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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저녁`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12-22 02:01 게재일 2014-12-2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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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강좌 한 프로그램의 수료식이 있었다. 딱딱한 이론 과정을 거쳐 힘든 자격증 시험을 무난히 치른 회원들의 얼굴엔 짧은 회한과 설렌 희망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후회 없는 과정이 어디 있을까. 그만하면 충분하다며 서로를 응원했고, 플래카드 양끝을 팽팽하게 당겨 인증샷까지 남겼다. 그래도 아쉬워 가까운 밥집으로 옮겨 점심을 함께 했다.

바람이 매서운데다 추운 날씨라 따뜻한 물이 절로 당겼다. 그런데 식탁에는 물통이 하나 밖에 없었다. 누군가 벨을 눌러 물을 요청했다. 도착한 직원은 물통에 물이 가득 차 있는데 왜 불렀냐는 뚱한 표정을 짓는다. 거기까지면 괜찮겠는데 “(물이 있는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그래서 물을 더 달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따지듯이 말한다. 물 한 병이 모자라니 더 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하는데 -거의 정중한 부탁에 가까웠다! -그조차 성가시다며 적반하장이다.

이럴 땐 울며 겨자 먹기로 역지사지하는 수밖에 없다. 아마 주인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거나, 동료 간에 안 좋은 일이 있는 상태에서 바빠 죽겠는데 하찮은 물까지 달라고 하니 감정선에 혼란이 온 것이리라. 감정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 매양 한 가지의 낯빛을 유지할 수는 없다. 억지로라도 그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손님 입장도 기분이 엉망이 되고 마니 참고 만다. 그때 인증샷으로 올라온 폰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고만고만한 키를 자랑하는 무리에서 유독 키 크고 늘씬하고 상냥하기까지 한 회원이 나머지 분들의 낮은 키에 맞추느라 기꺼이 무릎을 굽혔다. 그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 오래 잔상으로 남았다. 작은 것에서 기분 상하고 작은 것에서 위안을 얻는 것 그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그리고 항상 바람이 분다 항상 / 우리는 많은 말들을 듣고 말하며 / 육신의 쾌락과 피곤을 좇는다 /…. 그럼에도`저녁` 이라고 자주 말하는군요” 호프만스탈의 시구이다. 크고 작은 온갖 것에 흔들려도 그럼에도 우리는 `저녁`을 기다린다. 서럽고 따뜻하고 정겨운 그 저녁의 위안이 있기에 항상 부는 바람에도 견딜만한 것.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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