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답게 몽테뉴가 대단한 통찰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신선하고,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그의 시선이 어딘지 삐딱하게 보인다는 면에선 혼란스럽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니 후자는 판단유보해도 되겠다. 내가 혼란을 느낀 것은 내 통찰력이 그에 미치지 못한 결과이다. 인간의 다양한 속성을 자유자재로 파악하는, 불편한 진실을 꿰뚫는 그의 눈길 앞에서 다만 뜨끔해질 뿐이다.
천성 깊숙이 선한 사람들은 태생적 유전자가 `주책없이 후하게` 굴도록 설계된 자들이다. 호의나 베풂은 그들의 자연스런 친구이다. 진심에서 오는 그 호의가 서툰 것인지 영악한 것인지 그들은 생각조차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 좋아서 나눔을 실천할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일부의 시선이다. 호의를 베푸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건 잠시다. 간사한 게 사람인지라 그 다음의 호의가 이전만 못하거나, 기대하는 호의에 다음 것이 못 미치면 이내 실망하고 의심한다. 몽테뉴의 다음 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받아버린 것은 이미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은 앞으로 후대 받을 것밖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왕은 남에게 주다가 줄 것이 없어질수록 그만큼 심복을 잃는다.”
받는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그 유효 기간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지나친 베풂은 사람들로 하여금 후대를 기약하게 하고, 그럼에도 착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선행을 하리라는 것. 한편으로는 호의를 기대하는 그 사람들을 잃을까, 주는 것조차 조절해야 하는 군주까지 있어야 한다는 무섭고 서늘한 통찰. 몽테뉴의 저 한 마디는 순한 사람과 탐욕스런 사람이 함께 살아가도록 운명적으로 조직화된 게 인간사라는 것을 깊숙한 찌름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