낫다. 한글날은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한글날 자체로 우뚝한 날이었으면 좋겠다. 저마다 지닌 얼을 맞춤하니 표현할 수 있는 젖줄 같은 글을 지니고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 받을 일인가. 그 젖줄은 당연하거나 무시해도 좋은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위대한 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10

`시네마 천국` 재개봉

`시네마 천국`이 재개봉되었다. 1988년산 영화라니 25년 만이다. 우리 지역에도 개봉관이 잡혀서 좋아했는데 상영 일정이 후할 리가 없다. 관객이 있어야 스크린이 오르지 않겠나. 이틀이나 상영 기간이 남았건만 조조로 일일 일회만 상영하다 보니, 내 일정과 맞지 않아 못보게 되었다. 명화 중의 명화라지만 케이블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심심하면 방영되었기 때문에 몇 번씩 본 사람들이 많아 관심을 덜 받게 된 것도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영화관을 찾아 명화에 대한 예우를 다하고, 감동 또한 배로 받고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아쉽다. 영화관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나 역시 `시네마 천국`은 몇 번 본 영화이다. 영국 탄광촌의 발레 소년 이야기인 `빌리 엘리어트`와 더불어 중고생을 위한 논술용 영화로 자주 활용한 덕분이다. 늙은 영화기사 알프레도와 어린 영화광 토토의 우정, 곁다리로 토토의 첫사랑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영화는 아프지만 따스하고, 가난하지만 사랑스럽다. 삶의 희로애락이 영화라는 거름망을 거치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영화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되, 삶보다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알프레도는 이 사실을 어린 친구 토토에게 깨쳐준다. 영화보다 인생이 훨씬 힘들다고. 첫사랑의 쓰라림도 없이, 경제적 곤궁도 없이 무료한 평화만 계속되는 게 삶이라면 영화 속에서 우리는 위안이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다. 첫사랑에 괴로워하는 토토에게 몸이 무거우면 발자국도 깊은 법이고, 사랑에 빠지면 괴로운 이유는 막다른 골목과 마주치기 때문이라고 일러준다. 화재로 시력을 잃게 되었을 때는 시력을 잃었지만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게 된다고 긍정한다.영화는 현실이 아니며, 현실은 그보다 훨씬 혹독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알프레도 덕분에 토토 내면은 윤택해질 수 있었다. 알프레도의 인생철학을 영화관에서 제대로 맛보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재개봉 덕에 `시네마천국`을 되짚어볼 수 있게 됐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08

여자가

어릴 때부터 `여자가`라는 말을 자주 듣고 산 세대이다. `여자가 문지방에 걸터앉으면 복 날아간다`, `어리바리한 남편도 남자다. 그러니 여자인 아내가 함부로 나서지 마라`, `정월 초하루부터 여자가 남의 집에 방문하거나 전화 걸어서는 안 된다`, `서방 갓 끈도 풀기 전에 여자가 고름 먼저 푼다` 등등 숱하게 그 `여자가`란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집안이건 밖이건 흔히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무의식적인 이런 학습 효과(?) 때문에, 어렸을 때 내 여성관은 다분히 노예근성이 포함 되어 있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친구집에 다녀 온 큰오빠가 그 친구 아내를 극찬했다. 라디오 진행자라는 그 아내는 얼굴도 고운데 맘씨는 더 곱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아무리 바빠도 남편 발 씻는 물을 꼭 안방까지 대령한다는 것이었다. 하룻밤 묵은 오빠 자신도 따뜻한 물대야 시중을 받았다면서 `여자가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어린 나는 커서 물대야 바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하늘같은 큰오빠가 저토록 옹호하는 것이니 그것이 진리라고 믿었다.요즘 세대는 `여자가`라는, 훈육을 빙자한 그 말을 듣고 자라지는 않는다. 자의식이 강해진 여자애들 스스로 그 말의 부당함에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세뇌된 우리 기성세대는 `여자가`라는 그 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모 부장판사가 법정에서`남편과 변호사가 있는데, 여자가 왜 이리 말이 많으냐`는 식의 발언을 했단다. 여성은 종속적이어야 한다는 그 시각이 불편하고 불쾌하다.중년인 그 판사도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라는 말을 자주 접했음에 틀림없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고, 한 번 길들여진 의식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약자인 여성에 대한 비하의식을 간직한 사람이 약자 전반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갖추고 있을 지 의문스럽다. 법의 존재 이유는 공정함에 있지만, 그 공정함의 혜택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언제나 약자 쪽이라는 것을 그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07

고독사(孤獨死)

