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시청박(視聽搏)의 여행

`시지불견(視之不見) 청지불문(廳之不聞) 박지부득(搏之不得)`이란 말이 있다. 도덕경에서 도(道)를 설명하는 말 중의 하나이다. `보아도 제대로 못 보는 것, 들어도 제대로 못 듣는 것, 잡아도(겪어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은 도뿐만 아니라 여행에도 적용된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곳을 휘돌았을 때 그것은 `시청박(視廳搏)`에 머문 것이지 `견문득(見聞得)`에 이른 것은 아니다.냉정하게 보면 차 탄 채 풍광을 보다가 내려, 낯선 축조물과 거리를 배경으로 빛의 속도로 사진을 찍고 밥 먹고, 다음 장소로 옮겨 잠자는 것, 이것이 여행의 전 과정이었다.패키지여행의 한계였다. 여행에서 가장 필요한 자발적 의사와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았기에 뭔가를 깊이 새긴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합리적인(?) 비용만큼의 합당한 결과였으니 당연한 얘기이긴 하지만.인증욕이 발동해 셔터만 바쁘게 눌러댔을 뿐 그들 삶 자체를 들여다 볼 기회는 좀처럼 가지지 못했다.이국의 문 닫힌 여염집안의 티타임,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평원에서의 농사꾼의 망중한, 마을을 흐르던 푸르거나 흙빛 시냇물의 감촉 등을 새기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토록 날 좋았던 이국 밤하늘의 별 한 번조차 쳐다보지 못한 것은 나의 실수였다.주마간산 식 여행은 견문득과는 한참 멀다. 그렇다고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비록 시청박에 머물렀지만 그 또한 여행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로, 듣자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로 정의하고 있다.이희미(夷希微)는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분명한 실체가 아니다. 도가 그러하듯 여행에도 완벽한 실체가 있을 수 없다. 닿을 수 없는 한 지점을 향해 바람 맞으며 떠나보는 일, 그 과정에서 삶을 이해하려는 열린 자세 그것이 여행 궁극의 목표 아니겠는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6-25

젊은 어깨동무

`오, 삶이여. 삶 그것은 바깥에 있다는 것 / 활활 타는 불꽃 속의 나 / 나를 아는 자 아무도 없다` 임종 때 남겼다는 릴케의 이 시구는 여행의 목적에도 맞춤하다. 왜 사람들은 저마다 떠나기를 꿈꾸는 것일까. 왜 누군가는 기어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마는 것일까. 삶이란 내 안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바깥 어딘가로 향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 밖을 넘보는 욕망,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활활 타는 불꽃, 그 정념의 뿌리를 찾아 우리는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청춘인 여행객 셋. 둘은 쌍둥이 자매였고, 하나는 우연히 포항에서 같이 출발한 아가씨였다. 셋 다 직장 생활을 하는 커리어우먼이었는데 휴가를 내고 여행에 동참한 경우였다. 사회생활에서 터득한 지혜 덕이었을까. 어려보이는 외모와 달리 하나같이 성숙하고 사려 깊은 삼인방이었다. 흔히 기성세대들이 우려하는 젊은이 특유의 철없음도 없었고, 혼자만 잘났다는 이기심과 무관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엄마 미소가 절로 나온다.카드를 분실했다고 울먹거리다가도 위로의 말에 해맑게 웃던 모습, 약속 장소를 넘겨짚는 바람에 한참 숨바꼭질을 했을 때, 기다리던 우리는 그마저 소소한 재미로 생각했는데 어쩔 줄 몰라 하며 진심으로 미안해하던 모습, 귀찮을 법한데도 티내지 않고 환한 미소로 사진기 셔터를 눌러주던 밝은 심성 등 그들이 뿜은 매혹적인 아우라 덕에 여행은 한층 즐거웠다. 두고 온 걱정거리가 많은 주부들에게는 2주의 여행 기간이 적당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홀가분한 그들로선 못내 아쉽기만 하다고 했다.바깥의 삶을 내 안으로 적극 끌어들이는 데는 젊음, 그것도 어깨동무한 젊음보다 나은 게 없다. 여행이란 꿈꿀수록 이루기 쉽고, 덜 심사숙고할수록 기회가 온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자. 한시라도 젊었을 때 경계로 상징되는 모든 것을 경험하자. 내 안에 머문 나를 밖에서 볼 수 있는 여행이 되도록./김살로메(소설가)

