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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가장 어려운 것

하는 일의 특성 상 주부들을 만날 일이 많다. 그들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가 자식에 관한 것이다. 자녀가 어리면 어린대로, 사춘기면 사춘기대로, 청년기면 청년기대로, 혼인해 분가하면 분가한 대로 부모는 자식 걱정으로 편할 날이 없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흔한 말로 우리는 자식에게 바라는 게 별로 없다고 말한다. 기본만 해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초등학생 학부모의 경우 내 아이가 영민해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고,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는 아이가 그 무섭다는 `중2병` 정도는 거뜬히 넘기고 공부에만 몰두해줬으면 좋겠고, 청년기 자녀를 둔 부모는 내 자식의 취업기나 연애사가 무난하게 진행되었으면 좋겠고,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일 경우 그들이 별 탈 없이 자식 낳고 살림살이가 빨리 나아졌으면 하고 바란다.하지만 부모의 이런 바람이 기본이 아니라는 게 문제이다. 실은 내 욕망을 한껏 자식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기본 희망`을 지닌 자식이 못되었으므로 내 자녀만큼은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게 된다. 마치 부모인 자신은 스마트폰을 한 시도 손에서 내려놓지 않으면서, 자식만은 그것을 적당히 즐기는 절제심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심리와 같다.좋은 부모 되기 관련 자료나 서적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부모자식 관계의 정답은 텍스트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저마다 처한 환경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경험에 빗대 서로 위안하자면 바라는 게 없을수록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이다.다소 비겁한 방법 같지만 내 욕심을 버릴 때 자식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정작용처럼 그들 스스로 제 갈 길을 모색하고 있을 터인데, 너무 부모가 앞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만 기다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 아니던가. 오늘도 자식 걱정이란 나비 수천만 마리가 각기 부모 머릿속을 휘젓고 날아다니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7

민주화라는 말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아이돌 그룹의 모 멤버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뱉은 한 마디 말 때문에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단다. 의심할 바 없이 기성세대인 나는 논리적 오류로 이어진 저 말 뜻도 모르겠고, 왜 사람들이 흥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개성을 존중하는데 민주화시키지 않는다`는 말장난을 해석하느라 골머리만 아팠다.추이를 관망한 이제야 무슨 말인지 감을 잡겠다. 민주화라는 말이 특정 집단에겐 그 본래적 의미를 벗어나 부정적이고 치졸한 의미로 쓰인단다.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 또는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란 숭고하고 긍정의 의미인 `민주화`라는 말이 극우 성향을 지향하는 한 사이트에서는 그 반대의 뜻으로 사용되는 모양이다. 상대를 비하하거나 시비걸때 `민주화`라는 말을 쓴단다. 조롱의 의미로 `저 녀석 민주화 당했네`, `이 자식 민주화시켜야 겠어` 라고 하거나, 네티즌 글을 `비추천`할 때도 `민주화`란 말로 대신한단다.독재자를 옹호하고, 민주화 운동은 조롱거리로 전락시키고, 인권 유린마저 유희로 생각하는 집단들의 사이트가 활발히 운영되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상 자체가 민주화된 사회를 증명하고도 남는데, 왜 그들은 비겁하게 `민주화`라는 말을 그토록 폄훼할까. 온갖 불합리와 각종 비리와 말할 수 없는 비열함의 세계를 엮어가는 기성의 행태를 보면서 그들은 너무 쉽게 생을 환멸이나 유희의 장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화이건만 왜곡된 그것은 이제 내 편이 아니거나 내 뜻과 다른 것일 때 비하하는 말로 전락하게 생겼다.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의 실체는 전혀 민주화되지 않고,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몸짓은 전혀 정의롭지 않은 현실이 그들을 저토록 극단적인 생각의 장으로 내몰게 한 건 아닐까. 숭고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대로 전파하지 못한 기성의 한계에 대한 반발이 이런 현상을 불러온 것은 아닌지 곱씹을수록 머리만 무거워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4

장그래의 선물

5월은 감사의 달, 마음을 주고받느라 바쁘다. 특히, 젊은이가 중년이상에게 할 선물 때문에 고민한다면 만화책`미생`을 추천할 만하다고 한 선배가 말한다. 당신 아들이 실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연작인 그 책을 한두 권 선물하면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 부담을 갖지 않으면서도 만족하게 된단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로 나뉘게 되겠지만, 대개 받은 쪽은 나머지 시리즈 권을 사거나 검색해서 읽게 된단다. 공감이 절로 된다. 좋은 만화는 좋은 사색을 낳고 나아가 좋은 사람까지 낳을 터이니. 한 포털 사이트에 연재되는 미생은 어린나이부터 프로 바둑기사를 꿈꿨지만 실패하고 평범한 인턴사원이 된 `장그래`의 직장 생활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바둑에 빗댄 에피소드이지만 고수가 등장해 직장인의 처세에 대해 훈계하거나 세상을 향해 단순 일갈하는 내용은 아니다. 좋은 어른의 가치, 개별자의 존귀함, 나아가 공감의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로 읽힌다.완전한 삶을 향해`아직 덜 살아있는` 나를 깨쳐가는`미생`에 왜 사람들은 열광할까. 캐릭터에 대한 독자의 이해가 가장 큰 이유라고 작가 윤태호는 말한다. 누군가의 싸움 현장이 창밖으로 보이면 호기심에 구경할 순 있다. 나와 무관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 싸움의 대상이 내가 아끼는 사람인데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면? 본능적으로 사건 현장으로 뛰쳐나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품게 되는 불안과 공포가 곧 만화의 캐릭터가 되는데 독자들이 장면마다 스며드는 이유는 그것이 곧 내 마음이기 때문이다.`살아있네`라고 독자가 느끼는 건 플롯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 때문이다. 캐릭터에 관심을 가지면 주변이 보이고 만물 안에 든 내 모습도 보인다. 작가는 신출내기 직장인 장그래를 통해 그 의미를 부여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데 배움이 있고 훈계하지 않는데 깨달음이 있고, 각 인물의 미세한 인과관계까지 독자와 호흡하려는 그 캐릭터 때문에 사람들은`미생`을 지지한다. 곧 영화도 개봉한다니 설렘만으로도 족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3