지난 2일은 `노인의 날`이었다. 훈훈한 소식으로 노년층을 위무해도 시원찮을 판에 60대 노인이 백골로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먼저 날아든다. 보도에 의하면 사망한 지 5년이나 된 노인의 집안은 어두컴컴한데다 거미줄이 얽혀있었고, 주위 환경은 너저분했단다. 겹쳐 입은 아홉 겹의 옷도 맹추위와 사회의 무관심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시킨 죽음이었다. 발견할 당시 67세였다니 사망 당시는 62세였다. 노년층 부류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나홀로 죽음`에 방치된 걸 보니 더 가슴 아프다. 갑작스런 건강 악화와 외로움이 죽음의 큰 원인이었을 텐데 노인 치고는 젊은 층이라 주변의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복지 차원에서도 65세 이상 노인들은 당국의 관리를 받을 수 있지만 60대 초반은 그 관리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노인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그 연배의 사람들이 건강을 잃고, 돌봐주는 가족이 없을 경우 이번처럼 안타까운 일은 생길 수밖에 없다.노인들의 고독사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기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판 밖의 일이 아니다. 노령화 시대는 빠르게 다가오고, 나홀로 노인 가구 수는 늘어만 간다. 통계청 조사를 보면 올해 홀몸 노인은 125만 명이나 되고, 2025년에는 224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2035년이 되면 전체 노인인구는 천 475만 명, 이 가운데 독거노인은 23%인 343만 명이 될 전망이란다. 외로움과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도 그만큼 많아지는 구조이다.일상생활이 어려운 취약 계층이나 거동조차 못하는 위기 계층의 독거노인들부터 우선 관리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정 방문, 돌보미 서비스, 도시락 배달 및 상담 등 독거노인을 위한 당국과 사회의 서비스 제도가 활성화 되어 있긴 하다. 하지만 노인 사각 지대와 고독사 위험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여전히 미흡하다. 개인 차원의 관심과 더불어 이 문제부터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04

기초연금 논란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의 기초연금 관련 공약은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한 마디로 65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기초연금으로 20만원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각종 선거 공약이 너무 쉽게 공약(空約)이 되어버리는 현실이기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박 대통령의 약속만은 믿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하게 된 청와대에서 공약 수정을 선언했다. 씁쓸하지만 역시나 하는 맘이 되어 국민들은 참는다. 수정안을 두고 합의를 보지 못한 청와대와 보건복지부 간의 갈등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역시 국민들은 이해하려고 애쓴다.문제는 공약 수정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 성명과는 별도로, 그 수정안 자체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연금 전문가들에 의하면 그 안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불합리하단다. 우선,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길수록 기초연금은 반으로 깎이는 구조이다. 두 연금을 합한 총수령액이 늘어나기 때문에 딱히 손해는 아니라고 해명을 하지만, 총액이 늘어나는 건 내가 낸 국민연금 덕분이지 세금으로 분배되는 기초연금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두 번째, 미래 노인이 현재 노인보다 불리한 수령 구조에 있다는 점이다. 물가 상승이나 국민소득을 고려한 국민연금 지급 방식 덕에 두 연금을 합한 절대 수령액은 늘어나겠지만, 기초 연금의 가치는 현재가 미래보다 훨씬 낫다. 기초연금 수령액이 현재 노인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는 미래 수급자에게 국민연금에서 얻을 유예된 이익을 기대하라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국민연금 장기 가입자와 미래 세대에게 불리한 이러한 구조는 역차별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한 예로 국민연금을 오래 가입할수록 기초 연금이 깎이니, 다른 노후 대책을 마련한 뒤 기초연금을 최대 금액으로 받고자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될 것임을 전제하는 국민들의 너그러운 정서도 이런 논란에 한몫했으니 누구를 탓하랴. 선거 제도가 있는 한 이런 논란은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02

아웃도어·인도어

유행이 나를 압도한다. 몸을 방치했더니 장난 아니게 살집이 잡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파트 내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천성이 게으른지라 예견되는 결과가 그리 밝지만은 않지만, 어쨌든 다시 시작한 운동에 맞춰 복장을 갖추려고 검색을 해본다. 몸이 곧 제 가치를 말하는 세상인지라 몸에 관한 건 뭐든지 상품으로 연결된다. 스포츠 브랜드마다 전략적으로 고가의 운동복을 자랑한다. 거기까진 좋은데 이건 또 무슨 소린지. 패션 관심이 이제 아웃도어에서 인도어로 확산 중이란다. 바쁜 현대인들이 등산이나 야외 레저에서 눈을 돌려 실내 운동인 헬스나 요가 등에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단다. 자연히 스포츠 패션도 실내복 쪽으로 기울어지니 그쪽이 대세라나.등산복 제품이 광고를 휩쓴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제 실내운동복 타령이라니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등산이든 헬스든 운동은 운동일 뿐이고, 운동복의 제일 기능은 땀 흡수와 통풍일 터인데 여기에 실내외 구분이 왜 필요한가 싶다. 이제 우리도 살 만해졌고 소비자들의 다양한 요구에 업계도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겠지만, 어쩐지 고리타분한 옛어른(?) 마인드가 되어 너무 앞서가는 업계의 트렌드 사냥에 시비를 걸고 싶어진다.십여 년 전만 해도 산에 오를 땐 청바지에 면 티셔츠, 거기다 빨간 등산용 재킷을 걸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땀 걱정 없이, 통풍에 대한 부담 없이 잘만 산을 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등산할 때, 조깅할 때, 골프할 때 입는 옷이 달라졌고, 운동화도 트레킹화, 등산화, 조깅화, 워킹화, 스니커즈 등으로 구분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단벌 나일론 줄무늬 운동복에 밑창 허술한 운동화 하나만으로도 족히 운동했던 그 시절이 옳다는 게 아니다. 다만 너무 일회적 상업성에 기대 소비자를 이용하고 시험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인다. 단순한 기능성 운동복 개념도 이해하기 전인데, 이젠 아웃도어 인도어까지 구별해가며 소비하라고 부추기니 어느 장단에 손발을 맞출꼬. 소극적 저항으로 클릭을 유보하는 중에 이 글을 써본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01

