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에 대한 좋은 쪽의 기억은 나쁜 쪽의 기억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타자에 대한 나쁜 쪽의 기억은 단 한 번이라도 깊이 각인되고 나면 거기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기억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상처는 나쁜 기억을 낳고 그것의 자기력은 끈질기고 뭉근하게 우리 내면을 괴롭힌다. 그 상처의 길은 끝내 기억을 왜곡한다. 똑같은 사안을 두고도 내 기억과 당신의 기억이 다른 것은 모든 개별자는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편리한 대로 가공하고 아쉬운 대로 재배치되는 게 사람의 기억이다. 기억은 대체로 믿을 만하지만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못 된다.
한편으로 기억 인자가 자기 유리한 대로 재편성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기억이 만약 원형질 그대로 재생된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울 것인가. 안 그래도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끈질기게 우리의 심리적 옷자락을 잡아당기는데 왜곡조차 되지 않고, 가공조차 되지 않은 채 재현된다면 제 기억의 한계가 부끄러워 더한 상처를 받게 되는 건 아닌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은 내면의 고통을 부른다. 고통은 평정심을 흐트러뜨리고 급기야 자기 연민으로 치환되곤 한다. 그 연민이 다 이해받는 건 아니니,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냉정한 조언을 준다. `네 연민조차 지나친 기억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을 상기하라`는 것. 그렇게 부단히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게 삶인 것을.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