2013-06-24

함께라는 말

잘잘한 해프닝이야말로 여행의 또 다른 묘미이다. 단체여행에서의 수위 높지 않은 실수담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여행의 잔재미를 선사해준다. 겪는 당사자로서는 아찔하고 당황할 수도 있지만 지나고 나면 그마저 좋은 추억담이 되어준다. 일찍 잠에서 깼다. 말로만 듣던 파리 시내 관광, 그 중 에펠탑과 센느강을 볼 수 있다는 설렘에 마음은 절로 달떴다. 외곽의 숙소를 떠나 버스는 시내로 달렸다. 한참 가고 있는데 전화를 받는 가이드의 얼굴빛이 심상찮다. 두 명의 일행을 숙소에 둔 채 신나게 달려왔던 것이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설마 자신들을 두고 떠났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직 초기 여정이라 여행객들끼리 통성명조차 없어서 서로를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인원 체크는 당연히 가이드 몫이라고만 생각했다.아뿔싸, 두고 온 멤버는 전날 밤 내게 자신들의 곁잠자리를 내어준 그분들이란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가이드보다 내가 더 미안해졌다. 주변을 돌아볼 생각 없이 나만의 여행에만 몰두해있던 스스로에게 실망감이 일었다. 버스는 이미 삼십 분 이상을 달려왔다. 운전대를 되돌릴 상황이 아니었다. 할 수없이 그들은 택시를 타고 뒤따라 와야만 했다. 에펠탑 광장에서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다. 잠시의 이별이었지만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괜히 민망해졌다. 섬세한 마음자리까지 이르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기만 했다. 둘이였다 해도 낯선 이국의 택시 안에서 그들은 얼마나 불안에 떨며 노심초사했을 것인가. 함께 하는 여행은 서로 챙기고 다시없을 위안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임을 깨치게 해주는 해프닝이었다.`우리가 그렇게 존재감 없는 사람들이었어?`라고 안전지대에 당도했음의 여유를 귀여운 눈 흘김으로 대신하던 그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랬다. 누가 파리까지 와서 택시 일주까지 하는 호사를 누리겠어요? 어느 누구도 쉬 경험하지 못할 파리의 추억을 그대들은 간직한 걸요./김살로메(소설가)

2013-06-21

따뜻한 바닥잠

길 떠나면 뜻 하지 않은 사건 하나쯤은 생겨줘야 제격이다. 여행담은 평범하지 않을수록 오래 기억되고, 그 기억의 갈래들은 깨어지는 삶의 리듬에 윤활유가 되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고, 심하게 로망에 젖었던 파리에 대한 첫인상은 실망감이었다. 대책 없이 자유로운 도시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도로에 흩어진 각종 비닐봉지, 휴지, 꽁초 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깨끗하고 단정했던 런던 거리와 자꾸만 비교되는 것이었다. 겨우 한 번 스친 눈썰미로 이른 실망에 닿을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내게 파리의 첫인상은 기대 이하였다.그에 대한 파리의 보복이었을까. 도시 외곽 호텔에 짐을 풀었다. 잠시 밖에 나오면서 카드키를 방안에 둔 채 문을 닫아 버렸다. 자정 즈음이라 호텔직원들은 퇴근했고,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꼼짝없이 한뎃잠을 자야 할 신세였다. 우리 일행을 운전해주던 버스기사 아저씨 두 분도 나처럼 카드키를 방안에 두고 나왔단다. 속수무책으로 당황하고 있을 때, 누군가 자기들 방에서 같이 자자고 했다. 아무리 여유 공간이 있다 해도 쉽지 않은 선의였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잠시나마 타인의 호의를 기대하며 내 입장을 변명하던, 민폐를 자초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한 순간이 떠올라 복합적으로 울컥해지는 것이었다.그날 밤, 가이드가 동분서주하며 구해준 여유이불을 바닥에 깔고 잠을 청했다. 내 방이 아니고, 침대 위도 아니었지만 어느 때보다 달콤하고 따뜻한 잠자리였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가이드 역시 곁방 잠을 잤단다. 운전기사 두 분께 잠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가이드 방에서 잤다는 것이었다. 내 문제로도 피곤했을 텐데 잠자리까지 편치 않았던 가이드에게 미안하기만 했다.여행을 하다보면 순간의 실수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한다. 그 민폐를 보듬어 안는 것 또한 개인의 몫인데 쉬운 일은 아니다. 잠자리 내어준, 모녀처럼 다정하던 직장 동료사이라던 두 분께 지면이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20

유럽에서의 공중화장실

2주간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귀갓길 택시 안, 짐 꾸러미만으로도 먼 길 떠났다 온 것을 알아 본 기사분이 갑자기 흥분하신다. 외국여행은 할 게 못 된단다. 특히 유럽 여행이 그런데, 화장실 갈 때도 돈 내고, 호텔 나올 때도 팁 줘야 하고, 물마저 사먹어야 한다더라며 결론은 우리나라만큼 살기 좋은 데가 없단다. `우리나라 좋을씨고`, `내 집이 최고지`에 대한 답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가끔 길 떠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유럽의 화장실 문화나 팁 예절, 공짜가 아닌 음용수에 대해 딱히 불만이 있는 쪽은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지 않은가. 다만 공중 화장실에 대한 의문은 가시질 않는다. 유료인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런 화장실조차 드물다는 게 문제이다. 우리식 화장실 문화에 길들여진 여행객으로서는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매장에 딸린 화장실 입구에는 칸막이 봉까지 설치해 놓았다. 무표정한 검표원이 동전 투입구 앞에 서서 물건 살 때 화장실 사용료만큼 할인해주는 쿠폰을 발행해 준다. 인건비도 안 나올 것 같은데 왜 저런 시스템을 고집할까 싶다. 그들 조상들의 위대한 축조물 앞에서 연신 감탄하다가도 미로 속 같은 무료 화장실을 찾아 헤맬 때나, 푼돈을 낚아채 가는 유료 화장실을 보면서, 그들 문화 스케일의 양극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했다.더럽힌 자, 품위 있게 그 비용을 지불할 지어다. 그런 마인드라면 화장실 개수도 늘이고 그 품격이라도 높여야 하지 않는가. 화장실 관리 명목, 노숙자 접근 금지라는 이유 등으로 유료 화장실을 고집한다지만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화장실이 그리 깨끗한 것도 아닌데다, 공중화장실마저 노숙자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어디서 볼일을 보나? 이참에 선진화된 우리 화장실 문화를 유럽에다 전수하면 어떨까. 아니면 우리도 관광대국이 되어 느긋하게 화장실 앞에서 돈 내놔라고, 무표정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나을까. 아서라, 생각만 해도 멋쩍고 볼썽사납구나./김살로메(소설가)