작가 최인호

최인호 작가가 별세했다. 지병인 침샘암으로 고생하셨다는데, 아직 세상을 뜨기엔 이른 연세라 안타깝기만 하다. 주요 뉴스로 떠오르고, 장례식이 치러지고, 정부에서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정작 젊은 층 사이에는 최인호 작가가 누구지, 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작가 최인호는 누가 뭐래도 7080세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예를 들면 1983년 한 해, 베스트셀러 목록에`고래사냥`과`깊고 푸른 밤`이 동시에 올랐고, 두 작품은 당시 일인자였던 배창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야말로 전국의 젊은 감수성이 최인호 신드롬으로 수렴되던 한 시절이었다.`별들의 고향`으로 대표되는 그의 초기 작품들은 도시문학 또는 대중소설을 표방했다. 절망하는 젊음의 책임을 사회에 묻지 않고 개별자 스스로에게 전가하고,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로 여성을 도구화해버린 점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최인호표 브랜드가 될 만큼 당대 사회의 감수성을 잘 그린 작가였다. 후기로 갈수록 작가는 통속적 소비문학 대신 문학의 진정성으로 승부를 건다. 장편`상도(商道)`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때 3백여만 부가 팔릴 만큼 주인공`임상옥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라고 깨쳐주었고, 작은 이익보다는 의와 도를 따르는 것이 더 큰 이윤이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독자들은 무한 신뢰를 보냈던 것이다.문학의 위상은 옛만 못하고 문학계의 큰별은 자꾸만 사라져간다. 애잔한 마음일랑 작가의 작품을 들춰보는 걸로 대신해야겠다. 샘터사에 장장 36 년간이나 연재했던 연작소설`가족`이 오늘 같은 날 제격이겠다. 작가가 연재를 시작했던 서른의 나이에 네 살이었던, 이제는 또 다른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딸 다혜와의 추억은 어찌하고 그리 일찍 가신 걸까. 경쾌하고 청량하던 청년 작가는 곁에 없고, 그의 소설로 위로받던 중년의 독자만 우두커니 남아 애달픈 제 청춘을 소급할 따름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30

바틀비의 화초

화초에 물을 준다. 같은 아침 햇살을 받건만, 산세베리아나 고무나무 등은 무작정 생기발랄하기만 한데, 앤슈리엄이나 옥잠화는 사시사철 풀이 죽어 있다. 새치름하니 생기 잃은 화초들은 그렇다고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신경이 쓰여 물 더 주고, 자리 바꿔 가며 통풍에 신경 써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도리어 `활기 찾을 의향 없음`이란 표시로 제 잎맥을 늘어뜨린 채 애간장을 녹인다. 삶이란 뭉근한 연민과 은근한 저항의 관계망일 때가 있다. 허먼 멜빌은`필경사 바틀비`를 통해 이러한 피로한 연민과 수동적 저항의 알레고리에 대해 짚어냈다. 수동적 저항만큼 열성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지만 그 저항에는 악의가 없고, 저항을 감당하는 자 역시 상대를 이해하려 애쓴다고.온건하게만 보였던, 자신이 고용한 필경사가 사흘째부터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말로 글씨 쓰기를 거부한다. 고용주인 변호사의 잘못을 따지는 적극적 반항이 아니라, 이유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소극적 저항을 고집한다.`하고 싶지 않아요`가 아닌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는 말은 소시민 이하의 삶을 사는 필경사 을이 변호사 갑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 의사 표현인지도 모른다. 변호사가 당황하게 되는 건 갑의 입장이 아니라 보편적 정서 상 필경사를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해고 통보에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는 바틀비를 피해 변호사가 사무실을 떠나는 지경에 이르고, 바틀비는 결국 구치소에서 식음을 전폐하다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변호사의 입을 통해 작가 멜빌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까. 필경사는 가엾은 사람일 뿐 나쁜 사람이 아니며 악의 또한 없다고. 그는 쓸모 있는 사람이고 변호사 역시 훌륭하지만 서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는 각자의 영역이 있고, 어떤 경우라도 남의 영혼에 완벽하게 가닿지는 못한다. 한쪽은 연민하다 지치고, 다른 한쪽은 제 아픔을 소극적으로 어필하다 쓰러진다. 나와 화초도 그렇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7

