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옳고 그름은 의심에서

정민 선생이 쓴 `오직 독서뿐`에는 옛사람 아홉 명의 독서 전략이 담겨 있다.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독서(학문)에 대한 선인들의 자세를 알 수 있다. 그 중 실학자 이익의 단상에 눈길이 간다. 성호사설을 비롯한 여러 저서 중에서 몇 가지 생각을 가져왔는데 통찰이 깊고 생각이 서늘하다. 정민 선생의 번역이 원체 군더더기가 없어서 그런지 한 눈에 쏙 들어온다. 이익 선생은 학문은 반드시 의문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의문 없는 학문은 내 것이 되어도 여물지가 않단다. 한 예로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의심이 생긴다나. 착한 사람은 너무 착하고, 악한 자는 너무 못됐단다.역사책을 쓸 때 권선징악을 염두에 두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안타까워한다. 착하게 그려진 사람이야 당연하다 해도, 악한 사람이 원래 지독했겠냐고 흥분하신다. 실제로는 선함 속에 악이 있고 악 가운데 선함이 있게 마련이라고 적었다.어디 역사에만 그럴 것인가. 모든 시시비비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기울어지는 쪽은 있어도 완전히 옳거나 아주 나쁜 건 없다. 시와 비, 선과 악은 언제나 함께 한다. 그런 시비와 선악이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니 학문하는 자는 끊임없이 의심(탐구)해야 한다. 선생의 비유에 의하면 복숭아나 살구를 먹을 때 살은 먹고 씨는 버린다. 반대로 개암이나 밤이 생기면 씨만 먹고 껍질은 버린다. 복숭아는 살이 맛있고 개암은 씨가 고소하다는 걸 혀의 의심(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이다. 만약 혀가 의문을 품지 않았다면 밤 껍질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그대로 믿고야 만다.세상은 필연보다 우연이 관장할 때가 많고 시비나 선악을 가릴 수 없을 때가 허다하다. 필연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하면 우리는 무딘 단정에 길들여지고 우연의 가능성을 열어두면 날카로운 핵심이 보인다. 역사든 현상이든 진실에 닿는 어려움을 통찰하는 이익 선생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천하의 일은 놓인 형세가 가장 중요하고, 운의 좋고 나쁨이 그다음이며, 옳고 그름은 가장 아래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23

맏딸 콤플렉스

`큰딸은 살림 밑천`이란 속담이 있다. 솔직히 한 번도 그 말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친정에서나 시댁에서나 오남매의 막내 입장이다 보니 맏이들이 느끼는 의무감이나 부담감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들이 느끼는 무게감 못지않게 막내들이 맛보는 피해의식이나 상실감 또한 크다고만 생각했다. 한데 맏딸 입장인 친구 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얼음주머니로 한 대 맞은 느낌을 받았다. 딸에 대한 서운함의 토로가 발단이었다. 내 입장은 오랜 만에 집에 온 동생 밥 한 끼 정도는 바쁜 엄마 대신 차려주고, 취직하면 동생 운동화 정도는 사 줄 수 있는 게 `누나` 아니냐고 했다. 그들은 정색을 했다. 그런 생각 자체가 딸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친정에서나 시댁에서나 맏딸 역할이 어떻다는 걸 알기에 그들은 맏딸더러 동생 밥을 챙기라거나, 농담으로라도 돈 벌면 동생 용돈 주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단다.가부장적 효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우리의 맏딸들은 자신들의 숙명을 익히 알고 있단다. 말하지 않아도 맏딸로서 느끼는 의무와 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단다. 하기야 큰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이야말로 얼마나 폭력적이고 위압적이던가. 살림 밑천이 될 수 있도록 맏딸은 집안의 조력자가 되어야 했다. 맏딸이 가정 경제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산업 현장에 뛰어 든 예는 흔해도, 맏딸을 위해 동생들이 희생정신을 발휘했다는 얘기는 드물다.나아졌다 해도 아직 우리 유전 인자 속에는 맏딸들에 대한 기대치가 있다. 개별자부터 그런 시각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심리적 부당함을 느끼고 저항하는 사회는 건강하다. 오히려 힘들고 지치고 억울해하면서도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시각에 갇혀 있는 맏딸들의 불행한 시각이 문제이다. 그들이 행복하지 않는 것은 사회 인식 탓이다. 맏딸 콤플렉스를 강요한 그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당함은 함께 바꿔도 좋다고 설득하는 일이다. 이 무더위에 의무감과 강박에 시달리는 모든 맏딸들에게 응원을!/김살로메(소설가)