2013-06-19

참을 수 있는 존재의 위안

우리 삶은 환희와 명랑과 광채로 들썩이는 날보다 굴욕과 절망과 고립의 나날일 때가 더 많다. 아니 어쩌면 그 둘 현상은 비슷하게 벌어지는데, 우리가 겪는 감정의 여운이 후자가 더 길게 가는지도 모르겠다. 기억해도 좋을 감정보다 잊고 싶은 감정이 우리 내부를 더 많이 휘젓고 다니기 때문이다. 간단하지 않은 이 삶에서 우리가 위로받을 곳은 어디일까. 이 세상 모든 비난과 절망에 대한 위안처는 친구이다. 다정한 존재 하나가 온 우주를 커버할 만큼 큰 위력을 발휘한다. 알랭 드 보통이 말했다. 친구란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에 대하여 더 적극적으로 정상이라고 판단해줄 만큼 친절한 사람을 일컫는다고.만난 지 십 년도 훨씬 지난, 멀리 사는 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서로가 몹시도 보고 싶어 했었다. 그새 남편은 병으로 먼저 떠났고, 이 년 전에는 그녀마저 암 선고를 받았다. 꾸준한 치료 덕에 이제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식당을 하는 그녀는 휴무일을 맞아 무작정 먼 길을 운전해왔다. 먼저 간 남편에 대한 야속함, 시댁에 대한 서운함, 자식들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감 등을 털어 놓는 그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 앞서 울고 그녀 뒤에 웃는 것밖에 없었다.못 보던새, 내 몸피는 그녀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굵어졌고, 그녀의 등짝과 허리는 그 옛날보다 날렵하기만 했다. 눈곱조차 떼지 못한 나를 안으며 그녀가 말했다. 하나도 안 변했어. 그렇고말고. 몸은 변해도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게 사람이지.누군가와 친구가 되는 건 상대방이 친절하고 배려심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서로가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로에게서 완벽을 찾는 게 아니라 상대의 결핍이나 과잉마저 인정할 때 우정은 지속될 수 있다. 내게 비합리적 양상이 벌어졌을 때, 그런 친구라면 무조건 내게 긍정의 신호를 보내주기 마련이다. 이 실팍한 세상에 친구보다 나은 약은 없다. 참을 수 있는 존재의 위안, 그것이야말로 친구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8

백석 시인과 젊은 화가

누군가를 몹시 좋아하면 객관적인 눈을 가지기는 힘들다. 김영진이란 젊은 화가이자 저자 또한 그러하다. 그가 쓴 `백석 평전`은 우연이자 운명적으로 내게 왔다. 인터넷서점에서 알게 된 전국구 독서친구들이 있다. 일명 오공주파인 우리 다섯은 비정기적으로 만나 우의를 다진다. 그 중 책 나누기 이벤트도 있는데, 이번 모임에서 내 손에 온 책 중에 가장 눈에 띤 게 이 책이었다. 일반적으로 평전이라면 객관성은 기본으로 깔린 채 저자 특유의 해설이 붙는데 이 책은 아무리 봐도 일방적 백석 헌사에 가깝다. 검증된 자료로 시인과 시를 분석을 한 게 아니라 주관적 감정적 판단으로 백석 시인을 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그런데도 저자의 노고와 진정성이 배어나와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책 제목처럼 평전이라 불리기는 뭣하고 백석에 관한 저자의 모든 관심 정도로 읽히면 무방하겠다.젊은 화가이자 저자인 김영진은 어릴 적부터 병약해 5학년 때 학교를 중퇴했다. 그러던 그가 백석 시를 알게 되고 그 감동을 그림으로까지 표현하기에 이른다. 건강이 악화될수록 그에게는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근원을 아는 것이었다. 저자에게 그것은 다름 아닌 백석이었다. 당대 화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한 시인의 시를 읽고 또 읽어 심장과 영혼에 새겼다.저자는 시인이 사용한 언어를 알게 되고, 시인의 삶을 유추하게 되고, 당시 시대 상황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시는 저자의 몸과 마음에 체화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어렵다. 사물이나 사람을 좋아하면 무작정 좋아하게 되는 것이지 그것을 분석하거나 따지는 건 고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이 책은 백석평전이란 제목은 붙이기 곤란하다. 가난하고 외로웠으나 높고 쓸쓸한 시인의 삶이 화가의 가슴에 들어가 한 편의 글이란 그림으로 완성된 것만으로도 저자는 뿌듯해 해도 좋으리라./김살로메(소설가)