관심의 크기는 언제나 다르다

덜 가진데다 피해의식마저 있는 악동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대처할까? 객관적 영향력이 큰 대상을 물고 넘어지면 된다. 제 이름을 드날리고 싶은 신진학자가 흠 있는 학계의 대가를 공략 대상으로 삼거나, 나 혼자 덤터기를 쓰기 싫어 약점 있는 거물급을 물귀신 작전으로 끌어들이는 행위 등이 그것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하루라도 관심을 끌지 못하면 배알이 꼴리는 스타일이다. 핵 카드와 로켓포 발사로 세계의 정세가 자신에게 멀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며,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언사로 주변국을 긴장으로 몰아넣는 몽니부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안을 조장하는 이슈를 담보로 그의 인민을 통제하고 길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강대국으로부터 관심이 멀어지는 것이야말로 곧 그의 치욕을 의미한다.이번 한미동맹 60주년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은은 자신이 큰 관심거리로 부각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도에 의하면 그 시간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 상태보다는 시리아 사태에 더 집중한 걸로 되어 있다. 실무책임자 존 케리 국무장관은 시리아 사태를 논의한다는 핑계로 러시아로 날아가 버렸다. 이스라엘에 저항해야 한다는 아랍권의 대동단결이 그들에겐 더 큰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에서도 온전히 한반도 문제에 그 질문이 할당된 게 아니라 시리아 사태와 미군 내부의 성폭행 문제도 언급될 정도였다. 우리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그게 엄연한 현실이다.대통령의 방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 관계는 신뢰의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군사동맹을 넘어 경제, 국제협력 등 21세기형 글로벌동맹으로 발전했다고 청와대는 자체 평가한다. 이런 말들이 공허하게 들리는 건 한쪽만의 일방적 메아리이기 때문이다. 강자는 약자에게 무심하고 그것이 상처인지조차 모르는 한쪽이 자화자찬하는 사이, 관심을 빼앗긴 김정은은 소위 열을 받았나 보다. 사흘 연속 동해로 미사일을 쏘아대며 제 몽니를 뉴스 한 줄로라도 장식하고 싶어 하니 말이다. 이래저래 관심은 약자가 강자에게 바라는 생존 본능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2

뒷모습 넘어 마음

뒷모습이 때론 앞모습보다 많은 걸 보여준다. 그걸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뒷모습보다는 앞모습만 신경 쓴다. 예뻐진다면 친구랑 똑같은 얼굴이어도 좋으니 제 개성을 팔아 미모 지상주의에 편승하고, 돈이 된다면 잘난 인간들 앞에서 비굴해도 좋으니 제 품위를 죽여 물질 만능주의 곁자리를 예약한다. 중학생들을 상대로 도서관에서 `위대한 개츠비` 독서 및 영화 토론수업을 했다. 가치관이나 자기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는 청소년 초입 시기라 접근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원작 번역 소설도 그들에겐 버거울 수 있는데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신작 영화는 나이 제한에 걸려 개봉관에서 볼 수도 없었다. 책은 축약본을 읽어도 좋다고 타협하고, 영화는 디브이디를 활용하기로 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 그런지 기존 영화도 두 편이나 있었다. 그 중 원작에 충실한 로버트 마코비츠 감독 것을 택했다.책과 영화를 접한 학생들의 반응은 대체로 개츠비가 답답해죽겠단다. 반어법이라면 몰라도 제목대로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인정하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단다. 은밀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그토록 빠른 부를 축적한 것도 다른 부도덕한 등장인물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단다.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한 여자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다만 돈으로라도 여자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개츠비는 뒷모습까지 순수한 사랑을 한 사람이란다.상처나 파멸과 친구하는 건 누군가의 뒷모습이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본 앞모습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제 지고지순함으로 사랑하는 이의 약점마저 끌어안은 개츠비야말로 갑갑하지만 위대한 남자였다. 그는 제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넘어 심성마저 다사로운 사람이었다. 전상보다 후상, 후상보다는 심상이라 했다. 개츠비가 전상과 후상을 넘어 여운을 남기는 건 그 마음결 때문이다. 보이는 앞, 안 보이는 뒤보다 더 중요한 건 속 깊은 성정이라는 걸 개츠비는 씁쓸한 죽음으로 증명한 셈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1