2013-07-22

무겁고도 가벼운 삶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소설 형식을 취했을 뿐 철학 에세이로 봐도 무방하다. 담백한 문체와 더불어 밀란 쿤데라 식 이러한 특징이 세계의 독자를 사로잡아왔다. 만약 쿤데라가 우리나라 작가이고 이 소설이 이 땅에서 처음 발표되었다면? 처음엔 홀대 받다가 전 세계가 열광한 뒤에야 지금과 같은 호응을 얻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독자의 사유를 간섭하고 과도한 친절로 작가의 세계관을 강요한다고 생각해 부담스러워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독자들은 쿤데라식 소설 문법에 익숙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스토리텔링에 충실하고 독자는 그것을 자기 식으로 해석할 때 안심하는 경향이 있다. 주인공인 토마스와 테레사보다 훨씬 공감 가는 캐릭터는 사비나와 프란츠이다. 그들은 각각 가벼움과 무거움의 상징이다. 제목처럼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무거움`도 그만큼 언급된다.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우연과 운명의 소산물이다. 서로 동경하고 이행하며 상호 교류적이다.엄숙주의를 경멸하는 사비나의 삶은 한없이 가볍다. 데모대의 행진 대열에 끼는 삶이 그녀의 현실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와 민주화 운동 모두에 냉소적이다. 반면 유럽표 샌님인 프란츠는 서재에서 고뇌할 때 가장 현실적이다. 책상물림 프란츠 눈에는 운동, 혁명, 행진 등이 순수한 열정으로 비친다. 모험과는 거리가 먼 그에게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사비나야말로 꿈의 세계이다. 사비나에게 몰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그때 배반을 택하고 새로운 자유를 찾는 게 사비나 식 삶이다.사심 없이 가벼운 사비나의 눈에는 삶 이면의 불합리와 부조리가 너무 잘 보인다. 배반이 어울리는 사비나는 입버릇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투덜거린다. 끝내 사비나가 얻은 결론은 부조리한 키치적 삶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진실하다는 것.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그 자체가 우연이며 영원회귀로의 행진이야말로 인간사의 영원한 숙제라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3-07-19

투명 프롬프터

얼마 전, 박 대통령의 방미 외교 때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미의회 연설이었다. 영어로 진행된 연설은 호불호가 엇갈렸다. 차분하고 또박또박한 어조에 감동을 받았다는 이와, 국가원수가 모국어를 버리고 굳이 외국어 연설을 할 필요가 있냐는 이들로 나뉘었다. 둘 다 옳지만 나는 전자 편이었다. 이 글로벌한 시대에 영어의 본무대에서 우리 대통령이 그 나라 말로 연설을 했다고 뭐 그리 자존심이 상할 것인가.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박 대통령의 발음이 어설퍼 보일지 몰라도 일반 국민으로선 그 정도면 성실한(?) 연설을 한다 싶었다. 발음 가지고 시비 거는 이들은 반기문 유엔 총장더러 같은 시비를 거는 것만큼 이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감동한 것은 대통령의 당당한 태도 때문이었다. 영어로 연설을 해서가 아니라 영어로 연설을 하는데도 어쩜 저리 기품 있고 부드러운 시선을 유지할까 싶었다. 의례적이라 해도 미 의원들이 기립박수를 보낼 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뿌듯하기까지 했다.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그 비밀을 알았다. 연설을 돕는 투명프롬프터가 연설대 양옆에 있었던 것이다. 밑바닥에 텍스트를 놓고 빛의 반사 원리를 이용하면 투명 프롬프터에 선명한 글씨가 뜬다. 연설자의 눈높이에 맞게 양쪽에 투명 프롬프터를 설치하면 청중들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좌중을 번갈아 보듯 시선을 돌리면 감쪽같이 프롬프터에 뜬 연설문을 읽을 수 있다.내가 몰랐을 뿐, 투명프롬프터는 연설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문명의 이기란다. 오바마 대통령도 안철수 의원도 이것을 활용한단다. 괜히 속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곰곰 생각하니 이런 감정 또한 허세이다. 연설은 그 내용의 진정성에 있지 그걸 완벽하게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아니질 않나. 연설문을 단순 낭독하는 지도자보다 연설 자체를 멋지게 하는 지도자를 원하는 청중이 있는 한 투명프롬프터의 진일보는 계속될 것이다. 달 자체가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도 무시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18

귀태(鬼胎)

정치판은 말(言)들의 도미노 게임장이다. 말로 흥하고 말로 망한다. 사건이 터진다. 한쪽에서 물고 늘어진다. 별 다를 바 없는 한쪽 역시 자폭의 기회는 오고야 만다. 옳다구나 싶게 기회를 포착한 다른 쪽이 재반격한다. 싸움은 필수요, 동원되는 언어는 선택 사항이다. 그때의 언어는 무너질지라도 자극적일수록 좋다. 무너뜨림의 미적 쾌감이 궁극의 목표인 도미노 게임처럼 그들은 서로 무너뜨리고 무너지는 걸 즐긴다. 귀태 논쟁으로 한바탕 소란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일본의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는 `귀태`이며,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를 `귀태 후손`이라고 비하한 야당 대변인의 말이 발단이 되었다. 청와대와 여당의 격렬한 성토에 당사자와 민주당이 사과하는 선에서 진정 국면을 맞이했다. 귀태 발언에 여론이 호의적일 리가 없다. 정치와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그 말 자체를 듣는 게 불쾌하고 불편하다.세상엔 몰라도 되는 말이 있는데 귀태야말로 그런 경우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 귀신에게서 태어난 아이 또는 불구의 태아 등의 의미로 그 말이 쓰인단다. 재일학자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에서 인용했다는 데 우리말에서는 흔히 쓰이지 않는다. 사전을 찾아봤다. `두려워하고 걱정함` 또는 `나쁜 마음`이라고 되어 있다. 불길한 태생을 걱정하는 데서 오는 극심한 두려움을 나타낼 때 활용할 수 있는 낱말이다. 한데 일본에서는 더 극단적인 예로 쓰이나 보다.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는 없다. 철들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의 하나가 인간존엄에 관한 것이다. 개별자 고유는 모두 소중하다. 지위고하를 떠나 어느 누구도 제 태생이나 자존에 대해 위협받거나 조롱받을 이유는 없다. 비자의적 의지의 으뜸 사례인 탄생은 그 자체로써 존귀하다. 천사표 인간이든 악의 상징이든 태생 자체는 누구에게나 축복이다. 삼자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말 필요 없다. 모든 태생은 귀태(鬼胎)가 아니라 귀태(貴態)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17

