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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과 보이는 것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12-15 02:01 게재일 2014-12-1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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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모든 타자와 완전한 합일을 이루기 어려울까. 하기야 `모든 타자와의 완전한 일치`라는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면 신의 할 일이 무어겠는가. `인간적`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온갖 한계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한계 중 하나는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 두 사이에서 모든 인간적인 문제들이 생긴다. 만약 여러 상황에서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얼추 비슷하게 반영된다면 거기에 따르는 갈등과 번뇌는 문제될 게 못 된다.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의 기 싸움에서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라보는 나가 앞에서는 이기는 것 같지만 실제 보이는 나는 뒤에서 진다.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게 사람이기 때문에 앞에서는 대놓고 진실을 말하기 어렵다. 옳고 그름을 떠나 바라보는 나는 변명이 되기 십상이고, 보이는 나는 진실이 되기 마련이다. 이 예감을 알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나`에 더 치중한다. 예를 들어 `미생`에서 `장그래`가 사무실에서 두렵고 불편하게 느끼는 건 회사를 바라보는 나와 회사에 비치는 나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하게 된 장그래는 보이는 나에 대해 단속하게 되고 신경 쓰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타자를 규정할 수 있지만 내가 규정한 그 타자는 정확한 타자가 아니다. 내가 본 그 타자는 옳게 본 타자도 아니고 옳은 타자도 아니다. 다만 내가 바라보는 내 안의 타자일 뿐이다. 반대로 나를 규정하는 타자에 비친 나는 정확한 타자가 될 수 있다. 나를 본 타자 역시 옳게 본 것도 아니고 옳은 타자도 아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내 밖의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그 시선은 정확한 것이 된다. 그것은 약자 인간이 느껴야 하는 운명의 고리 같은 것이다. 그러니 평범한 대부분의 생활인은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타자를 보는 내 시선보다 나를 보는 타자의 시선이 더 옳다. 세상 모든 장그래들이 남은 연말이라도 편한 일상을 꾸릴 수 있기만을.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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