히스꽃

캐시, 히스꽃이 만발한 저 성에서 우리 사랑을 영원히 지켜나가야지, 죽으면 안 돼! 히스클리프, 저 들판 무수히 핀 히스꽃을 한아름 안겨 줘. -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히스꽃 이미지로 넘실대는 작품이다. 작가들은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적재적소에 소도구를 장치한다. 그 소품들이 없다면 소설은 밍밍한 이야기에 그치고 만다. `폭풍의 언덕`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쓰인 소품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히스꽃이다. 야생마 같은 캐서린과 야생초 이미지의 히스클리프를 대변해주는 꽃이기 때문이다. 음울한 구름, 매서운 바람에 이어 폭우가 쏟아지면 반쯤 미친 히스클리프와 제 멋에 겨운 캐서린은 온통 히스꽃 천지인 들판을 맨발로 쏘다녔다. 히스꽃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갖지 않았던 사춘기 시절, 내 머릿속의 히스꽃은 김유정 소설의 동백꽃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었다.까맣게 잊고 있던 히스꽃을 검색해 본 적이 있다. 절대고독이자 광적인 카리스마를 상징하는 히스클리프란 이름도 실은 히스꽃과 관련이 깊다. `절벽에 핀 히스꽃`이란 뜻에 어울리려면 뭔가 강렬한 포스를 풍길 거라고 생각했다. 눈으로 확인해 본 히스꽃은 실망스럽게도 폭풍의 언덕이 아니라 여염집 울타리와 더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황폐한 언덕 풍광과 궁합이 맞는 꽃이란 걸 인정하게 된다. 음울한 구름과 거센 바람을 견디려면 화려하기보다는 키 낮고 소박하지만 강인한 꽃이 제격일 터였다.히스꽃은 에밀리 브론테가 죽는 순간에도 함께 했다. 서른의 그녀가 죽어갈 때, 언니 샬롯 브론테는 구릉에서 꺾어 온 보랏빛 히스꽃을 그녀에게 건넸다. 히스꽃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뿐만 아니라 브론테에게도 어울리는 꽃이었던 셈이다. 한 번이라도 요크셔 지방의 하워스 무어를 여행하고 싶다. 바람 부는 황량한 언덕에 서면, 드넓게 펼쳐진 들판이 보이고 거기엔 온통 연보랏빛 히스꽃이 만발하겠지. 무리 진 히스꽃 덤불을 배경으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여전히 맨발인 채로 저들만의 격정을 발산하고 있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6

SNS 단상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가 급속도로 확대되던 초창기, 팔로어 수가 자랑이던 때가 있었다. 넷 상에서 누가누가 더 넓은 인맥을 가졌는가를 내기하는 마당 같았다. 연예인이나 스포츠인 등 유명인들일수록 팔로어 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SNS 본래의 목적인 소통보다 허세와 자기만족에 더 치중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자연히 혀로 인한 크고 작은 사고도 늘어났다. 축구 선수, 아이돌 가수 등이 차례로 구설수에 올랐다. 만 천하에 공개되는 글이란 점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걸 무시한 결과였다.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했지, 한 마디 말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고, 그것이 사회적 공분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이런 시행착오 때문인지 요즘의 SNS는 공개적인 것 못지않게 폐쇄적인 것도 활성화되고 있다. 관계망에만 치중하는 그물 치기식 확장보다는 구설수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모임방 식 폐쇄형도 인기가 많다. 소위 그들만의 밴드를 만들어 조촐하나마 진솔한 소통의 장으로 삼는 것이다. 소통 갈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피상적인 인맥 대신 소규모지만 내실을 선택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열린 공간과 폐쇄적 공간의 장단점은 있다. 전자에서는 모든 것에 솔직할 수가 없다. 솔직해서도 안 된다. 사적인 감정은 일기장으로 갈 것이지 공개된 SNS에 올라올 일이 못 된다. 원활한 관계망을 위해 사회 규범이 있는 것이니, 적당한 페르소나로 그 규범과 타협할 수 있어야 한다. 배려와 신중을 팔아 깊이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후자에서는 소위 우리끼리 모였으니 비교적 솔직해도 좋다. 일기장에 버금가는 말들의 폭포수로 스트레스도 날리고 진솔한 마음의 창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우리 삶 자체가 공개와 비공개의 연속이이고, SNS는 그 삶의 축소판이다. 자신을 드러낸다는 게 두려우면서도 제 맘을 알리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운명적 속성이다. 이 팍팍한 세상, 약점 많은 SNS이지만 잘만 활용하면 그것은 작은 위안이 되어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5

고졸미(古拙美)