피할 수 없음에 대하여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자기합리화를 꾀할 수 있도록 방어기제가 되어주는 명언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긍정의 아이콘으로 변해 그 상황을 즐기는 게 낫다고 역설하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쩐지 인간 숙명의 한계를 보는 것 같고 패배의식을 자인하는 것 같아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피할 수 없으면 피해라, 피할 수 없으면 도망가라, 정도는 되어야 신념과 행동을 일치하는 주체자로서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때 묻지 않은 영혼이라면 합당한 이유 앞에서 고통이나 불이익이 따르더라도 그 상황을 피하면 되지 굳이 즐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간사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도망가고 싶은 상황이 발생하고, 그야말로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만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행동과 태도가 불일치할 때 느끼는 심리적 정서이다.인지부조화 상태에 이르면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변화시켜 인지 조화를 꾀할 수밖에 없다. 개인이 상황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대개 자신의 태도를 바꿔 합리화한다. 그 과정에서 극심한 혼란이 오는 건 당연하다.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 이때 우리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같은 말을 만들어 스스로를 위로하게 된다. 정신적 패배를 이렇게라도 위장해야 덜 씁쓸해진다.같은 옷이지만 친구보다 비싸게 산 내 옷이 더 좋은 것이고, 혹독한 군대 생활을 한 사람일수록 애국자가 된다. 그 상황을 개인적 차원에서 되돌릴 수 없으니 긍정의 화신이 되어 내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다. 슬픈 현실이지만 그래야 견디는 걸 어쩌란 말이냐. 피하고자 했던 원인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할 수 없는 상황은 생기고, 그것을 최대한 즐기라고 세뇌할 수밖에 없는 제 인간조건에 연민이 인다. 인지부조화의 조화를 위해 오늘도 세상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모든 심리적 고뇌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김살로메(소설가)

2013-07-16

합리적 의심

`합리적 의심`이란 법률 용어가 있다. 피고인의 무죄 추정의 원칙에 활용되는데, 사실의 개연성에 논리적 의문을 제기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억울한 상황을 구제하기 위한 사유체계이다. 물론 합리적 의심이란 모든 의문을 포함하는 건 아닐 것이다. 무조건 사물을 삐딱하게 보거나 모든 일이 불공평하다고 투덜대는 의심증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사회에서도 `합리적 의심`은 필요하다. 특히 각종 미디어를 접하는 우리의 눈은 건전한 의심과 가까울수록 좋다. 보도 매체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때 우리는 별 의심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간단한 예를 들자. 모 방송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한국인의 실태를 몰래카메라로 보여준다. 화면만 보면 캐나다인 백인에게 피실험자들은 친절했고, 미얀마 출신 청년에게는 불친절한 태도를 취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개 합리적 의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문제는 이 실험에 참여한 사람의 생각과 그것을 분석한 방송 제작자의 시각이 다르다는 데 있다. 미얀마 출신 실험자는 친절하게 답변한 한국인이 대부분이었는데 제작진에서 악의적 편집을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제작진은 20퍼센트의 사람들만 불친절했다고 해서 인종차별이 없는 건 아니다, 백인에게는 모두 친절하고 동남아인에게는 80퍼센트만 친절하다면 그것도 차별이다, 라는 시각을 견지한다. 상대적 불친절을 보여줬으니 문제 될 게 없다는 식이다.모든 현상에서 진실은 하나이다. 언제나 이쪽과 저쪽 사이에 그것이 있다는 게 문제이다. 미디어와 소비주체 사이, 너와 나 사이, 그들과 우리 사이에 그 진실은 있다. 뻔히 보이는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한쪽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 주고, 다른 한쪽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가장 위험한 것은 어느 한쪽에 길들여져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합리적 의심`이다. 주체들의 객체성 확보를 위해 오감을 여는 것, 이것을 합리적 의심이라 부르고 싶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15

맞춤법 한 번 까탈스럽다!

홍길동이 제 아비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듯이,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적을 수 없었던 한때가 있었다. 된소리, 거센소리 추방하여 명랑시민 길러내자, 라는 캐치프레이즈가 흥하던 시절이었다. 군말 필요 없이 짜장면은 짜장면일 때 제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 매가리 없는 `자장면`으로는 어림도 없다. 백성들의 언어 습관까지 관장하려는 당국에 맞서 민초들은 일부러 `자장면` 대신 `짜장면`을 힘주어 외치곤 했다. 그 투쟁으로 짜장면은 온전한 제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자장면`이 품은 교양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당국은 겨우 자장면과 동거하는 수준에서 짜장면을 허락했지만 그쯤은 상관없다. 짜장면은 애초에 교양이나 지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서민적인 낱말이므로.글 모임에서 합평회를 했다. 그놈의 표준어규정이 또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엔 짜장면이 아니라 `까탈스럽다`가 그 연민의 대상이었다. 규정에 의하면 그것은 `까다롭다`의 잘못된 표기란다. 표준어규정 제25항의 `의미가 똑같은 형태가 몇 가지 있을 경우, 그중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널리 쓰이면, 그 단어만을 표준어로 삼는다`에 근거를 뒀다.하지만 `까탈스럽다`의 경우 그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까다롭다` 가 `까탈스럽다`보다 널리 쓰인다고 보기도 어렵고, `까다롭다`와 `까탈스럽다`는 쓰임새 자체도 다르다. 전자가 상황이나 조건에 쓰이는 말이라면 후자는 대상의 성격을 표현할 때 맞춤하지 않던가. 예를 들면 `문제가 까다로워 풀기가 어려웠다, 까탈스러운 그의 성격 때문에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다`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타당한 언어의 현장성이 우리말법이란 규제에 갇힐 때 언중은 혼란스럽다. 변하는 게 언어의 속성이다. 당연히 그 수용에도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변화와 규정이라는 그 정반의 줄다리기 속에서 호흡 곤란을 앓는 낱말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뒷전으로 밀려난, 합리적 수용 대상의 언어들이 하루 바삐 날개를 달 수 있었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12