`보통`은 영어로 쓴다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 때문에 국적을 오해 받는 작가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알랭 드 보통`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읽히는 작가군 중의 하나인 그는 스위스 출신 영국 작가이다. 비록 프랑스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프랑스 작가라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이름 자체가 워낙 프랑스식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가 프랑스인이라고 착각한다. 꽤 알려진 서평가조차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 중 하나로 알랭 드 보통을 꼽았는데, 부주의하게도 시종일관 그를 프랑스 작가로 믿고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 작가의 문학적 토대는 철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을 또 한 번 확인한 셈`이라며 알랭 드 보통을 알게 된 후 다시 프랑스 작가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고 실언할 정도이다.작가의 국적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작가의 국적과 언어는 떼려야 뗄 수 없다. 프랑스인이면 프랑스어로 작품을 발표할 것이고, 영국인이면 영어로 작품을 발표한 가능성이 높다. 영어로 쓰인 작품과 프랑스어로 쓰인 작품은 각기 그 글맛이 다르다. 따라서 이름에서 풍기는 어조만으로 한 작가의 출신과 쓰는 언어를 단정해버리면 독서할 때 편견이 생길 수 있다. 영국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이 영어로 글을 쓰는 건 자연스럽다.남녀의 심리를 이해하고,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해 대중성을 획득한 그의 작가적 취향은 프랑스식이 아니라 영국식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한 작가가 어떤 언어로 글을 쓰는가는 섬세한 책 읽기의 필수 정보가 되어준다. 취리히 출신으로 옥스퍼드와 하버드에서 학문한 런던 시민 알랭 드 보통. 그가 프랑스 사람인 것처럼 독자들에게 어필되는 건 득일까 실일까. 그만의 고유 문학적 정체성과 실체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다.한 작가의 국적은 그가 어떤 언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정보가 될 수 있다. 보통 글에 열광하는 독자들아, 그는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쓰는 영국작가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0

지상 낙원 지키기

자원은 유한하다. 이 명백한 명제를 실감하기 어려운 인류는 오늘도 지구 표면 이곳저곳을 삽질해 제 욕망을 채운다.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자원의 잔존량에 대해 배운 적이 있는데, 석유의 경우 불과 50년만 지나면 고갈된다고 했다. 삼십 년도 훨씬 지난 일이니 그때 기준이라면 석유자원은 이제 20년 정도 밖에 생명력이 없다. 하지만 우린 그때 배운 기억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부족한 자원에 대한 불편함이나 그로 인한 고통을 일상에서 절실하게 맞닥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자원의 유한성을 자각하지 못한 인간의 파괴적 욕망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예시의 땅이 여기 있다. 그것은 성찰 없고 무분별한 우리의 미래를 보여준다. 여의도 크기의 두 배 남짓한 조그만 섬 나우루. 호주와 하와이 사이에 있는, 일만여 명 남짓한 주민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화국이다. 이곳 사람들은 천국에서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이들의 비극적 실상은 구미 열강들의 자원전쟁이 도화선이 되었다. 백 년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지상낙원을 팔아 부를 경험했지만 이내 나락으로 떨어졌다.나우루는 인광석이란 자원을 발견한 열강들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했다. 1968년 나우루가 독립국이 되면서 고급비료의 원료인 그것은 주민들의 특혜 산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직수출 자원이 된 인광석 하나로 그들은 하루아침에 부를 손에 잡았다. 삽질을 재촉할수록 돈이 쌓였다. 그 좁은 땅에 외제차가 굴러가고 먹거리는 풍부해졌으며, 해외로 나간 주민들은 맘껏 돈을 뿌렸다.하지만 무한한 자원은 없다. 인광석이 고갈된 현재의 그들 생활은 지옥이 따로 없다. 각종 질병이 난무하고 게을러진 국민성과 수입 감소로 최빈국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 지구온난화까지 겹쳐 해수면 상승까지 도래한 그들의 처지는 인류의 미래를 경고하는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나우루의 실상을 보면서 자원의 유한은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경험적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우루는 세계화를 외치는 인류의 불편한 자화상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16

잠의 유혹

지인 중에 기면증으로 당혹해하는 이가 있다.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외곽으로 나갈 때면 누군가 동석을 해야만 안심할 정도이다. 자신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옆에서 말동무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의 차를 타고 볼일 차 다른 도시로 간 적이 있는데 연신 하품을 했다. 잠을 개관하는 신경물질의 장애로 인한 일종의 해리상태가 기면증의 증세라니 본인의 의지와도 상관이 없다. 나로서는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운전석에 내가 바꿔 앉으면 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니 안심하라고 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 걱정도 되고 공감도 되었다. 기면증까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잠이 많다. 호흡기도 좋지 않은데다 운동을 싫어하니 기초체력이 많이 달린다. 자연히 모자라는 체력을 잠으로 보충하게 된다. 젊었을 때부터 그랬다. 기면증이 타고났거나 체질이듯 다면증 역시 타고난 체질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중년에 접어들면 점점 잠이 없어져 잡생각이 많아진다는데 나로선 남는 시간엔 잠으로 체력 보충을 하느라 잡생각이 끼어들 틈조차 없다.젊은 시절부터 유독 잠이 많았다. 수업 마친 뒤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그대로 뻗어 잠든 기억이 숱하다. 두통과 근육통이 몰려오며 극도로 피로해진 신체는 오직 잠만을 불러댔다. 한밤까지 잠들지 않고 있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때부터 신체적 약점을 알고 기초체력을 다졌으면 많이 좋아졌을 텐데 그 노력도 없이 잠으로 모든 에너지를 보충하려고만 했다.이번 휴일에도 내리 잠만 잤다. 한번 자면 그것도 얕은 잠이 아니라 깊은 잠을 잔다. 남들은 불면증으로 고생한다는데 너무 잠이 쏟아지니 이 또한 정상은 아닌듯 싶다. 찜찜하고도 불필요한 낮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내가 혼자 하는 말 - 뭔가 이루지 못했다면 팔 할이 잠 때문이다. 체력 보충제로 활용하는 잠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한 그 자책은 붙어 다닐 것이다. 나쁜 습관은 자책을 낳고 자책은 또 다른 잠을 낳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5-15