우리 고전문화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던 딸아이가 묻는다. `고졸미`가 뭐야? 방송을 보지 않고 있던 나는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되묻는다. 시청하지 않은 핑계도 있지만 실은 나도 처음 듣는 말이니 그 되물음은 나도 모른다는 뜻과 같다. 어감만으로는 뭔가 고결하거나 고상함이 넘치는 단계를 표현하는 말 같다. 그세 딸내미는 스마트폰으로 사전 찾기를 한다.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란다. 완전히 내 생각을 벗어났다.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일까. 그쪽 방면에선 널리 쓰이는 `고졸미`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 들어봤다. (어쩜 상식의 문제인데 나만 몰랐을 수도 있다!)고졸미라는 한자를 보는 순간, 헛갈리기만 했다. 오래되었다는 뜻의 `고`(古)는 그렇다 치고, `졸`(拙)의 한자를 보는 순간, 왜 이게 `소박하다`는 뜻이 되어야 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졸렬하다, 옹졸하다, 고 말할 때 쓰는 졸(拙)자만 떠오를 뿐, 다른 뜻으로 쓰이는 한자어 예는 한 단어도 연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사전 찾기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졸(拙)이란 말은 `옹졸하다, 졸렬하다` 라는 뜻 말고도 `둔하다, 어리석다, 질박하다, 수수하다, 서툴다, 불우하다, 곤궁하다`등의 뜻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그제야 서투루지만 빠른 것을 뜻하는 `졸속`이란 낱말도 떠올랐다.의문이 해소되고 나니 `고졸미`라는 말을 몰랐다는 부끄러움보다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어렵고 잘 쓰이지 않는 고졸미, 라는 말보다 비록 같은 한자어일지라도 흔히 쓰이는 `소박미`라고 표현해도 무리는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신라의 얼굴무늬수막새나 조선의 달항아리, 나아가 김정희의 세한도를 설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말 중의 하나가 `고졸미`라는 것을 깨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겠다. 남들 다 아는 말을 뒤늦게 익혔으니, 개인적으로 애정이 가는 단어는 아니지만 `고졸미`의 현장 학습을 위해 이른 가을 여행이라도 떠나야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4

대체 행동

갈등하고 욕망하는 인간은 불안을 친구하기 십상이다. 이때 불안은 무의식적인 행동을 수반한다. 면접을 앞둔 수험생이 시계 잠금 장치를 풀었다 잠갔다 하거나, 수술실 앞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보호자가 의자에 앉았다 섰다 하는 행위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인간 행동을 관찰한 데즈먼드 모리스의 말을 빌리면 `쓸데없는 동작을 전혀 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한 자세로 본래적 의지대로만 하는 사람은 지배적인 사람이거나 갈등을 초월하거나 소외된 사람`이라고 보았다. 일반인의 전형에서 벗어난 이런 사람들은 예외로 치고 대부분은 저런 상황이 되면 침착성을 잃고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이처럼 내면의 정서적 혼란을 숨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어떤 동작을 골라서 행하는 것을 `대체 행동`이라고 한다.사람이 모이는 곳 어디에나 대체 행동이 있다. 추석도 그 좋은 예이다. 친척들이 몰려온다. 우선 손님을 맞는 맏며느리, 긴장과 불안의 징후인 대체 행동이 빠질 리 없다. 더 이상 치울 것 없이 정돈된 주방 앞에서 접시를 놓았다 들었다하고, 뜸 잘 든 밥솥 앞에 괜히 코를 들이밀며 밥 익는 냄새를 체크한다. 동서들 역시 푸짐한 음식 앞에서 형님에 대한 최대한의 공치사로, 돕지 못한 제 마음의 불안을 떨쳐내려 한다. 청년층은 오지랖 넓은 어른의 취업 걱정, 연애사 훈수가 자신을 향할까봐 아예 스마트폰에 눈길을 고정시킨다. 할머니는 빳빳한 새 돈이 든 지갑을 부여안고 각방에 흩어진 손주들을 순례하며 당신 건재를 증명한다. 이 모든 게 대체 행동이다.대체 행동이야말로 인간적이다. 자질구레하고 쓸데없는 이런 행위야말로 인간 이해의 필수 영역이다. 불안한 심리의 도피처인 그것이 있기에 우리는 궁지에 몰리지 않고,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지금 누군가 자신의 손바닥을 자꾸 부비거나, 머리칼을 자주 쓸어 넘긴다면 그 사람도 나만큼의 삶의 무게를 지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대체 행동으로 제 불안을 해소하는 중이니 가만 연민할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3

애덤 스미스의 공감

경제학자로 잘 알려진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정부의 규제를 철폐하고 경쟁을 촉진하면 풍요롭고 부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개인의 이기심에 근거한 경제 활동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반하는 건 아니라고 보았다. `국부론`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개인주의 관점도 실은 타인과의 공감을 전제한다. 그것은 그의 다른 저서 `도덕감정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자이기 전에 철학자였음을 상기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는 것은 사회화 과정에서 생기는 공감지수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고립적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다. 이를 두고 애덤 스미스는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이와 상반되는 천성이 존재한다`라고 표현했다.사람은 타인이 느끼는 기쁨이나 슬픔, 분노 등의 감정에 공감하려는 본성이 있다. 이를 근거로 개인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요구에 맞게 행동하려는 경향을 띈다. 애덤 스미스는 바로 이러한 도덕 감정의 신호 체계 안에서 각자 경제적 이익을 최대화하려 할 때 건전한 시장이 작동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때 도덕감에 의해 형성되는 정의를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의 하나로 간주했다. 즉, 사회를 떠받치는 토대는 정의지 자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자혜는 바람직한 권장 사항인 것으로 만족해도 되지만 정의는 마땅히 지켜야 할 규정으로 강제해야 한다고 보았다.이때도 공감이라는 보편 정서가 전제된다.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는 객관적 잣대가 아니라 오히려 개별자 내부의 공평한 관찰자 시선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그 사회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성숙했느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공감 의지에 달려 있음을 스미스는 강조했다. 정의와 자혜를 규정하는 기본 정서에도 공감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그야말로 공감하기 좋은 독서거리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17

