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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소왕과 뇌물죄

서동훈(칼럼니스트)
등록일 2015-04-22 02:01 게재일 2015-04-2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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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2대 효소왕때 일이다. 통일신라는 안정돼가고, 백성들도 평화를 원했다. 화랑도는 국군에 편입되고, 사조직 형태로 조금 남아 있었는데 당시`죽지랑`의 무리 중`득오곡`이라는 화랑이 한 열흘 결근을 했다. 알아보니 부산성(건천읍 오봉산 산성) 수비대장 `익선`이 징집해갔다는 것이다. 죽지랑은 떡과 술을 마련해서 그를 면회갔고, 익선에게 “득오에게 휴가를 좀 주게”하며 간청했으나, 익선은 완강히 거절했다.

그때 밀양지역에서 세금을 거두어 돌아오던`간진`이 죽지랑의 부하사랑에 감복하고 익선의 고집불통이 미워서“조(租) 30 섬을 주겠으니 휴가를 주시오”라고 했으나 역시 거절하므로, 말안장을 얹어주니 그제서야 허락했다. 아무리 화랑이 힘 없는 시절이지만 김유신 장군 휘하에서 싸웠고,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죽지랑인데 일개 부대장이 뇌물을 받고 부탁을 들어주다니…. 이 일은 곧 궁궐에 알려졌다.

체포조가 들이닥쳤을 때 익선은 도망가고 그 맏아들을 잡아 더러움을 씻긴다며 연못에 빠뜨렸는데 그 때는 한겨울이라 얼어죽었다. 효소왕의 징벌은 혹독했다.“익선이 모량 출신이므로, 모량사람은 관직에서 쫓아내고, 승복을 입지 못하며, 중이 된 자라도 절에 못 들어간다”당시에는 중이 귀족이었는데, 원측법사는 고승이었으나 모량출신이라는 이유로 승직을 주지 않았다.

모량부는 22대 지증왕의 처갓곳이다. 지증왕의 음경이 너무 크서 배필을 얻기 어려웠는데, 요행히 모량부 상공(相公)의 딸이 거물급이라 무사히 혼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곳은 신라 초기 왕족·귀족들의 분묘가 수십 기 있는 성지이다. 그런데도 효소왕은 그 마을을`독직사건 뇌물죄`를 물어 가혹하게 처벌했다.

뇌물을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아무 조건 없이….”라고 말하지만,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인데, 어떻게 아무 조건이 없단 말인가. `효소왕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한국에서 공직에 나갈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번은 치러야 할`홍역`이기를….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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