2013-06-17

말 달리는 아버지

김혜순 시인의 시 중에 `델리카트슨`이 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길렀다/ 당연히 잡아 먹으려고` 이렇게 시작하는데 시인은 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보고 이 시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는 질곡의 부성(父性), 부성의 패악과 연민 등으로 읽힌다. 불편한 진실의 따끔거림, 옛날에는 이런 시들도 괜찮다 느꼈는데 요즘은 이런 것보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시들에 더 마음이 간다. 이 시를 대하면 어떤 연유에서인지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이 떠오른다. 분위기는 비슷한데 그 맛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등장하는 건 같지만 두 아버지는 서로 대척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빠른 피아노 반주와 어우러지는 `마왕`은 음으로만 듣는 게 아니라 얘기로 이해하는 음악이다. 슈베르트가 열여덟 살 어린나이에 광풍에 휘말리듯 작곡한 이 곡은 괴테의 시`마왕`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다. 절절한 부성이 전해지는 이 곡을 들을 때면 이미 알고 있는 노랫말 덕에 그림이 그려지곤 한다.밤늦게 아버지 말 달리신다. 사경을 헤매는 아들을 팔에 안고서. 아들의 눈에는 헛것이 보인다. 옷소매 당기는 마왕이 보이지 않느냐고 아버지께 보챈다. 아버지는 아들을 달랜다. 아들아, 저것은 안개의 춤사위고, 마른 잎에 바람 부는 소리란다. 마왕은 유혹한다. 예쁜 꽃과 황금 옷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자고. 아들은 공포에 떨고 아버지는 다시 아들을 달랜다. 아버지는 아들을 안고 힘껏 말 달리지만 결국 마왕은 아들의 죽음을 거둬간다.한 성악가가 각각 내레이터, 아들, 마왕, 아버지가 되어 변주를 한다. 북유럽 어딘가의 설화를 시로 재해석한 괴테도 대단하고, 단번에 이런 시에서 영감을 얻어 가곡을 만든 어린 슈베르트도 위대하다. 대개의 아버지는 말달렸고, 무심한 자식들은 회한만 남아 이렇게 노래로써 부성을 추억한다. 자식은 아버지를 파먹고 자랐고,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그저 말 달렸을 뿐이다. 이 가곡, 나로서는 `마왕`이 아니라 `말 달리는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4

산처럼 무겁게, 깃털처럼 가볍게

우리 영화 `아나키스트`를 오랜 만에 다시 보았다. 1920년대 상하이를 무대로 실제 있었던 의열단 멤버들의 독립 투쟁기가 소재이다. 당시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두 축을 이룬 가운데 제 3의 세력인 무정부주의자들도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역사는 은연중에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강요하였다. 김구나 안창호 등 상해임시정부 측근들이 주도한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투쟁사를 정통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도저도 아닌 제3의 입장인 아나키스트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운다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세우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행동주의자들이다. 그 단순한 목표 때문에 그들의 상처 또한 깊다.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둘러싼 제 상황과 힘겹게 싸웠음을 알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쯤 그들이 본질적인 허무주의자가 되어 있음을 관객들은 눈치 챈다.독립에는 소모품으로 쓰이고, 조직에는 별 도움이 못 되는 세르게이는 적이 아닌 같은 단원에게 죽음을 당하고 만다. 무의미한 투쟁이라는 걸 멤버들도 알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아나키스트를 설명하는 말을 영화 곳곳에 장치함으로써 감독은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리스어로 `아나르키아`는 `선장 없는 선원`을 뜻한다. 그들은 지배자가 없는 진정한 평등사회를 꿈꿨다. 일할 수 있는 만큼 일하고 먹을 만큼만 가진다는 그들의 모토는 일견 사회주의자들의 그것과 상통한다. 하지만 권력투쟁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순수한 의미의 아나키스트와는 거리가 멀다.애석하게도 아나키스트들이 꿈꾼 대로 역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 서로 간의 굴욕적인 투쟁의 기록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우울한 허무주의자들의 처절한 자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삶은 산처럼 무거우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 -그들은 살아서 허무하고 쓸쓸했으나 진정 죽어서 깃털처럼 가벼운 희망이 되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3

스마트폰 세상

스마트폰 천국이다. 나남할 것 없이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세상이다. 아직 갖추지 않은 이가 있으면 그게 더 신기하고 존경스러워 보일 정도이다. 스마트폰의 순기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만 그게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스마트폰을 통해 교류를 하다 보니 인성이 메말라 간다. 모든 게 스마트폰 안에서 해결되니, 굳이 옛날 방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오죽하면 모든 답은 스마트폰 안에 있다는 말이 나올까. 스마트폰과 함께 크는 요즘 아이들에게 그것은 가장 편리하고 재미난 장난감이다. 유치원생들에게조차 이보다 나은 놀이도구는 없다고 한다. 실제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보여주면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는단다. 모든 게 클릭 한 방으로 해결되는 줄 아는 아이들에게 책은 먹기 싫은 떡이나 성가신 장난감 같은 게 되어가고 있단다. 예를 들어 토끼나 원숭이 그림이 나오면 아이들은 그걸 먼저 클릭부터 하고 본단다. 그래봤자 반응 없는 동물들이니 자연스레 책은 스마트폰보다 재미없는 것으로 밀려나게 된단다. 우스갯소리 같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문명의 이기만큼 미래 사회를 두렵게 하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인형이나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들 눈동자는 초롱초롱하고 입말은 발달한다. 그에 비해 스마트폰에 익숙한 아이들은 특유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중얼거림이 덜하다. 스마트폰에 자주 노출된 아이들은 소위 말하는 `멍 때리는 표정`이 압도적으로 많단다. 외부의 자극에 적극 반응하거나 그것을 수용하려는 게 아니라 수동적 미온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아이들에게 첨단을 경험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정서적 감성적 사고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다. 자극적 즉흥적 정보에 노출될수록 황폐한 가슴에 구멍이 뚫릴 여지도 높다. 오늘도 아이들은 스마트폰에다 눈길을 고정시키고 열심히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스크린을 터치한다. 클릭의 중독성과 더 친해지기 전에 아이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2