늙어도 동심

연출한 사진은 아니었다. 멀리서 찍었지만 무척 자연스럽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깬 누군가는 창을 열고 무심코 놀이터를 내려다봤을 것이다. 그리곤 감동에 겨워 스마트폰으로 셔터를 눌러댔을 것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노부부이다. 놀이터엔 그들 외엔 사람 그림자조차 없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지금 동심(童心) 놀이 중이시다. 첫 장면은 나란히 그네에 앉는 장면, 두 번째 컷은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탄 그네가 허공에 더 가깝다. 할머니의 무릎 관절이 더 좋거나, 아니면 더 신났음에 틀림없다.다음 사진, 지구 모형처럼 생긴 뱅글이 기구에 바투 붙어 있는 할머니가 보인다. 그네를 겨우 벗어난 할아버지는 시소와 뱅글이 사이에서 할머니를 주시한다. 등이 휜, 팔순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는 뒤처진 할아버지에게 어여 오라,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으리라. 마지막 네 번째 컷, 노부부 기어이 뱅글이 놀이기구에 올라 타셨다. 엉거주춤한 자세지만, 다리에 힘을 싣고, 팔에 기를 넣어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유쾌한 시간을 위해 기구를 힘껏 돌렸으리라. 뱅글뱅글 팔순의 동심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인터넷에 올라온 네 컷의 사진을 내 식으로 묘사해보았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해맑은 노부부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동심은 사라진 게 아니다. 다만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허리 아프고, 무릎 삐걱거려도 그 세계를 한 시도 떠난 적 없다. 산책에 나선 노부부가 서로를 보듬는 매개체로 놀이터를 활용하는 것은 어쩜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게 쉬운 일이던가. 겸양을 통해 스스로 자제하고, 체면을 빌려 어른인체 해야 하며, 세월의 옷으로 주책을 피해야 했던 것들을 잠시나마 거부하는 그 스릴에 우리는 감동하는 것이다.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은 언제나 동심이다. 그걸 들키는 게 부끄러운 것도 쑥스러울 일도 아닌데 우리는 감추고 산다. 늙어도 동심임을 제 몸이 기억하건만 사회는 그것에 너그럽지 못하다. 발동하는 동심은 구르고 돌려야 제 맛이거늘!/김살로메(소설가)

2013-07-11

안네와 엄마

내 인생 최고의 책 중의 하나는 완전 판 `안네의 일기`이다. 그토록 어린 소녀가 그만치 진솔하고 통찰 있는 내면의 목소리를 가지기란 쉽지 않다. 암스테르담 여행 중 예정에도 없던 안네의 은신처를 들르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가슴이 벅차올랐던 건 말할 필요가 없다.안네의 일기는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묘사했다거나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고발하는 내용이 주가 아니다. 선전문구만 보면 그런 것이 주된 내용인 걸로 착각하기 쉬운데 시쳇말로 닥치고 읽어 봐라고 말하고 싶다. 한마디로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의 일기이다. 그런데 그게 보통 사춘기 여자애의 감수성이 아니라 몇 단계 뛰어넘는, 말하자면 감당하기 힘든 개성을 보유한 소녀의 기록이라는 데 그 매력이 있다.제한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과 생활할 수밖에 없던 안네는 불화의 아이콘이다. 고집불통에다 예민하며, 자기 주관적이면서 적극적인 안네는 아버지를 제외한 은신처 사람들 대부분과 부딪힌다. 그런 딸을 가장 버거워한 이는 당연 안네의 엄마였다. 은신 생활을 한 첫날부터 안네와 엄마는 긴장과 대립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썩 관계가 좋은 건 아니었다.모녀의 기질은 완전히 달랐다. 엄마 에디트는 겉보기에 지루해 보이는 차분함과 모성에서 비롯된 잔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딸 안네는 과도할 정도로 자기표현에 능한데다 울음과 흥분으로 제 기분을 표출하는 성격이었다. 모성의 안달과 사춘기의 예민함은 자주 충돌했다. 안네는 `엄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탓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면 대단한 자제력이 필요하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때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한다.안네의 엄마도 이해되고 사춘기 안네도 공감된다. 이러한 섬세하고도 진솔한 에피소드들이 안네의 일기에는 차고 넘친다. 위선이나 거짓 감정이 배제된 영특하고 발칙한 소녀의 기록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좋은 텍스트가 되는지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강조한다. 단, 안네가 실제 내 딸이라면 버거워서 사절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10