각주 없이 담백하게

한 사건이 터진다. 실상이 공개된다.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그것은 발 없는 말이 되어 천리를 달린다. 피해자는 말이 없고 뒤늦게 나타난 가해자는 억울하다며 남 탓하기 바쁘다. 치졸한 응원군까지 얻으면 자신의 안위가 걱정된 가해자는 진솔한 사과 대신 구질구질한 변명을 택하고 만다. 아인슈타인은 인류 역사에 빛나는 논문 몇 편으로 과학계의 지존이 되었다. 에너지와 질량과 빛의 관계를 도식화한 그의 방정식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질량과 에너지의 상호 관계를 말하는 이 식은 쉽게 말해 물질에 갇혀 있는 에너지의 양이 엄청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평균 체격의 성인은 대형 수소 폭탄 서른 개 정도가 터질 정도의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 다만 그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란다.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내용면에서 가장 빼어난 논문이기도 했지만 형식면에서도 남달랐다. 각주나 인용문이 없었고, 수식도 거의 없었다. 자신의 연구에 영향을 주었거나 앞선 연구에 빚진 논문도 없었다. 다만 직장 동료의 도움만 있었다고 말했을 뿐이다. 누구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신의 생각만으로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성과를 이뤄냈다.어떤 이론에 각종 주석이 달리고 인용문이 너덜너덜하게 붙는 건 그만큼 자신의 생각이 독자적이지 못하고 창의적이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말에 객관성을 부여하고 싶거나 자신의 생각을 인정받고 싶을 때 선각자의 말들을 빌려온다. 검증받은 사람들의 말에 슬쩍 기대어 제 말의 부족함을 채우려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자신보다 더 나은 객관적 자료는 없었기 때문이다.과학자의 논문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각주 없는 삶일수록 좋다. 모자라도 설명하지 않으며, 부족해도 갈구하지 않으며, 불편해도 불평하지 않는 삶. 그것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임을 깔끔한 논문처럼 증명하는 삶. 특히 잘못했을 땐 변명 따위의 각주보단 진솔하고도 담백한 본문이 매력적인 그런 삶을 꿈꾼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14

갑을관계 소묘

`갑을` 관계가 화젯거리이다. 몇몇 우월적 입장을 앞세운 자들의 막말이나 횡포가 상식을 넘어서자 억압되었던 갑을 문화에 대한 불만 표출이 집단적으로 온라인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부담스러운지 공공기관과 백화점 등에서 갑을 관계 표기 방식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본질과는 먼 대처 방식이라 별로 달갑지 않다. 갑을이란 용어는 처음엔 단순한 익명의 표기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와 나`이면 어떻고 `A와 B`이면 어떻고 `사과와 오렌지`면 어떻고 심지어 `나와 너`이면 어떻단 말인가. 임의로 출발했을 그 용어가 우리 사회 밑바탕을 관장하는 계급의식으로 점차 왜곡·변질된 것에 씁쓸할 뿐이다.우월적 지위와 아쉬운 입장으로 대변되는 갑을 관계는 따지고 보면 기업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매순간 의식하지 않을 뿐, 우리 인간 삶 자체는 갑을 관계의 총화이다. 혈연 학연 지연으로 얽힌 여러 관계망에다 유교적 관습 및 상부하달식 기업문화 등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단 한시라도 자유인이 된다는 건 어렵다.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위치가 `을`이라고 생각한단다. 당연한 반응이다. 조금이라도 우월적 입장이 되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별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누리는 것에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아쉬운 입장이 되어 서운하고 갑갑한 일을 당하다 보면 피해의식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약자에 쉽게 공감하는 이유는 부당함은 언제나 약자의 것인데다, 그 부당함의 배에 언젠가는 나도 탈 수 있다는 보험 심리 때문이다.`갑을`이라는 용어를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널리 퍼져 굳어진 계급의식이나 상하문화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갑을관계는 윽박지르면 따르는 사이가 아니라 상생하고 윈윈하는 관계여야 한다. 사회구조상 완벽하게 동급이 될 수 없다면 더 약자에게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이라도 있어야 한다. 진정성과 효율성이 담긴 인격 수양은 사람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기업에도 필요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13