당신의 꿈 색깔

꿈의 색깔은 흑백일까 컬러일까. 당신이 꾸는 꿈이 흑백인지 컬러인지 말해달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지만 분명한 대답을 하긴 쉽지 않다. 수면심리학 분야의 한 연구자가 꿈 색깔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16년간의 공백기를 두고 두 번의 조사를 한 결과, 30세 미만의 젊은 층에서는 대부분이 꿈을 컬러로 꿨으며, 60대 이상에서는 대부분이 흑백으로 꾼다고 대답했단다. 흥미 있는 결과이다. 급변하고 다양한 색깔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이 컬러 꿈을 꾸고, 상대적으로 색깔의 변화에 덜 노출된 시대를 산 사람들이 흑백 꿈을 꾸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내 꿈 색깔은 어떨까. 꿈을 자주 꾸면서도 꿈에도 색깔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지나간 꿈속에서 계절이나 색채를 떠올리거나 그 분위기를 감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과거의 단편적 회상들이 비논리적으로 이어지는 게 꿈이다 보니 그 진행 자체가 들쑥날쑥해 색깔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꿈이 선명한 색깔로 승화되기는 어렵다.하지만 특정 꿈을 꿀 때는 총천연 시네마스코프가 될 때가 있다. 내 경우 유독 스무 살 시절의 회상 장면이 꿈에 나타나면 그렇다. 단풍 든 느티나무 군락, 친구의 자주색 카디건, 주인이 분명하지 않은 빛바랜 갈색 가방,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달려가는 푸른색 버스 등이 꿈속에서나마 선명하게 보이곤 한다.젊은이들은 컬러로 꿈을 꾸고 노년층으로 갈수록 흑백 꿈을 꾼다는 보고가 내겐 맞지 않는 말이 되는 셈이다. 내 식으로 말하면 특정 젊은 날의 회상은 컬러로 나타나고, 다른 일반적인 꿈에서는 색깔이 큰 변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청춘의 추억만 유독 꿈속에서 총천연색으로 등장하는 건 그만큼 못 다한 꿈이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지배한다는 뜻일 게다. 사랑이든 열정이든 청춘의 이력이 분명한 색깔로 복기되는 한 희망의 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1

행복지수 높이기는 어려워

누구에게나 양면성이 있다. 사람은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에게 끌린다. 누군가 나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면 나도 더한 깊이로 상대를 공감하고 배려하게 된다.`사심 없다`는 말이 그야말로 사심 없이 성립될 수 있는 관계가 늘어날수록 일상의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하지만 모든 일상이 그런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다. 어린이 논술 강좌에서 가끔 내 한계를 시험당할 때가 있다. 과자 파티하자는 아이들의 요청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신이 난 아이들은 자제심을 잃는다. 한참 자유로울 시기에 저들도 얼마나 힘들까. 잠시나마 해방구를 만들어주자 싶어 참기로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다. 뒷정리 장면에서 실망이다. 책상과 의자를 바로 돌려놓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아이가 한 명도 없다. 과자부스러기와 음료 빈 통을 휴지통에 넣는 녀석도 물론 없다. 교육적 차원(?)에서 같이 치우자고 말해보지만 쇠귀에 경 읽기다. 정리정돈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저 부산스레 움직이고 떠들 뿐이다.순간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된다. 심리분석가들의 고백 중에 `거기 돈 많은 환자, 당신은 그냥 영원히 아프세요.`라는 내용이 있다. 분석가는 한 여자를 치료했고 그녀는 이제 휴양지에서 며칠 쉬어도 좋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는 휴양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며 `이제 남은 것은 그녀가 툭툭 털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실언한다. 이것은 심리분석가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한 무의식적 소원이었다. 말하자면 부자인 이 여자를 계속 치료했으면 하는 무의식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실제 의식으로 떠올랐다면 분석가는 그것을 세게 부정했을 것이다.최선을 다해도 상대가 몰라줄 때 혹시 상대를 아픈 환자 취급하며 현실과 타협하게 되지나 않을까 살짝 두려워진다. 인간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사심 없는 행복 지수가 영혼 없는 현실보다 백만 배는 소중하다. 따라서 행여 그런 포기하는 맘이 무의식중에라도 생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0