정의보다 지혜

정의는 옳지만 인심이 묻힐 수 있고, 지혜는 그를 수 있어도 사람을 구한다. 가령 소셜 네트워크 대화방에서 있을 수 있는 소란을 중계해보자. 옷 장사 하는 A가 제 하루 일과를 이렇게 보고한다. 오늘 넘 힘들었어. 자꾸만 에누리하려는 손님들 때문에 밑지고 팔다 보니 남는 게 없어.이때 A를 응원할 겸 평소 원칙에 충실한 B가 나선다. 올바른 상도덕을 위해 의류정찰제가 하루 빨리 정착되어야 함을 피력한다. 그때 C가 나타나 의류정찰제만이 능사는 아니며, 정가제를 한다고 상도덕이 지켜지는 건 아니라며 반박한다. 기분이 상한 B는 자신은 A에게 한 이야기인데 왜 C가 나서서 물을 흐리냐고 재반박을 한다.이해할 수 없다는 듯 C는 단체방에서 하는 얘기는 누구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냐, 그러니 당사자가 아니라도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흥분을 한다. 이때 평소 방관자였던 D가 나타나 B가 틀린 말 한 건 아니니 이해하라며 슬쩍 B편을 든다.역시 방관자였던 E도 뒤질세라 제 의견도 맘대로 못 내놓을 것 같으면 단체대화방이 왜 필요하냐고 C를 두둔한다. B는 A를 위로하려는 제 진심이 왜곡되었다며 단체방을 탈퇴한다. 결국 분란이 생기는 대화방은 없느니만 못하다고 방을 개설한 F는 단체 계정을 폭파한다. 그 다음 끼리끼리 모여 대화방을 재개설한다. 그렇다고 평화가 오나? 천만에! 그 안에서 또 새로운 분란은 지속된다. 그렇게 삶은 정반합 계속된다.과장되게 소셜 네트워크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 예를 들었지만 이는 대화법에 대한 여러 시사점을 제시해준다. 특히 정치인들을 둘러싼 알레고리로는 이보다 나은 예도 없다. 그들이 흘리는 말은 보기에 따라 언제나 옳거나 항상 그르다. 옳거나 그른 그 말에 국민들은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다면 대화의 방식이다. 위 예에서도 보듯이 내용만 보면 그들 역시 다 옳다. 하지만 형식면에서 보면 그들 모두 그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언제나 정의를 지혜로 실천할 수 있는 타협의 방식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09

예술적 취향

작년 개봉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영화관에서 못 본 건 아쉬운 일이었다. 어젯밤 교육방송에서 심야영화로 방영해주는 걸 봤다. 우디 앨런 식 유머를 곱씹는 것만으로도 무척 즐거웠다. 약혼자와 파리로 떠난 소설가 `길`이 192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 큰 흐름이다.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콕토와 헤밍웨이, 피카소와 달리, 마네와 고갱 등등 파리 거리를 누볐던 당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영화 자체에 빠지거나 잘 알려진 예술가들을 상기하는 것도 재밌지만, 잘 몰랐던 대중 예술가를 눈 여겨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주인공 `길`은 술집에서 혼혈 흑인 무희를 만난다. 조세핀 베이커이다. 흰 드레스에 깃털을 휘날리는 그녀는 고국인 미국이 버렸지만 파리 사교계에서 부활한 실존 인물이다. 불우한 환경과 뉴욕에서의 인종차별 경험은 파리로 진출한 그녀에게 단단한 무기가 되었다. 날렵한 몸매, 매혹적인 표정, 깃털 같은 경쾌함, 천진난만한 분위기 등으로 그녀는 단번에 블랙아메리카 열풍의 핵심이 되었다. 새로운 것, 특히 아프리카적인 것과 재즈 등에 환호했던 파리 상류층 기호에 그녀는 멋지게 화답했다.파리는 그녀에게 열광했다. 여성들은 베이커처럼 피부를 그을리고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틀어 올렸다. 뉴욕에서의 상처를 기억하는 그녀는 그 열풍을 만끽했다. 대신 파리에 대한 고마움을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갚았다. 전후에는 민권 운동과 고아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75년 그녀가 죽었을 때 장례식이 프랑스 전역에 중계될 정도였다. 파리와 조세핀 베이커는 궁합이 맞았던 셈이다.`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디 앨런이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는 모든 현재는 모든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그 답은 현재에 있다이다. 속살거리는 그 유머에다 내 식 깨알 같은 후기를 더하련다. 진정한 자긍심은 이국적이고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너그러움에서 나온다고. 따라서 파리 사람들의 문화적 오만은 열린 시각에서 온 예술적 취향이니 용서할 만하다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7-08