톱밥은 계란이다

예술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당위성의 가치를 당연한 듯 태연하게 얘기하는 걸로는 종교서적이나 좋은 생각 같은 잡지 하나면 충분하다. 휴지는 휴지통에, 불난 데는 물길을, 가난한 자에게는 연민을 뭐 이런 얘기와 멀수록 예술가에는 가깝다. 예술가들은 생래적으로 아웃사이더 기질이 선명한 자들이다. 콜린 윌슨은 평론집 `아웃사이더`의 자전적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웃사이더의 근본 문제는 일상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이며, 그 일상의 세계가 무언가 지루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데 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이 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이라고 믿으면서 먹고 있는 것처럼.`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으로 생각할 정도로 몽롱한 상태가 되어야 아웃사이더의 대열에 낄 수 있고, 그럴 때 그들은 진정한 예술가의 반열에도 오를 수 있다. 이십대 초반의 노동자 콜린 윌슨이 처녀 평론집 하나로 온 세계를 강타한 것은 그 자신이 오롯한 아웃사이더였기에 가능했다. 그 어떤 정치적, 사회적 여건에 휘둘리지 않고 읽고, 자료를 수집했으며, 방대한 기록에 매진했다. 그 자신이 아웃사이더가 아니라면 이뤄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카뮈에서 니진스키에 이르기까지 실재했던 아웃사이더를 연구하는데 젊음은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었다. 쾌락의 유혹과 가난의 절망을 동시에 이겨내며, 저토록 이른 나이에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해 필사적으로 제 청춘을 투자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불가사의한 예술가로 각인된다.아웃사이더들은 세속적인 성찰을 거부한다. 자발적이고도 정신적 노역을 즐기는 그들에게 이 세상은 무가치해서 저항할 만한 사유가 된다. 시인이나 사상가들이 평범함을 넘고, 실재하는 세계를 거부하는 몸부림을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일상적인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 표류이다. 떠도는 바다 위의 군중을 본래적 단독자의 삶으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의무가 강할수록 그는 아웃사이더에 가깝다. 톱밥이 계란으로 보이는 아웃사이더들의 저항이 거셀수록 예술은 발전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10

백전백패하면서도

토니오는 급우 한스를 사랑했다. 한스는 토니오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토니오는 그런 한스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소박하고도 가혹한 교훈을 토니오는 벌써 열네 살에 깨쳤다. 토니오는 그 경험을 실용적으로 활용할 강단조차 없었다. 다만, 학교에서 주입하는 지식보다 이런 체험적 교훈이 훨씬 더 중요하고 흥미 있는 것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토니오는 금발의 잉에를 사랑했다. 웃고 있는 길쭉한 푸른 두 눈에 빠졌고, 수많은 웃음소리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구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잉에 역시 토니오를 고려해본 적 없었다. 그녀는 같은 부류인 한스와 사랑에 빠졌다. 잉에와 한스 같은 안정되고, 평화롭고, 정돈된 치들은 애잔한 단편소설 따위는 읽지 않고, 그런 작품을 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토록 아름답고 무심하고 명랑할 수 있다. 그것이 토니오의 슬픔이다.앨리스는 남자 친구 에릭을 사랑했다. 자신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그 남자의 행동에 좌절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지만 그것을 최선의 경우로 해석하려 했다. 그것이 그녀 사랑의 증거였다. 남자가 짜증을 내면 과로 때문이라고 받아들였고, 말이 없으면 배가 고파서 그럴 거라 믿었다. 내 탓은 아닐 거야. 마음의 상처 때문에 화를 내는 걸 거야. 퉁명스런 남자의 태도를 수줍음이나 환경 탓으로 돌렸다.개뿔! 앨리스와 토니오의 사랑법은 상처의 개인사이다. 한스와 잉에와 에릭은 그 둘을 덜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엔 공평한 저울추가 없다. 더 사랑해서 패배하거나, 덜 사랑해서 상처가 없거나, 무관심해서 추억조차 없을 뿐이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랑에 빠지는 건 그 순간만은 승리자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엔돌핀이 백만 배는 솟구친다. 백전백패하면서도 사랑이란 문밖을 서성이는 이유다. 토마스 만과 알랭 드 보통도 그쯤은 알고 있었으렷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09

어머니, 진화를 거듭하셨다

어버이날이다. 홀로 계신 시모와 친정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매뉴얼은 해마다 똑 같다. 바닷가에 산다는 핑계에다, 두 노인이 회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횟감을 떠서 방문하지만 실은 이보다 편한 먹거리 효도도 없다. 현금이야말로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풍문을 위안삼아 푼돈 몇 푼 민망하게 내밀지만 그 역시 반 이상은 아이들 용돈으로 되돌아온다. 아무리 창의력이 바닥난 중년의 일상이라지만 의지만 있다면 이런 식상한 어버이날을 뛰어넘어 뭔가 그럴듯하게 두 노인에게 더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으련만 언제나 마음뿐이다. 후회하고, 반성하고, 사죄하며, 자책하는 모든 회고적 모성의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들에 그토록 염증을 내면서도 정작 그 부류에서 나 또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간사한 인간의 한계를 스스로 체험하는 셈이다.팔순 중반을 넘어선, 각각 고관절과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두 노인은 보조 수레나 지팡이 없이는 오래 걷지도 못한다. 그 몸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즐거이 성당 나들이에 나선다. 마리아께 제 몸과 마음을 의탁해 평화를 갈구하고 내세를 간청하는 것이, 당신들 스스로 다복하다고 자부하는 자식들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노친네들은 진작에 알고 있다.`아흔 고개 바라보는 저 할머니 / 오늘도 물질 들어가신다 좀 더 걸어 들어가지 않고 / 무릎께가 물결에 건들리자 그 자리에서 철벅 / 엎드려버리신다(중략) / 관절이 시큰거려 / 얼른 안겨 / 편하게 헤엄쳐 가시는 것이겠다 (중략) / 할머니, 일평생 진화를 거듭하셨다`문인수 시인의`해녀`를 대하면 신 앞에 철벅 엎드리고 마는, 관절 시큰거리는 두 모성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무릎에 스치는 순간, 의탁하고픈 물결이 있다는 것에 무심한 자식들은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다복하고 거칠 것 없는 자식을 둔 것도 죄인양 두 할머니 오늘도 마리아께 오롯이 제 모든 걸 맡기러 저 언덕배기 넘어 간다. 구루마 밀며 지팡이 짚고서 웃으며 간다. 오늘은 어버이날!/김살로메(소설가)

