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도 환희에도 혀가 관여한다. 혀를 통해 나오는 말은 보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일찍이 그것을 갈파한 선인들이 이런 말을 지어냈다. `임금이 지혜로운 두 신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구해오도록 명령했다. 두 신하는 각자 상자 하나씩을 가져왔다. 첫 번째 상자에도 두 번째 상자에도 사람의 혀가 들어 있었다.`
왜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을까? 생각이 다르다는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건 내 맘이니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타자에게 나를 똑 같이 대접해달라고 강제하기는 어렵다. 그건 타자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무한대로 뻗어있는, 자유롭기만 한 타자를 내 식으로 규제하려 할 때 우리는 필연의 상처와 대면한다.
상처를 옮기는 기본 도구는 혀(말)이다. 속으로야 나라님도 팔아먹고 전 우주도 바꿔치기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뱉은 언어는 걷잡을 수 없는 상처라는 꽃 무덤을 만든다. 흔히 잘못 놀린 혀는 세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놀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 그 대상이 되는 사람 모두. 현명한 소통을 하는 자들은 타자를 향한 시선이란 끈을 느슨하게 잡을 줄 안다. 팽팽한 줄잡이야말로 상처의 근원이라는 것을 누적된 학습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혀 놀림도 훈련하면 줄일 수 있고, 소통의 문도 노력하면 언젠가는 열린다. 무더위를 이기는 것만큼 힘들지만 자기최면 걸듯 훈련과 노력은 필요하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