이오덕 일기

이오덕 선생의 글쓰기 방식은 한마디로 `쉬운 말로 쓰자`였다. 권정생 선생과 더불어 그는 `국민학교만 나와도 알아먹을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우리글 바로쓰기`는 글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여전히 인기 있는 책이다. 쉽게 쓰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아야 한다고 일깨우는 그 책의 감동을 나는 잊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을 쉬운 글로 표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번역문장에서조차 우리말을 고집해 문장이 어색해지는 선생의 방식을 제외하면 나는 여전히 선생의 글쓰기 방식을 존경하고 따르려 하고 있다. 올해로 선생이 떠난 지 십 년이 되었다. 그를 기리는 지인과 출판계의 뜻으로`이오덕 일기`가 출간되었다. 다섯 권으로 추려진 이 책이 나오기까지 2년8개월이 걸렸다. 앞 두 권은 교사로 살았던 24년 세월을, 뒤쪽 두 권은 사회활동을 하던 13년의 기록을 담았다. 마지막 권에는 충주 무너미 마을의 마지막 5년 생활이 실렸다.그 중 권정생 선생과의 만남 장면이 인상 깊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된 권정생 선생은 아프다는 핑계로 시상식에 못 간다고 했다. 여비가 없을 것으로 짐작한 이오덕 선생은 당신이 갖고 있던 원고지와 돈을 두고 나온다. 두 분의 우정이 오래 지속된 계기가 된 만남이었다. 이오덕 선생의 발품은 가난한 권정생 선생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는 쉽지 않다. 전체 일기가 아닌 부분만 읽어도 선생이 뿌린 생각의 씨앗이 얼마나 영글고 올곧은지 알겠다. 어린이와 노동자와 농민 등 가장 낮은 이들과 호흡한 선생의 숨결이 오롯이 살아 있다. 교육과 글쓰기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사회 혁신으로까지 신념을 확대해간 선생의 노고가 일기 안에서 되살아난다. 가난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소박하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제 몸과 맘을 연 선생의 한살이가 이 일기집으로 인해 더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05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 단상

국정원판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이 공개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들쳐볼 수 있으니 웬 횡재인가 싶다가도 솔직한 심정은 `이래도 되나`이다. 기밀사항인 정상회담록마저 온 국민이 열람할 수 있다면 자료가 공개될 것을 의식해 회담에서 깊은 대화들이 오갈 수 있을까 하는 기우가 이는 것이었다. 중편소설 분량보다 많은 대화록은 주로 노 대통령이 대화를 주도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화답을 하는 분위기이다. 방문객 입장인 노 대통령은 많은 의제를 쏟아내기에 바빠 보였고, 김 위원장은 회담을 의례적 행사로 보거나, 아니면 나이 탓인지 피로감 깃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원본과 국정원이 공개한 이 전문이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입맛에 맞게 약간의 윤색이 가해졌다 치더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노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나 `굴욕적 외교` 운운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다만 민족자주와 남북경제협력에 대한 노대통령의 의욕과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자의적 해석의 빌미가 되고, 악의적 왜곡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대화록에 담긴 노 대통령의 모든 말이 옳거나 공감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국가원수로서 정상회담에서 할 수 있는 말들의 경계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접대용 발언이라 해도 개성에 이어 해주까지 경제특구로 주려고 했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수위가 더 강도 높아 보였다. 북한에서야말로 이 회의록이 공개된다면 군부나 인민들은 굴욕적 회담이라고 성토하지 않을까 싶었다.민감한 안보사항을 경제논리나 평화 무드의 해법으로 바라보려 한 것은 노 대통령의 과잉의욕으로 읽힐 수 있다. 그것이 보수언론들이 일제히 헤드라인으로 잡은 `NLL 바꿔야, 위원장님과 인식 같아`라는 사실상 NLL 포기 발언 맥락으로 이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번 소동이 국정원의 정치개입 국정조사 전 물 타기 전략이 아니기를 바라며 궁금한 이들은 회의록 전문을 읽는 것이 가장 빠른 답이 될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04

내 방에 잠들 착한 사람

`내 방에서 마지막으로 착한 사람을 재웠던 게 언제인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밤에 나는 창문을 닫고 물을 끓이고 손으로 이부자리에 묻은 머리칼을 떼어냈을 것이다.` 김도언의 `불안의 황홀` 중 어느 오월에 쓴 일기 전문(全文)이다. 오래토록 호흡이 진정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런 기억을 떠올린 지 오래 되었고,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왜 이런 단상을 길어 올리지 못했을까 하는 탄식이 지나갔다. 과외로 연명하던 청춘 시절, 낮잠 자고 음악 듣고 글쓰기를 해도 시간은 넘쳤다. 그렇게 남는 시간,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끼리 모여 놀았다. 착하지만 뜻대로 안 되었던 우리는 좁은 골방에 틀어 앉아 청춘을 둘러싼 제 환경을 성토했다.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자주 내 방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나는 곡예를 즐기듯 그 시간을 즐겼다.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호떡과 설탕 듬뿍 넣은 커피를 앞에 두고 에어 서플라이나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며 수다를 떨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친구를 위해 간이침대 밑 먼지를 훔치고 창문을 여몄으며, 물을 끓이고 홑이불의 머리칼을 떼어냈다. 그렇게 음습한 수다의 환희로 청춘의 정점을 찍었다. 불안한 미래였기에 뭐든지 불온하게만 받아들였고, 부족한 현실이었기에 무조건 불편하기만 하던 시절이었다.세월은 흘렀다. 불안도 결핍도 덜한 나날이 되었다.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더 이상 친구를 위해 요령부득의 호떡을 굽느라 부산을 떨지도 않고, 설탕 듬뿍 넣은 촌스런 커피를 내놓지도 않는다. 문자 한 번이면 오리구이집이나 물회집에서 편리하게 만날 수 있다. 불안의 황홀 대신 편안의 불손이 유머로 먹히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내 방에 잠든 착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는 만큼의 감칠맛 나는 입맛을 기억하는 시절이 된 것이다. 오늘 하루쯤은 마음으로나마 오랜 친구를 위한 잠자리를 마련해도 좋겠다. 어딘가 묵어있을 에어 서플라이의 당신이 사랑한 사람, 밤이 깊을수록 등의 테이프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김살로메(소설가)