독자가 우선이다

유려한 만연체 문장이 아니라 피로를 불러일으키는 숨은그림찾기였다. 백 번 양보하더라도 독자를 피곤과 짜증으로 몰아넣는다. 어쩌다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너무 잦으니 이해심에도 한계가 인다. 섬세한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작가와 편집자에게 화가 난다. 구병모 작가의 장편 `파과`를 읽은 소감이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작품인데 개인적으로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너무 고역이었다. 작가의 부주의한 문장 때문이었다. 달디 단 포도 한 알을 급하게 삼키려다가 목구멍에 쏙 들어갈 경우 우리는 캑, 하고 뱉어낸다. 순간적 낭패감과 찜찜한 다행스러움이 목구멍과 입안에서 오래 맴도는 기분이랄까. 내용을 떠나 문장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니 쉽게 몰입이 되지 않는다.뜬 달을 중요시 여기지만 가리키는 손끝도 무시하지 않는 나쁜(?) 책 읽기 습관을 가진 나 같은 독자는 작가가 구사하는 문법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만연체를 구사해서도 호흡이 가빠져서도 아니었다. 너무 잦은 작가 특유의 비문의 진격 앞에서 인내심을 시험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단정한 문법이, 깔끔한 문장이 전부라고 얘기할 마음은 전혀 없다. 만연체를 구사하든 단문을 엮어가든 그건 작가의 자유다. 한데 너무 독자를 의식하지 않거나 배려하지 않는 작가만의 웅얼거리기 식 문법에 당황스럽기만 하다. 생각 외로 독자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소설이란 무엇인가? 예술인가 아니면 단순한 구어체 발성법에 지나지 않는가?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착잡하고도 기본적인 질문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깊고 서늘한 우물 같은 통찰이 있고, 숨긴 칼날 같은 눈썰미가 있고, 냉장고 속 파과 같은 연민이 흐르면 그건 소설로서 충분한 것일까?모든 문학적 소설이 예술성까지 담보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메시지와 주제가 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소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총체적 항목에서 어느 정도는 독자를 만족시켜야 안심하고 읽어 내려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소설은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16

조정래와 정글만리

어지간히 공부하셨다. 신문이나 잡지의 중국 관련 기사를 6년이나 스크랩했다. 자그마치 90권 분량이다. 그다음 중국에 관한 책이라면 `중국 통사`를 비롯해 80여 권을 독파했다. 여기까지도 놀라운데 그게 끝이 아니다. 그 책들 가운데 소설 집필에 필요한 책 20권을 골랐다. 입시생처럼 줄 치고 메모지를 붙여가며 내용을 익혔다. 마지막으로 취재를 했다. 그 노트가 또 20권이다. 그러니까 중국 관련해서 선생이 준비한 노트만 110권이 된다. 이 모든 게 `정글만리` 집필의 원동력이 되었다. 조정래 작가의 세 권짜리 이 소설은 각 서점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금세 차지했다. 과도한 선인세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도, 요즘 소설계에서 뜨거운 존재감을 확인시키고 있는 정유정의 `28`도 제칠 정도이다.선생은 칭다오를 중심으로 여덟 번이나 취재 여행을 다녀왔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중소기업인도 만났고, 양해를 얻어 소설의 실제 모델로 삼기도 했다. 살아 있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들과 친화하고 융화해야 한다. 그들을 진심으로 이웃으로 대하지 않고서는 그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현실적인 인물을 소설 속에 고스란히 재현했다.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한 경제 소설이란 게 특별하게 보인다. 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 그가 쓴 작품만큼이나 새길만하다. 작가들의 시선이 문제란다. 말하자면 시야가 좁으면 좁게 쓰고, 넓게 보면 넓게 쓰게 되어 있단다. 소설은 인생 총체를 말하는 것이니 겁낼 필요도 없고, 못 건드릴 영역이 없다는 말씀이렷다!중국을 우리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들 시선 또는 적어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소설 같다. 선생의 인터뷰 기사만 보고 책을 주문했다. 아직 손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반쯤은 읽은 이 기분은 뭘까? 그 옛날 `태백산맥`을 읽을 때의 감동을 이 책에서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김살로메(소설가)

