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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라는 명상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07-01 02:01 게재일 2014-07-0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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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음의 감정은 선명하게 드러나고, 사랑의 감정은 막연하게 나타난다. 싫음의 감정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어떤 한 남자가 싫을 이유는 백 가지가 넘는다. 약속 시간을 칼 같이 지켜 부담을 주는 것도 싫고, 생긴 것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한 옷차림새를 하는 것도 싫고, 유머랍시고 하는 말들이 어쩐지 유치해보여서 싫고, 심지어 내세울 게 없어 보이는데도 당당하게 보이는 모습조차 싫다. 이외에도 죄 없는 그를 싫어할 이유는 만들기 나름이다.

반대로 한 남자를 좋아할 이유는 선뜻 대기 어렵다. 하자 많을지도 모를 그 남자를 왜 좋아하냐고 누군가 물으면 답은 오직 한 가지, 무조건이다. 객관적인 눈들이 후자의 남자보다 전자의 남자가 훨씬 괜찮다고 충고한다 한들 그것은 남자를 보는 판단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별자 감정과 관계가 있다. 문제는 그 감정이란 게 객관성과는 무관하다는 거다.

석가모니가 한 무리의 스님들에게 조용히 수행할 숲을 추천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명상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무 정령들이 저들 거처에 스님들이 쳐들어온 것을 보고 격노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자비심`이라는 명상법을 가르쳐서 스님들을 다시 숲으로 보냈다. “이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유일한 보호책이니라.”라는 말과 더불어. 웬일인지 나무 정령들의 해코지가 멈췄다. 심술쟁이 정령들도 법복 입은 스님들이 뿜는 자비심이라는 파동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 의심, 불안, 두려움, 분노 등의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은 내 맘에서 출발한다. 너그러움과 관대함에 대한 훈련으로 그 맘을 어느 정도는 다스릴 수 있다. 나무의 정령으로 상징되는 인간사를 다독이는 것은 너그러움의 힘이기 때문이다. 자비라는 연민은 타자를 향할 때 그 의미가 있겠지만 결국 내 안으로 환원되는 감정이다. 스스로를 위한 궁극의 훈련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맘속 우물 하나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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