2013-07-03

필요한 덕목

어제 오늘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모 중견 기업이 상위에 랭크되고 있다. 지난 주말 방영된 시사교양 프로그램`그것이 알고 싶다`와 무관하지 않다. 모 살인사건 주모자의 파렴치한 후일담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주모자가 그 기업 회장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오래된 사건이지만 너무나 충격적이라 나 역시 인터넷이나 방송으로 전해주는 여러 정황들에 그간 관심을 뒀었다. 이번 방송에서는`사모님`인 가해자의 병원 특실 생활 고발을 통해 우리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부재에 대한 강력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에 관한 우리들의 자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모양이다. 돈 있고 배경 있으면 죄 없는 사람 죽여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우리 사회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도 형집행정지라는 합법적(?) 근거로 병원 특실에서 나머지 형기를 보낼 수도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방송은 나아가 사법 적용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고발한다. 한마디로 그들만의 세계란다. 같은 법이지만 그들의 법 집행은 돈과 권력에 좌지우지된다. 일반 서민들과 특수층을 대하는 그들의 법 해석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 검은 고리에 연결된 인물들은 한결 같이 사회지도층이다. 의사, 검사, 변호사, 경찰 등으로 이뤄진 그들에게 `가진 사모님`을 위한 `형집행정지` 정도는 너무 쉬운 심부름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구린 돈이 빠질 리 없다. 의사는 수상쩍은 진단서를 발급하고, 검사는 당당하게 형의 정지를 허가하고, 변호사는 뻔뻔하게 형 집행 신청을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돈이 힘이다. 당연히 가해자에게 그 심부름 값은 껌값에 지나지 않는다.돈으로 제 안위를 사고도 활개 치는 사람들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안전 불감증 못지않게 양심불감증도 우리 사회를 좀 먹는 불쾌의 정서이다. 언제까지 법보다 돈, 돈보다 권력인 사회를 인정하라고 자기체면을 걸 것인가. 그들 지도층들에게 바라는 서민적 정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적 덕목이다. 그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돈이 그보다 훨씬 좋은 이유되시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02

문화의 방식

누구나 제 눈으로 타자와 풍경을 읽는다. 같은 것을 보고도 사람마다 여행의 감흥이 다른 이유이다. 유럽 여행 중 가장 큰 정서적 충격은 센느 강변의 젊음들이었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강변 풍경은 인산인해이다. 평일 저녁인데도 둔덕이나 보도마다 몰려나온 청춘들은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다. 인구 밀집형 도시가 아닌 파리에서 이토록 많은 청소년들이 강변으로 쏟아져 나와 이야기꽃을 피우다니. 서머타임 기간이라 해가 늦게 져 시간이 많은 그들이라 해도, 우리식 문화에 길들여진 나에겐 너무나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 청소년들은 평일 저녁, 강변에 떼로 몰려나올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 대학입시에 밤 시간을 저당 잡힌 지 오래다. 설사 자유가 주어져도 그들은 강변에서의 수다 삼매경은 택하지 않는다. 피시방이나 노래방 등 폐쇄적인 공간을 선호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집에서 러닝맨이나 개그콘서트 등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할 것이다. 통째의 젊음이 강변을 점령해 저들만의 소통으로 낭만을 즐기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최첨단 인터넷 환경이 아니라서 그럴까. 스마트폰만 죽어라 들여다보는 청소년들도 거의 없다.세대는 다르지만 문화적 관습은 대를 잇는다. 수다 문화, 고상하게 말해 토론 문화가 발달되다 보니 대를 이어 그게 당연히 학습된 걸까. 흔히 프랑스를 수학과 철학의 나라라고 한다. 대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도 수학과 철학에 가산점을 줄 정도이다. 답 자체보다 답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하는 문화이다 보니 모여서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런 모양이다. 주입식 사고와 오지선다형 학습에 익숙한 우리의 청소년 상황이 떠올라 괜히 심란해지는 것이었다.고통 없고 방황 없는 청춘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밤물결을 일렁이는 바람 앞에 제 청춘을 부려놓을 여유가 있는 것과 그 바람의 존재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는 청춘은 다르지 않을까. 문화적 관습으로만 그들의 낭만성을 치부하기엔 우리 청소년들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까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01

힌트는 짐

이십 대 초반 동아리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다. 험한 산을 며칠에 걸쳐 종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다. 합리적인 등반 채비는 안중에도 없었다. 들뜬 나머지 이것저것 꾸러미만 늘렸다. 이틀째였던가. 급경사인 등산로 앞에서 나를 비롯한 여학생 몇은 그만 울음보가 터졌다. 체력은 바닥인데 무거운 배낭마저 어깨를 짓누르니 설움이 북받쳤던 것이다. 하지만 강단 있는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눈썹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배웅 나왔다가 엉겁결에 뾰족 구두 차림으로 합류한 후배조차 의연한 모습이었다. 너그러운 남학생들의 도움으로 겨우 종주를 마칠 수 있었지만 그 일은 내게 꽤 충격이었다. 주량도 모른 채 마신 한 잔 소주에 취해 다음날에야 깨어났던 사건처럼 수치스럽고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괴와 민폐를 불렀던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정글의 법칙` 같은 다큐에서 힘든 상황일수록 의연하게 대처하는 여성 출연자를 보면 마구 존경심이 인다. 어쨌든 그 이후로 `나 자신을 알자`는 말을 자주 새기게 되었다.명강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베테랑일수록 꾸러미가 간소하다는 여행전문가의 충고는 내 경우 옳았다. 그 옛날 지리산 종주에서 겪었던 낭패감을 떠올리며 짐을 줄이고 또 줄이라는 그 말을 무조건 신봉했다. 최대한 가벼운 짐을 꾸렸다. 얼마나 줄였는지 공간이 남아돌아 가방을 움직이면 덜컥이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그러면 가벼운 짐 싸기만 옳은가. 그럴 리가! 때에 따라 무거운 짐은 생명까지 구할 수 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성가셔하면서도 근시와 돋보기용 두 개의 무거운 안경을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저격수는 대통령의 가슴팍을 겨냥했다. 하지만 총알이 주머니 속 강철 안경집에 굴절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다. 내 짐이 무겁다고 느끼는 자는 덜고, 그 짐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면 챙겨서 떠나면 된다. 인생은 어차피 전세 아니면 월세, 선택의 연속이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6-28