2013-09-13

거꾸로 가는 시간

이 글로벌한 세상에 유독 우리 현실만 거꾸로 가는 것 같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고서라도 이석기 사태를 둘러싼 정치권 및 언론의 여러 행태는 유행 지난 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 통진당 수뇌부의 `과대망상적` 발언이나 국정원의 `내란 음모`카드나 일반국민에겐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구태의연한 두 과거가 그들만의 레퍼토리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국민들은 귀 후비거나 코 파는 지겨움으로 그것을 구경할 뿐이다. 두 쪽 다 신선하지도 않고 21세기 정서와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국정원이 통진당 수뇌부를 향해 내란예비음모죄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석기 의원 및 통진당 쪽은 예상대로 날조, 왜곡이라고 맞선다. 이석기 그룹의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의 몇몇 움직임이 내란음모에 해당된다는 것이 국정원의 입장이고 처음엔 모임 자체를 부정하던 통진당 쪽은 단순한 당내 모임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기본 틀에다 변주만 가한 형태인 이런 공안 정국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레퍼토리이다.이석기 의원은 내란음모와 어울리기 보다 마음이 병든 자에 가깝다. 이미 그들 그룹은 국회에 입성할 때나 대선 과정에서 희한한 행보를 거듭해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동정의 대상이지 위협적 존재는 못 된다. 국정원이 확보했다는 내란예비음모 증거 자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들을 그 죄목으로 엮기에는 어딘가 격이 맞지 않다. 그들의 정체가 국가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주고, 국민을 호도할 만큼 위협적인가에 대한 생각도 회의적이다. 법조계나 언론의 분위기도 그들이 내란음모를 꾸몄다고 볼 정도로 명백한 목적과 계획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쪽이다.마음이 병든 자는 치료의 대상이지, 교화의 대상이 아니다. 비뚤어진 정치색이나 고착된 이데올로기는 가두어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선 개입이란 악재를 벗어나기 위한 국정원의 전환용 카드인지, 진짜로 내란예비음모를 할 만큼 그들이 통 큰 그룹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다만 거꾸로 가는 시간 여행에 씁쓸해질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12

창의력이 필요해

하루 종일 단세포생물이 된 기분이다. 시쳇말로 뇌가 너무 청순해진 나머지 또릿또릿한 행보와는 거리가 먼 하루를 보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만 그런 게 아니다. 실수투성이 일상을 꾸리는 건 내게 흔한 일이다. 우선 독서모임에서 활용한 CD를 기기 안에서 빼내지 못해 허둥거렸다. 몸집이 큰 전문 기기였다지만, 눈썰미만 좀 있다면 금세 CD 플레이어의 위치를 찾을 것인데 내 눈엔 그 데크가 그 데크 똑 같아 보인다. 기계치다 보니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자체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저녁에는 약속 장소를 찾느라 또 헤맸다. 자주 다니는 길인데도 주변 조명이 바뀌니 이 길이 아닌가 싶어 같은 곳을 몇 바퀴나 돌고 있는 거다. 당황하다 보니 선물로 준비한 책을 전하는 걸 깜박하고 만다. 여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그건 바람일 뿐이다. 집에 돌아 올 때는 식구들 간식을 사가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기다리던 식구들 표정을 보고서야 아차 싶은 거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한두 가지에 몰두하게 되면 나머지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운이 좋아 신경이 덜 쓰인 것들이 떠오르면 챙길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다.창의적이지 못한 일상이 아쉽기만 하다. 이참에 우스갯소리나 한 번 해야겠다. 곧 죽을 할머니, 내 생명을 구해준 오랜 친구, 꿈꾸던 이상형 여자(남자) 등이 급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고, 자동차로 지나던 나는 오직 한 사람만 태울 수 있다. 누구를 옆자리에 앉힐 것인가? 단순 세포형인 나는 망설임 없이 오랜 친구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창의력 만점인 다음과 같은 매혹적인 답을 내는 이도 있다. 자동차 키를 친구에게 주어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게 한 뒤, 자신은 이상형 여자와 함께 버스를 탄다. 여자가 자신을 좋아해줄 것은 차치하고라도.두려워서, 당황해서, 예민해서 등의 핑계가 붙은 습관성 어리바리함을 벗어나고 싶다. 빠릿빠릿한데다 창의적이기까지 한 전천후 멀티플 인간형으로 거듭나고 싶지만 내 현실은 멀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11

개와 돼지

일찍 잠이 깬데다 운이 좋았다. 유선 방송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그토록 보고 싶었던 `돼지의 왕`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는 거다. 폭력, 자살 등 수위 높은 장면이 많아 청소년 금지용이지만 정작 이 영화는 청소년기가 그 배경이다. 학교 폭력이 주는 씻을 수 없는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자, 어린 나이에 계급의식을 인식하고 인정해야만 했던 우리 자화상에 관한 통렬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찜찜하다. 불편하기만 한 진실이기에 당혹스럽고 갑갑한 느낌이 이 영화의 본질이다. 중1 어린 나이에 약한 이들은 악한 그들에게 철저하게 신체적 인격적 유린을 당한다. 돈 있는 집, 공부 잘 하는 집, 힘 있는 집 아이들은 개에 비유되고, 돈 없고, 존재감 없는 데다 힘마저 없는 아이들은 돼지에 비유된다. 그들 때문에 이들은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고 끝내 너무 가슴 아픈 반전의 비밀을 갖게 된다.어느 누구도 어린 그들 간에 계층이 정해져 있다고 가르치지 않지만 그들은 교실 현장 속에서 이미 계급의식을 자각하게 된다. 가난해서 서럽고, 소심해서 두렵고, 힘없어서 무서운 아이들은 폭력과 정서적 학대에 노출되기 쉬운 캐릭터들이다. 무력해서 절망하는 아이들은 내가 무시당하는구나, 라는 느낌을 뼛속 깊숙이 맛보지만, 유력해서 희희낙락하는 아이들은 자신이 누리는 호사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남의 아픔을 돌볼 근본적인 계기조차 그들에겐 마련되지 않는다. 개와 돼지의 갈등에서 개의 필연적 우위가 예견될 수밖에 없다.`돼지의 왕`은 너무 날카롭고 매워서 눈과 혀를 돌리고 싶은 현실을 고발한다. 부드럽고, 달콤한 것들만 보기에도 아까운 날들인데 감당하기 벅찬 실상을 들여다보고 받아들이려니 쓰리면서도 안타깝다. 하지만 섣부른 낙관주의와 때 이른 온정주의의 순진성을 경계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이런 영화는 불편하지만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은 대개 따뜻하고 포근하지만, 그 이면의 차갑고 거친 공기 속에서 돼지의 왕을 꿈꾸는 서글픈 현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므로./김살로메(소설가)