배고프고 어리석기

스티브 잡스는 죽었지만 그의 어록은 세상에 남아 빛을 발한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 사랑하는 거라고 그가 말했다. 그것도 배고프고 어리석은 방법으로. 일상이 시시한 건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치 보며 하거나, 억지로 하는 일은 다만 고된 노동일뿐이다. 타성에 젖은 하루가 초조하기만 할 때 스티브 잡스의 진솔한 연설문은 채찍이자 위안이 되어준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한 그의 연설문 요지는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것이다. 대학원생이었던 그의 생모는 대학을 나온 부부가 그를 입양하고 대학까지 교육시켜주기를 바랐다. 그의 양부모는 대학을 다니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스티브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오히려 대학을 자퇴한 것은 순전히 그의 의지였다. 일찍이 사업을 구상할 수 있었으니 인생의 전환점을 극적으로 잘 활용한 경우였다.두 번째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이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의 성격은 괴팍했다. 고집불통에 안하무인인 그는 주변과 불화했고 결국 그가 만든 회사인 애플사에서 공공연히 쫓겨났다.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린 참담한 시기였다. 하지만 기회를 위기로 삼아 다시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고, 그의 주도하에 개발했던 기술 덕에 다시 애플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삶이 내 인생을 벽돌로 내리칠 때 기회는 온다. 그때 신념을 버리지 않고 일을 사랑할 수 있었기에 다시 설 수 있었다.나머지 하나는 죽음에 관한 것이다. 암을 경험한 그로서는 매 순간마다 죽음에 대해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이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본능적 사명에 충실할 수 있다. 스탠퍼드에서의 그의 연설문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늘 배고프라, 늘 어리석어라.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꿈꾸고 이루려는 자, 다만 배고프고 어리석을 지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07

침팬지의 바나나

살다 보면 여러 문제에 부딪친다. 시간이 가도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 땐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때 필요한 것이 통찰력이다. 통찰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경험이 다양하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순간의 영감처럼 탁, 하고 튀어오르는 것이다. 일회성 경험인 통찰학습에 대해 심리학자 쾰러는 침팬지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우리 밖에 바나나를 두고 침팬지 곁에는 막대기 하나를 비치했다. 침팬지는 바나나를 집으려고 손을 내밀어보지만 허사였다. 녀석에게 바나나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침팬지는 연구자를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무심한 연구자가 도움을 줄 리 없다. 이윽고 침팬지는 옆에 있던 막대기를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거리까지 바나나를 막대기로 끌어 당겼다. 바나나를 손에 넣은 순간 침팬지는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침팬지가 바나나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시행착오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즉, 반복 학습이나 점진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적 체험이 아니었다. 사태를 파악하는 눈과 문제를 해결하는 통찰을 어느 한 순간에 깨친 것이었다. 목욕하다 유레카를 외치며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나, 떨어지는 사과 앞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도 이런 통찰의 순간을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통찰은 온 우주와 대면하는 나만의 고유 방식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 변화를 시도하는 한 지점이 있다. 자신의 심적 상태와 처한 상황에 따라 그 힘이 제대로 발휘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사물이나 사람을 많이 경험하고, 다양한 독서를 한다고 통찰이 깊어지는 건 아니다. 내 안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내공이 쌓일 때 문제 해결의 직관이 생긴다. 한데 그 순간이 쉽게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저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보이는 바나나를 앞에 두고 일희일비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다. 그런데도 통찰의 눈썰미는 멀기만 하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6-05

푸른 하늘

분주한 아침, 물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끼고 존경하는 지인 왈, 갖고 싶은 책 있으면 이야기하란다. 책 주문하는 김에 내게도 선물해주겠단다. 정을 나누는데 책보다 나은 선물이 어디 있으랴.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싶은 책 두 권을 문자로 보냈다. 한 권은 최근 소설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집이고, 다른 한 권은 철학 입문서였다. 어느 날 그미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빈 화분들이 눈에 띄었다. 꽃과 시를 무척 좋아하는 이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니 새로 꽃을 채울 시간조차 내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저 빈 화분을 내가 채워줘야지 하고 생각했었다.지난번 다시 들르게 되었을 때 나는 빈 화분을 챙겨 화원에 들렀다. 신경 쓰이는 업무가 많은지 그녀는 요즘 들어 머리가 아프고 호흡기도 안 좋아졌다고 했다. 로즈마리를 키워 상쾌한 기분을 맛보고 싶다고 했다. 네댓 개의 화분에다 로즈마리, 선인장 등의 화초를 채웠다. 그 중 선인장 화분은 다시 그녀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화초를 좋아하면서도 키우는 재주는 없는데 선인장이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물 줄때마다 그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책 주문을 마쳤다는 그녀가 말한다. 로즈마리 잎을 살짝살짝 건드려 향을 맡으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허브향 덕분인지 머리도 덜 아프고 기분도 한결 나아졌단다. 매사에 열성적이고 긍정적인 캐릭터가 매력인 그녀가 그렇게 말하니 덩달아 나도 상쾌해진다.저녁 무렵, 역시 좋아하고 아끼는 다른 지인으로부터 이런 문자가 날아든다. 낮에 누군가로부터 받은 문자인데 내게도 꼭 전해주고 싶었다고. `오늘은 아무 생각 없고 / 당신만 그냥 많이 보고 싶습니다 - 김용택의 `푸른 하늘`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시가 이토록 묵직한 선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오늘 하루는 `정`에 대해서만 생각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알겠다. 그 정감 릴레이를 당장 그녀에게로 이어가야겠다.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푸른 하늘만 보고 싶다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6-04