2013-05-08

질문의 기술

어떤 가게의 과일이 맛있을까? 동네 시장엔 대여섯 군데의 과일 가게가 있다. 처음 몇 번은 그게 그맛이려니 해서 눈에 띄는 아무데나 들른다. 한데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한두 군데만 정해놓고 가게 된다. 그 집 과일이 가장 싱싱하고 맛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곰곰 생각하면 그 가게 주인의 응대 방식이 과일을 맛 들게 했다. 소비자로선 이 과일 싱싱해요? 맛있어요? 등의, 하나마나한 질문들을 습관적으로 하기 마련이다. 그때 하수인 주인은 살짝 짜증을 미간에 심거나 심할 경우 싱싱하고 맛있는지 만날 먹어보고 사오는 것도 아닌데 자신인들 어떻게 알겠느냐고 손님에게 면박을 주기도 한다. 고수일 경우 주인은 준비된 맛보기용 과일을 권하며 순한 낯빛과 부드러운 말로 긍정의 대답을 유도한다. 그 가게 과일이 맛있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실은 퉁명스런 집이나 친절한 집이나 그 과일이 그 과일일 뿐인데도 말이다.대개 논쟁은 쓸모없다. 상대 입장에서 `네`라고 답하게 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아끼는 최선의 방법이다. 맨발로 다니고 40살 넘어 대머리가 된 뒤에야 어린 신부를 만난, 일상생활에서는 젬병이었던 소크라테스는 현명한 설득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노련한 그는 `아니오`라는 말보다 `네`라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화법을 썼다. 상대편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도록 동의를 이끌어내는 질문을 했다. 상대가 극구 반대하던 사안도 어느새 긍정의 화답을 할 수 있도록 상대의 입장이 되어 동의를 구하는 질문을 했다.내 맘속의 안달은 언제나 상대가 틀렸다고 고집부린다. 하지만 실제 대부분은 상대가 옳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심리적 간극을 메우려면 맨발의 소크라테스를 기억하는 것도 괜찮다. 부드럽게 질문하면 `네` 하고 상대는 동의하게 되어 있다. 그 단순한 방법을 고수는 실행하고 하수는 거부한다. 맛있는 과일은 과일 가게 주인에게 달려있지 과일 자체와는 별 관련이 없다. 무맛 나는 참외도 꿀맛 나는 것으로 믿게 하는 것이 사람의 힘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07

위대한 개츠비

처음 번역해서 안착한 제목은 원작이 지닌 본래의 뜻을 왜곡하는데 일조한다.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도 그런 의미에서 살짝 아쉽다. 개츠비의 일생을 쫓다보면 애초에 기대한 위대한 개츠비는 어디에도 없다. 사나이 개츠비의 허망한 순애보만 있을 뿐이다. 그 짠함을 일러 반어법으로 위대하다고 말해도 나쁘지는 않지만 썩 맘에 들지는 않는다. 내게 개츠비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바보 같은 사람, 말리고 싶은 사람, 친구이고 싶은 사람 등으로 각인된다. 하기야 이런 걸 통칭할 때 `위대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것도 없으니 최선의 번역일 수도 있겠다.재즈 유행, 도덕 해이, 불법 난무, 주가 폭등. 1920년대 초반의 이런 뉴욕 분위기를 이해해야만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물질적 풍요와 세련미와 교양이 전수된 롱아일랜드 해협의 이스트에그는 퇴폐적이고 타락한 당시 사회의 상징 코드로 봐도 좋다. 1차 세계대전 직후 꿈조차 버거운 젊은이들은 파티와 술, 음악과 자동차 등으로 대변되는 `재즈 시대`를 살았다. 돈과 환락의 시대였다. 확실성이 보장되지 않은 그 시절,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개츠비는 사랑을 위해 물질적 성공을 거두고야 만다.물질적 풍요 앞에서 사랑은 쉽게 무너지고, 허영심으로 제 턱 끝을 장식하는 사람들은 순정을 백 번이라도 배반한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 사랑을 제 희생으로 마감함으로써 허무에 이르는 개츠비도 있고, 그것을 안타까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닉 캐러웨이 같은 사람 또한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근본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 사랑도 물질도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조급한 오늘날 내레이터 닉 캐러웨이가 되어 어느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 보라. 허영심으로 더욱 예쁜 데이지를 못 잊어 연신 술잔을 기울이는 착한 사람 개츠비를 만날 수 있으리니. 누군들 개츠비를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 있으리. 끝내 버리지 않은 순도 높은 꿈과 환상만으로도 개츠비는 위대하구나./김살로메(소설가)

