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은 한층 차분해지고, 땅의 열기도 많이 숙졌다. 열린 창으로 다급히 들어오는 바람의 숨결에 가을 냄새가 확연하다. 이때쯤이면 가을 편지 한 자락이 생각나야 제격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언제부턴가 우리는 손 편지를 주고받기 드문 시대를 살고 있다. 기억을 살리기조차 아득하다.
편지지 위에다 내 의지의 손으로 연필을 움직인다는 건 온몸으로 쓴다는 거다. 때론 에두르고, 더런 질러가며 하고 싶은 말들의 호흡을 가다듬던 그 불면의 흔적들. 상처의 갑옷을 입거나 환희의 날개를 달았던 그 까만 사연들은 쓰는 순간엔 상대를 넘어 우주 끝까지 가도 좋을 것들이었다. 하지만 편지 한 통에 기가 다 빠져 다음날을 꼬박 앓아눕고 나면 유치찬란했던 간밤의 실상이 제대로 보여 그 편지는 찢기기 일쑤곤 했다. 그래도 숙명처럼 편지를 즐겨 쓰던 시절이 우리에겐 있었다.
친구들에게 받은 오랜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 잊고 지냈는데 십대와 이십대를 추억할 수 있는 좋은 매개물이 되어준다. 받은 게 쇼핑백 가득이니, 편지 쓰기 좋아했던 내가 보낸 건 그 두 배는 족히 되리라.
갑자기 그것들의 운명도 궁금해진다. 편지 하지 않는 지금의 세대는 감성이 메말라서라기보다 대체할 것들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 많아 눈이 바쁘고, 너무 빨리 돌아가 따라갈 수 없는 지금 세상이, 느린 손 글씨와 침 발라 붙이던 우표와 어울리기나 하던가. 그래도 가을 온다는 바람의 영근 전언을 한 번쯤은 손 편지로 배달하고 싶다. 한데 그 많던, 편지 받을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