행복 총량에 기여하기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접하라.` 인류 탄생 이래로 이 말 만큼 인간관계에 대한 명답도 없다. 무심코 행하는 언행이 상대에게는 상처가 되거나 불쾌감을 줄 때가 있다. 예를 들자. 어린 아내가 아무 생각 없이`요즘은 연하남을 만나는 게 대세인데 당신은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으니 억울해.`라는 말을 했다 치자. `그렇게 자신 있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젊은 남자 만나 살아.` 라고 그날따라 남편은 발끈한다. 점점 훤해지는 이마와 늘어나는 뱃살에 신경이 쓰이고, 나이 드는 것에 대해 부담담도 밀려오던 차에 젊은 아내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으니 감정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 가끔 이런 문자를 받는 경우가 있다. `내일 오전 시간 있어요?`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일 뿐만 아니라 당황스럽기도 하다. 적어도 `내일 오전 시간 있으면 같이 산책할래요?` 라거나 `내일 오전 시간 있으면 제 숙제 좀 도와줄래요?` 정도로 문자한 목적은 밝혀줘야 한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이다. 사람 마음을 시험하는 듯한 저런 문자를 대하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라해도 당하는 입장에선 그리 유쾌하지 않다.`인간관계론`에서 카네기는 시종일관 이렇게 말한다. 상대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상대를 먼저 배려하라고. 빌딩 안내 직원이 카네기에게 성실한 자세로 지인의 사무실 위치를 안내해줬을 때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다 말고 되돌아와 이렇게 말한다. “제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이 굉장히 훌륭하군요. 답변이 매우 깔끔하고 분명했습니다. 이런 예술적 수준의 대답을 듣는 건 쉽지 않지요.” 사소하게 보이는 일에도 상대를 칭찬한 일, 카네기는 이를 두고 `인류의 행복 총량`에 약간이나마 기여를 하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인류 행복 총량에 보탬이 되는 길은 크고 거창한 게 아니라, 작고 하찮은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먼저 나가는 내 말이 상대를 대접할 때, 돌아오는 대답은 더한 배려로 돌아오게 되어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03

`굿바이`는 따뜻하다

EBS에서 방영한 한 편의 심야 영화를 보고 남편은 감동을 받았단다. 다른 일을 하느라 영화를 함께 보지 못했는데 꼭 챙겨서 보란다. 대충 들어보니 나도 충분히 좋아할 영화였다. 우연히 다른 친구가 또 그런 말을 한다. 일본 영화`굿바이`는 아끼는 영화 목록 중에서도 최고에 끼우고 싶다고. 그 영화 덕에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길을 스스로 단장해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단다. 가까운 사람 두 명이 동시에 추천하니 미룰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가서 당장 디브이디를 빌려왔다. 잘 나가던 첼리스트 다이고는 악단 해체로 실직을 한다. 백수가 뭘 가리겠는가. 연령 무관, 전공 불문, 고수익 보장이라는 여행 가이드 구인광고를 발견하고 면접을 본다. 바로 합격이다. 하지만 인생사 쉬울 리 없다. 여행사인줄 알았던 회사는 `납관`일 즉, 시신을 염하는 곳이다. 고상한 첼리스트에서 초보 납관 도우미가 된 그에게 모든 것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거북하면서도 묘한 이 일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선배 납관사 이쿠에이의 정성 깃든 태도가 찡한 울림을 선사했던 것.첼로를 만지던 손과 시신을 만지던 손이 어찌 같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끝내 그 두 손은 같은 손이 된다. 이 숭고한 손으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누구의 몸을 염습하는지를 지켜보는 순간, 누구나 그만 감정선을 놓치고 퍼질러 울게 된다. 모든 영화가 스케일이 크거나 반전이 있거나 눈요기를 담보할 필요는 없다. 확실히 좋은 영화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먼저 파고든다.누군가 좋다고 권한 영화가 내게 와서도 똑 같이 좋은 느낌을 줄 때는 이 역시 로또를 맞은 기분이다. 착한 영화, 따뜻한 영화, 여운이 오래 남는 영화 이런 것들이 대중 영화에 밀려 덜 관심 받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마니아 층이 있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죽음과 가족과 눈물과 애증과 사랑에 대한 수많은 단상이 가슴으로 퍼지는 것을 원하는 자에게 썩 어울리는 영화이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5-31