2013-05-06

노동이란 말

우리 사회는 불온한 혐의를 지닌 것들을 못 견뎌한다. 개인의 욕망이나 취향보다 집단의 결속이나 합일이 더 중요하게끔 오래도록 길들여지다 보니 (권력) 집단이 용인하는 것이 아니면 그른 것이 되기 일쑤다. 그 적절한 예로 `노동`이란 말을 들 수 있겠다. 단순한 그 말에 깃들인 불온의 혐의 때문에 전지구촌이 5월1일을 `노동절`이라 부를 때 우리는 `근로자의 날`이란 희한한 용어로 대체해 부르고 있다. 우리는 노동이란 말에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노동당, 노동투쟁, 노동자와 사용자 등의 예에서 보듯이 `노동`이란 말이 품고 있는 사회정치적 의미가 강경하거나 불온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몇 번의 혼란 끝에 노동절의 날짜는 5월 1일로 정착했지만 오죽하면 그 기념일 이름은 `근로자의 날`에 붙박여 꼼짝도 하지 못하겠는가.근로와 노동의 차이는 무엇일까?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을 의미하고, 노동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노동절이 근로자의 날이 된 데는 사전적 뜻과는 무관한, 단순히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겠지만 따지고 들자면 불쾌한 면도 없지 않다. 낱말의 의미대로라면 부지런히 일한 자만을 위한 날이 근로자의 날이 되고 만다. 그에 비해 본래의 노동절로 되돌릴 경우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날이라고 확장된 정의를 내릴 수 있다.노동이라는 말 자체는 원래 신성하기 그지없다. 한데 왠지 노동은 노예 또는 종속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노동절이란 말도 씁쓸하게 와 닿는다. 주인의 생산성을 위해 이만치 일한 대가로 그날 하루만큼은 쉬어도 좋다는 시혜의 느낌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자발적 유희의 노동이나 자신의 개발을 위한 노동이라면 타의에 의해 노동의 휴식을 명받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싱그런 오월을 맞으면서 `노동`이란 고매한 가치의 낱말이 이래저래 휘둘리는 걸 보니 아직 내 마음의 오월은 맞을 채비가 덜 되었나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03

회고 미학

시인 김수영은 수필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에서`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말 열 개로 꼽았다. 그 낱말에는 `어린 시절의 역사가 스며있고, 신화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 뒷말이 머리끝을 서늘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향수에 어린 말들은 (중략) 진정한 아름다운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아무리 많이 열거해 보았대야, 개인적인 취미나 감상밖에는 되지 않고, 보편적인 언어미가 아닌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회고 미학`이라는 용어를 발견한 기쁨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글 몇줄 쓰려한다. 오늘날 우리 수필은 재미없다는 비난을 종종 듣는다. 신춘문예 공모에서조차도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한다. 왜 그럴까? 말이든 글이든 행동이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숙제해라고 아무리 엄마가 고함질러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이는 빈 공책에 낙서만 하다 잠들고 만다.좋은 수필의 전형이라고 하는 글들을 보면 대개 면죄부 얻은 과거의 상투적 회고에 지나지 않는다. 모성의 희생은 위엄 깃든 필수요, 부성의 패악은 낭만적 양념이며, 툇마루에 대한 추억은 당연한 선택이다. 처음 한두 번은 마음결을 다독여주고, 내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이런 글에 마음이 간다. 두세 번 읽다보면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하는 반발심이 생긴다. 사람들은 으레 수필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흥미를 잃게 되고 종내는 그들만의 잔치로 머물고 만다. 김수영식 대로 고작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것이다.우리 의식은 좀 더 현재적 보편성에 가깝게 점진적으로 변형된다. 쌈박한 개별자의 개성이 저만치 앞서가는데, 어쩌면 이런 것이 새로운 보편의 패러다임에 가까운데, 언제까지나 의고적이고 훈계적인 말들로 향수를 포장하고 열거하는 데만 머물 것인가. 무려 50년 전에 이런 회고 미학의 경계성을 단언한 시인의 통찰이 놀라울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02

봄비 또는 안개

이런 날은 이성(理性) 따윈 버리는 게 제격이지.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처럼 빗소리 들렸지. 저 멀리 산마루엔 저들끼리 홀리는 안개 가득했어. 누군들 센티멘탈에 빠져들지 않겠어. 온몸으로 파고드는 감성의 춤사위, 와이퍼에 내다 걸고 희희낙락 저 고립무원 안개 고지를 향해 점진하는 거야. 애인하고 함께일 필요는 없어. 우인(友人)이 제격이야. 단 둘 보다는 한 차 가득 젖은 빨래처럼 출렁댈수록 좋은 거지. 단, 운행 속도는 줄여야지. 미친놈 고쟁이 자락 빠진 듯 더러워진 흙신발로 발판을 뭉개진 않았으면 좋겠어. 저 산허리만 지나면 무중력 상태인 안개의 나라거든. 거기선 흙신발일수록 환영 받아. 역맛살의 혐의가 짙을수록 외계인이나 신선의 대열에 선발되기가 쉽거든.드디어 안개나라에 잠입했어. 여기선 겨드랑이에 숨겨둔 저마다의 이름 하나 발설할수록 매혹적이지. 젖은 추억을 팔거나 절벽 같은 시간을 풀어도 괜찮아. 지독히도 은밀한 한 생애를 고해하고 공유한 공모자가 되는 순간이야. 원래 사는 건 시시하고, 막막한 거거든. 그 비루한 삶을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기 위해 안개비를 꿈꾸는 거지. 말할 수 없는 내 불안과 네 공포가 두렵지 않은 자 어디 있겠어. 점점 푸르러가는 계절에 걸맞게 그것들도 증식하지. 진초록 짙어오기 전, 한 호흡을 갈무리 하듯 빗줄기 머금은 저 산정의 밀지(密地)를 만나러 가는 거지. 선계에 선뜩 내닫지 못한 창밖으로 빗소리 들려오고, 산 높고 깊은 곳의 안개는 제 겹을 늘여갔지.환한 날의 밋밋한 우정보다 안개비 속의 축축한 인정은 다음 만남을 잡기에도 유리했어. 다음번엔 안개비 대신 솟구치는 물마루를 만나러 갈지도 몰라. 분수처럼 솟구치는 인공 물마루 넘어 햇살 받은 쌍무지개는 황홀한 바람을 닮았대. 벌써 그 장면이 어룽거려. 아쩜 사는 게 시시하고 막막할 때 아름드리 버짐나무 아래 섰던 그대들이 떠오를 거야. 그땐 이성을 버리고 오직 센티멘털의 전송법으로 편지를 쓰겠어. 그럼 된 거지. 뭘 더 바라겠어./김살로메(소설가)