제라늄이 있는 창

들여다보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여행은 반쪽짜리 여행에 지나지 않는다. 잠깐이라도 그들 삶 안에서 부대껴봐야 여행의 참맛을 알 수 있다. 바람결에 제 흰 뒤태를 맘껏 까불던 은사시나뭇잎의 당당함, 그 아래 푸르거나 흙빛으로 휘돌던 냇물의 도저함, 늦봄의 아쉬움을 달래며 만개하던 아카시아의 친근함, 그 뒤에 묻어나는 삶의 실체를 호흡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드넓기만 한 평원은 고요를 지나 적막하기만 했고, 문 닫힌 대문 안 울타리는 상상으로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자연에서 경험하지 못한 간접 체험은 사람을 대하면서 조금 할 수 있었다. 곤돌라 내부가 더러워질까 예민해지던 뱃사공의 시선, 타성에 젖은 노랫가락으로 제 피곤을 연주하던 악사들의 낯빛, 휴지 하나 버리자는 데도 손사래 치던 점원의 이맛살. 작은 관찰만으로도 산다는 게 얼마나 힘겹고 피로한 것인지 알 것 같다.그들 목가적 원경의 평화와 위대한 축조물의 위용 앞에서 우리는 무던히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평화와 위용은 껍데기일 수도 있다. 견문의 대상을 그들 삶의 현장으로 치환한다면 어떨 것인가. 원경의 평화도 삶 안에서는 곤고함이 도드라질 것이고, 건축물의 위대함도 노동 현장이 되면 신산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원래 멀리서 보면 청맹과니 평화요, 가까이서 보면 천리안 전쟁터 같은 것이 사람 사는 모습이니.그 신산하고 지리멸렬한 것들로부터 치유하기 위해 사람들은 작은 여유를 찾는다. 창가의 제라늄 화분이 그 좋은 예가 될까. 유럽의 창밖 베란다마다 붉은 제라늄이 지천이다. 춥지 않은 날씨 덕에 오래 꽃을 볼 수 있는데다 잎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은 해충 퇴치에도 도움이 된단다. 관상용 꽃으로는 그만이다. 제라늄의 잔영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소박한 데서 여유를 찾고자 하는 인간 심성의 공통점 때문이리라. 굳은 결의 또는 그대가 있어 행복이네 등의 꽃말을 지닌 제라늄이 핀 창가는 한동안 내 안에서 쉬 떠나지 못할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27

타자를 안다는 것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에`번지`라는, 내가 보기에 무척 예쁜(?)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다. 우스갯소리를 붙이자면 그의 자는 자지(子遲)란다. 공자의 수레를 몰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학식이 높았던 이는 아니었으리라. 총명하고 똑똑한 제자는 아니어서 엉뚱한 질문, 예컨대 채소 가꾸는 법 따위를 물어 주변으로부터 비난을 듣곤 했다. 영민함과 재치와는 거리가 멀었겠지만 순박함과 성실함으로 공자를 보필한 제자였을 것이다. 그의 관심 분야는 앎(知)과 어짊(仁)에 관한 것이었다. 번지가 그것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했다. `어짊이란 애인(愛人)이고, 앎이란 지인(知人)이다.`라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공자의 인에 대한 가르침은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안연에게는 예를 회복하는 것이요, 중궁에게는 남에게 원치 않은 일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며, 사마우에게는 말을 조심하는 것이라 답할 만큼 그때그때 달랐다. 하지만 가만 보면 공자의 여러 답변은 결국 한 가지였다. 다름 아닌`타자에 대한 이해`이다.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흔히 만나는 두 나무가 사이프러스와 우산소나무이다. 전자는 밑이 넓다가 위로 솟구칠수록 뾰족한 긴 삼각형 모양이고, 후자는 나무둥치가 뻗어가다 윗부분 잎맥에 이를수록 핵 분열하는 것처럼 둥글게 퍼지는 형태이다. 각각은 직선과 곡선, 첨탑과 돔, 뾰족함과 둥글함, 자제와 허용 등의 이미지를 풍긴다. 한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두 나무가 연출하는 거리의 풍광이야말로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사람마다 다 다르다. 나아가 그 다른 사람마저 밑둥치와 잎맥이 지닌 성질은 다를 수 있다. 다변적인 인간의 성정을 공자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제자마다 다른 답변을 줄 수 있었다. 사람 따라 달랐던 공자의 답에는 다음과 같은 숨은 가르침이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인간 보편성에 대한 균질하고도 다양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3-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