2013-09-10

눈물

눈물샘에서 만들어진 눈물은 환경적, 심리적 요인에 의해 밖으로 표출된다. 바람 또는 알레르기 현상에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환경적 요인의 눈물은 자기 의지와는 무관한 자연 현상 같은 것이라 이해 받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심리적인 눈물은 그에 비해 복잡한 양상을 띤다. 최근 여성 아이돌 그룹이 토크쇼에 나와 차례로 눈물을 보인 것이 이슈가 되었다. 이것만은 피했으면 하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자신의 연애사를 들먹이며 사회자들이 약을 올리자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만다. 옆자리의 동료 아이돌도 뒤질세라 배턴을 이어받았다. 애교를 보여 달라는 주문에 난감해하자 한 사회자는 숫제 맡겨 놓은 돈 뺏어가듯이 윽박을 질렀다. 겁에 질린 아이돌 출연자는 넘치는 애교 대신 그 누구도 원치 않은 눈물을 보여주고 말았다.프로라면 두 경우 모두 농담으로 맛깔스레 받아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아이돌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연히 시청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자연발생적인 환경적 요인의 눈물처럼 심리적 요인의 눈물도 전적으로 이해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중들은 그렇게 이해심이 넓은 편이 못 된다. 하지만 나는 그들, 아직은 어린 그녀들을 이해하고 싶다. 사람의 감정은 조절할 수 있는 거고, 그래야만 프로라고 생각하는 자체도 인간의 오묘한 심리를 덜 이해하는 데서 오는 단정적 언사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 마음이 정리 되지 않고 복잡 미묘한데다, 잦은 스케줄로 스트레스 지수마저 높은데, 멍석도 깔아 주지 않고 내키지 않은 것을 하라니 서러운 눈물만이 솟구칠 수도 있다.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싶지만 마음 깊은 곳의 감정을 적절히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이십대 때의 여성 감성이 가장 섬세하고 다치기 쉬운데 현 상태가 얼마나 힘겹고 난감할지는 당사자가 아니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어린 여자의 눈물이 다 연민하고 동정할 일은 아니지만, 한때의 눈물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요청하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주는 이도 필요하다. 누구나 청춘의 강을 건너왔고, 건널 터이니./김살로메(소설가)

2013-09-09

본질은 다양하지만 단순해

노트북 워드프로세서 기능이 내 의지대로 먹혀들지 않는다. 복사도 잘 안 되고, 파일 저장도 몇 번이나 클릭을 해야 겨우 될 정도이다. 평소에 인터넷도 느리게 뜨는데다 자판키도 변덕이 심하다. 내 생각엔 노트북이 오래되어 그런 것 같은데, 식구들은 내가 기계치인데다 컴맹이라 활용을 제대로 할 줄 몰라 그렇단다. 오늘도 노트북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불필요한 문장에다 검은 옷을 입혀, 지우기를 해야 하는데 원하는 부분만 선택되는 게 아니라 자꾸만 모든 문장에 검은 옷이 입혀진다. 몇 번 클릭을 해야 겨우 한 번 성공할 정도이다. 그도 잠시, 저장하기 위해 파일 버튼을 누르면 목록이 떠야 하는데 목록 자체가 아예 보이질 않는다. 어쩌란 말이냐. 시간은 없고, 마음은 급하고.출근하느라 바쁜 남편 손목을 끌고 컴퓨터 앞에 앉힌다. 한두 번 시도해보더니 말없이 마우스 패드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 어라, 마법에 걸린 공주가 잠에서 깨어나듯 글자가 살아나고, 원하는 문구 위에 척척 검은 장막도 드리울 수 있다. 그토록 애 먹이던 파일 목록도 잘만 뜬다.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다! 나로선 노트북 자체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지, 단 한 번도 마우스패드가 낡아서 접촉 불량일 수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마우스에라도 이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도 이르지 못했다. 오로지 컴퓨터가 잘 안 되는 건 컴퓨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어떤 문제의 본질은 너무 단순해 문제 자체가 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거창한 데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는 손가락이 아플 뿐인데, 나는 지레짐작으로 그 상대의 오장육부까지 관장하려 든다. 달을 가리키는 손과 달이 있을 때 언제나 저 달만이 답일 거라는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때론 달을 가리키는 손끝에 답이 걸려 있을 수도 있다. 삶의 본질은 내가 바라고 원하는 곳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체의 다양하고도 단순한 모습으로 존재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