2013-05-01

바람 쐬고 약 줘야

일주일이 지나도록 배탈이 낫지 않는다. 꾸룩꾸룩 장 뒤틀리는 소리 요란하고, 가스 찬 배를 두드리면 수박 두드릴 때처럼 통통거리는 소리가 난다. 욱신거리는 배를 다독이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도 병원 가는 게 성가셔 약국에서 응급약만 지어 먹었다. 그래도 차도가 없어 결국 병원 신세까지 졌다. 그새 일주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단순 장염이지만 염증은 심해졌을 거란다. 아픈 순간 빨리 병원부터 찾는 게 순선데 자가 처방만 믿은 게 화근이었다. 배탈 따위는 하루만 참으면 절로 낫는다는 자신감 같은 게 그간 내 안에 있었다. 음식 버리는 것에 극도로 예민한 엄마는 흔히 어려운 시절을 건너온 어른들이 그러듯 쉰 콩나물무침도 씻어서 기어이 드시는 분이다. 팔순을 훨씬 넘긴 연세에도 비교적 건강한 소화기관을 자랑하는 당신의 산교육(?) 영향인지 나도 위와 장은 튼튼하다고 자부하던 터였다.환경이 바뀌면 나를 바꾸거나 대상을 바꿔줄 줄도 알아야 한다. 기존을 고집하면 탈이 날 경우 더디게 회복될 수도 있다. 얼마 전 쌀밥덩이처럼 몽실몽실한 흰꽃을 사들인 적이 있다. 싸리꽃 닮은 `아리삼`이란 일년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꽃색이 흐려지며 생기를 잃는 것이었다. 끄떡없이 두 달은 꽃구경 할 수 있을 거라던 꽃집 주인의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바람과 물과 영양제까지 맞으며 무리지어 생육환경에 맞게 자라다가 고립무원의 아파트로 옮겨오니 꽃도 소화계에 탈이 난 모양이었다. 자주 환기를 시켜 바람과 별빛의 기를 씌었더라면 꽃탈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시들어가는 초기에 꽃집에 들러 조치를 취했더라면 초기의 싱싱함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사람도 마찬가지다. 젊은 혈기 때는 아프더라도 하루 만에 거뜬히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면역력이나 소화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중년 이후론 건강할 때의 잣대로 자신의 몸을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하루 가던 장염이 한 달, 아니 일 년을 끌기 전에 현명한 조치가 우선임을 뼈저리게 맛본 한 주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30

언어유희

싸이의 `젠틀맨`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음악성 자체보다 단순한 멜로디의 반복, 풍자 깃든 춤, 언어유희가 섞인 노랫말 등이 지구촌 사람들의 보편적인 음악 정서를 충분히 자극해주고 있다. 특히 `나랏말쌈`에서 자유로운 말장난 같은 가사의 전략적 배치도 노래의 파급력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이처럼 언어유희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좋은 매개물이다. 진은영의 시 `대학시절`은 맛깔나는 말장난을 전면에 내세워 청춘의 지난한 현실을 노래한다. `내 가슴엔/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살고 있어/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비슷한 말들의 소란을 빌려 이십대를 회상하는데, 같은 경험을 거친 독자라면 그게 더한 신뢰감으로 다가오는 거다. 청춘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명랑발랄해서만이 아니라 다시 오지 않을 `멜랑콜리`의 정점을 맛보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에 의하면 `멜랑콜리에서 매력을 뺀 게 우울증`이라고 했다. 단순한 우울이나 비애로 설명할 수 없는 세련된 우울의 정서인 멜랑콜리를 이십대 때의 시인은 `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염소 한 마리`로 정의하고 있다.청춘의 염소는 종일토록 종이만 먹어치우며, `시시하기 이를 데 없는 시`만 토할 수밖에 없다. 앞선 친구들의 속도감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현실감과 멀게 태어난 시인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빈둥빈둥 빈센트 반 고흐`처럼 보장된 바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며 시간을 축낼 뿐이다. 누군들 아프지 않을 청춘이었을까. 누군들 멜랑콜리하지 않을 이십대였을까. 하지만 누가 이처럼 매혹적인 언어유희로 자신의 멜랑콜리한 청춘을 `화끈하고 말끔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젠틀맨`을 들으며 제 청춘에 말장난 걸어본다. 알랑가몰라 아리까리한 그 시절./김살로메(소설가)

2013-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