소요하기

`장자`는 독서모임에서 강신주식 버전으로 두세 번 접했다. 그래도 부족해서 그림 곁든 해설서와 전공 학자들의 관련 글도 찾아 읽었다.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해설의 뉘앙스가 조금씩 다른데다 저마다 자기 식 해설에 대한 자긍심마저 있으니 독자로서는 혼란스러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원래 고전 강독이란 게 첫 문구 하나만으로도 학자들끼리 논쟁할 만큼 범우주적 범위를 자랑한다. 그러니 일반 독자가 고전 해설서를 접하면서 느끼는 갑갑함은 당연지사이리라. 장자 사상의 기본은 제1편 `소요유(逍遙遊)`에 잘 나타나 있다. 소요유는 말 그대로 이리저리 자유롭게 노닐며 거닌다는 뜻이다. 목적지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저 한없이 한가한 행보를 할 뿐이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진정 자유로운 자만이 그것이 가능하다. 장자가 말하려 한 것은 궁극의 자유, 절대의 자유, 자유 너머의 자유였을 것이다. 인간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인간을 규정하는 그 어떤 질서나 규범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여러 예시로 보여준다.큰 가죽나무 한 그루를 보고 혜자가 말한다. 줄기는 울퉁불퉁하고 가지조차 구불구불해 쓸모없이 크기만 한 나무라고. 장자는 이렇게 대꾸한다. 쓸모없이 큰 나무에 대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 너른 들판, 큰 나무 곁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그 아래 누울 생각은 왜 하지 않느냐고. 목재로서 쓰임새 없다고, 폐가 되거나 해를 끼치는 건 아니라고.실용의 가치로만 따진다면 둥치 굵고, 가지 곧은 나무보다 좋은 건 없다. 하지만 그건 장인의 입장에서 본 것일 뿐 다르게 본다면 제멋대로 자란 나무야말로 `쓸모있는`것이 될 수 있다. 좋은 목재로 거듭나는 게 큰 나무의 가장 좋은 쓰임새라는 생각이야말로 한정적 견해이다. 소요하는 인간의 조화로운 파트너가 되는 일도 가죽나무의 나쁘지 않은 쓰임새가 될 수 있다. 주어진 합의나 정해진 틀에 안주하지 않고 궁극을 향해 소요하는 자유의 참맛을 깨치는 장자는 읽을수록 매혹적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30

변해간다

각국 미녀들이 출연해 수다를 떠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을 알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 그들이 겪는 애환 등에 공감할 수 있어서 재미있게 봤었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접하면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게 그나마 문화충돌을 최소화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중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일본 출연자가 나와 식사예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한일 양국의 식사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밥그릇과 국그릇을 밥상에 고정시켜 놓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이용해 내용물을 입까기 운반한다. 한데 일본은 그것들을 손에 받쳐 들고 식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숟가락을 잘 쓰지 않는 일본 문화이다 보니 밥알을 흘리지 않으려면 밥그릇을 입 가까이 들어야 하고, 국도 그릇째 들고 마실 수밖에 없다.밥상문화에 대한 한일 간의 차이를 생각해본 적이 없던 나는 그저 흥미롭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한데 이어지는 말에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일본에서는 밥상에 밥그릇을 붙이고 먹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데 개나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는 요지였다. 묘하게 울컥했다. 아무리 양보해도 내 쪽에서는 숭고한 밥그릇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먹는 방식이 더 야만으로 보이는데 그쪽에서는 밥상에 밥그릇을 붙이고 먹는 쪽이 더 야만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문화의 다양성에 관한 좋은 예라 하겠다.어느 한쪽에 길들여지면 다른 쪽보다는 내 것이 옳거나 더 나은 방식이라고 믿거나 우기게도 되는 게 문화의 속성이다. 각설하고, 요즘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의 식사 장면을 보면 밥그릇을 들고 먹는 젊은층이 제법 보인다. 짱구 만화나 일본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일본 밥상 문화가 무의식적으로 전파된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턱대고 우리 것만 좋은 것이라고 고집하는 쪽은 아닌데도 받아들이기에 살짝 버겁다. 변화는 빠르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미세한 혼란을 느끼는 것, 그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생각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9

색깔 있는 사람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 언변에 능한 이는 자공이었다. 공자와 자공의 대화에서 자주 회자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사람`에 관한 것이다. 자공이 묻는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떠하냐고. 공자가 대답한다. 좋은 사람 아니라고.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떠한지 여쭤본다. 공자는 다시 답한다. 역시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만 못하다고.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자연스레 인간관계에 많은 정성과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나아가 가능하다면 모든 이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청소년 시기에 왕따 때문에 극단적 행위를 하거나, 사회에 나가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건 그만큼 관계망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반증이기도 하다.얽히고설킨 현실에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란 소리를 듣긴 어렵다.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이라면 그는 정치꾼이거나 기회주의자에 가깝다. 겉으로만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만의 색깔이냐 향기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걸 애써 숨기려 하기 때문이다. 애매모호한 중립의 도덕성을 내세워 `나는 이쪽이다` 대신 `나는 기회주의자입니다`라는 비겁의 실리를 택한다.나만의 견해가 있다는 건 뭐든 좋다는 식의 꼼수부리는 것보다는 진솔하다. 비록 당파성을 나타내는 약점이 있더라도, 좋은 걸 좋다하고 나쁜 걸 나쁘다 말하는 건 공자가 바라던 바였다. 가장 나쁜 예는 좋은 것은 좋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데,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나쁜 사람에게 욕 좀 먹으면 어떠랴. 좋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고, 나쁜 사람으로부터 나쁘다는 소리를 듣는 건 명예스런 일이다. 세상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절대다수이다. 악덕한 사람들이 내는 나쁜 소리 정도는 거부할 수 있어야 공자가 말한 좋은 사람 대열에 낄 수 있는 것 아닌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